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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마가는 가장 먼저 종교지도자들의 악한 의도를 보여 준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할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절기에는 하지 말자"고 계획하지만, 결국 예수님은 정확히 유월절에 죽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계획보다 우선함을 보여 준다.
II.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 (14:3-9)
주제: 사랑과 헌신
향유
순 나드는 히말라야 지방에서 수입하는 최고급 향유였다.
삼백 데나리온
노동자 약 1년 연봉 정도의 가치.
머리에 부음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 사용되는 상징이었다.
장례 준비
예수는 이 행동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준비라고 해석하신다.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
반면 제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계산하였다.
예수님은 헌신의 가치를 계산이 아니라 사랑으로 평가하셨다.
여인의 행동은 훗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III. 유다의 배반 (14:10-11)
주제: 헌신과 배반의 대조
여인이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면, 유다는 가장 귀한 주님을 팔아버린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붙여 놓는다.
여인 → 드림
유다 → 팖
이것이 마가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대조이다.
참된 제자는 자기 것을 드리고, 거짓 제자는 예수를 이용한다.
같은 예수를 만났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IV. 유월절 식사 준비 (14:12-16)
주제: 하나님의 주권
남자가 물동이를 드는 것은 당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십자가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다.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준비되고 있다.
유월절 식사는 출애굽을 기념하는 자리지만 이제 새로운 출애굽이 시작된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이 이루어진다.
V. 배반자의 예고 (14:17-21)
주제: 식탁 위의 배반
"나입니까?"
제자들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베드로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의 성취이다.
그러나 배반자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 함께 나타난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신다.
그러나 그 식탁에는 배반자가 함께 앉아 있다.
은혜의 자리에도 믿음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VI. 성만찬 제정 (14:22-26)
주제: 새 언약의 시작
① 떡을 떼심
② 잔을 주심
③ 새 언약의 피 선언
④ 하나님 나라의 완성 예고
떡
"이는 내 몸이다."
예수께서 친히 생명의 떡이 되신다.
잔
"언약의 피"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가 언약을 피로 세운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다.
많은 사람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을 암시한다.
새 포도주
장차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한다.
성만찬은 과거를 기억하는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는 식탁이다.
유월절 식사는 원래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의미를 새롭게 완성하신다.
어린양은 더 이상 식탁 위에 있지 않다.
예수님 자신이 어린양이 되셨기 때문이다.
성만찬은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새 언약을 선포하는 예배의 중심이 된다.
마가복음 14:1-26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대조와 전환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는 문학적 구조를 이룹니다.
이 전체 단락은 "인간은 배반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신다"는 중심 메시지를 향해 전개됩니다.
배반과 음모가 깊어질수록,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새 언약의 은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이 구조의 핵심입니다.
배반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본문: 마가복음 14:1-26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자신이 믿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까지 변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상처는 낯선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서 찾아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외면당할 때 그 아픔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가 신뢰하며 함께 떡을 먹던 친구가 나를 대적하였다"(시편 41:9)고 탄식했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배반은 마음을 가장 깊이 아프게 하는 상처였습니다.
마가복음 14장은 바로 그런 배경 속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하루 앞둔 예루살렘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월절을 준비하는 평범한 절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전혀 다른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한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 드립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거래를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조용히 유월절 식탁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들을 처음 읽으면 서로 관련이 없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매우 치밀한 구성을 통해 이 사건들을 연결합니다.
죽이려는 음모와 사랑의 헌신, 배반의 거래와 은혜의 식탁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인간의 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배경인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심판을 지나가게 했던 그 유월절이 이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월절을 단순히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로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서 자신의 몸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온 인류를 위한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14장은 단순히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를 기록한 본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배반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만나는 자리이며,
죄가 가장 깊이 드러나는 순간에 은혜가 가장 풍성하게 선포되는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드리는 제자인가,
아니면 내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신뢰하며 살아가는가?
그리고 나는 오늘도 새 언약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본론 1. 사람은 예수를 거절하지만, 참된 제자는 자신을 드립니다. (1-11절)
마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본문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장면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먼저 1절과 2절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서 3절부터 9절까지는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10절과 11절에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결심합니다.
겉으로 보면 각각 독립된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들을 연결하여 기록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같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먼저 종교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본문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말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사건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본문은 "유월절과 무교절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그 절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금 참된 하나님의 어린양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역설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종교는 있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제사는 드렸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것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칫 예수님보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 체면과 편의를 더 앞세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길을 걸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곧바로 분위기를 바꾸어 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매우 값비싼 순 나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져와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당시 순 나드 향유는 멀리 인도 북부와 히말라야 지역에서 들여오던 최고급 향료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 품삯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이 향유는 단순한 화장품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평생 재산이나 혼수품으로 간직되던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것을 조금씩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모두 예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깨뜨렸다'는 표현은 다시 담아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남김없이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낭비로 볼 때가 있습니다.
예배에 시간을 드리는 것도, 선교와 구제를 위해 물질을 드리는 것도,
교회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는 것도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평가하셨습니다.
"그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주님은 헌신의 크기를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습니다.
향유의 가격보다 사랑의 깊이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그는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모두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귀한 섬김이 되었습니다.
반면, 10절과 11절에서는 유다가 등장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재산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넘겨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랑 때문에 드렸고, 다른 한 사람은 욕심 때문에 팔았습니다.
한 사람은 이름 없이 헌신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놓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태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간과 물질, 재능과 삶의 우선순위는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참된 제자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참된 제자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보다 마음을 보시고,
헌금의 액수보다 사랑의 깊이를 보시며, 봉사의 크기보다 헌신의 진실함을 받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계산하는 제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헌신하는 제자가 될 때,
우리의 삶은 향유처럼 주님께 향기로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본론 2. 하나님은 인간의 배반 속에서도 자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 (12-21절)
본문은 이제 유월절을 준비하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고,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Passover)'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절기는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유월절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십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유월절을 준비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를 따라가라.
그가 들어가는 집 주인에게 말하라.
그러면 준비된 큰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다."
당시에는 대개 여인들이 물동이를 메고 다녔기 때문에,
남자가 물동이를 메고 있는 모습은 쉽게 눈에 띄는 장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 보았고, 모든 것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떠밀려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유다는 자신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넘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흔들림 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한 선택까지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십니다.
이것은 악이 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배반이 정당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죄로 심판하시면서도,
그 죄를 넘어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이 원리를 발견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형들의 행동은 분명 죄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온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일이 무너지고, 기대했던 사람이 떠나며,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사람들의 음모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계획은 더욱 분명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이어서 식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갑자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근심하며 하나씩 묻기 시작합니다.
"내니이까?"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겠지요?"라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혹시 저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보다 자신의 연약함을 먼저 돌아봅니다.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교회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세상의 문제도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주님, 제 안에도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주님, 저는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삶에서는 주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을 살피는 사람은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붙잡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진리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입니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자신의 욕심과 선택으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배반을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셨지만,
유다의 죄를 선한 것으로 바꾸거나 정당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두 진리를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이 두 진리가 성경 안에서 함께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할 수는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은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사건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가 되었습니다.
배반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배반이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고,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끝낼 수 없으며,
우리의 눈물이 하나님의 계획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통해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십니다.
본론 3.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22-26절)
이제 본문은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중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식사를 단순한 작별 식사로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유월절 식탁을 새로운 의미로 완성하셨습니다.
원래 유월절은 과거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피로 죽음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 후 매년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월절의 모든 상징이 바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식탁 위에 어린양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어린양은 해마다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은 단 한 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완전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리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떡 자체가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떡은 곧 십자가에서 찢기실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떡을 떼는 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잔을 들어 "이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후 제단에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선언했습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언약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계속해서 희생제사를 드려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십니다.
더 이상 황소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냈지만, 예수님의 피는 죄를 용서합니다.
옛 언약은 반복되는 제사를 요구했지만, 새 언약은 단번의 희생으로 완전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받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은혜를 새롭게 붙듭니다.
성만찬은 과거를 기억하는 예식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은혜를 누리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성만찬은 과거만 바라보는 예식이 아닙니다.
현재의 은혜를 경험할 뿐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완전한 잔치를 기다리는 소망의 식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에는 세 가지 시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첫째, 과거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둘째, 현재를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셋째, 미래를 소망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잔치를 바라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매우 의미 있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너무 쉽게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찬송은 십자가를 앞둔 찬송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체포되실 것을 아셨습니다.
조롱과 채찍질, 십자가의 고통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찬송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길 끝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 끝에 우리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가장 깊은 진리를 만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찬의 떡과 잔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구원은 너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흘린 피에 달려 있다."
"너의 소망은 너의 의가 아니라 나의 사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죄책감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세우신 새 언약은 오늘도 우리를 살리고,
붙드시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가복음 14장에는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팔았습니다.
한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로는 유다처럼 욕심에 흔들리고,
제자들처럼 이해하지 못하며,
종교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산하는 신앙이 아니라 헌신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배반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멈추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가장 깊이 드러난 자리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자리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삶을 주님께 기쁨으로 드리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