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우리역사를 왜곡시킨
‘심상소학역사보충교재’(4)
瓦也 정유순
<삼국의 수도>에 대해서는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왕이 살해되고 땅을 잃어 국가가 곧 망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도움으로 겨우 그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도읍을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겼는데, 그 후 나라가 점차 쇠약해져 다시 도읍을 사비(泗沘)[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로 옮겼다. 긴메이(欽明)천황 시대에 불상과 경론을 일본에 바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 두 나라의 수도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수도는 처음에는 만주 땅에 있다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장수왕 때 조선반도의 대부분이 그 영토가 되었으므로, 도읍을 남쪽으로 옮겼으며 그때부터 변하지 않았다.”로 기술하며 백제가 일본의 도움으로 겨우 나라를 유지할 수 있어 마치 일본 없이는 백제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조작했으며, “긴메이(欽明)천황 시대에 백제가 불상과 경론을 바쳤다.”라고 심하게 왜곡한다.
<반가사유상(국보83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에서는 “고구려의 영토는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중국의 영향을 자주 받았는데, 중국의 삼국시대에는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에게 토벌을 당했다. 이때가 동천왕(東川王)[제19대] 20년이다. 이때 관구검이 공격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을 함락하자, 왕은 도망쳐 북옥저(北沃沮)[지금의 함경북도]로 달아났지만, 오래지 않아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바로 오진(應神)천황시대에 해당한다. 그 후 약 50년이 지나, 중국은 서진(西晉) 말기에 이르렀는데,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난이 일어나, 여러 오랑캐족들이 번갈아 가며 일어나 나라를 세우자, 고구려는 중국의 위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그 군령(郡領)을 잠식했다. 미천왕(美川王)[제15대] 때에는 조선의 북부에 있던 낙랑군(樂浪郡)은 이미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점차 남하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 북쪽에서 일어난 연(燕)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연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고국원왕(故國原王)[제16대] 12년에는 환도성이 다시 파괴되고, 왕은 산골짜기로 도망쳤고, 그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그의 생모(生母)는 적에게 잡혀 가는 재난을 당했다. 고국원왕 때는 고구려가 외환(外患)으로 가장 고통을 받던 때로, 그 왕 41년에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왕이 나가 이를 막았지만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이상은 바로 닌토쿠(仁德)천황 시대에 해당한다.”로 하여 은근히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있는 것처럼 왜곡하여 강조하였고, 동천왕이 달아난 곳은 북옥저가 아니라 남옥저로 낙랑군 땅이었으며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 동남부의 땅으로 최근에는 중국 내륙으로 나온다.
<가짜시비에 휩싸인 관구검기공비>
<관구검기공비에 새긴 문자>
<광개토왕의 사적(事蹟)>에 대해서는 “고국원왕(故國原王)부터 소수림왕(小獸林王)[제17대], 고국양왕(故國壤王)[제18대]을 거쳐, 광개토왕(廣開土王)[제19대]에 이른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은 닌토쿠천황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라고 하며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다. 이 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재위 기간은 중국의 혼란이 더없이 심한 시기로, 점점 더 반도의 땅을 빼앗아 그 영토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왕이 친히 사방을 공격하여 국토를 크게 확장한 것은, 현재의 만주 [성경성(盛京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왕의 비문에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왕은 주로 백제와 더불어 그를 도운 일본과 싸웠다. 최근의 고증(考證)에 의하면 이 왕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경계는 임진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중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삼국사기>에는 백제 진사왕(辰斯王)[제16대] 본기에,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이 통솔하는 병사 4만 명이 북비(北鄙)를 공격해 와, 석현(石峴) 등 10여 개 성들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대를 이용하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막을 수 없었으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을 빼앗겼다. [진사왕 8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다.]”라고 되어 있으므로, 백제는 한강 이북에 있는 영토를 이때 많이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강원도에 있던 예족(濊族)도 광개토왕 이전부터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므로, 그 영토는 신라와 인접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 왕 때 신라는 볼모를 보내 고구려와 우호를 맺었다. <삼국사기>의 신라 내물왕(奈勿王)[제17대] 본기에는 “37년 봄 정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 37년은 광개토왕 원년이다.]라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은 재위 22년, 나이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인교(允恭) 천황[제19대] 2년 [동진(東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이다. 이듬해에 그를 산속의 능(陵)에 옮겨 매장했다. 집안현(輯安縣)에 현존하는 이 왕릉비(王陵碑)는 이 해로부터 가능한 오래지 않아 만들어졌을 터인즉, 실로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으로, 그 비문은 곧 당시의 문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매우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료(史料)이다. 광개토왕이라는 호칭은 앞에서 기록한 비문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되어 있다. 호칭이 너무 길기 때문에 보통 줄여서 ‘광개토왕’ 또는 ‘호태왕’이라고 부르며, 고구려에서는 그때의 연호(年號)에 따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존칭했다.”로 하여 고구려 대륙역사를 은근히 반도역사로 둔갑시켰다.
<북한이 기증한 광개토호태왕 비석-임진강유역>
<장수왕 시대의 삼국의 형세>에 대해서는 “장수왕(長壽王)[제20대]은 광개토왕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에 이어 즉위한 것은 인교(允恭)천황[제19대] 2년이다. 왕의 재위(在位)는 80년이나 오래 유지되었지만, 이 왕 때에 고구려는 이미 조선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함으로써, 이 왕 35년에 수도를 만주의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다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더욱 국토를 넓혔다. 36년에 왕이 친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그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시켰으며, 그 왕인 개로(蓋鹵)를 사로잡아 참수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백제는 한강의 남북에 있는 많은 영토를 잃었고, 고구려의 영토는 늘어나 경상북도의 북부인 죽령(竹嶺)에 다다랐으며, 오늘날의 충청북도 충주도 포함하여 이 도(道)의 대부분과 충청남도의 일부까지도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라며 은근히 조선반도를 강조한다.
<일본 조작이 의심되는 점제현 신사비>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불안을 느낀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6년 후 [신라 눌지왕 17년, 백제 비유왕 7년]에 이르러, 종래의 적대적 감정을 버리고 화의를 맺고 힘을 합쳐 고구려를 방어했지만,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를 함락하여 그 영토가 한강 이남까지 크게 늘어나자, 갈수록 두 나라의 결합을 공고히 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백제왕은 신라에 혼인을 요청하자, 신라왕은 딸을 보내 아내로 삼게 하였으니, 두 나라는 한층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관계는 백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라고 기술하여 삼국의 영향권을 조선반도 안으로 국한하려 하였다.
<가야를 포함한 4국시대 지도>
<일본의 백제 구원>에서는 “광개토왕 때 일본은 백제를 지원하여 고구려와 싸웠지만, 그 후 백제는 장수왕의 침략을 받았으며, 마침내 개로왕(蓋鹵王)[제22대] 때에는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살해되었으며, 또한 막대한 토지를 잃어, 나라가 곧 망할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가 유라쿠(雄略)천황 19년이다. 천황은 즉시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을 도와 국가의 부흥을 꾀하셨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 21년 봄 3월에 천황은 백제가 고려 [고구려]에게 패했다는 말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웅진(熊津)]를 문주왕(汶洲王)[문주왕(文周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하여 일으켰다. 이때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백제국은 이미 망하여 창하(倉下)에 모여 걱정하고 있었지만,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백제는 일본을 의지한 정도가 특히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로 적으면서 백제가 마치 일본의 속국으로 일본 이 아니면 존립이 어려웠던 것처럼 조작했다.
<백제 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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