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이한열(복덕월) 보살
더없는 자비심으로 사회적 약자 보듬었던 관음보살
공주 첫 고아원 풍덕원 설립
갑사 팔상전 거주하며 자비행
고아·노약자 70여명 보듬어
어린 시절 궁궐서 불교 귀의
구제 활동 근간은 깊은 불심
불상·불경 조성에도 원력
예로부터 사찰은 때때로 종교와 복지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부처님 법음을 듣고 신심을 다지는 종교적 귀의처인 동시에,
고아들을 양육하는 아동보호시설이자 나이 든 신도들이 삶을 회향하는 요양원이기도 했다.
사회복지라는 용어와 개념이 법적으로 제도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원력을 세운 수많은 불제자들이
지역사회 내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왔던 까닭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20년대 무렵의 공주 갑사다.
당시 갑사 팔상전에는 부모 없이 걸식하는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던 고아원이 있었다.
고아원의 이름은 계룡 풍덕원, 계룡산 갑사에 위치한 까닭에
지역 내에서는 계룡산 풍덕원이라고도 불렀다.
계룡 풍덕원은 공주 최초의 고아원이었다.
그러나 최초라는 상징성에 비해 전해지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하는 이가 흔치 않을 뿐더러,
기록 또한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역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과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단편적인 기록에 의존해 사실관계를 짐작해 볼 뿐이다.
계룡 풍덕원은 1917년 무렵부터 1930년대 이후까지 운영됐던 고아원으로,
주소지는 갑사 팔상전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팔상전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풍덕원은 팔상전 옆 보조전각 혹은 요사채 등과 함께 운영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 곳에는 적을 때 40~50명, 많게는 70~80명의 고아들이 항상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간혹 의지할 곳 없이 병든 이나 연고 없이 죽음을 앞둔 노인들까지 받아들였다고 하니,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지역사회 내 복지 구심점이었던 셈이다.
당시 풍덕원은 갑사에 주소를 두긴 했지만
사찰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됐던 것으로 보인다.
운영자 역시 스님이 아닌 재가자였는데,
당시 팔상전에 거주했던 이한열(1883~1934, 복덕월) 보살이 그 주인공이다.
복덕월 보살은 계룡 풍덕원의 설립자이자 경영자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가슴으로 품어낸 자비로운 어머니였다.
그러나 풍덕원과 마찬가지로 그녀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어
그 삶의 흔적을 살피기란 쉽지 않다.
1924년 9월2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계룡산 갑사 복덕월의 자비행’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계룡 풍덕원과 복덕월 보살에 대한 짧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충남 계룡산 갑사 팔상전에 거주하는 복덕월이라는 호명의 40여세 여자 이한열씨는
5~6년 전 당지에 도착해 갑사 팔상전을 중수하고
부모 없이 걸식하는 고아를 모아 고아원을 만들고 40여명을 구제해 왔다.
최근에는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 150석을 추수하는 것을
고아원의 기본 재산으로 설정해 공주 지방법원에 재단법인으로 등록하려 하더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면,
당시 갑사는 도량 정비나 관리에 철저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팔상전 역시 관리하는 이 없이 방치됐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기사에 따르면 복덕월 보살은 1918~1919년 무렵 갑사에 들어와 팔상전을 중수,
고아들과 함께 거주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기록에 복덕월 보살이 당시 수만금을 들여 팔상전을 중수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신빙성은 낮아 보인다. 당시 어마어마한 재정을 투입해 팔상전을 중수할 정도였다면
그녀가 굳이 40여명의 고아를 데리고 이곳을 찾아올 이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풍덕원이 종종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복덕월 보살은 수만금을 들여 팔상전을 중수할 정도로
풍족한 재정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기사에 나타난 ‘150석을 추수하는 농지’가 풍덕원의 유일한 재정적 기반이자
그녀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을 것이다.
더욱이 복덕월 보살이 굶주린 고아들을 구제하기 시작한 것은
갑사 팔상전에 거주하기 훨씬 이전부터다.
이미 1912년부터 그녀가 공주 사곡면 운암리에서
불구자와 노약자, 고아 등 70여명을 모아 구제활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이 동아일보에 전한다.
그녀가 어떤 연유로 팔상전으로 거처를 이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유 중 하나가 재정적인 어려움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자 혼자 몸으로 70여명을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그녀에게 팔상전은 조금이나마 재정적 부담을 더는 방편이자,
소외된 이들과 더불어 몸을 의탁할 마지막 귀의처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팔상전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도 그 삶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70여명의 고아들과 사찰에서 살아가는 삶은 이미 그 자체로 평범하지 않은데다
재정적 어려움도 항시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가 고아들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1927년 동아일보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답은 그녀의 돈독한 불심에 있었다.
복덕월 보살은 일찍이 불교에 귀의한 신심 깊은 불자였다.
갑사 팔상전에 머물기 전에는 불각 건축과 중수, 불상 조성과 불경 간행 등에 힘써왔고,
보은 법주사 일대 사찰과 경주 불국사, 영주 부석사 등
각 사찰의 불사에도 동참해 그 공적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녀는 무엇보다 승속을 떠나 빈한한 사람과 병자를 구제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녀가 어떤 계기로 처음 불연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에 남다른 원력을 세웠음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그녀가 세속을 떠나 사찰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남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 이면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는 설명이다.
남다른 불심과 원력에 기반한 만큼 복덕월 보살의 자비행은
고아들을 거둬 먹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다양한 직업교육을 실시했고,
보통교육의 일환으로 국어와 한문을 가르쳐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또 아이들이 장성하면 짝을 지어 가정을 이뤄준 일이 허다했다.
슬하에 남매가 있었지만 일체의 차별을 하지 않아,
모르는 이는 풍덕원의 고아들 중 복덕월 보살의 친자식이 있다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진심을 담은 그녀의 구제원력에 감화돼 풍덕원 운영에 힘을 보탠 이도 있었다.
공주 사곡면에 거주하던 박인묵 거사는 복덕월 보살과 의남매를 맺고
매년 1600원 가량을 운영비로 기탁했다.
박 거사는 193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공주 계룡면 중장리 일대의 토지를
복덕월 보살에게 기탁하는 등 풍덕원의 안정적인 운영을 발원했다고 한다.
이 같은 공적에도 복덕월 보살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일설에 그녀가 어린 시절 궁궐에서 생활하던 궁녀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1932년 동아일보의 또다른 기사에 따르면
“복덕월 보살은 일찍이 고종태황제를 섬기고 있다가
때마침 궁중에 수운(愁雲)이 맴돌자 시골로 내려와 생각한 바 있던지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드리는 것으로 그날 그날의 일을 삼았다”고 한다.
기사가 사실이라면 그녀는 궁궐에 머물던 어린시절 불교에 귀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번 궁녀는 죽을 때까지 궁녀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때문에 그녀가 궁궐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기 궁녀 방출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궁녀 방출은 모시던 이가 죽었을 때, 혹은 나라에 재난이나 재해가 있는 경우 이뤄진다.
복덕월 보살이 1883년생이라는 점을 점을 감안하면,
첫째로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방출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과 12세의 나이에 홀로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드렸다고 보긴 어려우므로 가능성은 적다.
두 번째는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여사를 비롯한 궁녀 100여명이
일시에 방출된 시기에 궁을 나왔을 것이란 추측이다.
구체적인 연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당시 궁궐에서 방출된 박자혜 여사가
숙명여학교 1회 졸업생이었으므로, 퇴궐 시기는 대략 1909년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덕월 보살은 17세 무렵 궁궐을 나와
10여년간 전국 명산을 다니며 기도를 드리다가,
29세가 된 시점부터 공주 사곡면에 터를 잡고 본격적인 구제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명성왕후 시해 직후 남다른 불심의 순헌황귀비 엄씨가 고종의 후궁으로 재입궐하면서
궁녀들 사이에 불교 신앙이 확산됐다는 점에서,
복덕월 보살이 궁궐에서 불교를 접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기록에 의존한 추론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복덕월 보살의 구제원력 이면에 깊은 불심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이 같은 불심을 대변하듯 복덕월 보살은 40대 중반 무렵 신문에 게재된 사진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 차림을 하고 있지만,
이후의 기사에서도 일관되게 복덕월 보살로 칭해지는 것으로 보아
차림새의 변화일 뿐 실제로 출가해 스님이 된 것은 아닌 듯하다.
복덕월 보살은 죽는 날까지 소외된 이들의 어머니로 살다가
1935년 풍덕원에서 고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연을 접었다.
이후 풍덕원은 그녀의 유지를 이은 공주 지역 인사들에게 인계됐지만
재정난과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지금은 그 명맥이 끊어진 채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복덕월 보살의 발자취를 더듬어 온 공주 원효사 주지 해월 스님은
“어린 시절 마곡사 포교당의 권만호 스님을 모시던
복덕월 보살의 어머니가 공주 최초 고아원을 설립하신 분이라는 소문이 있었다”며
“이후 알고 보니 그 분의 원래 법명은 정심월이었고
어머니인 복덕월 보살의 공적이 워낙 크다보니 딸에게까지 그 법명이 이어졌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스님은 “모두가 어렵던 시기 버림받은 소외 이웃들을 자비로 보듬은 복덕월 보살,
그리고 그녀를 도운 박인묵 거사야말로 한평생 중생구제 원력을
실천한 보살에 다름 없음에도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그들의 공적이 잊혀지는 듯해 더없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2013. 10. 07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