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해전 전적지인 명량대첩, 노량해전, 한산도대첩, 옥포해전, 부산포해전 당항포해전 중
오늘은 당항포 전적지인 테마를 탐방하는 코스 입니다
현충탑 ▶ 숭충사 ▶ 충무공디오라마관 ▶ 당항포해전관 ▶ 충무공전승기념탑
지금부터는 이순신의 당항포 전적지를 탐방하는 테마코스 입니다
공룡발자국보호각을 끝으로 공룡엑스포행사장 탐방을 마치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당항포 전적지로 이동 합니다
고성자연사박물관 앞의 이정표
고성수석전시관
숭충사 추광문
숭충사 안내문
응진문
숭충사에서 내려다 본 응진문
응진문에서 바라본 추광문
이순신 장군의 전적과 기생 월이의 전략을 시뮬레이션으로 볼 수 있는
당항포해전관 입니다
당항포해전관은 당항포 대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건립된 곳으로 내부에는 치열했던 당시의 해전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아울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전의 승리를 도왔다는 기생월이 설화와 해전과 관련된 재미있는
지명이야기등도 소개되어 그의미를 다시금 새겨 볼 수 있다
<당항포 대첩을 승리로 이끈 기생 월이>
15세기 후반,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고 사전에 밀사를 보냈다. 밀사는 삼천포 쪽으로 해서
남해 노량과 여수, 목포를 거처 평양을 들러 남쪽으로 내려오다 무학동 무기정 곱새네 집을 창자왔다.
임무를 완성한 밀사는 방심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기생 월이는 술을 자꾸 권해 취하게 만든 후,
완전히 잠든 밀사의 가슴을 뒤져 무명 비단보에 싼 보자기를 열었다.
그 속에는 우리나라를 침략할 전략과 해로의 공격 요지며, 육로로 도망할 수 있는 지도가 상세히 스려져
있었다. 월이는 밀사의 붓을 찾아 조심스럽게 월평리와 지소강(지금의 마암면 삼락리 간척지)을 연결,
통영군(통영시)과 동해면, 거류면을 섬으로 만들어 놓고 붓을 놓았다
그 후, 임진년 6월 5일 일본이 조선을 처들어왔다. 그들은 월이가 그려 넣은 가짜 지도를 따라
고성 소소포(고성 마암면 두호리 근방)에서 죽도포(고성만 바다)로 가기 위해 소소강(고성천)을
거슬러 올라 갔다가 뱃길이 없음을 알고 되돌아 나오던 중, 뒤따라 온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전멸이 된다
왜선은 산산조각이 났고, 물 위에 떠오른 왜적의 머리 수백 두가 썰물에 밀려 소소포쪽으로 밀려오니
그 후부터 머리가 밀려왔다 하여 이곳을 두호라 부르게 되었다
당항포해전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전공이라 하지만 월이가 일본 밀사의 지도를 허위로 고처 놓지 않았다면
고성은 왜놈의 손에 아비규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월이는 1, 2차 일본의 대함대 57척의
3천500여명이나 되는 수군을 전멸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월이기 그린 지도를 따라 간 왜장은 속았다고 분개를 했고, 그 후 그 일대 바다를 "속시개"라 부르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 유래되었다
<고성 기생 월이>
널리 알려진 의녀(義女) 논개 이야기 외에도 한 사람의 주민 혹은 한 여인의 몸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가상한 이야기들이 여러 곳에 전해 온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다수의 밀정을 보내 조선의 정세를 정탐하고 지형과 지리를 정찰하여
지도를 그릴 때의 이야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있어 2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바다 건너 남의 나라를 침공해 들어갈 때에는 사전에 그 나라의 정치정세를 정탐하고,
지리와 지형을 익혀 그것을 지도로 그려두는 일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승려 게이테쓰 겐소1) 등을 공식 사절로 조선에 파견했으며 그 사절 일행은 부산에서
내려 서울까지 가는 동안 이곳저곳을 경유하면서 지역 관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조선의 사정을
파악했다. 서울까지 가는 기간도 길었지만, 서울에 체류하는 기간도 길어 어떤 때는 6개월씩 머물기도 했다.
일본은 공식 사절단이 수집하는 정보 외에도 수많은 밀정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하여 전국을
누비고 다니게 하고 지리와 지형을 익히게 했다.
1591년 가을 어느 날 경상남도 지역의 해안선을 살피러 고성에 잠입한 일본 밀정이 무학리에 있는 술집
무기정(舞妓亭)에 들어왔다. 이때 ‘월이’라는 기녀(妓女)는 그가 1년 전에도 와서 며칠 쉬었다 간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 사람과 기녀들은 구면이어서 바로 친해지고 서로 술을 권했다.
그런데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그 사람의 품속에 여러 겹으로 싼 비단 보자기가 보였다. 이것을 예사롭지
않게 본 월이가 보자기를 열어보니 조선을 침공하고자 하는 일본의 해로 공략도(海路攻略圖),
위기상황 발생 시 육상 도주로 등 지리와 지형이 상세히 그려지고 있었다.
월이는 그 지도에 당항만이 바다로 이어진 것처럼 그려 넣었다. 즉 고성읍 수남리 앞 바다와 소소강(召所江,
지금의 간척지)2) 을 연결하여 통영군과 동해면, 거류면을 섬으로 만들어 놓은 후
지도가 들어 있는 보자기를 밀정의 품에 전과 같이 안겨 놓았다.
1592년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제1차 당항포해전에서 월이가 조작한 지도를 든 채 조선 수군과 싸웠다.
이순신의 전략과 거북선의 위력에 밀린 일본군은 바다로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거의 전멸당했다. 당항만으로 들어오면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어 들어섰지만 지도에 표시된 해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본군은 당항포 앞바다에서 퇴로가 육지로 막혀 있어 빠져나가지 못하고 조선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일본 밀정을 속인 월이의 설화는 당항포
앞바다(지금의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를 일컫는 ‘속싯개’라는 지명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위 지도의 지명의 뜻을 설명하는 내용 입니다
충무공전승기념탑 후면 입니다
전방급신물언아사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1598년 11월 19일 아침, 마지막 노량해전의 대격정 중 갑자기 날아든 총탄이 뱃머리에서
독전허던 공의 왼편 겨드랑이를 맞혀 공께서 전사하던 순간에 하신 말씀.
마지막까지 왜군의 격퇴를 염원한
"애국의 유언" 이다
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노량해전도
명란해전
당포해전 세력의 전과
당포해전
바다의문 입구 입니다
남파랑길 12코스 4부에서는 당항만 해상데크둘레길을 걸어서 당항포포구를 지나
배둔시외버스터미널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