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나라 시조 아골타에 대한 역사기록
(1) [송막기문(松漠紀聞)]
남송(南宋) 때 홍호(洪皓)가 금나라를 돌아보고 쓴 견문록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2) [금사(金史) 세기]
세기는 금 태조와 그 이전 자료를 수록한 책으로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합부(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3)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청나라 건륭제때 만들어진 역사서로,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한다.”또한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없으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4)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남송 때 서몽신(徐夢莘)이 쓴 역사서로,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5) [고려사(高麗史)]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여기서의 평주는 고구려의 옛 땅인 산서성 남부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평주(平州)를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晋分幽州置,治昌黎,(진때 유주에서 갈라짐, 창려에 치소)
前燕置,治襄平 (전연때 양평에 치소)
后燕置,初治龙城,后治平郭,(후연때 초기에 용성, 후기에 평곽에 치소)
前秦置 治和龙,后魏置 治肥如,(전진때 화룡에 후위때 비여에 치소)
隋置,唐因之,亦曰北平郡,元改为兴平府,治卢龙 (수.당때 구북평군으로 원때 영평부로 바꾸고, 노룡에 치소)
유주, 양평, 비여, 북평군, 노룡 등의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주는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 일대 즉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서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참고로 북평군(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은 요서군의 바로 옆으로 행정구역의 일부가 서로 왔다리 갔다리 한다. 다음은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서군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
令支,有孤竹城(고죽성=노룡)。莽曰令氏亭。
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 옛 평주 땅은 황하의 동쪽인 하동 지역으로 산서성 남부인 요서군이다. | |
(6) 금 태조 아골타가 고려에 보낸 국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여기서의 高麗는 바로 고구리(高句麗)를 말하는 것이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7). [동사강목(東史綱目)]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
2. 아골타(阿骨打)와 신라와의 관계는?
금나라 아골타는 분명하게 신라의 후손이라고 정사서에 적혀져 있다. 그렇다면 아골타의 조상이 되는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은 신라와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1). 김행 혹은 김준은 두 가지 이름의 상반된 기록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金傅)를 시조로 하는 부안 김씨의 족보에는 김행(金幸)이 마의태자의 아들로 형제를 둘 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김행은 두 형제를 고려에 놔두고 홀로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안정목의 동사강목에서는 '김준(金俊)이 여진으로 갔다고 했다. 또한 위에 적혀있듯이 형제가 셋으로 나온다. 이는 적어도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아들인 김행(金幸) 김준(金俊)둘 중 한사람이 확실히 '아골타'의 조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2). 마의태자(麻衣太子)는 실존인물
마의태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신라의 경순왕 김부(金傅)가 고려의 왕건에게 귀부하자 홀로 분개하여 개골산으로 갔다고 한 인물이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머리를 깎고 해인사에 들어간 인물이다. 사람들은 이런 마의태자를 전설적 인물로 여기고 있다.
다만 한명이 아닌, 두 명의 마의태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경순왕의 아들들이 태자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 두 명의 마의태자는 바로 '김일(金鎰)과 김분(金奮) 바로 이 두 사람이다. 다만 김일(金鎰)은 부안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지만, 김분(金奮)와 다른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일설에 '김일'이 마의태자로 알려진 것은 부안김씨와 경주김씨의 족보에서 경순왕 김부와 첫째 석씨 부인 사이에 난 아들(김분)을 넣지 않고, 둘째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김일'만을 넣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1642년)에 나온 신라시대 박(朴)·석(昔)·김(金) 세 사람의 족보를 적은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에 김일과 김분 두 사람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해 10월 고려에 귀순할 때 석씨의 막내 분(奮)과 박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극력 간(諫)하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통곡하더니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마의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 금나라 황실의 가계도. 금 태조 아골타는 신라의 후예. | |
출처: 고구리역사저널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78§ion=sc3§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