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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심포닉 락 (Symphonic Rock)
필 자: 전 정 기 / 1999년 5월
출 처: http://www.sobaworld.co.kr/2303 / 포스팅:
- 목차 -
1.록음악은 왜 클래식을 도입하게 되었는가?
2.심포닉 록과 클래식 록
3.심포닉 록의 요소
4.영국외 주요 유럽국가의 심포닉 록
5.80년대 이후의 심포닉 록
6.심포닉 록을 다시 들으며
1. 록 음악은 왜 클래식을 도입하게 되었는가?
16년 전의 기억
우선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내가 처음 <아트록>을 접하게 된 것은 오래 전 어느날 새벽이었다. 습관적으로 켜 놓은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한 작품에 나는 지금까지 전혀 경험치 못했던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클래식 원곡을 '리메이크'한 것이라는 것을 DJ의 멘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원하는 음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든 시절이었다는 것은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시는 사실. 결국 나는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보다 입수가 수월한 그 클래식 원곡의 오케스트라 연주, 피아노 연주, 그리고 기타연주에서 심지어는 전자음악으로 편곡된 음반까지 닥치는 대로 모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 새벽의 감흥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 곡은<Pictures At An Exhibition>, 바로 무쏘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의 원곡을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가 편곡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트록>과의 만남은 시작됐고 벌써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간 수 많은 곡들을 음반과 라디오를 통해 접해 왔지만 그 때와 버금가는 감흥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독자 분들도 그 같은 소중한 추억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나는 소박한 의문을 하나 지니게 되었다. 왜 원곡이 아닌 편곡 작품을, 그것도 고매하신 분들이 한 단계 격이 떨어진다고들 하는, 록 음악으로 쓰여진 이런 불경스러운곡에 왜 나는 그렇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내 정신 상태나 예술적 감수성 혹은 수준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황당한 생각이었지만, 당시 내 나름대로는 퍽이나 심각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는 아무런 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다음이었다.
지금이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울지 모르겠으나 당시만 해도 '대중 음악'의 <미학>이나 수용 <가치>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기 힘든 분위기였고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별 다른 이견을 달지 않았다. 산울림의 데뷔 앨범이 발표되었을 즈음, 라디오에 음악 평론가라는 분이 나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울림의 노래는 엄밀히 말해 음악이라고 보기 어렵죠".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최소 10년 동안은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개인적으로 '대중 음악'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담론의 권력장에 그다지도 천착하게 된 것은 당시 그런 황당한 상황 속에서 록 음악을 듣고 자라면서 경험했던 것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많이 호전되었지만, 우리는 지금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진 않을 것이다. 나부터도 말이다.
히피 문화와 사이키델릭 록
다시 본 장의 주제로 돌아가자. 록 음악과 클래식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라는 한 천재 뮤지션에 의해 완성된 록 음악의 본질과 음악사적 의의는 바로 '육체성의 발견'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재즈의 '루이 암스트롱'이나 '찰리 파커'와 같이 서양 음악의 전통적 궤도에서 이탈하는 또 다른 주류 음악 장르를 제시하고 그 토대를 다진 장본인이었다.
물론 당시 활약하던 다른 록그룹들, 예컨대 후(The Who)나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기여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미 헨드릭스'를 <록의 원형질>에 대한 완성자로 보는 이유는 그가 록 음악의 뿌리인 '리듬 앤 블루스' 전통을 훌륭히 계승하면서 현대 록의 공통적 특질인 전기적으로 증폭된 굉음과 서양 문명의 일상적인 비트에서 벗어나는 원초적 리듬을 덧붙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예술 장르로서의 록 음악이 가능케 된 중요 요소인 <확장 가능성>을 록 음악 속에 심어 놓았으며 '비르투오소'적인 연주인과 실험에 적극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 록 뮤지션이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이렇듯 기존 예술 개념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음악'이 아닌 '땅의 음악', '관념'이 아닌 '육체의 본질'에 충실한 음악을 제시한 셈이다.
이는 소위 순수 음악 뿐아니라 대중음악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질적인 사건이었다. 1970년대 초 롤링 스톤지의 평론가집단은 "일부의 록은 예술이다" 라는 떨떠름한 판정을 내렸지만, 만약 필자의 관점대로 예술 여부를 좌우하는 요소가 작품 자체의 전통적 <미학> 개념에의 충실도가 아니라 창작자의 장인 정신 또는 작가 정신이라 한다면, 70년대 대부분의 록음악은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그 시작점에는 '지미 헨드릭스'가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록 음악사에서 연주 기술의 발전이나 하부 장르로의 분화는 뒤늦게 일어났거나 그 형태를 달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육체성의 음악인 록에 이성적 논리와 관념적 측면을 중시한 클래식 음악이 접목되게 된 계기는 <사이키델릭 문화>와의 연계성에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백인 중산층 계급의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60년대 중반부터 전개된 '히피' 문화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약물>이었다. 그들은 유럽의 신좌파나 미국의 젊은 급진 단체였던 이피(Yippie) 등 다른 청년 문화나 운동과는 달리 현실 정치에 대해 무관심 했으며 물질적 풍요보다는 정신적 고양을 중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만연하던 흑백 인종 차별에 대해서 조차 별다른 입장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 대한 소박한 상상만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다. 그들이 외친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을 뿐 사회 변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대안이나 이슈를 제시하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하버드대 심리학교수였던 티모시 리어리는 강력한 환각제인LSD(Lysergic Acid Diethylamide)의 효과를 설파하기 시작했고 (LSD는 1938년에 합성된 물질로 1943년이 돼서야 그 환각 효과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는 일반인들에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새로운 정신 세계로의 도피를 갈구했던 히피들에게 그것은 복음이나 다름 없었다. 당시 LSD의 효능은 다른 어떤 약물보다도 탁월한 것이어서 그 환각 효과가 10여 시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흔히 보아온 <사이키델릭 아트>는 바로 LSD에 기인한 <환각경험>을 묘사한 것이었다. 히피들은 LSD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에 어울릴 만한 음악을 찾게 되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가사 또는 곡의 정합적 전개나 구조 딱 위보다는 소리 그 자체였다. 노래 중심의 대중음악이 연주 중심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한 결과이다.
이렇게 미국의 <히피> 문화 속에서 탄생된 <사이키델릭 록>은 일반적인 젊은이들에게도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당시 미국 록 음악의 커다란 두 흐름은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와 '바닐라 퍼지(Vanilla Furge)'로 대표되는 이스트 코스트 록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가던 웨스트 코스트 록, 예컨대 '도어스(The Doors)'나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그룹들의 음악이었다. 전자가 이지적이고 실험적인 곡들을 들려주었음에 반해 후자는 사이키델릭 록의 본질에 충실한 음악을 구사했다. 하지만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To Love)가 빌보드 차트 5위에 랭크되는 등 웨스트 코스트 록이 강세를 보이면서 이스트 코스트 록은 상대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음반사들은 앞 다투어 사이키델릭 록 그룹들과 계약하려 했고 결국 수 많은 동류 그룹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히피운동이 사그라듬에 따라 이들 양 쪽이 추구하던 음악 역시 별다른 발전을 보이지 못한 채 모두 사라지고 만다. 만약 이스트 코스트 록과 웨스트 코스트 록 두 흐름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면 미국의 록음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아트록의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작 <사이키델릭 록>이 확대 발전된 것은 본토인 미국이 아니라 유럽, 특히 영국이었다.
사이키델릭 록의 영국적 수용
영국 뮤지션들의 록 음악에 대한 태도는 미국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축적된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국의 록 음악이 대중들과 함께 하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자 현실에 대한 대응 방식이었음에 반해, 영국 뮤지션들은 그것을 예술의 훌륭한 가능태로 받아들였다.
이들 대부분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으며 그 중 상당수는 아트 스쿨 출신들로 현대 미술과 문학에 대한 기본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이나 재즈 악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다다. 팝 아트, 환상 문학, 프리재즈 그리고 리듬 앤 블루스는 대중적 방법론도 하나의 예술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들은 특히 예술의 혼성 가능성에 주목했으며 미국 뮤지션들에 비해 대단히 <지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를 지녔다.
당시 미국에서는 '히피' 운동이 청년 문화를 주도했음에 반해 유럽에서는 '신좌파'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과격 학생 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자본주의에 반하는 이상적 사회를 추구했다는 점은 같지만 이들의 운동은 히피들에 비해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학생들은 대중예술의 힘과 발전 가능성이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는 파격적 방법론에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당시 영국에서는 수 많은 신진 록 그룹들이 탄생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재즈와 블루스 그리고 현대 전위 음악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더불어 문학과 시각적 요소를 담으려는 시도도 보여주었다. UFO클럽에서 활동하던 '소프트 머쉰'과 '핑크 플로이드'는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영국으로 건너 간 <사이키델릭 록>은 당시 영국 록 음악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들은 그것이 지니는 기존 록 음악과의 차이점, 즉 장시간의 연주와 <육체적>인 것에 반하는 <정신적>인 측면에의 강조 그리고 환청과 환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한 다양한 사운드의 실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하고자 했다.
그들은 굳이 록 음악 내에서 새로운 사운드의 방법론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여러 예술들간의 혼합을 경험했으며, 컨트리와 리듬 앤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과거 록큰롤이나 이제 막 완성된 록 음악내에서 그 소재를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몇몇 작가들이 눈 돌리기 시작한 것은 록 음악 외적 요소였으며 바로 그 중 하나가 <클래식>이었다.
특히 그들은 이성적인 구조의 고전주의 음악보다는 감성에 충실했던 19세기 이후 낭만주의 또는 민족주의 음악가들의 작품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록 음악의 기본 성격이 바로크나 고전주의보다는 낭만주의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클래시컬 록의 선구자 키스 에머슨(Keith Emerson)
당시 영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록에 접목시키려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연주인은 키보드주자 '키스 에머슨'이었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19세기 후반에 활동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클래식 작가들이었다. 그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그룹 나이스(The Nice)가 1967년에 발표한 데뷔 작 타이틀 [Thoughts Of Emerlist Davajact]은 드보르작(Antonin Dvorak)을 멤버들의 이름(Keith Emerson, David O'List, Brian Davison, Lee Jackson)으로 패러디한 것이 분명했으며, 오케스트레이션과 구상 처리가 도입된 두 번째 앨범 [Ars Longa Vita Brevis]에는 시벨리우스의 곡을 새롭게 해석한 <Intermezzo From The Karelia Suite>가 담겨 있다.
당시 일반적인 록 음악이 기타에 의해 주 선율이 전개되었음에 반해 그는 그 자리를 키보드로 대체하고자 했다. 데뷔 작 발표 후 기타리스트(David O'List)가 탈퇴하고 멤버 구성이 키보드, 베이스, 드럼의 삼인조로 바뀌게 됨에 따라 그러한 성향은 더욱 짙어졌다. 결국 키보드가 주도하는 록그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후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향후 키보드가 주도하는 록 그룹의 전형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평론가들은 이러한 그룹들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을 '키보드 록(Keyboard Rock)' 이라 부르기도 했다.
물론 대중음악에 건반 연주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 그가 최초는 아니다. 재즈에서 피아노는 일반적인 악기였으며, 이미 지미 스미스(Jimmy Smith)나 브라이언 오거 (Brian Auger)같은 걸출한 건반주자들이 하먼드 오르간을 블루스 음악에 도입함으로써 키보드의 가능성을 확대시킨 바 있기 때문이다 (지미 스미스의 음악은 '소울 재즈'로 분류되기도 한다).
사실 '키스 에머슨'은 이 두 연주인 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는 재즈와 블루스로부터 자유로움과 사운드로의 감정 이입을, 록 에서는 파격적인 비트를 그리고 클래식으로부터는 정합성을 배웠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도입한 것은 클래식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음악적 뿌리에는 당시 주류 대중 음악의 모든 요소와 클래식의 전통이 함께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혼합 변종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나이스의 세 번째 앨범인 [Nice]에서이다. 이 앨범에 담긴 <Hang On To A Dresm>은 팀 하딘(Tim Hardin) 그리고 <She Brings To Me>는 밥 딜런의 곡이었다. 또한 뉴욕 필모어 이스트에서의 실황을 담은 <Rondo'69')은 데뷔 앨범에 실린<Rondo>를 라이브로 연주한 것으로 데이브 브루벡 쿼텟(The Oave Brubeck Quatet)의 명반 [Time Out]의 <Blue Rondo A La Turk>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크레딧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자신이 편곡한 곡을 완전한 새 곡으로 생각한 것일까?). 이후 '에머슨 레이크 앤파머' 작품의 클래식적 요소들이 치장음이나 상상력의 빈약함을 가리기 위한 위장 전술용처럼 느껴지지 않고 록 음악의 비트와 파격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새로운 방법론으로 확대된 것은 그의 관심 영역이 이처럼 다방면에 뻗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움은 그룹의 후반기 작품들, 예컨대 [Works] 같은 작품에서는 많이 퇴색되긴 하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클래식과 록의 접함은 히피 문화에서 유발된 <사이키델릭 록>에 근원을 두고 있다. 사이키델릭 록의 특성이었던 장시간의 연주와 다양한 사운드의 탐색 그리고 사운드 외적 요소들에 대한 관심은 유럽에서 록 이외 장르와의 결합으로 이어졌고 그 중 하나가 기존 서양의 전통 음악, 즉 <클래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이키델릭 록의 핵심인 트립(trip) 그리고 트랜스(trance)적인 요소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제거되었다. 이와 대비되는 경우는 핑크 플로이드이다. 핑크 플로이드는, 최소한 '로저 워터스'가 그룹을 탈퇴하기 전까지, 사이키델리 록의 기본축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단지 사이키델릭 록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켰을 뿐이다. 뻔하지만 한 편으로는 사이키델릭의 한계를 뛰어 넘는 또 다른 사이키델릭 록을 창조하였다.
나는 이러한 점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를 위대한 그룹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지향하였던 바, 즉 인간 내면 세계 그리고 그것이 투영된 사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클래식과 같은 기존 전통이 아닌 다른 현대적 요소를 탐색했다 (물론 [Atom Heart Mother] 같은 작품에 오케스트레이션이 도입되긴 하지만 핑크 플로이드의 독자 노선에서 크게 벗어난 시도는 아니었다). 내가 아트 록이 곧 클래시컬 록이나 심포닉 록이라는 말에 반발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는 핑크 플로이드라는 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도르노 식으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와 핑크 플로이드,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키스 에머슨과 로저 워터스를 복고와 모더니티로 대비해 한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갔었던 것 이다. 그 때문에 록 음악은 더욱 풍성해졌고 우리는 그것을 향유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다.
클래시컬 록의 선구자는 나이스의 키스 에머슨이었고, 후에 언급되겠지만 나이스와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음악은 <클래시컬 록> 뿐 아니라 이것의 변모된 형태로 나타난 <심포닉 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글의 주제인 <심포닉 록>의 본래 형태는 <클래시컬 록>이었으며 그 뿌리와 동기는 <사이키델릭 록>에 있다. 하지만 심포닉 록이 클래시컬 록의 선형적 변모 형태는 아니었다. 이 둘은 관점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되며, 나름대로 분화, 지속되었다.
2.심포닉 록과 클래시컬 록
오케스트레이션의 도입과 실패
나이스와 함께 클래식과 록의 접목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그룹은 무디 블루스(Moody Blues)였다. 런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이루어진 무디 블루스의 데뷔 작 [Days Of Future Passed]는 클래식에게 구애의 손길을 뻗친 노골적인 예에 속한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에서 악상을 빌려 왔다고 하는 이 앨범의 첫 곡은 아예 오케스트레이션과 나레이션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까지는 전혀 록 음악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후의 곡들도 결성 당시 그들이 추구했다고 하는 리듬 앤 블루스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새벽부터 밤까지의 정경과 인상을 묘사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한 것은 기타와 드럼 또는 베이스가 아니라 현악기와 목관 악기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 앨범의 앞 면은 멜로우'한 팝 오케스트레이션에 경쾌한 록 음악이 흔합된 작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이키델릭 록의 색채는 <Lunch Break>정도에서 겨우 발견할 수 있으나 그나마도 머지 비트 풍의 사운드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후 클래시컬 록과 심포닉 록의 맹아로서 일컬어질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Tuesday Afternoon>과 <Night In Whits Satin>이라는 두 곡 때문이었다 이 두 곡은 오케스트레이션의 효과를 록 악기와 보컬로 대신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던 것으로, 새로 도입된 멜로트론은 매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다시 언급되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멜로트론과 그것이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던 여러 전자 키보드들은 클래시컬 록이나 심포닉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로 자리잡게 된다. 만약 키보드 사운드의 혁신적 발전이 없었다면 이들 두 형태의 록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클래시컬 록>이 기존 <하드 록>이나 <사이키델릭 록>과 크게 달랐던 점은 사운드적 요소와 곡 구성에 있었다. 그들은 클래식에서 구축된 다중 악기의 효과를 차용하려 했으며 그것이 가장 초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무디 블루스의 데뷔 작에서 시도되었던 것 같은 오케스트레이션의 도입이었다. 당시 나이스도 [Ars Longa Vita Brevis]와 [Five Bridges]두 앨범을 통해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기본 악기 구성에 키보드와 오케스트레이션을 접목시켰다. 이 사건은 록음악의 화성, 리듬, 톤 등의 요소들을 중층적으로 변모하게끔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모노(mono)로 점철되어 왔던 록 음악의 방법론과 음 공간이 폴리(poly)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심포닉 록과 클래시컬 록의 공통점이자 이것들이 기존 록 음악과 가장 크게 구별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케스트레이션의 도입에 따라 곡의 길이는 점점 더 길어졌고 서사적이고 서정적인 효과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엮어 낸 오케스트레이션과 록 음악의 접합은 그다지 적절치 않았다는 것이 대부분의 평론가들 (-아트록 옹호파든 반대파든 관계 없이 -)의 생각이며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 근거는 한마디로 말해 이들의 접합이 새로운 음 세계를 창조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선율과 주제 반복에 의해 오케스트레이션의 복합적이면서 미묘한 사운드는 천박하고 저급한 형태로 후퇴했으며 간헐적인 기타와 드럼 연주는 주객전도 상태 속에서 표류하고 말았다. 특히 전통적 록 옹호론자들이 가장 분노한 것은 바로 록 음악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힘이 이 때문에 크게 손상을 입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비판적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과연 이러한 시도가 없었다면 록 이 원초적 힘을 지켜 나가면서 그 영역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도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물론 심포닉 록과 그로부터 분파되었거나 영향을 받은 여러 장르들 (예를 들자면 프로그레시브 메틀)마저 부정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말이다.
하지만 훗날 이러한 시도를 재탕하는 우를 범한 그룹의 작품들, 예를 들자면 딥 퍼플과 런던 심포닉 오케스트라 그리고 네덜란드 그룹 엑셉션(Ekseption)과 로열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협연 따위의 것들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렉트로닉 클래시컬 록(Electronic Clsssical Rock) - 에니드(Tho Enid)
다양한 음색과 악기 소리의 합성과 재현이 가능한 신세타이저가 개발되면서 몇몇 그룹들은 오케스트레이션의 자리를 키보드로 대체했다. 그 대표적 예는 버클리 제임스 하베스트의 데뷔 앨범과두 번째 앨범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던 로버트 존 갓프리와 그의 그룹 에니드의 작품들이었다.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멤버 구성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데뷔 앨범의 크레딧에 따르면 에니드는 당시 로버트 존 갓프리 (key-board, percussion), 프란시스 리커리쉬(guitars), 스티븐 스튜어트(guitars), 그렌 토레트(keyboards, bass, tuba), 로비 돕슨(percussion)의 5인조 구성으로 되어 있다. 튜바와 퍼쿠션을 제외하면 오케스트라에 채용된 어떤 악기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976년도 데뷔작 [In The Region Of The Summer Stars]의 <The Sun>이나 (The Last Judgement> 같은 곡들은 거의 완벽하게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구사하고 있다. 그것의 원천은 바로 로버트 존 갓프리의 키보드 연주였으며 이러한 시도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은 에니드의 두 번째 앨범인 1977년 작 [Aerie Faerie Nonsense]였다.
사실 그가 키보드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 효과를 처음 시도한 것은 에니드의 작품에서가 아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73년 솔로 앨범 [Fall Of Hyperion]에서 그는 '버를리 제임스 하베스트'의 오케스트레이션 감독이었던 감각과 실력을 바탕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클래식 작품으로 착각할 만한 사운드적 효과를 이끌어 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작품에서 주로 사용한 건반 악기가 요즘 같이 다양한 샘플링이 가능한 발전된 형태의 신세사이저가 아니라 단지 피아노와 멜로트론이었던 점이다.
특히 멜로트론에 의한 현악기적 효과는 매우 탁월한 것으로, <The Raven>은 멜로트론 연주가 담긴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명곡이었다. 그의 솔로 앨범과 에니드 시절의 작품들은 클래시컬 록의 전형으로 불리운다. 바꿔 말해 이들 작품들에는 클래시컬 록의 기본적 개념과 방법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클래시컬 록은 과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록 음악의 연애 편지였다. 그것은 기존 클래식 음악을 전복 또는 혁신하고자 나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클래식의 영광을 복고시키려 한 것이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이미 친숙한 록 악기들을 내세우면서 다시 그 위에 오케스트레이션 혹은 그와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키보드사운드를 덧붙여 클래식의 형식과 음공간을 충실히 재현했다.
부연하자면 제대로 된 클래시컬 록이란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클래식과 록 음악의 접목되는 과도기에서와 같이 오케스트레이션과 록 음악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잡탕식이 된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로버트 존 갓프리와 에니드는 그 해답을 제시한 셈이다. 일반적인 지명도에 비해 많은 아트 록 관련 문헌들에서 에니드를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쿠스틱 클래시컬 록(Acoustic ClassicalRock) - 르네상스(Renaissance)
에니드가 신세사이저 등의 전자 건반 악기를 사용한 클래시컬 록을 내세웠던 반면 다른 몇 그룹들은 기존의 어쿠스틱 악기들을 고수하며 클래식적인 사운드를 구사했다 여기에 오케스트라를 채용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들의 음악은 당연히 교향곡이 아니라 클래식 소품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때 곡을 주도한 것은 역시 건반 악기인 피아노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그룹은 '르네상스(Renaissance)'였다.
'르네상스'는 '야드 버즈' 출신의 키스 렐프(Keith Relf)가 이끌었던 르네상스 그리고 애니 하슬럼(Annie Haslum)의 르네상스로 구분된다 (일반적인 호칭에 따른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애니 하슬럼은 작곡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순수 보컬리스트였으며 그 대신 음악을 주도한 것은 곡 전반의 구성과 작곡 그리고 작시를 담당했던 베티 대처(Betty Thatcher)여사와 기타리스트 마이플 던포드(Mike Dunford)였다). 이들은 멤버가 전혀 다른 별도의 그룹이었으되 음악적으로 모두 클래시컬 록을 추구했으며 여성 보컬을 전면에 등장시킨 점에서 매우 유사했다.
키스 렐프의 르네상스가 남긴 1969년 데뷔 앨범[Renaissance]는 다른 초기 클래시컬 록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클래식에 경도되기 보다는 사이키델릭 록이나 포크록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작품이었다.
클래시컬 록 그룹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기존 곡의 재현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이<Island>에 일부 편곡되어 수록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애니 하슬럼의 르네상스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Turn Of The Cards]의 <ColdIs Being>은 알비노니(Abinoni)의 <Adagio In G Minor>를 거의 원곡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느 앨범에서도 원곡의 작곡자를 크레딧에 기입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원곡 재현 혹은 일부 수록 행위는 클래식에 대한 그들의 지극한 짝사랑을 은연중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었다.
'키스 렐프'의 르네상스 작품들이 피아노 연주가 주도하는 클래시컬 록이면서도 다른 록의 형태가 혼합된 것이었다면 '애니 하슬럼'의 르네상스는 보다 클래시컬 록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들을 남겼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데뷔 작 [Prologue]은 비교적 강한 록 비트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다 <Rajah Khan> 같은 곡은 중동 풍의 선율과 연주를 조합시켜 사이키델릭'적인 향취가 여전히 짙게 배여 있다. 두 번째 앨범 [Ashes Are Burning]도 포크나 서정적인 팝 작품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클래식의 웅장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들이 클래식과의 본격적인 접선에 성공한 것은 다름 아닌 그 다음 작품[Turn Of The Cards]였다. 피아노 솔로로 시작하는 <Running Hard>는 지미 호로비츠(Jimmy Horowitz)의 오케스트레이션이 가미된 곡으로 애니 하슬럼의 고음의 목소리와 존 타우트(John Tout)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레이션이 전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융합되어 있다. 이러한 성과는 다시 <Mother Russia>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곡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영국 그룹이면서도 다분히 이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Mother Russia>뿐 아니라 데뷔 앨범의<Kiev>나 <Rajah Khan>, [Scheherazade And Other Stories]의 <Song of Schehera-zade>등, 그들은 음악적으로도 유럽 작곡가들, 예컨대 베에토벤이나 바그너 보다는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v-Korsakov)와 같은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에 경도되어 있었다.
[Turn Of The Cards]는 이들이 추구하던 <어쿠스틱 클래시컬 록>이 비로소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작품이었다. 이들의 음악에 '어쿠스틱' 이라는 호칭을 붙이게 된 것은, 전자 키보드가 주로 사용된 에니드의 음악에 비해, 르네상스의 곡들이 피아노, 베이스, 드럼/퍼쿠션,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음악이었으며 교향악적 효과를 필요로 할 때는 순수 오케스트레이션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에니드의 음악이 혁신적인 측면이 강했음에 반해 르네상스의 음악은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헨리 카우'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그룹으로 '르네상스'를 꼽았을 정도였다. 어느 한 쪽의 우위를 떠나 그 비교자체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클래식에 대한 반대의 접근법 - 심포닉 록
<심포닉 록> 역시 클래식과 관계를 갖고 있긴 하지만 <클래시컬 록>이 계승되어 변화된 형태로 보긴 어렵다. 그 이유는 심포닉 록의 클래식에 대한 접근법이 클래시컬 록과는 상이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클래시컬 록 그룹들이 어떻게 록 음악의 악기와 다른 사운드적 요소를 도입하여 클래식의 형식과 음 공간을 재현하였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클래시컬 록을 대표하는 그룹들 대부분이 를래식 자체의 방법론과 세계관을 긍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의 이상으로까지 삼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심포닉록은 어떠한 점에서 클래시컬 록과는 다른 관점과 지향점을 가지고 클래식과 연계하려 한 것 일까.
우선 심포닉 록은 클래식을 긍정하거나 이상으로 삼으려는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심포닉 록 그룹들은 클래식을 음악적 영감과 방법론의 한가지 원천 정도로 생각했을 뿐, 그것을 재현 또는 추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클래식을 재현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그러뜨리거나 해체시켜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귀족성과 관념성을 조롱하기 일쑤였다.
<심포닉 록>을 대표하는 그룹인 '예스(Yes)'와 '젠틀 자이언트'는 록 음악의 방법론으로 클래식을 구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클래식에 담긴 구축성과 사운드적 요소를 록 음악에 도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클래시컬 록>과는 화살표의 방향이 정반대인 것이다.
또 이들은 되도록 록 음악 자체에 내재된 원시적, 육체적 요소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클래시컬 록> 그룹들이 베에토벤 같은 고전주의 작곡가나 쇼팽, 차이코프스키, 시벨리우스 등 낭만주의 작곡가 흑은 그 중간에 있는 브람스 같은 이들의 음악을 선호했음에 반해 <심포닉 록> 그룹들은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같이 고전과 낭만 모두를 거부하는 작곡가들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그 전형적인 예는 예스의 [Close To The Edge]나 [Relayer], 젠틀 자이언트의 [Octopus]같은 앨범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분류법으로 모든 그룹들의 성향을 확연히 구별할 순 없다. '에머슨 레이크앤 파머'의 음악은 심포닉 록과 클래시컬 록을 구분 지으려는 모든 시도를 무색케 할 정도로 이 두 하부장르에 반하는 동시에 합치한다. 그들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1)클래식 곡의 완전한 재해석, 2)다른 하나는 클래식의 일부나 그것의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흡수하려 한 것, 3)마지막으로는 스스로 또 다른 클래식 곡을 만들어 내려 한 것이다.
<Pictures At An Exhibition)><Pictures At An Exhibition>, <Hoe-down><Trilogy>, <Toccata>, <Brain Salad Surgery), <Fanfare For The Common Man>, <The Enemy God> <Works Volume 1>에서 그들은 '무쏘르그스키' 와 '코플란드', '지나스테라', '프로코피에프'의 원곡을 단순히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오리지날리티를 바탕으로 재해석하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특히 <Pictures At An Exhibition>같은 곡은 그 탁월한 예이다. 전기적으로 증폭된 '키스 에머슨'의 건반 굉음은 현악기가 지니는 섬세하면서도 서정적인 음색을 산산이 찢어 놓았으며 '칼 파머'는 기존의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리듬을 잘게 분해한 후 이를 원시적 타음으로 대체시켜 버렸고 '그렉 레이크'의 목소리는 하늘을 향한 물리적 소리를 육체의 소리로 바꾸었다. 또한 <Sege>나 <Blues Variation>과 같은 자작곡을 삽입함으로써 과거와 현대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원곡이 처음 울려 퍼졌을 당시 19세기 인간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공간과 음공간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원곡이 가지는 웅장함 (원래 이 곡은 피아노 곡으로 작곡된 것이지만 '라벨'이 편곡한 관현악곡으로 더 많이 연주되었다)과 묘사적 효과를 고스란히 살려 놓았다. 그들은 다른 <클래시컬 록> 그룹들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클래식 음악을 추구하던 세계와 그 사운드의 유혹에 함몰되지 않은 채, 록 뮤지션로서의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클래식 거장에 대한 예의를 지킨 셈이다.
또한 그들은 기존 곡들을 재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작곡가들의 방법론을 자신들의 록 음악에 적극적으로 흡수하려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원곡의 일부를 차용하기도 했다. '키스 에머슨'의 타악기적 건반 연주는 '바르톡' 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이었고, 데뷔 앨범에 실린 <Knife Edge>의 일부는 체코 출신의 현대 음악가 야나첵(Leos Janacek)의 '심포니에타' 에서 따 온 것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롭게 구축된 그들의 독자적 방법론이 가장 선명하게 꽃 피운 첫 작품은 (아마도 순수한 창작 곡으로만 채워진 유일한 앨범일 것인) [Tarkus]였다. 앨범 발매에는 앞섰지만 [Pictures At An Exhibition] 이후에 제작된 [Tarkus]는 전 곡이 유기적으로 묶여져 있는 <컨셉트 앨범>이었으며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음악 세계가 농축되어 나타난 작품이었다. [Trilogv]와 [Brain Salad Surgery]는 보다 정교하게 발전된 형태의 음악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Tarkus]에서 확립된 방법론 (=곡 구성, 사운드적 요소, 연주 형태, 가사 등)에 빚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축적된 그룹의 역량이 [Works] 이후의 작품에서는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Works Volume 1], [Works Volume 2]나 [Love Beach] 역시 빼어난 작품임에 틀림 없으나 그들의 우회적 시도는 그다지 혁신적이지 못했다. 그 중 '키스 에머슨'이 클래식에 대한 경의(혹은 동경)으로서 작곡한 <Piano Concerto> 같은 곡은 한 마디로 말해 록 뮤지션에 의해 만들어진 클래식 작품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록과 클래식 양 진영에 충격을 주지도 그 영역을 확대시키지도 못한 채 표류하고 만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최고의 심포닉 록 작품 - 예스(Yes)의 [Close To The Edge]
최고의 아트 록 작품 중 하나로 [Close To The Edge]를 꼽는 데 이견을 제시할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작품은 <심포닉 록>의 프로토타입이었다.
데뷔 당시 예스'의 음악은 하먼드 오르간을 내세운 전형적인 브리티쉬 록으로, 당시 풍미하던 <사이키델릭 록>보다는 '비트 그룹'의 음악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데뷔 작의 곡들은 그룹명 'Yes'처럼 긍정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섬세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록 사운드로 가득차 있었다.
이어서 그들이 시도한 것은 <클래시컬 록>의 '방법론'을 일부 채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Time And A Word]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지향점은 클래식에 있지 않았다. [Time And A Word]에 삽입된 곡들은 여전히 록음악에 더 가까웠으며 이는 이후 예스'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근거로 그들은 두 번째 앨범 이후 어떠한 오케스트레이션도 자신의 곡에 삽입하지 않았으며 기존 클래식 곡을 다시 연주하거나 그것의 형태를 재현하고자 하는 데 무관심했다 (물론 [Fragile]에 담긴 '릭 웨이크먼'의 솔로 곡이자 브람스 교향곡 3번에서 발췌한 <Cans And Brahms>는 예외에 속하지만, 온전한 예스'의 곡이라 보긴 어렵다). 그들은 그 대신 클래식의 형식과 사운드적 효과를 일부 흡수하여 새로운 록 음악을 창출해 내려 했다. 어쩌면 <심포닉 록>이란 예스'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거나 그들과 동일한 지향점을 추구한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스'의 음악이 <심포닉 록>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세 번째 앨범인 [The Album]부터 이지만, 실질적으로 그 형태를 본격적으로 구축한 것은 왕립 음악 학교출신 건반주자 '릭 웨이크먼'이 가입한 후 제작된 [Fragile]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앨범 역시 완전한 <심포닉 록>이라곤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Fragile]에는 <심포닉 록>의 중요 요소인 <컨셉트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Fragile]의 곡 중 <Roundabout>, <South Side Of The Sky>, <Long Distance Runaround>, <Heart Of The Sunrise>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곡들은 각 멤버의 솔로 작이었으며 곡간의 유기적 연관성도 찾기 힘들다. [Fragile]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승화된 것이 바로 <Heart Of The Sunrise> 같은 곡이었다. [Fragile]에서 구축되기 시작한 <심포닉 록> 형식이 완벽하게 완성된 것은 바로 [Close To The Edge]였다.
헤세(Hesse)의 [Siddhartha]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걸작 [Close To The Edge]을 가능케 한 것은 여섯 명의 영국 젊은이들이었다. 멤버들을 제외한 나머지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디 오퍼드(Eddy Offord)'였다. 당시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Bill Bruford)'의 말에 따르면 본 작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곡이나 작곡이 완전히 이루어진 다음 연주된 것이 아니었다. 리허설 과정을 통해 창작된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G# 다음에는 G가 어때?" 하는 식으로. 각 파트의 녹음 테입이 완성되면 그 다음 작업은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에디 오퍼드'의 몫이었다. 그는 이 테입들을 편집하여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예스'의 멤버들은 이렇게 완성된 곡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 전까지 어떤 곡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최근 음악과 같이 창작과정에 <샘플링>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과 작업자가 당당히 작품과 작가로서 인정 받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에디 오퍼드'를 예스의 한 멤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예스의 멤버들은 그 기여도에 대한 답례로 앨범 뒷 커버에 그의 사진을 자신들과 나란히 담아 놓았다.
아무튼 앨범 전체의 완성도나 그 치밀함을 따져볼 때 '에디 오퍼드'는 대단히 탁월한 프로듀서였음에 틀림 없다.[Close To The Edge]에 대해 완벽한 편곡, 구성, 연주를 보여 준 최상의 아트 록 작품이라는 상찬은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시에 이 작품은 후기 낭만주의나 20세기 초반 클래식적인 방법론의 도입과 재구성, 중층적 곡 구성과 사운드, 컨셉트성 등과 같은 요소들이 압축되어 담긴 <심포닉 록>의 이상적 형태였다.
3. 심포닉 록의 요소
아주 단순하게, 원어의 뜻에 충실하다면, <체임버 록>은 실내악을 그리고 <심포닉 록>은 교향곡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렇게 단순치 않다는 것이다.
<체임버 록>만 하더라도 악기의 구성만 실내악과 비슷할 뿐 (심지어는 실내악 악기를 전혀 채용하지 않은 음악도 체임버 록으로 분류되곤 한다), 뒤집어 말하면 실내악과 전혀 관계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고딕과 아방가르드, 살롱 뮤직의 상호 교통과 치밀한 짜깁기로 승부하는 그들의 음악은 서로 정신적 연대감은 이루고 있을지언정 도구의 동일성과는 이미 거리가 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심포닉 록> 역시 교향곡과의 연관성에만 집착한다면 자칫 오해할 소지가 짙다. 다른 록의 하부 장르들과 같이 <심포닉 록> 역시 시대를 거쳐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면서 세포 분열과 확장을 거듭했다. 때문에 도대체 왜 <심포닉 록>이라 부르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이 분야에 포함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과거 <심포닉 록>의 전형과 역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변명하곤 하지만, 나 자신도 솔직히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포닉 록>들의 요소들을 언급하는 것은 <아트 록>의 자기고백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요?'- 과 그 '포스트 모던'적 성격을 주장하던 나 자신 역시 기만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비판을 뒤로 하고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더 <황당한 혼란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머릿속부터라도....
교향곡적 사운드 그리고 키보드
<심포닉 록>이란 명칭이 가능케 했던 것은 아무리 뭐라 해도 역시 <록>과 <교향곡>의 만남에 있었다.
초기 교향곡의 형태는 소규모의 현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예컨대 하이든의 교향곡). 이에 관악기와 타악기가 도입됨으로써 대규모 편성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발전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새로운 선율과 리듬이 도입되었다. 다시 말해 교향곡이란 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는 <다성 음악>이었다.
위에서 다루었듯이 <심포닉 록>의 발전 계기가 되었던 클래시컬 록의 초기 형태는 록에 오케스트레이션이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그 오케스트레이션이 맡은 역할의 일부를 키보드가 넘겨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점은 심포닉 록과 전자 음악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반복되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심포닉 록은 관현악 사운드를 록 악기와 신세이저로 단순히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예스'를 비롯한 대표적 <심포닉 록> 그룹 뮤지션들은 '비르투오소'적인 연주인 이었으며 그에 상응하는 태도와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대신 교향곡적인 사운드를 소규모의 록 그룹 멤버만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세사이저>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향곡과 같이 동시에 여러 악기의 소리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중 녹음이 필요하며 이는 그 중 일부를 테이프로 재생하지 않고서는 라이브에서 원형 그대로 연주할 수 없다.
물론 마이크 올드필드 같은 뮤지션은 엄청난 <다중 녹음>을 거친 작품을 공연에서 재현하기 위해 대규모의 연주인들을 몰고 다녔지만 일반적인 편성의 록 그룹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교향곡 사운드 그 자체에 충실한 작품은 상줄리아노(Sangiuliano)나 토미타(Isao Tomita) 같이 신세사이저 연주가들의 작품이었으며, 이는 당연히 녹음 작품으로서만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록이라기 보다는 전자 음악에 속한다.
이런 이유로 정통 <심포닉 록> 그룹들은 키보드와 함께 기본적으로 드럼, 베이스, 기타와 같은 록 음악의 필수적인 악기를 채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록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키보드의 비중은 그룹의 의도에 따라 충분히 조절되어야 했다. 키보드 사운드는 <심포닉 록>의 필수 요소임에 틀림 없지만 너무 강조되면 록 사운드의 효과가 유실될 위험이 있으며 그 조화와 운용의 미덕은 전적으로 작가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키보드사운드가 넘쳐 흐르면서도 전자 음악이나 클래식과는 다른 새로운 록 음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 준 훌륭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신세사이저도 아닌 오르간과 멜로트론 등 비교적 구식 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심포닉 록의 사운드적 요소를 훌륭히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심포닉 록에 자주 사용되었던 키보드를 살펴보자. 하나는 '하먼드 오르간'으로, 스틸 라이프(Still Life), 마르수필라미(Marsupilami), 크레시다(Cressida) 등과 같은 초기 브리티쉬 록 그룹들이 주로 애용했으며 고풍스러우면서도 박진감 있는 음색이 일품이었다.
다음은 건반에 각각 테이프재생 장치가 달려 있는, 일종의 샘플러 기능을 담은 '멜로트론'이다. 주로 코러스나 스트링 사운드를 만들어 냈으며 극적인 효과에 즐겨 사용되었다 (멜로트론에 대한 상세해설은 AR 4,5호 특집 기사 참조 바람). 모델400은 예스, 제네시스, 젠틀 자이언트, [Red]시절의 킹 크림슨 작품에 선보였으며 최근 앵글라고드도 이 모델을 채용했다. 마크 II(Mark II)는 후에 나온 모델 400에 비해 보다 기계적으로 복잡했던 것으로 <Strawberry Hills Forever>제작 당시의 비틀즈와 무디 블루스 그리고 초기 킹 크림즌의 작품에 사용되었다. 제네시스의 <Fountain of Salmacis>에 실린 웅장한 멜로트론 음향도 이 장치로부터 나온 소리였다.
그 다음은 로버트 무그 박사가 개발한 '무그 신세사이저'였다. 이전의 키보드가 '전자 악기(Electronic Instrument)'라기 보다는 일종의 '전기 악기(Electric Instrument)', 즉 물리적 진동음을 <전기적으로 증폭>한 것이었음에 반해 '무그 신세사이저'는 전기 회로 자체가 물리적 소리를 만들어 내는 본격적인 <전자 악기>였다. '키스 에머슨'은 이 악기를 대단히 애용했으며 무그 박사도 특별히 그의 요청에 따른 모델을 만들어 줄 정도였다. 이들 그룹들은 대부분 키보드를 자신의 음악의 중추에 심어 놓으면서도 타 파트와의 연계를 중시했던 축에 속한다. 때문에 그들의 음악은 록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양한 소리의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 ** 키보드 사운드가 넘쳐 흐르면서도 전자 음악으로 전도되지 않은 경우는 프랑스의 작곡가 겸 건반악기 주자였던 시리유 베르도(Cyrillie Verdeux)가 이끌었던 그룹 '클리어라이트(Clearlight)'였다. 그는 키보드는 물론 공(Gong) 출신의 연주인들이었던 스티브 힐레이지(Steve Hillage), 팀 브레이크(Tim Blake), 디디에 말레르브(Didier Malherbe)의 퍼쿠션, 일렉트릭 기타, 색소폰 사운드를 첨가해 록 음악 구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개념의 록 심포니를 만들어 내었다. 클리어 라이트의 대표작인[Clearlight Symphony]에서 그들은 클래식적 요소를 흡수한 다양한 사운드적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신세사이저에만 의존하지 않고 피아노와 오르간 그리고 멜로트론 사운드의 적절하면서도 다채로운 혼합 방식을 선보였으며 이에 기타와 색소폰을 도입함으로써 "부유하는 듯한 효과" 를 이루어 내고 있다. 트립(trip)적 요소로 가득찬 부유감은 사이키델리아와 재즈 록으로부터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
초기 형태의 키보드가 점차 다양한 음색과 악기 효과를 나타낼 수 있게끔 개량되면서 이들의 음악은 <관현악 연주>와 같은 효과를 일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교향곡은 심포닉 록으로 혹은 심포닉 록이 교향곡으로 등가 비교되거나 상호 투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포닉 록에서 키보드는 기존 록 편성의 빈약한 사운드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그것 이 교향곡적인 사운드 전부를 재현할 순 없었다. 게다가 뮤지션들이 지향했던 것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교향곡의 형식
오페라의 오프닝 연주 정도로 작곡되었던 '신포니아(Sinfonia)'가 하이든에 의해 독립된 형태의 음악으로 발전되면서 탄생한 교향곡은 모짜르트와 베에토벤을 거치면서 고전주의 양식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교향곡의 근간에는 <소나타 형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향곡을 '소나타 형식으로 만들어진 관현악 연주곡' 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특히 고전주의 시대 작곡된 심포니의 1 악장은 대부분 <소나타 형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론도, 주제와 변주곡).
<소나타형식>은 기본적으로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3부로 이루어지며 그 앞과 끝에 서주부와 종결부가 첨가되기도 한다. 많은 분들이 <심포닉 록>의 대표곡 들을 들으면서 도입, 전개, 절정, 결말이 뚜렷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소나타 형식>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의 '스트레이트' 했던 록 음악이 보다 '구축적 형식미' 를 갖출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간략했던 가사는 장황해졌으며 곡 전체의 <스케일>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70년대 록 음악의 연주 기교나 사운드가 다채롭고 정교하게 발전된 것은 아마도 이렇게 커진 <스케일>을 감당하기 위한 필연적 요청에 따른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다 악장 형식>에 있었다. 물론 교향곡과 같이 각 악장의 형식이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클래시컬 록> 그룹이었던 '프로컬 하럼', '나이스' 심지어는 초기 '핑크 플로이드'의 작품에서도 한 곡을 각 주제에 따라 나누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정통 록음악의 형식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질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이후 전반적인 <아트 록> 그룹들의 <대곡 지향 작품>에 도입되었으며 특히 <심포닉 록> 그룹이나 교향곡적인 효과를 도입하려 한 다른 분야의 <아트 록> 그룹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자면 <포크 록> 그룹인 '스파이로자이라(Spirogyra)'의 세 번째 앨범 [Bells. Boots Ard Shambles]의 <In The Western World>같은 곡).
<심포닉 록> 그룹들의 작품에 나타난, 기존 록 음악과의 차이는 그들이 <대칭>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조화와 안정감 대신 <비대칭>성의 불안과 긴장감을 담으려 애썼다는 데 있다. 기존 록 음악이 증폭음과 디스토션 등 사운드 자체의 변형과 드럼 비트로 기성 세대의 음악과 차별화하려 했던 반면, 이들은 <음 구성 형식>을 정교하게 꼬아 놓음으로 기존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으로부터 탈피하려 했다.
재즈와 현대음악으로부터 물려받은 <비대칭>적이며 <다중>적인 리듬 패턴으로 곡은 더욱 복잡해져 갔고, 더불어 화려함이 뒤따라 붙었다. 이는 <아트 록>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한편으론 이후 <펑크 록> 그룹들이 내세운 주된 비판의 소지이기도 했다.
컨셉트성
19세기 작곡가들이 지닌 문학과 미술 등 타 예술에 대한 탁월한 식견은 음악 외적 요소들을 자신의 음악에 수용하려 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표제음악', 즉 음악에 <이야기>성이나 <서술적 묘사>가 덧붙여진 음악이었다.
이에 따라 전체의 곡은 서로 <연관성>을 지니면서 <내용의 전개>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이 당시 만들어진 대표적 '표제음악'으로는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과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 [단데 교향곡]을 들 수 있다. 특히 [환상 교향곡]은 아편 복용 상태에서 나타난 환각 체험을 음악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사이키델릭 록의 시조?).
물론 록 음악에는 대부분 가사가 덧붙여져 있다. 하지만 그 가사가 단지 여흥을 위한 잡담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를 문학과 연결시키기는 아무래도 곤란하다. 록 음악의 가사가 시적인 아름다움과 메시지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아마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포크 록>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문학의 고유 영역으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고 그것에 대한 표현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 영국 뮤지션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진행 중이었던 현대 문학과 미술 등의 타 예술 분야에 대한 소양과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록 음악에 포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19세기 클래식 작곡가들과 흡사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 몇몇 록음악은 앨범 전체의 곡들이 서로 <연계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1)하나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음악적 묘사>에 치중하는 것이었으며, 2)다른 하나는 내용의 <흐름>에 충실한, 다시 말해 <이야기성>이 뚜렷한 작품이었다.
전자의 대표적 예는 '킹 크림슨' 의 [Islands]이며 후자는 <씨어트리컬 록>이라 일컬어지곤하는 일군의 작품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영국보다는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프랑스의 <심포닉 록>은 그 상당수가 <씨어트리컬 록>으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 성>이 강했는데 그 대표적 그룹으로 마르텡 치르쥐스(MartinCircus), 퓔사르(Pulsar), 아톨(Atoll), 앙쥐(Ange)가 거론된다. 특히 퓔사르의 [Bienvenue Au Conseil D'administration!]은 아예 애초부터 <연극>을 위해 쓰여진 작품이었다.
이태리 그룹 중에는 라테 에 미엘레가 '마테 수난곡' 을 주제로 한 「[Passio Secundum Matteum], 그리고 무제오 로젠바하가 니체의 서사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그 내용을 빌어 온 [Zarathustra]를 발표했다.
영국에서는 아서 브라운의 킹덤 컴(Arthur Brown's Kingdom Come)과 '제네시스'가 <씨어트리컬 록>을 대표하는 그룹이었는데, 특히 '제네시스'의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는 <씨어트리컬 록>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The WalI] 역시 <이야기 성>과 <주제 표현>이 탁월한 걸작이었다. 물론 <컨셉트 형식>과 <이야기 성>은 <심포닉 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다른 <아트 록>의 하부 장르들 예컨대 재즈 록, 아방가르드 록, 체임버 록, 스페이스록 등에 비해 심포닉 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4.영국 외 주요 유럽 국가의 심포닉 록
이태리
재즈 록이나 전자 음악이 상대적으로 약세였던 이태리. 하지만 그 대신 이태리는 심포닉 록의 종주국이라 불리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심포닉 록 작품을 발표했다. 영미 권의 영향을 받은 초기 <비트 그룹>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클래식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이는 매우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에 녹아 들어 갔다.
상당수의 이탈리안 <하드 록>을 <브리티쉬 하드 록>과 구별해 <헤비 심포닉 록> 이라 부르는 것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예스'나 젠틀 자이언트'가 수직 상승적이면서 빈틈없는 정교한 음악을 들려주었음에 반해 이들에게는 다듬어지지 않은 '여백의 미'가 살아 있었다. 그러면서도 스트라빈스키나 바르톡의 원시적 역동성과 난해함 대신 바로크적인, 다시 말해 고전주의 양식과 같이 이성적이지도, 그렇다고 해서 탈 서양적이지도 않은 <전통음악>을 선호했다.
이에 따라 이태리의 심포닉 록은 <서정파 심포닉 록>과 <헤비 심포닉 록>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그 그룹의 수가 기라성 같은 수퍼 그룹들을 포함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다 소개 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이러한 부류의 음악을 대표하는 몇 그룹의 예를 들고자 한다.
서정파 심포닉 록의 전형을 보여 준 그룹은 PFM(Premiata Forneria Marconi)이었다. 60년대 영미의 히트곡을 카피하던 비트 그룹 쿠엘리(Quelli)의 멤버들이 바이올린 주자 마우로 파가니(Mauro Pagani)를 영입해 결성한 PFM은 뉴 트롤스와 함께 이태리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 받은 록 그룹이었다. 72년 3월에 발표된 데뷔앨범 [Storia Di Un Minuto]는 발매되자마자 앨범 차트 4위에 올랐고 <The World Became The World>의 원곡이었던 <Impressioni Di Settembre>는 싱글로 큰 인기를 얻었다. 플라비오 프레몰리(Fiavio Premoli)의 오르간, 피아노, 멜로트론, 무그 신세사이저 등 다양한 키보드 연주와 마우로 파가니의 플룻과 바이올린이 PFM 음악의 심포닉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데 크게 기여 했던 것과 같이 이태리 서정파 심포닉 록의 특징이자 매력은 전기, 전자 악기 음과 어쿠스틱 악기 음의 절묘한 조화 그리고 전통과 현대의 어우러짐에 있었다.
PFM과 동류의 음악을 선보였던 레알레 아카데미아 디 무지카(Reals Accademia Di Musica)와 막소포네(Maxophone)를 포함해 QVL(Quella Vecchia Locanda), 일 파에제 데이 발로키 (Il Paese Dei Balocchi), RDM(Il Rovescio Delta Medaglia)의 작품들은 단순히 오케스트레이션이나 클래식 악기를 록 음악에 도입하는 차원을 넘는 새로운 음악 미학을 제시했다. '아름다움의 충격' 이란 표현은 상투적 일진 몰라도 최소한 이들의 작품에 있어 이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악기 구성뿐 아니라 곡 자체에 있어서도 전통과 현대는 상생하며 공존하고 있다. 무작위적 '임프로비제이션'이나 '사운드 이펙트' 그리고 '무 조성(無 造成)' 의 연주가 진행되는가 하면 어느새 '바로크' 음악이 들려 오기도 한다. 심포닉 록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 두 극단적 요소를 서로 충돌시키려 했던 오푸스 아반트라(Opus Avantra)는 이태리 록 그룹들의 성격을 가장 과격하게 드러낸 예일 것이다.
헤비 심포닉 록은 하드 록 특유의 묵직한 일렉트릭 기타 음과 드럼 비트가 더욱 강조된 것이었다. 이런 성향을 지녔던 그룹들은 대부분 초기에 비교적 순수한 하드 록을 연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심포닉 록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키보드 연주의 전면 도입 그리고 컨셉트 형식이나 드라마틱한 곡 전개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 자연스럽게 심포닉 록 그룹으로 변모해 갔다. 나폴리 출신의 일 바레토 디 브론조(I1 Balleto Di Bronze)는 이러한 전철을 그대로 밟은 예에 속한다.
1970년에 제작된 데뷔 앨범 [Sirio 2222]는 블루스와 사이키델릭적 요소가 가미된 크림(Cream=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조직한 '블루스 록' 밴드名) 풍의 하드 록을 들려주고 있다. 바이올린 연주를 실은<Meditazione>같은 곡에서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들의 음악이 심포닉 록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치타 프론타레(Citta Frontare)에서 활동하던 키보드주자 지안니 레오네(Gianni Leone)의 가입에 있었다. 당시 무조성 음악, 12음 기법, 절분음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였던 만큼, 멤버 교체후 발표된 앨범 [YS]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음조직으로 얽힌 작품이었다. 신화를 소재로 한 컨셉트 형식의 구성, 여성 코러스와 키보드 음을 비롯한 중층적인 사운드의 조합은 심포닉 록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이들은 코스모스적인 구축미 대신 카오스적인 무질서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들 사이의 연계성이나 각 곡들의 짜임새가 거의 손상을 입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헤비 심포닉 록의 걸작이라 불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일 바레토 디 브론조와 함께 이태리 헤비 심포닉 록 계를 빛냈던 그룹은 JET, 무제오 로젠바하(Museo Rosenbach), 비례토 페르 린페르노(Biglietto Pei L'Inferno), 세미라미스(Semiramis) 그리고 메타모르포시(Metamorfosi)였다. 이들이 남긴 음반들은 모두 이탈리안 록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것들이다. 이들이 서정파 심포닉 록 그룹들의 작품과 구별되는 점은 예의 헤비함 뿐 아니라 극적인 곡 전개에 있었다. 특히 무제오 로젠바하의 조곡<Zarathustra>와 메타모르포시의 <Inferno>는 록 음악에 있어서 드라마틱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특히 멘타모르포시는 여타 씨어트리컬 록 그룹들과 같은 연극적 무대를 선보인바 있다.
한편 서정파 심포의 록이나 헤비 심포닉 록과는 약간 다른 노선을 걸었던 것은 키보드 연주를 보다 중시한 그룹들이었다. 연극성과 극적인 전개를 강조한 이탈리안 록 그룹들이 '제네시스'(영국의 밴드 名)로부터 영향 받았다면 코르테 데이 미라코리(Corte Dei Miracoli), 루오보 디 콜롬보(L'uovo Di Colombo), 페스타 모빌레(Festa Mobile)는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방법론을 따랐으며 특히 '키스 에머슨'의 키보드 연주 스타일을 계승하려 했다.
물론 모든 이태리 심포닉 록 그룹들의 성향이 위와 같이 명료하게 구분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로 레 오르메(Le Orme)같은 경우 키보드 중심이면서도 서정적 심포닉 록의 요소를 갖고 있으며, 라테 에 미엘레 역시 서정성과 헤비함이 공존하면서 컨셉트성과 드라마틱함까지 갖추고 있다.
이렇게 70년대 아트 록 씬을 화려하게 수놓은 이태리 심포닉 록은 75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다. 다만 77년에 유일한 앨범을 발표한 로칸다 델레 파테(Locanda Belle Fate)만이 그 희미한 불꽃을 간신히 유지했을 뿐이다.
프랑스
70년대 프랑스의 아트 록 씬은 크게 <록 테아트르>, 마그마 패밀리의 <재즈 록> 그리고 <포크 록> 세갈래로 갈라졌다 (물론 이 밖에 엘동(Heldon) 같은 전자음악 계열이나 아르 조이(Art Zoyd), 코민테른(Komintern)등의 <체임버 록> 그룹들도 무시할 순 없다).
연극적 요소를 록 음악에 부여한 <록 테아트르(Rock Theatre)>, 영어식으로 말해 <씨어트리컬 록>은 프랑스식으로 변형된 <심포닉 록>이었다. 발생 연도나 스타일 등으로 따져 볼 때 이는 영국의 '아서 브라운'이나 '제네시스'로부터 영향 받았다기 보다는 이미 연극이 대중문화로서 뿌리깊게 자리 잡았던 자국 내 문화 환경 탓인 듯싶다.
<록 테아트르>를 대표하는 그룹은 앙쥐(Ange)와 퓔사르(Pulsar), 모나리사(Monarisa)였다. 물론 이들 모두가 처음부터 <심포닉 록>을 들려준 것은 아니었다. 앙쥐의 초기 라이브곡들을 담은 [En Concert 1970/1971]에는 도어즈'를 연상케 하는 사이키델릭 풍의 키보드 사운드가 담겨 있으며 퓔사르의 데뷔 앨범 [Pollen]은 [The Dark Side Of The Moon]시기의 '핑크 플로이드' 음악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앙쥐가 본격적인 <록 테아트르 그룹>으로 변모한 것은 [Le Cimietiere Des Arlequins]였다. 퓔사르의 경우 [Halloween]으로 독자적인 <심포닉 록>을 구축했지만, 앙쥐 그리고 보컬의 역할이 특히 강조된 모나리자에 비해 '연극적 요소'는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이었다.
<록 테아트르>의 전통은 이후에도 끈질기게 지속됐다. 탁월한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로랑 티보(Laurent Thibault : 그는 마그마의 [Attahk]같은 작품을 프로듀스 했다) 에 의해 제작된 오니리스(Oniris)의 79년 유일작[L'Homme Voilier]는 전형적인 <록 테아트르>였으며 90년에 데뷔작을 발표한 신진 그룹 베르사이유(Versailles)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록 테아트르>의 드라마틱한 구성과 전개 방식을 수용하면서도 연극적 요소보다는 서정적인 선율을 강조하며 본래의 <심포닉 록>에 보다 충실했던 그룹들이 더 많았다. 아톨(Atoll), 아틀란타이드(Atlantide), 스텝 어헤드(Step Ahead)는 '예스' 특유의 수직 상승적 텐션을 자신의 음악에 담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고, 팡탕클르(Pentancle)의 [La Clef DesSonges], 타이퐁(Tai Phong)의 [Windows]는 서정파 프렌치 심포닉 록을 대표하는 작품이었다.
한편 티앙코(Tiemko), 에델스(Edhels), 할로왼(Halloween), 와 같은 80년대 신진 그룹들은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 받기보다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노선을 탐색코자 했다. 크리어라이트(Clearlight) 같이 신세사이저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심포닉한 음악을 들려 주려 한 그룹 중 주목 받은 것은 80년대부터 본격 활동한 장 파스칼 보포(Jean Pascal Boffo)와 미니멈 바이탈(Minimum Vital)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발표한 작품의 수준은 크리어라이트에 비하면 매우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신세사이저 사운드의 기교적 조합만으로는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사례를 다시 확인케 해준 셈이다. 미니멈 바이탈의 경우 최근 발표한[Esprit D'Amor]는 신세사이저 음악에서 탈피한 <심포닉 록>을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독일
저먼 록 씬은 아몬 듈(Amon Duul), 구루 구루(Guru Guru) 같은 크라우트 록이나 텐저린 드림과 크라우스 슐체 그리고 클러스트 등의 전자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심포닉 록>은 주목을 덜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뭍론 수적으로 볼 때 <저먼 심포닉 록>음악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매니아들 사이에서 심포닉 록은 저먼 록의 마이너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수 많은 클래식 작곡가를 배출한 나라치곤 의외이지 않은가? 아마 그 이유는 20세기 이후 독일 예술계, 특히 전후 청년 문화가 이전 전통을 상당히 부정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다다이즘(Dadaism)과 허무주의(Nihilism)그리고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과 슈톡하우젠으로 이어지는 <반 고전주의>가 독일의 20세기 예술을 주도했고 이어 미국의 마샬 정책과 함께 물밀듯 넘쳐 들어온 영미의 대중 문화는 독일 록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크라우트 록 그룹들의 음악을 독일 현대 예술과 영미 대중 음악의 합성 형태로 바라본다. 결국 이러한 성향이 <저먼 록>계에 워낙 강했기 때문에 <심포닉 록>은 약세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저먼 심포닉 록>은 크라우트 록 그룹들과는 달리 전통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계승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 심포닉 록과 하드 록, 사이키델릭 록, 전자 음악의 경계가 매우 모호했던 것에 비해 <저먼 심포닉 록>은 독일 <아트 록>의 기타 하부 장르들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계승한 전통은 다름 아니라 <독일의 낭만주의>였다.
초기 <저먼 심포닉 록>의 형태는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클래시컬 록>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펠멜(Pell Mell)의 음악은 노골적으로 클래식을 차용하려는 의지를 나타냈다. 그들은 데뷔 앨범인[Malbourg]에서 스메타나의 <Moldau>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From The New World>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에 대한 예찬이다. 선택된 작곡자들의 성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고전주의보다는 북구와 러시아의 민족성 강한 클래식 음악을 선호했다. 노발리스(Novalis)의 음악에서도 이성적인 곡 구성보다는 낭만적 성격이 강함을 느낄 수 있다.
반면 독일을 대표하는 <심포닉 록> 그룹이었던 발렌슈타인(Wallenstein)의 [Britzkrieg]는 클래식과 현대의 인상주의, 표현주의를 꼴라쥐 형태로 조합한 음악으로 평가 받았다. 리더인 위르겐 도라제는 "나는 클래식의 정신으로부터 음악을 만든다. 음악의 전통성이 이루어 놓은, 시대에 알맞은, 원칙과 형식에 따르는 그런 음악을..." 이라고 말했지만 [Britzkrieg]에 실린 곡들, 특히 <Lunatic>은 원칙과 형식에 충실한 고전주의 보다는 현대음악과 '사이키델릭' 그리고 평자의 말대로 <(미술의)표현주의>나 <(미술의)인상주의>에 더 가까운 것 이었다. 하지만 임프로비제이션이나 감성적인 솔로 연주를 배제하는 빈틈 없이 정교한 음악이었다는 점에서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발렌슈타인의 음악이 보다 마일드한 심포닉 록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바이올린 주자 요아힘 라이저(Joachim Reiser)가 가입한 후 발표된 [Cosmic Century]로 그들은 스스로 "심포닉 록 오케스트라" 라 일컬었다. 본 작 그리고 이어서 발표된[Stories, Songs & Symphonies]으로 그들은 이전과 같은 금속성의 차가운 사운드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바이올린 연주의 비중이 커지면서 그들의 사운드는 보다 교향곡적인 색채를 띤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Briokrieg]와 [Mother Universe]가 <심포닉 록>의 '본질'에보다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osmic Century]와 [Stories, Songs & Symphony]는 그 이후 등장하는 <저먼 심포닉 록>의 전형이 되었지만 말이다.
<저먼 심포닉 록>은 밝은 낮보다는 달빛이 드리워진 밤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애니원스 도터(Anyone's Daughter)가 남긴 앨범들의 커버는 이러한 감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발렌슈타인은 물론, 후기 <저먼 심포닉 록>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에덴(Eden)의 음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들이 채택한 주된 소재 중 하나가 밤이었다는 사실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예스(Yes)의 장대함이나 수직상승의 공격성, 무제오 로젠바하의 드라마틱한 구성과는 거리가 먼, 여성적이고 소박한 음악 세계를 보여 줬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지금 이야기하려는 그룹들은 우연찮게도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키보드의 역할이 극대화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 '트리오' 구성이라는 점이다. 바로 SFF(Schicke, Fuhrs, Frohling)와 트리토누스(Tritonus) 그리고 트리움비라트(Triumvirat)이다.
스위스 출신이면서 주로 독일에서 활동한 SFF의 멤버들은 모두 키보드를 구사했으며, 그들이 남긴 <심포닉 록>의 걸작[Symphonic Pictures]에 실린 16분의 대곡<Pictures>는 피아노, 멜로트론, 무그 등 키보드사운드의 조합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예를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긴장감 넘치는 장대한 음공간은 다른 <저먼 심포닉 록> 그룹들의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최소한 그들만은 낭만주의보다는 고전주의나 현대음악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SFF'가 비교적 독창적인 음악을 시도했음에 반해 '트리토누스'와 '트리움비라트'는 '에머슨 레이크 앤 팍머'를 추종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독일적이라기 보다는 영국 <심포닉 록> 또는 <클래시컬 록>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 (특히 '트리움비라트'는 이 덕분에 독일보다는 영국과 미국에서 더 큰 인기를 누려 [Illusions on A Double Dimple], [Spartacus]는 빌보드 차트 40위 안에 랭크 되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저먼 심포닉 록>은 하드-사이키, 전자 음악등의 주류에 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지만 레베카(Rebekka), 루소(Rousseau) 등 몇몇 신진 그룹들이 이를 계승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뉴 에이지>적 성향과 노이쉬반슈타인(Neuswanstein),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등의 '제네시스' 모방 등은 <저먼 심포닉 록>의 빈약한 토대를 드러낸 일례이기도 하다.
5. 80년대 이후의 심포닉 록
네오프로그레시브 록 혹은 팜프 록
80년대는 전통적인 음악을 사랑하던 이에게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일 것이다. 최근에 와서 당시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 역시 막연한 향수 정도일 뿐, 앞으로도 60년대 이후 록 음악사에 있어 가장 천박한 시기로 기록될 것이라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70년 중반 록 음악의 바다에서 '킹 크림슨'이 사체로 발견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아트 록>은 전반적으로 쇠퇴 일로의 길을 걸었다. 물론 '헨리 카우'를 비룻한 록의 '인민주의자' 또는 '해체주의자' 들은 꿋꿋이 자기의 갈 길을 가며 상업주의적 대중음악 세계와 '게릴라 전'을 벌였지만.
70년대 말 영국 <펑크>조차도 상업주의의 망령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즈음, 한편에서는 70년대 초 <아트 록> 음악을 재현코자 하는 젊은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추종하던 음악은 '예스'와 '제네시스' 그리고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작품들이었다. 비록 소수이긴 했으나 현재진행형의 <아트 록>을 갈망하던 팬들에게 있어 이들의 존재는 화제가 되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대부분 작가정신과는 동떨어진, <아트 록>의 외적인 화러함이나 웅장함만을 흉내 내고자 하는 경향이 농후했으며 이 때문에 <팜프록(Pomp Rock)>이란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이들 중 <심포닉 록>을 가장 잘 계승한 것으로 평가 받은 것은 84년에 발표된 팰러스(Pallas)의 두 번째 앨범 [The Sentinel]이었다. '로저 딘'을 연상케 하지만 보다 기계적이고 미래적인 모사로 가득찬 패트릭 우드로프(Patrick Woodroffe)의 커버 아트나 묵시록적인 가사에서 이미 그들이 담고 있는 음악이 현실보다는 상상 저편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폴리포닉 신세사이저와 12현기타 그리고 기타 신사사이저의 효과적 운용으로 그들의 사운드는 70년대 <아트 록>보다 오히려 더 <교향곡>에 접근하고 있다. 게다가 <컨셉트 형식>의 앨범 구성까지, 한편에서 본다면 그들이 만들어 낸 음악은 <심포닉 록>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반복해서 말했듯이 <심포닉 록>이 지향한 바나 그 '본질'은 <교향곡>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기초한 낭만주의나 고전주의, 그리고 한편으로는 록의 과장된 <남근성>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의지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팰러스'의 음악은 <심포닉 록>의 보수적인 측면만을 과장되게 강조한 대표적인 사례를 제공한 셈이다. 음악적으로는 그다지 나무랄 데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음악 그 자체 뿐 아니라 그것에 배어 있는 작가 정신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를 중시하는 청자라면 아마 가차 없이 이 앨범에 비수를 꽂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르네상스'를 흉내내며 포크적인 <클래시컬 록>을 들려준 '솔스티스(Solstice)'도 예외는 아니겠지? 끔찍한 일이다. 애도를....
심포닉 록에 대한 90년대의 대응 방식(1)
- 데빌 돌(Devil Doll)
끊임 없이 이어지는 신진 <아트 록> 그룹들의 '함량 미달' 작품에 많은 이들이 염증을 느낄 무렵인 90년 초반, 이태리로부터 날라온 한 장의 음반이 전 세계 <아트 록> 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슬로베니아 출신인 '미스터 닥터'가 작곡, 편곡, 보컬을 담당한 프로젝트 그룹인 '데빌 돌'의 세 번째 앨범인 [Sacrilegium]은 소수만이 알고 있었던 그들의 이름을 전세계로 알리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가장 성숙한 작품이다.
'데빌돌'의 음악은 외형적으론 이전 <심포닉 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심포닉 록>이다. 신세사이저의 자리를 다시금 피아노와 파이프 그리고 현악기로 대치시켜 만들어 낸 사운드 속에는 그레고리안 성가에서 아방가르드로 이어지는 클래식의 전통, 서커스와 집시 음악, 70년대 <아트 록>과 <메틀>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대의 여러 음악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숨쉬고 있다. 게다가 앨범의 구성은 <컨셉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전개 방식은 <씨어트리컬 록>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어쩌면 '데빌 돌'의 음악을 단순히 <심포닉 록>으로 구분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그의 음악은 지금까지 알려진 <아트 록>의 어떤 하부 장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가 80년대의 그룹들에 비해 오히려 더 <심포닉 록>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 받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하고도 중요한 사실이다.
심포닉 록에 대한 90년대의 대응 방식 (2)
- 앵를라고드(Anglagard)
90년에 들어서 스웨덴 <아트 록>이 갑자기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어쩌면 스웨덴의 <아트 록>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와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되어야 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룹이나 작품의 수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남긴 음반들 중 상당수는 다른 이들의 성과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에서 벗어나면서도 '전위'의 위치를 고수하려 한 '작가 정신'의 숨결이 곳곳에 송곳같이 박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내셔널 하베스터(International Harvester), 잠라 맘마스 만나(Zamla Mammaz Manna) 그리고 '앵글라고드'는 각각 <하드사이키>, <체임버 록>, <심포닉 록>과 같은 하부 장르에 있어 절대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앵글라고드'의 뿌리에는 트레티우오리가 크리겟(Trettioariga Kriget)이 있었으며 다시 '트레티오아리가 크리겟'의 밑에는 '예스'와 '킹 크림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앵글라고드'가 다른 유럽의 신세대 <심포닉 록> 그룹들과 같이 이들을 추종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자국 내 선배들, 예컨대 이미 언급된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나 잠라 맘마스 만나 그리고 앨랴나스 트래드고드(Algarnas Tradgard), 케브네카이제(Kebnekaise)등의 치열한 실험 정신과 독창성으로 무장한 그룹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의 타협하지 않는 냉철함, 과거의 것을 현대적으로 분해/재조합 하려 한 노력은 '앵글라고드'의 [Hybris]가 90년대 <심포닉 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서양 주류의 클래식을 거부하며 <민족 음악>의 '전통'을 되살리려한 <북구의 작곡가>들까지 똑같이 70년대의 키보드 악기인 오르간이나 멜로트론을 내세운 이태리 신진 그룹 스탄다르테(Standarte)가 <복고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앵글라고드'의 [Hybris]가 지금 들어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Hybris]의 미덕은 치밀한 곡 구성과 적절한 사운드의 배치에 기인한 긴장감 뿐 아니라 상업주의적 팝음악의 과장된 화려함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유혹적인 멜로디와 신세사이저의 허풍스러운 사운드가 짙은 화장처럼만 느껴지는 80년대 팜프 록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앵글라고드'의 음악은 담백하며 논리적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아마 대부분의 <아트 록> 팬들이 바라는 소박한 희망은 과도한 실험성이나 독창성보다는 '앵글라고드'처럼 과거의 전통을 버리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한 걸음씩 밖으로 나아가려는 태도일 것이다
6.심포닉 록 을 다시 들으며
다른 <아트 록>과 같이 <심포닉 록> 역시 <하드 록>이나 <헤비 메틀>에 비한다면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음악이다. 더불어 그 낭만적인 감성은 지극히 서양적인 것이다. 이는 유럽의 주류 전통 음악을 <아프로-아메리칸> 음악에 접목시키려 한 의지의 산물이며 한편으론 <반-록>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경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시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나 그리고 여러분들은 왜 이 음악에 때론 열광하고 감동 받는 것인가? 음악은 당파적이고 국지적이면서도 역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이 글은 물론 이에 대한 해답 은 커녕 실마리도 제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택한 주제와 의도 역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례하며 뻔뻔스러운 이야기를 말미에 툭 던지는 이유는, 자신 주변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 즉 '내'가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집어 본다면 '내'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아, 또 다시 부담만 안겨 드린 꼴이 되고 말았다. 부디 용서를.....
1999. 5 / ARTROCK 15
글 : 전 정 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