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답사(2024.4.16.) 자료 안내
완주군(完州郡)은 전주시(全州市)와는 원래 같은 행정구역인 전주군(시)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도농 분리정책으로 인해 도시지역인 전주부와 농촌 지역인 완주군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완주(完州)'란 이름 자체가 전주의 옛 이름인 '완산주(完山州)'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현재 전주시에는 완산주에서 이름을 따온 완산구가 있다. 한자로도 '전(全)'과 '완(完)'은 그 뜻이 같다. 인구는 약 98,500여 명으로 전북에서는 가장 큰 군이기도 하다. 이번 답사는 가능한 한 전북 지방의 문화적 콘텐츠 중심으로 탐방하기로 하였으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 :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산245-1, 063-290-3842. *이동 거리, 소요시간, 체류시간 : 반월당→ 술태마박물관 203km 145분간, 체류 50분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은 2015년 10월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에 개관하였다. 이 박물관은 경각산과 구이저수지가 맞닿아있는 경관을 담아 물방울처럼 퍼져나가는 술을 원형으로 형상화하였고, 우리 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5만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는 상설전시와 기획 전시로 나뉘며, 상설전시실에는 술의 재료와 제조관, 대한민국 술의 역사와 문화관, 세계의 술, 향음 문화체험관 등이 있다. 이번 기회에 주당(酒黨)들의 의미 있는 탐방이 되길 바란다.
완주 대한민국술박물관
야외공원에는 술과 관련된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자기 앞에 술잔이 올 때까지 시를 지어야 하는 놀이를 재현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 경주 포석정과 같은 놀이)과 여럿이 모여 술 마실 때 사용되는 벌칙을 적은 놀이 기구인 주령구(酒令具) 등이 있다. 입장료는 65세 이상 무료이나, 성인 개인은 2,000원이고, 단체(20명 이상)는 1,000원이다.
대한민국술태마박물관 내부 전시관
전북도립미술관 :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1068-7. 063 290 6888 *이동 거리 및 소요 시간 : 술태마박물관→ 도립미술관 7.2km 13분간, 체류 50분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있는 전북도립미술관으로 한국 서화 미술의 중심지였던 전북미술의 역사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서화, 서예, 근대미술품, 현대미술품 등의 작품과 자료의 수집, 전시, 연구와 국제교류를 통해 폭넓은 미술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라북도가 2001년 12월 착공을 시작해서 2004년 4월에 준공했으며, 2004년 10월에 개관하여 2010년 5월 인사아트센터에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도 개관하였다. 그 후 2016년 2월 전라북도 완주군의 옛 상관면 행정복지센터에 창작스튜디오를 개관하였다.
전북도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은 부지면적 20,982.60㎡, 건물면적 3,917.58㎡, 총넓이 6,904.81㎡의 2층 건물로 5개 전시실, 수장고, 강의실, 어린이 실습실, 강당, 아트숍, 셀프서비스 간이식당인 카페테리아, 자료 열람실, 야외 공연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밖에 분관(分館)인 서울관과 완주군 상관면의 창작스튜디오, 전라북도청 기획전시실 등의 시설도 이렇게 마련되어 있다.
삼례읍 후정리 비비정(飛飛亭) :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139-13 *이동 거리 및 시간 : 도립미술관→ 비비정 34km 27분간, 체류 30분간
만경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는 조선 시대 누각 정자인 비비정이 있는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의 만경강변은 강을 건너 호남지역을 오가던 한천(寒川)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교통과 지역 간 소통의 중심지로 번화했던 곳이다. 전면에는 삼례천이 유유히 흐르고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후면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비비정이 있는 주변의 풍경은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인근의 호산서원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지역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는 비비정이 있는 정자를 사이에 두고 만경강 구 철교와 신 철교가 있어 여전히 예전처럼 전주를 거쳐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 역할을 하였고, 완주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이다.
특히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비정기」에서는 중국 촉나라의 오호대장군 ‘장비(張飛)’와 남송 대장군 ‘악비(岳飛)’ 이름의 끝 자를 따와 비비정이 유래했다고 한다. 비비정은 1573년(선조 6)에 무인 최영길(崔永吉)이 창건하였는데, 그 후 철거되었다가 1752년(영조 28)에 관찰사 서명구(徐命九)가 중건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과 더불어 정자가 없어졌는데 최영길의 9대손 최광용이 중건하려고 노력했지만 1998년에서야 복원되었다.
비비정(飛飛亭)
완주 팔경 중의 하나인 비비정은 기러기도 쉬어가는 곳이라 해서 비비낙안(飛飛落雁)으로 유명하다. 한내[삼례천]는 물이 유난히 차갑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깊은 산속에서 물이 흘러 형성된 소양천과 고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이자, 전주천과 삼례천이 합류해 만경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내는 군산과 부안에서 오는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가 쉴 새 없이 오르내렸던 곳이며,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한 마지막 길목이었다. 그리고 한내에는 범선이 오르내려서 고산천 하류에 돛단배가 꿈처럼 미끄러져 가는 풍경을 연상시킨다는 의미에서 동포 귀범(東浦歸帆 : 멀리 나간 배가 동쪽 포구로 돌아옴)이라 해서 완주 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이곳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술을 마시고 시와 운문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한다. 비비정 기슭에 있는 한내의 강변에는 지금은 갈대와 풀로 무성해져 모래밭이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모래밭이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고, 전국 각지에서 모래찜질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았다고 한다.
비비정예술열차 : 삼례면 후정리 247-1. 063-290-3862. 체류 30분간 비비정 바로 옆의 비비정예술열차 아래로는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만경강 구 철교가 있다. 본래 1928년에 일본이 호남지방의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당시의 한강 철도 다음으로 2번째로 긴 교량으로 근대문화유산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완주군은 이곳에 폐기한 4량의 새마을호 열차를 리모델링하여 비비정예술열차로 개장하였다. 1량은 레스토랑, 1량과 2량 사이의 공간은 음악 공연장이 있으며, 2량은 특산품 판매점, 3량에는 편의점과 갤러리, 4량에는 카페로 구성되어 있다.
비비정예술열차
삼례문화예술촌 : 완주군 삼례면 후정리 247-1. 063-290-3862. 체류 50분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은 2013년, 이전의 양곡창고를 문화예술창고로 새롭게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일제 강점기 군산, 익산, 김제와 더불어 양곡 수탈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1920년대 만들어진 양곡창고로 2010년까지 실제로 사용되었으나, 저장기술의 발달 등으로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지역 재생을 위해 완주군에서 매입하여 문화와 예술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삼례문화예술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양곡창고는 일제 강점기 양곡 수탈의 현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대문화유산 중 하나로, 문화공간으로 변신을 추진하면서도 양곡창고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실제 창고 내부에 들어가 보면 천정이나 벽에 1920년대 목재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삼례문화예술촌 건물
2018년 아트네트웍스(주)에서 위·수탁 운영을 맡으며 ‘삼례를 세계로! 세계는 삼례로!’라는 강령을 목표로 삼아 재개관했다. 예술촌 내에는 어울림마당을 중심으로 모모 미술관, 김상림 목공소, 소극장 시어터애니, 커뮤니티 뭉치, 디지털아트관, 문화카페 뜨래, 책공방 북아트센터 등이 자리하고 있다. 각 공간은 미술, 나무, 공연, 미디어, 책, 커피 등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아이템들로 채워져 있다. 이번 탑사의 품격을 높이는 데 일조하리라 믿어진다.
대아저수지 : 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이동 거리 및 시간 : 삼례문화예술촌→ 대아저수지 24km 32분간, 체류 30분간
전북 특별자치도 완주군 동상면(東上面) 대아리에 있는 저수지. 대아호(大雅湖)라고도 한다. 진안군과 인접한 대아저수지는 1922년 만들어진 대아저수지가 있는 옛 댐에서 300m 하류 지점에 1989년 새 댐을 준공해 만들어진 것이다. 기존의 대아저수지는 일제 강점기 독일기술진이 설계한 아치형 콘크리트 댐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댐이다. 준공 후 45년 만인 1967년 누수 방지를 위해 보수공사를 하였으나 심각한 노후화와 절대 용수량의 부족으로 인해 하류 지점에 새로운 댐을 건설하게 되었다.
완주 9경 중 4경에 속하는 대아저수지(대아호)는 기암절벽을 거느린 운장산과 능선이 부드러운 위봉산 계곡을 막아 형성된 곳으로, 주변 산세와 호수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대아저수지를 감돌아 동상저수지에 이르는 호반 도로는 말끔히 포장되어 드라이브 코스의 운치를 만끽할 수 있다. 두 개의 저수지를 잇는 20km의 호반 도로가 관통하는 주변 경관은 사시사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대아저수지
대아수목원 : 완주군 동상면 대아수목로 94-34. 063-243-1951 *이동거리 및 시간 : 대아저수지→ 대아수목원 5.1km 8분간, 체류 100분간
운장산 자락 양지바른 자리에 생명을 숲을 키우는 대아수목원이 있다. 이곳은 70년대까지 화전민들이 살아가던 우리나라 손꼽히는 오지였다.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산세 따라 나무와 꽃 피어 자라고 지저귀는 산새들이 가꾸던 터전에 1995년 전라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대아수목원을 열었다. 454,000평의 드넓은 대지에 2,000여 종 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연박물관이다.
대아수목원 입구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있는 산림자원 조성의 목적으로 만든 수목원으로 1988년 7월 10일 100㏊ 규모의 수목원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 5월 17일에 수목원 개원을 했다. 2000년에는 금낭화 군락지 조성을 통해 150㏊의 구역 면적 확대를 했다. 2006년에는 수목원 등록 [제20호]을 산림청으로부터 받았다.
완주군에 있는 대아댐 호반을 타고 산천리로 들어가 마을 앞 다리를 건너면 200m 지점에 대아수목원이 나온다. 150㏊에 조성된 수목원에는 30여만 그루의 관상수가 우거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약수터와 쉼터, 전망대, 산림자료실, 임간 교실을 갖춘 아늑한 분위기의 휴식공간이다. 대아수목원은 생물 다양성 유지 및 보전, 국내외 식물탐색 수집 및 자원화, 국민의 산림교육 활성화 및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대아수목원 내에는 자생종을 비롯하여 식재종 및 원예종의 다양한 식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는 희귀 및 특산식물(산림청 지정) 135종류가 포함되어 있다.
대아수목원 야경(野景)
대아수목원은 특히 금낭화 자생군락지로 유명하다. 또한, 수목원 내에는 밀화부리·뻐꾸기·노랑턱멧새 등 살고 있고, 멧돼지·고라니·너구리 등도 서식한다. 또 약용 수원·유실수원·활엽수원·침엽수원·꿀밭 수원·관상 수원·수생식물원·난대식물원·난대약용수원·무궁화원·표본 수원·동백원·목련원 등 14개 전문 수목원으로 구성되어 있있다. 특히 대아호 풍경과 어우러지는 야외정원은 4월의 벚꽃과 영산홍, 5월의 철쭉과 금낭화, 6월의 장미와 7월 무궁화까지 계절이 보여주는 꽃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질 수 있는 곳이라 처음 탐방이라 자못 궁금하다.
대아수목원 야경(野景)
수목원을 제외한 천연림은 110만㎡로, 70년대 초부터 화전 경작이 중단된 후, 인위적인 훼손 없이 층층나무·느티나무·참나무류·비목나무·산벚나무 등 284종이 자라고 있다. 수목원 주변에 대둔산도립공원, 운일암반일암 계곡, 화심온천, 대아저수지 등이 있어 연계하여 둘러보기 좋은 곳이도 하다.
우산정사(紆山精舍) :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1106 *이동거리 및 소요시간 : 대아수목원→ 우산정사 23km 32분간, 체류 50분간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제촌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각(祭閣)으로, 진천송씨(鎭川宋氏) 집성촌 안에 있다. 제각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가 큰 건물로 지어졌으며, 제각 안에는 송영구가 생전에 쓰던 용이 새겨진 벼루(용연), 거문고, 가훈록,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종규철(宗規綴), 종회의록(宗會議錄)이 보관되어 있다.
우산정사(紆山精舍)
제내리(堤內里)는 방죽(防築) 안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긴 둑으로 쌓은 마을이란 뜻이며, 제촌마을은 방죽마을, 방죽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제내리는 과거 우주현(紆州縣)의 중심지였다. 우주현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우소저현(于召渚縣)으로 통일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까지 우주현(紆洲縣)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가 1409년(태종 9) 이후 전주부에 편입되었다. 우(紆)는 <굽을 우, 품을 우>로 구부러지다, 두르다, 감돌다 등의 의미이고, 주(州)는 <고을 주>로 고을 또는 큰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우주(紆州)는 고을을 두르다, 혹은 고을을 품에 안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시대 우주현은 우북, 우서, 가락국수로 분리되었고 쌀 창고인 ‘우주창(紆州倉)’만 남아 있었다. 이후 가락국수는 봉상과 통합되며 봉동이 되었고, 우북은 왕궁(익산군)으로, 우서는 오백조면과 함께 삼례면에 통합되었다. 그나마 이름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흔적마저도 없어지면서 우주현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주현이 사라지면서 본향(本鄕)을 잃은 성씨가 있는데 바로 우주황씨이다. 우주황씨의 원래 세거지가 지금 진천송씨의 묘역인 우산 일대이다. 진천송씨 입향조의 처가는 바로 우산에 세거하던 우주황씨 집안이었다. 그러나 세거(世居)를 이루고 살던 우주황씨는 떠나고 그 자리에 진천송씨가 자리 잡았다. 우주황씨의 세거지로 처음 들어온 진천송씨는 조선 초기의 유학자 송선문(宋善文, 1491~?)의 처가로 있던 곳으로 송씨가 들어와 뿌리를 내려서 정착하였다.
우산정사(紆山精舍)는 우산에 있는 정사(精舍)라는 뜻으로 정사는 재실의 역할 뿐만 아니라 문중 자녀들을 교육하는 서당의 역할도 함께 하던 곳이다. 그러나 고대 인도에서는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와 같이 사찰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사의 정면 왼쪽에는 용송(일명 효자솔)로 불리는 수령 300년의 소나무가 제각(祭閣)의 처마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누워 자라고 있어 그렇게 불리었다. 그 앞의 언덕에는 같은 뿌리에서 세 줄기로 자란 삼정승 소나무가 있고, 정사의 뒤쪽 언덕에는 송영구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우산정사는 비록 규모가 작지만, 그와 관련된 고사(古史)를 story telling으로 엮어 2종의 꿀팁 자료를 제시하여 그 의미를 깊게 느끼게 하고자 한다.
꿀팁 자료ㅡ1
마을을 잇는 나무 인문학
송영구의 유택과 신도비가 있는 우산정사 앞의 방죽에는 백련(白蓮)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백련의 시배지(始培地)이기도 하다. 송영구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백련을 가져와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연꽃이 피는 7, 8월이면 제촌지에 흐드러지게 핀 백련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이 일대는 백련의 향이 가득하다. 만일 해 뜨기 전에 탐방한다면 백련이 터지는 소리를 듣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다. 송영구의 후손들인 우산 종중은 백련잎 차와 백련잎 국수를 만들어 보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백련 시배지
우산정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소나무이다. 우산정사의 주변에는 유독히 소나무가 많다. 송영구의 며느리인 삭녕 최씨가 시집이 오면서 가지고 온 변산 솔씨를 뿌려서 가꾼 결과이다. 많은 소나무 중에 특히 이름을 가지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탑방객의 눈길을 끌게 한다. 한그루는 용솔[효자솔]이고, 다른 하나는 삼정승 소나무이다.
용솔[龍松]은 우산정사 뜨락 안에 있다. 용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일명 효자솔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송영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는 우산정사의 지붕 위로는 자라지 않고 추녀 밑으로 낮게 누웠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른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기에 겸손하게 예를 갖추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설마 진짜 소나무에 그런 깊은 뜻이 있겠나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 말에 동의가 되는 것은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용솔(일명 효자솔)
삼정승(三政丞) 소나무는 백련 시배지인 제촌지를 돌아가면 산 입구에 하늘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소나무는 한 뿌리에서 3개의 줄기가 자라서 삼정승 소나무라고 불리는데, 이 댁의 며느리 삭녕 최씨가 뿌려 가꾼 1세대 소나무로 추정되며, 수령은 약 400년 정도나 된다. 삼정승 소나무 줄기에 깊은 상처가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 전쟁 중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송진까지도 공출해 간 흔적이라 한다. 나라에 힘이 없으니 소나무까지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가 보다.
삼정승 소나무
이곳 우산정사에서 조선의 역사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 그리고 나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곧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이다. 완주에는 보호수가 47종, 54그루가 있다. 보호수가 있는 마을은 200년의 역사가 있으며, 오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나무를 매개로 하여 마을과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낼 나무 인문학 프로그램 50여 개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완주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자산이다. 이번 완주의 방문으로 이곳의 신선한 관광상품인 나무의 인문학에 빠지기를 기대해 본다.
꿀팁 자료ㅡ2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에 전하여 오는 망모당(望慕堂) 편액에 얽힌 이야기
효(孝)의 고장 익산을 대표하는 ‘망모당(望慕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왕궁면 광암리에 있는 이곳은 선조(재위 1567∼1608) 때, 문인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가 은거하던 곳의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선조 40년(1607)에 부친상을 당한 뒤 집 뒤쪽 언덕에 누각을 짓고, 동쪽 우산(지금의 완주 봉동)에 모셔져 있는 선영(先瑩)을 간절히 생각하여 ‘망모당(望慕堂)’을 지었다. 우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망모당은 표옹이 얼마나 선친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다. 망모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정사각형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일반 누각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누각 하나에 빙 둘러쳐진 담장이 고작이다. 그러나 망모당의 현판 글씨로 더 유명해졌다. 중국 명나라 최고 문장가인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다. 어떻게 중국인이 현판 글씨를 써줬을까? 그 연유를 살펴보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표옹문집(瓢翁文集)’에서 표옹과 주지번의 만남이 기록돼 있다. 표옹은 1593년에 송강 정철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는 사신으로 각종 기록을 맡은 임시 벼슬인 서장관 자격으로 갔다. 서장관(書狀官)은 조선 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외교사절단의 지휘부 ‘삼사신(三使臣)’ 가운데 한 관직이다. 왕복 약 5개월 동안의 사행 기간 보고 들은 각종 외교 정보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사절단의 비리나 부정을 감찰(監察)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그는 38세였다. 그때 조선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에서 군불을 때어주며 잔일을 도와주는 나이 어린 심부름꾼이었다. 표옹은 한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다. 남화경은 중국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도가 사상가인 장자가 지었다고 전하는 도가의 최고경서다. 그것도 숙소의 심부름꾼이 이를 외우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청년은 과거를 보기 위해 남방(베트남)에서 북경으로 올라왔는데 여러 번 낙방하여 노잣돈도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곳에서 심부름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표옹은 하도 신기하고 귀특하여 그에게 과거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지만,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표옹은 또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 편을 필사해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마련해 주면서 앞으로 시간을 아껴서 공부에 전념하라는 당부하였다. 그 후에 청년은 표옹의 도움으로 을미년(乙未, 1595)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의 수석합격이었다. 그가 바로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학사 문장가로 주지번(朱之蕃) • 초굉(焦竑) • 황휘(黃輝) 등 세 사람을 꼽았으나, 그 중에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다. 한림원은 당대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주지번은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쓰는 등 한림원에서도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주지번은 1606년 조선을 방문한다. 중국 명나라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온 사신. 그것도 공식외교 사절단 최고 책임자인 정사(正使) 신분이었다. 이때 주지번은 전라도 왕궁 시골로 직접 행차할 것을 결심한다.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광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 객사에 잠시 들른 주지번은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현판 글씨도 썼다. ‘풍패(豊沛)’는 한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고향의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는 곧 황제의 고향을 의미한다. 주지번은 표옹을 만나러 왕궁 광암리에 찾아왔건만 표옹은 없었다. 표옹이 함경도로 좌천됐기 때문이었다.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망모당(望慕堂)이란 누각이 지어진 연유를 알고 표옹의 효심에 깊이 감복해 정성을 다해 망모당(望慕堂)의 현판을 썼다. 400년 전 두 사람의 만남과 인연이 그 현판 속 세 글자에 깃들어있는 것이다.
표옹 송영구의 망모당
『조선왕조실록』에는 주지번이 표옹 송영구를 북경에서 만나고 나서 2년 후인 을미년(1595)에 명나라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영구와 주지번의 스승과 사제에 관한 인연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망모당의 편액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망모당의 편액은 주지번이 익산 땅에서 은거한 송영구를 만나러 와서 직접 글씨를 썼다는 설과 전주에 내려오지 않고 한양에서 썼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으나, 전주의 ‘풍패지관’ 등을 쓴 것으로 봐서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표옹 송영구 묘소
주지번은 희귀한 서책 80권을 표옹에게 전했다. 또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묫자리)를 택지하여 줬다. 사후 영혼이 편히 쉬도록 음택을 정해 은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망모당은 문화의 힘으로 중국을 감동하게 한 표옹 송영구와 명나라 대학자 주지번과 아름다운 사제지정을 머금고 있다. 망모당으로 가는 마을 입구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충 숙고 표옹 송영구 선생 강생 유지비’다. 표옹의 13대손 송재규 씨가 주도해서 세웠다.
완주 송광사(松廣寺) : 보조코스 /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 *이동거리 및 시간 : 우산정사→ 송광사 27km 30분간, 체류 50분간
종남산 아래에 자리한 사찰로,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도의 선사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백련사(白蓮寺)였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일주문이 3㎞나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황폐해 폐사되었다가 1622년(광해군14)부터 승려 응호·운쟁·덕림·득정·홍신 등이 다시 세우기 시작해 14년 만인 1636년(인조14)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전주부 송광사 개창지비(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어 불렀는데,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승보사찰 송광사와 한자(漢字)까지 같다. 순천 송광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아늑하고, 봄이면 진입로부터 약 2㎞에 걸쳐 펼쳐지는 벚꽃이 장관을 이루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 금강문(金剛門)·천왕문(天王門)·종루(鐘樓)가 차례로 나오고, 종루 옆의 대웅전을 지나면 뒤쪽에 나한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는 일자(一字)로 배치되어 있고, 공간배치가 자연스러워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대웅전 안에 있는 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가운데 오른쪽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은 국가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 유명한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에도 땀을 흘렸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대웅전(보물 1243), 종루(보물 1244),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보물 1255),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274), 일주문(전북 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4), 사적비(전북 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5), 동종(銅鐘:전북 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38), 나한전(전북 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72), 금강문(전북 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73), 벽암당부도(碧巖堂浮屠:전북 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44) 등이 있다. 위치는 전북 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 종남산 자락에 있다.
완주 송광사 범종루
완주 송광사(松廣寺) 범종루(梵鍾樓)는 특이하게 범종이 걸려 있는 가운데 칸을 중심으로 사방에 한 칸씩 덧붙인 열십자('아(亞)'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사찰의 종각에는 범종뿐 아니라 목어, 운판, 법고가 함께 걸려 있다. 이를 사물(四物)이라 하며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 쓰인다. 법고는 땅을 딛고 사는 짐승에게, 목어는 물속의 물고기에게, 운판은 하늘의 날짐승에게, 범종은 지옥의 중생들에게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원해준다.
이 범종은 숙종 42년(1716년)에 동(銅)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동종에는 "강희 55년 병신 4월 전라우도 광주 무등산 증심사 대종 조성(康熙 五五年 丙申 四月 全羅右道 光州無等山證心寺大鐘造成)“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영조 45년(1769년)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주 송광사에서 대구 반월당까지 : 중간 휴게소 휴식 *이동 거리 및 시간 : 송광사→대구 반월당 175km 124분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