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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 13-14(10) 어떤 길로 다니겠습니까? 2013. 6. 16
사진을 몇 장을 보시지요. 아주 아름답고 웅장하게 만들어진 예배당 사진을 보실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미국의 피츠보그 대학 안에 세워진 교회당입니다. 이 아름다운 교회당은 5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세워진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교회당입니다. 이 교회당의 이름은 “Heinz Memorial Chapel(하인츠 기념 예배당)”이라는 이름입니다.
하인츠라는 사람 이름이 낯설지가 않죠. 현재 하인츠라는 상표를 가진 세계적인 대기업 식품회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하인츠 캐첩, 하인츠 마요네즈, 하인츠 피클 등으로 전 세계인들이 애용하고 있는 하인츠 식품 회사를 만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인츠 식품회사를 만든 창시자 헨리 <존 하인츠>는 191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녀들에게 예배당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깁니다. 이에 하인츠의 자녀들은 5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피츠버그 대학 캠퍼스 내에 자신들의 부친과 할머니를 위한 대예배당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하인츠 기념 예배당(Heinz Memorial Chapel)”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 이후로 미국 피츠버그 대학을 방문하거나 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들러 보는 지역 명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부모가 가졌던 신앙의 유산을 자녀들이 그대로 잘 이어 받아 후대에 모범이 되고 아름다운 지역 명소가 된 실례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녀들에게 유언하고 신신당부를 해도 자녀들이 그 말을 귀담아 새겨듣지 않고,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낸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막대한 유산을 가지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인츠의 자녀들은 부모님이 걸어갔던 신앙의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는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세요.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올바르고 의로운 길을 가야 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길이 있고 사탄 마귀가 원하는 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사람들이 밀려가는 넓은 문으로도 들어가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파멸의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왜냐하면 좁은 문은 비록 찾는 이가 적지만, 그 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넓고 큰 것을 좋아합니다. 집이나 자동차나 대부분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에 있어서 물건의 크기는 작은 것 보다는 큰 것이 다 손쉽고 편리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좁고 작은 도로 보다는 크고 넓은 도로가 자동차나 사람이 다니는 것이 매우 편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작은 도로가 주는 위험성을 겪어 본 사람이나, 소형승용차를 타면서 힘들어 해 보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큰 도로, 큰 자동차를 선호합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것 보다는 큰 도로와 큰 것을 좋아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통계학자인 <데이빗 바렛> 박사의 통계발표에 따르면, 현재 세계기독교 인구는 약 22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의 인구는 약 67억 정도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인구가 천주교인들을 다 포함하여서 겨우 1/3쯤 되는 셈입니다.
이 통계 자료에 보면, 지금 지구상에서 하루에 34만 명의 새 생명을 가진 아기가 태어나고, 하루에 30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 통계 자료를 보면서 약간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루 30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신에게 내리는 심판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30만 명의 사람들 중에는 평생을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여 살아 왔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평생을 넓은 문, 넓은 길, 자신이 가고 싶은 길만 걸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며, 죽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 평생 살아가면서 편하게 살고,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자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다니는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이 무엇일까요?
1.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진정한 믿음의 길은 좁고, 협착하고 가기가 힘든 길입니다. 특히 이 14절의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설명함에 있어서 절대 빼뜨릴 수 없는 단어가 바로“협착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보통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할 때가 어떤 때일까요?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서 생활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디스크 협착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허리를 지탱하는 디스크가 시루떡처럼 위아래로 포개져 있는데, 이것이 간격을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붙어서 신경을 압박하여 통증이 올 때에 “디스크 협착”이라고 말합니다.
국어사전에 “협착(狹窄)”이란 단어의 뜻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매우 좁다.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뜻입니다. 매우 좁은 공간이나 자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생명으로 가는 길이 매우 비좁고 협착해서 가기가 힘들고 어렵단 말입니다.
국어사전에서 협착이라는 그 뜻을 지레 짐작할 수 있지만, 헬라어 원어 단어의 뜻은 더 많은 의미를 알려 줍니다. “협착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들리보>라는 말인데, “괴롭히다, 깨뜨리다, 좌절시키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헬라어가 표현하는 이 협착이라는 단어는 “신앙 때문에 핍박 받는 성도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세상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세상의 힘과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 무참히 피해를 보고 있는 성도의 모습을 그린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가장 잘 표현된 시대가 바로 초대 교회시대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극심한 핍박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좁은 길이 너무나 험하고 어려운 길임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몸소 깨닫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은 바로 이 신앙생활의 좁은 길을 두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쉽고 편하게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하면서 굳이 어렵고 힘든 좁은 길을 걸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좁은 길이 싫다고 해서 더 넓고 편안한 길을 찾아서 길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예수님을 믿었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진 고난 속에서 믿음을 잘 감당한 신앙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가정과 가문의 핍박, 공산당들의 핍박과 살해, 일제의 박해, 구타와 고문 등등...이 모든 것들을 다 견디며 의연하게 믿음의 길로 걸아 갔던 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조 신앙인들의 좁은 문, 좁은 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종종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의 소문은 쉬지 않고 들리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 있는 동기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이집트에서 어떤 이슬람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들통이 나서 징역 15년을 언도 받은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지금 중국에는 2천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중국이 이들을 강제로 북한으로 송환시키려고 한다고 합니다. 중국에 도착한 탈북자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고, 남한으로 갈 수 있도록 도움과 길을 열어 주는 사람들이 대부분 선교사들과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중국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김일성 주체 사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를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받아들인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돌아가면 생지옥이 펼쳐집니다. 탈북해서 중국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사에게 신앙교육을 받은 것을 북한 정부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모진 고문과 처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북 도중에 예수님을 믿었던 이들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저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길이 참된 구우너의 길이요, 어디로 가야만 생명이 주어지는지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초기 한국교회사를 보면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불신남편을 두고 홀로 교회에 나가 굳건하게 믿음 생활하는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여집사님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불신남편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숱한 기도와는 상관없이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 가지 못하게 두들겨 패기도 하고, 심지어 아내의 옷을 불에 태워 버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내의 머리를 가위로 짤라 버리는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남편의 모진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 나갑니다.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서양 코쟁이가 와서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한다는 것이 인근 마을 전체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집니다. 이 날도 남편은 거나하게 술을 먹고 저녁에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길로 한걸음에 교회당으로 달려 갑니다.
교회당에 도착하니 설교가 끝나고 통성 기도 시간이 되어 불이 꺼진 어두운 교회당 내부만 보입니다. 남편은 통성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아내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휘어잡아 끌고 나옵니다. 아내는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자 남편은 반항하는 아내의 옆구리를 무지막지하게 발로 걷어찬 후에 저항하는 아내의 머리채를 웅켜 잡고 예배당 밖으로 질질 끌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교회당 마당에서 사정없이 부인을 패대기치곤 마구 발길질을 합니다. 부인은 “사람 살려!”라는 비명만 지릅니다.
여자의 비명소리에 예배당에 있는 성도들이 나오고 마당에 남자를 뜯어 말립니다. 남자는 자신이 머리채를 움켜 잡고 두들겨 패던 여자를 내려다 봅니다. 이젠 술도 제법 깬 상태입니다. 그런데 내려다 보곤 아연실색합니다. 자신이 때린 사람이 자신의 부인이 아닌 것입니다.
여자가 끌려 나와서 얻어맞아 피범벅이 되는 상황에 이르자, 교회당 안에 있는 성도들이 나와 얻어맞은 여성을 살펴봅니다. 그 와중에 한 중년 남성이“너 이놈, 왜 남의 마누라를 패느냐?”고함을 지르면서 멱살을 잡습니다. 호통을 치면서 남자의 멱살을 잡은 사람은 그 지역의 경찰서장입니다. 그러면 그 부인은 누구였을까요? 경찰서장의 부인입니다.
경찰서장의 아내를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 남자는 한순간 술도 다 깨어 버립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합니다. 이윽고 경찰들이 와서 이 남자를 잡아다가 경찰서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제 이 남자의 인생은 종친 모양입니다. 그렇게 경찰서 감방에 수감되어 있는데, 얼굴이 맞아 퉁퉁 부은 경찰서장 부인이 이 남자를 찾아 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자는 무릎을 꿇고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싹싹 빕니다.
이에 서장 부인이 말합니다. “앞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을 폭행한 것으로 인해 콩밥을 먹게 될 것이라”말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서만 해주신다면, 바로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된 분이 바로 평안북도 신천교회를 세우고 북한 공산정권의 김일성에게 항거하다가 순교를 당한 <김**목사님>입니다.
성도여러분.
모진 남편 만나서 얻어 맞아가면서 모진 세월 눈물로 기도하였던 아내가 걸었던 길이 바로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또한 자신을 이유 없이 폭행하였던 남자를 감옥에 쳐 넣어서 따끔한 맛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을 마다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교회로 인도한 서장 부인의 모습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다녔던 모습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다니십시오. 내가 조금 손해 보고, 예수님 때문에 내가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 때문에 이유 없이 손가락질과 따돌림을 당하는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다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2. 넓은 문, 넓은 길은 가지 마십시오.
13절,“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본문에 등장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이것은 편안하게 믿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안위, 편리, 편안함”이런 단어는 기분 좋은 단어이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그리 큰 유익을 주는 단어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편리함, 신앙생활에서 안락함, 신앙생활에서 무사태평이라는 말은 결단코 신앙생황에 유익을 주는 단어가 아님을 잘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한동안 국내에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개념의 웰빙(well-being)이 유행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죽을 때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한 체 잘 죽자’는 웰다잉(well-dying) 또한 유행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이나 잘 죽자는 웰다잉’이라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요즈음에 유행하는 단어는 힐링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유식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힐링을 말하고, 개나 소나 “힐링”이라는 말을 끄집어 내어 사용합니다. 사상 지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도 대문짝만 하게 프랭카드를 내 걸고 “힐링 하는 교회”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힐링이 무엇이에요? 힐링(Healing)은 치유를 뜻하는 영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치료한다는 뜻이에요. 힐링 예배와 힐링 교회. 예배가 무엇을 치료하며 치료하는 교회가 무슨 말이에요? 의사선생님들이 많이 출석하는 교회가 치료하는 교회입니까?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청진기 들고 나와서 성도들을 검진하는 것이 힐링 예배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치유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치유를 의미하는 힐링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말로 믿음으로 치유함을 받고 힐링에 동참하고 싶다면, 예수님에게만 집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생활이 왜 부담스러워지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지라고 말씀하신 십자가를 내가 지고 가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교회에 다니고 싶은데, 이것저것 속박되는 것도 있고, 나를 구속하는 것이 있다고 판단이 되니, 교회생활이 재미가 없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하는 내 짐을 내가 지고 가는 것이 좁은 길로 가는 모습입니다. 내가 지고 있는 짐을 지기 싫다고 내 짐을 예수님에게 던져 버리는 것이 힐링이 아닙니다. 나만 가벼워지고 예수님이 몽땅 무거운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힐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내가 짊어지고 좁고 협착한 길로 가는 것’이 힐링입니다.
히말라야 험산 산에 사는 양들을 사고 팔 때에 장사꾼들이 건강하고 좋은 양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양을 풀어 놓으면 산 위로 올라가는 양이 있는 반면, 산 아래로 내려가는 양이 있습니다. 이때에 산위로 올라가는 양을 장사꾼들이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는 양인가요? 그저 편하게만 예수 믿으려는 양인가요? 힘들더라도, 어렵더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다니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상급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