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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32-41(165) ‘돌을 옮겨 놓으라’ 2021. 8. 22.
테슬라 최고경영자이면서 억만장자이고, 평범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우주여행을 실현시키겠다고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알론 머스크’라는 사람입니다. 괴짜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혁신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알론 머스크가 대학에 가서 강의한 내용 중에 이런 말이 등장해서 제 눈길을 끈 것이 있습니다. ‘망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꼭 망하는 길만을 계속 선택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성공을 하고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반면, 이것저것을 해도 항상 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망하는 사람은 항상 망하고 안 되는 것인가? 알론 머스크는 말하기를, ‘망하는 길만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오래전에 부교역자 생활을 할 때에 한 고등학생을 상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학생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대입 시험을 앞두고 가출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안수집사였고 연산 시장에서 제법 큰 가게를 가지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가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가출을 선택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나중에 그 아이를 만나 가출한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가출의 이유로 대는 것이 가관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어떻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어떻고,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는데 제가 판단하기에 가출할 만한 주된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고3의 중요한 시기에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계속 어렵게 하고 실패하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학생은 제 말을 듣는 듯 하다가 이후로 또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수년이 흐른 후, 제가 덕민교회로 부임하고 난 뒤에 그 아이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예전에 자신에게 충고하였던 그 말을 하면서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항상 노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커녕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쪽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같은 죄라도 그 본의를 명확히 파악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의지가 약해서, 또는 잘못된 순간적인 판단 때문에 범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은 그 지은 죄에 대하여 아주 관대합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범한 죄, 처음부터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죄에 대해 하나님은 변명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벌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된 선택이 내 인생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성도는 항상 하나님에게 내 문제를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면 실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던 세 남매에게 갑자기 찾아온 큰 슬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가정의 대들보라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나사로의 죽음 때문입니다. 이들 남매에게 찾아온 이 큰 슬픔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은 순탄하지 않고 날마다 문제의 연속입니다.
깊은 슬픔에 잠김 이들 가정에 예수님이 방문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합니다.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죽은 지 나흘이 되었고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까지 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에게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고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까지 난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체념적 말입니다.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고,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까지 나는데, 무덤 돌을 옮겨 놓아 보았자 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마르다의 이 말이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으로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출중한 사람이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죽을 때까지 말하고 세어도 끝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너무나 많습니다. 죽을 때까지 말하고 세어도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실망하고, 원망하고, 포기하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체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체념하고 울고만 있는 것이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인간이 할 수 있는 돌을 옮겨 놓는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이 하도록 하나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을 옮겨 놓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말씀을 들으면 영광을 봅니다
38-39절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세 번 우셨습니다. 1)본문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의 슬픔을 위로하는 눈물입니다. 2)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눅19:41). 사랑하는 이스라엘 국가의 패망 때문에 흘리는 눈물입니다. 3)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히5:7). 이 울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통곡의 울음입니다.
본문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면서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예수님은 연민의 정을 나누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눈물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보여지는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다가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은 안타까워 하시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다가와서 성도가 역경에서 일어서도록 손을 잡아 줍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합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첫 번째 말씀의 행동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사망권세를 이기는 예수님만 가지고 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받는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에 따라서 무덤 돌을 옮겨 보았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썩어져 가는 시신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르다의 생각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판단과 편견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되면, 그 뒤는 말씀의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내 생각과 내 판단을 따를 것인가? 이 부분에 있어서 주저하지 마십시오. ‘돌을 옮겨 놓아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황당한 말씀입니다. 무덤 돌을 옮겨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요?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주장과 생각을 말하면서 ‘안 된다’고 말하고,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누가 잘못된 생각이고, 누구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인가요? 주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상충하고 충돌한다면, 무조건 주님의 생각을 따라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생명이요 기적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림 퍼즐 맞추기’를 해보셨지요? 아마도 한 두번씩은 다들 해보셨을 것입니다. 쉬운 퍼즐 조각들은 금방 전체 그림을 다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까다로워지는 단계로 접어들면, 정말로 그림퍼즐 맞추기가 고도의 정신집중을 해야만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을 위한 두뇌개발용으로 만들어진 그림퍼즐 맞추기도 많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많이 가지고 노는 ‘레고 놀이’도 있습니다. 작은 레고 제품은 대충보고 조립하여도 금방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덩치가 크고 복잡한 레고 제품도 있습니다. 이런 레고는 장시간 집중하고 집중해서 조립을 해야만, 멋진 완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림퍼즐 맞추기와 레고놀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제가 보니 이 둘은 두 개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1)‘처음 시작할 때 매우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모든 조각들을 풀어서 흩어 놓아 버리면, 정말로 머리 아플 산만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집중을 하여서 한 조각 한 조각 붙잡고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다 보면, 하나하나 제 짝이 맞아 들어가면서 서로 맞는 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2)‘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이거나 끈기가 없는 사람은 한 두번 시도하다가 안 되면, 그냥 집어 던지면서 포기해 버립니다. 중도에 포기하면 나중에 완성된 결과물에서 오는 희열을 맛보지 못합니다. 여유를 갖고 끈기 있게 붙드는 수고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도 이런 놀이와 같습니다. 근시안적인 사각으로 짧게 보면, 내 자신에게 왜 이런 고통이 임했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아서 회의적인 신앙 때문에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마세요. 하나님의 희망은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에서 기적이 출발하도록 합니다. 무덤 안에서 나사로가 ‘이미 살아나서 무덤 돌을 두드리면서 열어달라’고 하는 기적이 먼저 보이도록 역사하지 않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초점을 맞추고, 그리고 돌을 옮겨 놓을 때에 기적이 내 눈에 보여 진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2. 말씀을 믿으면 영광을 봅니다
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절망적인 순간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 데서 끝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에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적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현실과 이성과 경험에 속박된 마르다에 대한 주님의 질책입니다. 파스칼이 ‘신앙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말했습니다. 신앙과 내 이성적인 사고방식이 충돌할 때에 먼저 신앙의 끈을 잡아야 됨을 말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고집을 십자가에 모두 못 박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은 선물이고 능력이고 축복과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용사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기적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영광스러운 모든 기적을 보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41절 함께 보도록 합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가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니이다’라는 말이 무엇을 표현하는 말인가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고,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도록 이미 죽어 냄새가 나고 있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믿고서 돌을 옮겨 놓은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고 보여 주시는 결과입니다.
1965년대 중반 프랑스 남부 아를 지방에 살던 ‘잔느 칼망’이라는 할머니에게 하루는 변호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변호사는 할머니가 살고 있던 아파트를 사기로 합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내 건 매매 조건이 조금 특별했습니다. 계약 조건은 ‘잔느 칼망 할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매달 2,500프랑을 지급하고 그녀가 사망한 후에 소유권을 넘겨주기로 한다’는 것입니다.
계약조건은 변호사와 할머니 모두를 만족시키는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90세로서 별다른 소득이 없었던 잔느 칼망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에 살며 죽는 순간까지 매달 2,500프랑이라는 큰 수입이 생깁니다. 변호사 역시 갑자기 큰 목돈을 들이지 않고서도 90세 할머니가 죽으면, 바로 아파트가 자신의 소유가 되는 계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호사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맙니다. 3년, 5년, 10년이 지나도 할머니는 돌아가시지 않고 매달 돈을 받아 갑니다. 그렇게 또 10년이 지나갑니다. 도리어 1995년 계약했던 변호사가 77세에 먼저 사망하게 됩니다. 변호사는 무려 30년 동안 매달 약속한 금액을 꼬박꼬박 지급했지만,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집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계약은 변호사가 죽은 다음 가족들이 승계를 받게 됩니다. 그때까지 낸 돈이 집값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변호사가 사망한 다음에도 잔느 칼망 할머니는 2년을 더 삽니다. 그리고 1997년 8월 4일 12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세계 최장수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됩니다.
법에 대하여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고, 너무나 이재에 밝은 변호사가 90세 할머니를 두고 잔머리 굴리다가 큰 코 다친 이야기입니다. 변호사는 ‘설마 자신이 90세 할머니 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할머니가 90세이니 기껏 더 살아 보았자 한 두해 정도’라는 이성적 판단이 자신을 수렁에 빠뜨린 희대의 코메디를 만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다가오는 수많은 난관들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동반합니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슈퍼컴퓨터도 하루 뒤에 나타나는 일기예보를 완벽하게 맞추지 못합니다. 고로 인간사 살아가는 모든 것에 있어서 정확한 예측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두뇌를 믿고, 자신의 경험을 믿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세상 불신자들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합시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행동합시다. 내 짧은 생각과 판단을 먼저 신뢰하지 맙시다.
초대교회의 여러 문헌에 보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을 때 30세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후 30년을 더 살면서 프랑스 지바에 가서 전도하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레네우스(Irenaeus)의 서신에도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많은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합니다. 나에게 하루하루를 이끌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