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와 심화,
혼란과 좌절의 1930년대, 일제 말 암흑기의 시문학사
양상들
1. 시대적 배경
한국 현대문학의 흐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식민지시대 우리 문학사의 중심에 1930년대 문학이 놓인다는 주장에 대해 대체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는 물론 시의 경우에도 예외일 수 없다. 1930년대 한국 시단이 이루어놓은 크고 작은 성과들은 해방 이후 상당 기간 우리 시단의 흐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된다. 당연히도 이 시기의 시문학은 그간 많은 비평가와 연구자들의 집중 논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그 결과 이에 대한 연구 성과 역시 질적·양적인 면에서 적잖이 축적되어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사실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 시단이 이룩해놓은 뚜렷한 자취에 힘입은 바 크다. 다채롭고 세련된 양식의 시작 경향과 제 조류들이 앞다툰 등장으로 1930년대 시단은 이전에 비해 한층 풍설하고 활기찬 볼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같은 양상들은 일차적으로 이 시기 시문학을 둘러싼 제반 여건의 다양한 변화와 성숙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개화기 아래 일본을 거쳐 도입되기 시작하였던 서구 근대의 각종 문물 및 제도들은 이후 우리의 사고와 생활에 차근차근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변화가 본 궤도에 접어든 시기가 바로 1930년대이며, 비록 실제에 있어 그것이 도시 중심의 기형적인 소비 형태에 국한된 것이었다 할지라도 당대인들에게 가한 정신적 · 물질적 충격은 무시 못할 수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도시의 출현과 그것의 급격한 팽창¹으로 인해, 이른바 도시 세대의 새로운 감각과 정서가 이 시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 이 땅의 일제 식민 지배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경성(서울)이 위치해 있거니와, 일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추진된 이러한 근대 도시로의 탈바꿈은 그 실제에 있어 상당한 문제점 또한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즉, 기록상으로 보이는 조선의 식민지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경성 번화가의 모습은 일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각종 진귀한 상품들과 더불어, 밤이면 화려한 전등불과 네온사인 아래로 수많은 인파들이 뒤엉켜 북적대는 불야성의 별천지를 이루었던 것이 사실이나, 그러한 도시의 이국적인 화려함 이면에는 일제의 식민경제정책에 의해 희생당한 농촌사회의 상대적인 황폐화와 도시 뒷골목을 헤매는 실업자·빈민·걸인·매음·마약 등 도시화에 따른 어두운 부산물들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이 시기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의 이중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개발에 따른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한편에서는 식민지배의 공고화를 위한 계획적인 음모가 은밀히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단 1920년대 시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소위 문화통치라는 다소 유연한 방식을 취하다가, 1920년대 후반을 고비로 하여 보다 노골화된 형태로 그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가져온 외형상의 화려함과는 달리,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내부 상황은 식민본국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가시화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열악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외부적인 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1920년대 말경 미국으로부터 파급된 세계 경제의 대공황은 일본 내에서의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군국주의화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를 기화로 정치권에까지 발언권을 강화하게 된 일본 군부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어용 세력들을 앞장세워서 주변국으로의 세력 확대를 통한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헛된 망상을 내부로부터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의 발발과 함께 그런 양상은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고 말았는데, 비슷한 시기 유럽 대륙에서의 파시즘과 나치즘 정권의 등장과 연이은 그들의 세력 확대는 이들에게 한층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외적인 상황의 변화는 분명 커다란 민족적 시련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대륙 진출의 본격화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식민지 조선 내에서의 사상적·제도적 통제의 강화를 예고하는 조치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제에 의해 취해진 일련의 조치들, 예컨대 1931년에 있었던 신간회 해산, 1931년과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KAPF 맹원 검거 사건, 1934년에 공포된 조선농지령 및 이어서 1936년에 공포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등은 이 당시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들로 열거될 수 있다.
중일전쟁(1937)에 이어 발발한 태평양전쟁(1941)을 전후하여 사태는 보다 극한 상황으로 치달리게 된다. 전시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이를 구실로 내부 단속을 철저하게 강화해 나갔는데, 이에 따라 조선 전역은 광기 어린 그들의 집단 테러리즘의 실험장, 발산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양상은 급기야 우리 민족 말살의 음모로까지 이어졌다. 1937년 국어(일어) 사용의 의무화와 1938년에 발효된 각급 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의 폐지 조치가 취해졌으며, 지식인에 대한 사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1937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설치, 1938년 조선방공협회 조직, 시국 대응 전선사상보국동맹 결성 등이 뒤따랐다. 뿐만 아니라 1938년, 일제는 중일전쟁 직후 만든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확대 적용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대가를 이 땅의 일반 주민들에게까지도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전선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정책이 본격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징용되어 비참한 작업 환경 아래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1930년대 한국 시단이 일구어낸 빛나는 성과는 이처럼 한마디로 규정될 수 없는 상황적 복합 요인과 그로부터 연역된 정신의 긴장감 속에서 타올랐던 불꽃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의 명암은 그대로 이 시기 시단의 부침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객관적인 좌표인 셈이다. 그 실질적인 공과를 둘러싼 다소간의 엇갈린 해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기의 시문학에 애써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그것이 외적 조건의 한계로 인해 일정 부분 왜곡되고 뒤틀린 양상을 보인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속에서 당대의 사회와 문학에 대한 이 시기 시인·비평가들의 고민과 의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면,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
1 일례로, 1928년 현재 경성(서울)의 인구는 약 31만 5천이었으나, 1934년에는 38만2천명에 이르고 있으며, 1941년에는 무려 97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의 급중은 1934년 총독부에 의해 마련된 '조선 시가지 계획령'과 그에 따른 인근 지역(용산·성북 등)의 서울 편입이 일차적인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겠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을 통한 도시화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이를 통한 인구 흡입 요인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준섭, 『한국 모더니즘문학 연구」, 일지사, 1988.22쪽.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4. 10. 1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