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선생 墓所
1 . 위치 :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신계마을)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書院을 세운 신재(愼齋)주세붕(1495~1554)선생과 그의 부친 문보, 큰 조카 조가 묻혀 있다.
아주 나지막한 주산에 소나무가 아름답게 어울러진곳에 3기의 묘소가 있는데 제일 위의 묘가 아버지 문보, 중간이 주세붕, 그리고 제일 아래가 큰조카 조의 묘다.
아버지 문보의 묘소는 봉분이 사각형으로 가로 세로 약 6-7M 정도로 굉장히 크게 조성되어 있는데 특이하게 사각형 석재 전면에 문보에 대한 기록이 전면(前面)에 가득 기록되어 있는데 아들 주세붕이 찬(撰)한 것으로 나온다.
주세붕의 묘소도 묘갈이나 비석의 형태가 아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세붕 부친묘>
칠서 출신인 선생은 조선 중종17년(1522)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직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중종 36년(1541)년 豊基로 부임하면서 교육의 진흥에 힘을 쏟는 한편 그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朱子학자인 안향(1243~1306)의 사당을 白雲洞에 세웠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學舍를 옮겨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이것이 敎育과 재례기능을 겸한 우리나라 최초의 書院이다. 이로써 선생은 조선 중기에 서원을 통해 사학의 발전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뛰어난 학자들의 덕행을 받들어 조선시대 유학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墓所 부근의 武山祠에서는 매년 선산에 대한 재례를 행하고 있다. 사후에 국가는 그에게 예조판서(禮曹判書)의 벼슬과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 . 形氣論
이곳의 보국(保局)은 잘 갖춰진 곳이라 할수 있겠다.
박환(剝換)과 결인속기(結咽束氣)등의 변화과정(變化過程)과 생기(生氣)의 순환과정(循環過程)을 거쳐 기를 모아 놓은곳이 혈처(穴處)이다.
혈처(穴處)는 따라서 가장 순하고 생기(生氣)가 넘치는 강한 기가 뭉쳐 있는곳이다. 그런 혈처(穴處)에 모인 기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둥그렇게 끌어안은 형상을 보국(保局)이라 한다.
<주세붕 묘>
좌청룡(左靑龍)은 묘소 좌측에서 조금만한 봉우리를 솟구쳐 올린것이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상으로 묘소를 안아주고 있고 우측 백호는 여러겹이 감싸안은 형상이다.
안산(案山)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어 조응(調應)해 주면 좋을텐데 그런 文筆峰의 귀봉들이 멀리 있어 흠이라 할 수 있겠으나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하지않는가?
그렇다면 이곳 주세붕(周世鵬)의 묘소는 보국(保局)도 좋고 명당(明堂)도 평탄원만(平坦圓滿) 하다 하겠으나 혈(穴)의 크기는 용(龍)에 달려 있다고 했는데 이 묘소의 龍은 아래위로 변화하는 기복(起伏)과 옆으로 꾸물거리는 힘이 보이지 않는 아주 부드럽고 順하디 順한 龍으로 대혈(大穴)을 만드는 큰 용(龍)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나 善한 龍이라 할 수 있겠다.
穴은 용진혈적(龍盡穴的)해야 하는데 앞에 연못이 있어 용의 흐름을 막고 있으니 용진(龍盡)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혈적(穴的)의 흔적은 입수도두(入首倒頭)와 선익(蟬翼) 그리고 순전(脣氈)의 형태를 갖춘곳에 定穴을 하는 것이다.
명당(明堂)은 평탄(平坦)하고 원만(圓滿)해야 하는데 이곳은 아주 평탄원만(平坦圓滿)하여 先生의 學者다운 性品을 잘 보여주는 四神砂의 圓滿局이라 하겠다.
명당(明堂)앞에는 얕은 연못에 연꽃으로 가득채워진 아름다운 풍경을 갖춘곳인데 지금은 물도 마르고 蓮잎도 말라 있다.
歷史는 흘러가도 後世에 교훈을 남기고 人傑은 사라져도 山河에 자취를 남기는 것 우뚝우뚝 솟구친 저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감돌아 줄기차게 흐르는 저 물굽이마다 오랜 歷史와 傳說이 서려 있으며, 한 시대를 별빛처럼 반짝이다 사라진 人傑들의 자취와 얼이 스며 있으므로 歷史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라졌건, 時代의 아픔을 씻으며 응달진 굽이길을 휘감아 갔건, 불의의 시류에 아부하지 않고 힘차게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 우리 歷史의 멋장이들, 자랑스러운 우리의 祖上, 여기에 조상님들의 幽宅을 찾는 진정한 이유가 있음이라!...............................
<안산을 바라보며>
3 . 文敏公 주세붕선생
周世鵬(1495~1554)의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어머니 黃氏가 연산(燕山) 乙卯에 세붕을 낳았다고 되어있다.
1522年(中宗 17) 別試文科에 乙科로 급제, 承文院 正字가 되어 賜暇讀書를 했다. 權臣 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江原道都事로 좌천되었다. 그후 1541년 豊基郡守로 부임하여 1542년(중종37)에 白雲洞(順興)에 안향(安珦)의 祠堂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우리나라 최초의 書院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紹修書院)을 創設했다. 뒤에 戶曹參判을 지내고 禮曹判書에 追贈, 淸白吏에 錄選도었다.
淸白吏 周世鵬은 平生을 통하여 30여년을 官職에 있었으나 서울에는 집도없이 남의 집을 빌려 살았고,
뿐만아니라 부리는 하인들이나 전답들도 대대로 물려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의 보탬이나 늘인 것이 없었고, 더욱이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어 葬禮에 사용되는 모든 비용을 임금이 내려주신 것과, 같은 동료들의 協助로 이루어졌다고 " 武陵雜稿" 에 기록되어 있다.
周氏 집안의 발복(發福)을 확인하기 위해 족보(族譜)를 추적해 보지만 상주(尙州) 주(周)씨 중에선 주세붕(周世鵬)이 가장 현달한 인물로 나온다. 아마도 후손들은 비록 높은 벼슬은 못하지만 아주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살았을것이다. 그것은 이곳 주세붕(周世鵬) 묘소의 지형(地形)이 그걸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일가?.
그 例로 韓末의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썼던 한힌샘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先生, 先生은 1896년 獨立協會에 참여하여 協成會를 만들고, 1907년 國文硏究所委員이 되어 한글의 文法과 맞춤법의 科學的 硏究에 一生을 바치고 弟子 육성에 힘썼던 先生은 " 朝鮮語文法 " 이란 대작을 남겼으니 周氏家門의 내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