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에 집사람과 같이 성북동 길상사에 들렸더니
"법정" 스님을 모시고 "장사익" "노영심"씨들의 조그마한 음악 자리가 있었고 그때 한분이 "김대환"씨 였습니다.
쓰고간 내 등산 모자에 싸인을 받아 두었죠 .... 받아든 내용은 "흙바람 김 대 환" 이었습니다.
내가 아끼던 그 모자는 작년 건국대학교 연맹체육대회에서 흙바람과 같이 없어 졌습니다.
누구 그모자 본 사람 없는지요 ????
김대환을 아십니까?
진정한 꾼,예술가의 자세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소 길더라도 꼭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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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젊음 나의 사랑
'타악기연주가 김대환'
정리 김윤덕 기자(경향신문)
그가 두드리면 '후두둑' 비가 떨어지고, '우르르 꽝' 천둥이 내리친다. 우주의 섭리를 쳐내는 열 개의 손가락은 마디마다 부르트고 피멍이 맺혔다. 북소리 하나로 세계를 정복한 타악기 연주자.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넣어 세계 기네스북에 오른 세서(細書)의 달인 김대환씨(66). 동양철학자 김용옥은 "왕희지의 서법보다 더 자유분방한 그의 작품 앞에선 타이베이 고궁 속의 세각도 빛을 잃는다"고 감탄했다.
검은 모자, 검은 옷차림에 언제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예순여섯 살의 '청춘'. 새벽 4시면 일어나 세서미각에 골몰하고, 오후에는 인사동 연습실에 나와 8시간 이상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린다. '소리' 말고는 사람 만나 대화하기를 꺼려하는 그가 신문지상을 통해 처음으로 고백하는 '소리인생 50년'을 담는다.
- 편집자의 도움말
지난 2월 인사동 연습실로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NOI(Nation of Islam)라는 곳으로 흑인 인디언 황인종 등 유색 인종을 옹호하기 위해 75년간 '백인과의 전쟁'을 벌여온 이슬람 단체라고 했다. 2000년 10월 16일 백악관 앞에서 수백만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집회를 여는데 그 자리에 와서 연주를 해달라는 것이다. 집회에는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같은 사람들이 참가한다고 했다.
몇몇 실무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나 역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카고 본부로 날아갔다. 그들은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내 음반 <흑우(黑雨)>가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라성 같은 타악 연주자들 중에 왜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을, 그것도 동양의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을 선택했느냐고 묻자 그들은 대답했다. 나무, 쇠, 가죽 이 3가지만을 두들겨 만들어내는 소리에 만인의 가슴을 울리는 사상과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감회가 새로웠다. 60평생을 바쳐 일궈온 나의 소리.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들이었으나 그들은 음반 하나에 담긴 소리를 듣고 내가 지향하는 세계를 알아보았다. 자연의 소리, 원시의 소리, 보이지 않는 소리를 구현하고자 했던 나의 기나긴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50년 전 가난한 악극단의 나팔주자로 떠돌던 인생이 백악관 앞에서 엄청난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천지가 진동하도록 북을 울려대리라 생각하니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날 이때까지 나는 오로지 '연습' 하나로 일관해온 사람이다. 음악에 타고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우쳤기에 자나깨나 연습에 골몰했다. 젊은 시절 트럼펫이든 드럼이든 아무리 이를 악물고 연습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위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럴수록 독종이 되어갔다.
밤무대를 뛰고 오면 새벽 3시. 나는 하숙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악기 창고로 들어갔다. 후배에게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워달라고 부탁한 뒤 날이 새도록 드럼을 두들겼다. 사람들과 말하는 시간도 아까워 혀끝을 잘라버린 적도 있었다. 신중현에게서 "드럼에 김대환 이상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미친 듯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몽둥이를 들고 매섭게 훈련을 시켰다. 타고난 재능은 젊은 시절 반짝하고 사라질 뿐이다. 연습하고 연습해서 악기와 몸을 하나로 결합시킨 후에 자신의 음악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딴따라'라는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무엇이든 쉽게 이루는 것은 보람이 없다. 일부러라도 장애를 만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인간적이고 아름답다. NOI 사람들이 나를 택한 것도 연주력보다는 역경을 극복해온 내 삶을 평가한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소리가 아니고는 대꾸하지 않는 내가 그간의 인생을 낯간지럽게 털어놓는 것은 여전히 '딴따라'로 천대받으며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무명 연주자들을 위함이다. 창녀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아닌 창녀이듯, 나 또한 그들이 겪은 고통의 나날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 공연을 처음 보러 온 사람은 무대 중앙에 커다란 물체 하나가 덮개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한다. 대고와 드럼세트 사이에 위치한 그것은 다름아닌 오토바이다. 내 퍼포먼스의 중요한 악기다. 북채로 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올라타서 한바탕 쇼를 보여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공연말미 숨막힐 듯 이어지는 '두드림'의 끝과 함께 덮개가 걷히고, 순간 오토바이에는 '타다다다' 시동이 걸린다. 연주자는 퇴장하고 빈 공간에는 오토바이의 우렁찬 발동음이 한동안 울려퍼지는 것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는 아침저녁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괴상한 동물 보듯 손가락질을 하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그만큼 오토바이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대개의 오토바이광들이 그렇듯 처음엔 멋으로 탔다. 군을 제대하고 미8군 무대에 뛰어들었던 28살. 꽁지머리에 가죽잠바를 걸친 차림에 오토바이는 꼭 필요했다. 출연료를 긁어모아 장만한 250CC 국산 오토바이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제명에 못살 뻔했다. 오산 미공군 비행장에서 쇼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낭떠러지에서 굴러 머리와 가슴을 크게 다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집안 어른들의 불같은 만류로 오토바이 곁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 한창 소리찾기에 골몰하던 때 나는 1분1초가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식구들 몰래 50CC 작은 오토바이를 구해 영동에서 인사동 연습실로 한강다리를 건너다녔다. 내 손발이나 다름없는 물건이 되자 아내는 환갑날 그 유명한 '할레이 데이비드슨'을 사준다고 약속하고는 적금을 부을 정도였다.
지금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2년 전 자그마치 4만5천달러를 주고 특수 조립한 할레이 데이비드슨이다. 20개 회사의 부품을 모아 미국인 기술자 스카시가 만들었다. 그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를 누빈다. 베이징에서 하얼빈, LA에서 산타페, 규슈에서 홋카이도, 유럽 대륙 횡단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안 다녀본 곳이 없다. 타고 달리는 오토바이를 퍼포먼스에 사용하는 광경에 이방인 구경꾼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오토바이를 악기로 사용하느냐고. 그것이 내는 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30∼4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꾀꼬리처럼 청아한 미성(美聲), 아름다운 화음을 사랑했다. 그것을 '음악'이라 부른다면 이젠 '소리'의 시대다.
21세기는 '정성(情聲)'을 추구하는 시대가 오리라 확신한다. 전자음, 컴퓨터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지나온 추억을 느끼게 하는 옛소리에 귀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 본래의 정서를 일깨우는 원시의 울림이다. 3살 때 고향인 충청도 태안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올 때 들었던 똑딱선소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노년의 마음 한자락이 고향에 미칠 때 내 귀에는 어김없이 그 뱃고동소리, 발동음이 들려오는 것이다.
오토바이의 기관소리도 그를 닮았다. 육중한 몸집에서 '텅텅텅텅' 터져나오는 소리가 압권인 '명기(名器)'. 나는 할레이를 타고 달리면서 땅의 울림을 듣는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는다.
- 남이 돼버린 어머니, 아버지
후배들은 나를 퍽이나 어려워한다.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다. 커다란 몸집도 위압적이지만 광대뼈 불거진 얼굴에 괴기서린 표정이 무섭단다.
무뚝뚝하고 괴팍한 성질은 불우했던 어린시절에 형성된 듯하다. '죄'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때가 3살 안팎으로 기억되니 감수성도 유난히 예민했다. 아직 태안에 살고 있을 때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간 적이 있다. 북적이는 인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장터구경을 하다 지푸라기에 엮인 남의 계란꾸러미를 밟아버렸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콩콩대는 가슴을 안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온 뒤 계란에 흥건히 젖은 신발뒤꿈치를 얼마나 닦았는지. 주인이 찾아올까봐 신발을 감춰두고 며칠동안 바깥엘 나가지 않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느낀 최초의 죄의식. 그와 더불어 '어머니'란 존재는 내 어린시절 또하나의 아픔이다. 어머니는 19살 때 나를 낳고 내가 5살이 되었을 때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갔다. 아버지는 돌팔이 의사로 트럭을 타고 전국을 떠돌며 사람들 이빨을 고친다고 했다.
어머니가 떠난 뒤 나는 외삼촌의 둘째 양자로 들어갔다. 꽃같이 예쁘고 착했던 어머니가 보고 싶어 외삼촌 몰래 그 집을 찾아가 해가 기울도록 주위를 맴돌던 기억이 서럽다. 하루는 술 취한 남편에게 매맞는 모습을 보고 빨간 소독약을 사서 흙투성이가 된 어머니의 손에 쥐어준 적도 있었다. 어린 아들 앞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셨던 어머니는 또 한번 이곳에 오면 강물에 빠져 죽을란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따뜻한 품에 안겨보기는커녕 '어머니'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채 돌아오는 밤길이 얼마나 캄캄하고 무섭던지.
7살 때인가 아버지를 꼭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인천 외삼촌 집에 찾아온 낯선 얼굴의 아버지와 나는 겸상을 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려고 했는데 외가 식구들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동네 사진관에 가서 흑백사진 한 장을 박고 헤어진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양조장을 운영했던 외삼촌 집은 밥술깨나 먹는 집안이었다. 외삼촌 내외는 6명의 친자식과 다를 바 없이 애정을 쏟아주었다. 말썽을 피우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 낙제나 다름없는 성적으로 중학교에도 못 갈 뻔했는데 '그림 하나 잘 그린다'는 이유로 합격이 됐다.
그림과 글씨엔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중2 때 '양초 먹은 사람들'이란 제목의 그림책을 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내 관심은 음악에 있었다. 간절한 소원이 군악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행진할 때 나팔을 불며 앞장서가는 모습에 넋을 잃었었다. 인천 동산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브라스밴드에 들어갔다. 그렇게 소원하던 트럼펫을 불었지만 몸이 약해 악기를 소고로 바꿨다. 실력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훨씬 뒤쳐졌다. 남들이 1시간만에 배울 것을 10시간 연습해서 따라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음악이야말로 외돌토리인 내가 세상에 정붙이고 살아갈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 음악 인생의 동반자 강태환
한때 내 이름은 강대환(姜大煥)이었다. 외가의 성씨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름 탓인지 나를 강태환과 혼동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고백하건대 알토색소폰을 부는 강태환은 내 외사촌동생이다. 외삼촌의 아들이니 호적상으로는 친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태환이는 나를 잘 따랐다. 외숙모가 "우리 집안에 딴따라 핏줄이 없는데 태환이가 저렇게 된 것은 다 네 탓"이라고 탄식할 만큼 태환이는 음악을 사랑했다. 내가 동산중학교에서 트롬본을 불 때 신흥초등학교에 다니던 태환이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외삼촌 내외가 극구 반대하고 나서자 놈은 집을 여러 번 뛰쳐나가기도 했다. 중2 때는 충청도 산골에서 한달 만에 찾아온 적도 있다.
그러다 태환이는 서울예고에 들어갔다. '딴따라'가 되겠다는 그 고집을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공군에 복무하고 있던 나는 태환이를 군악대로 들어오게 해서 클라리넷을 기막히게 부는 동료에게 레슨을 받게 해주었다. 클라리넷뿐 아니라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에 이르기까지 관악기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 태환이는 17살 때 한국의 최연소 밴드마스터가 되어 시청 옆 도쿄호텔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기도 했다.
군 제대 후 미8군 무대를 누빌 때 학교를 중퇴한 태환이를 데리고 자취를 했다. 인천 양조장집 아들들이라고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딴따라가 된 우리를 어른들이 한푼이라도 도와주실 리 만무했다. 업소에서 번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아갈 당시 태환이는 큰 힘이 돼 주었다. 8군에 있을 때 연주 실력이 시원치 않아 모두들 그만두라고 했을 때도 "형만한 드럼 주자는 없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밤무대를 끝내고 새벽에 돌아와 악기 창고에 들어가면 바깥에서 자물쇠를 잠가주고 아침이면 창고로 식사를 날라와 연습에 지쳐 쓰러진 나를 깨워 밥을 먹이던 사람도 태환이다.
78년부터는 함께 활동했다. 현란한 쇼무대, 틀에 박힌 가요에 진저리가 난 나는 그 무렵 재즈에 골몰해 있었다. 태환이는 알토색소폰에 심취돼 있었고 트럼펫을 부는 최선배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다. '프리재즈'로 명명된 즉흥 음악을 파고들었다. 음악의 일반적인 박자나 코드를 벗어난 생경한 음악. 우리들 하는 짓거리에 국내의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일본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85년 처음 도쿄에 진출해 프리재즈 바람을 일으켰고 일본에서 미국,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갔다.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좀 소원해진 느낌이다. 나이 들어 그런가. 하지만 내 가슴속엔 늘 태환이가 있다. 그는 음악에 관한 한 천재다. 네드 로덴버그, 에반 파커와 더불어 세계 프리재즈 3대 색소폰 주자로 꼽힐 만큼 '세계적'이란 수식어가 공허하지 않다. 어느 땐 구도의 길을 가는 수도승 같다. 거적을 펼쳐 놓고 앉아 색소폰을 부는 모습엔 폭풍이 지난 뒤의 평화와 철학과 정이 깃들여 있다. 그의 삶 어느 자락에 음악이 아니고는 위로 받을 수 없는 진한 아픔이 새겨진 걸까.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소리를 내고싶다"며 명상하듯 연주하는 태환이를 나는 사랑하고 존경한다.
내 청년 시절은 참으로 어수선했다. 해방, 그리고 전쟁. 피를 나눈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는 상황에서 나 역시 우여곡절의 삶을 겪었다. 지금 생각하면 일면 비겁했다는 생각도 든다. 정면으로 부딪치지 못하고 언제나 살길을 찾느라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타고난 팔자가 억센 모양이었던지 그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중학교 6년을 마치고 나는 악극단에 들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주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무공작대. 군인들 앞에서 북 치고 노래 부르는 악극단으로 군복을 입은 채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그 시절 우리 악극단의 가수가 박재란이었다. 당시 8살이었는데 우리 단장이 지방을 돌아다니다 노래를 야무지게 잘한다고 해서 부모에게 돈 몇 푼 쥐어주고 데려왔었다.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 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를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00여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찰 공무원으로 살던 중 전쟁이 났다. 경찰은 인민군 손에 잡히면 즉결 처분 대상이었다. 제주로 부산으로 피란을 다녔다. 급기야 경찰복을 벗었다. 계속되는 전쟁의 소용돌이. 국군과 인민군이 밀고 밀리는 가운데 인천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숨어만 다니다 재수 없게 인민 의용군으로 뽑혀나갈 게 아니라 국군이 되어 아예 전쟁터로 나가자고 결심했다.
계급도 군번도 없는 악명 높은 유격대. 경찰학교 시절부터 명사수로 이름날 만큼 총 쏘는 실력이 좋아 거뜬히 유격대원으로 선발됐다. 팔공산 공비 토벌에 나서 수훈을 쌓기도 했다. 하지만 유격대 생활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38선을 넘으라는 명령을 받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속초에서 낙하산을 타고 개성 송악산에 떨어졌다. 그러나 도저히 북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망을 쳤다. 붙잡히면 사형. 보름 동안 오이만 먹고 간신히 인천까지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배에 태워져 유격대 본부인 강화도로 압송되는 길. 이젠 죽었구나 싶었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내 소식을 전해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달려온 외삼촌이 이리저리 손을 써준 덕분에 배가 강화에 도착하기 전 나는 공군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소원했던 공군 군악대가 있는 대구. 호른과 트롬본을 불며 생활했지만 그 시절도 얼마 못 갔다. 1년 만에 총기 사고를 일으켜 전국의 사고병들이 모이는 강릉으로 쫓겨간 것이다. 그곳에서 무려 7년 4개월을 복무했고, 제대하여 세상에 나오니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 록을 알게 해 준 후배 신중현
군에서 제대한 뒤 미8군에 들어갔다. 당시 음악 하는 사람의 최고의 소원은 8군 무대에서 뛰는 것이었다. 그만큼 경쟁이 심했고 에이전시들은 급수까지 매기는 까다로운 오디션을 거쳐 쇼 단원들을 선발했다. 내가 들어간 곳은 화양 에이전시에 소속된 팀으로 위키 리, 이한필, 신중현 등이 들어와 있었고, 다른 에이전시에서 이미 패티김, 최희준, 길옥윤, 이봉조, 현미, 한명숙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전국의 미군부대를 돌며 연주를 하고 쇼를 펼쳤다. 월남전이 일어났던 68-72년에는 베트남으로 원정쇼를 떠나기도 했다. 사이공을 거점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했는데 쇼를 하다 폭탄이 떨어지면 부리나케 올라타고 도망치는 일이 빈번했다.
미8군 시절 내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은 신중현을 만난 것이다. 월남전에서 돌아와 나는 신중현과 더불어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화양 에이전시는 신중현, 신지철, 그리고 나를 위해 '클럽데이트'라는 패키지쇼를 만들어주었다. 클럽을 순회하며 벌이는 그 쇼는 인기가 굉장했다. 무대 풍경부터 재미있었다. 테너색소폰을 부는 신지철은 키가 2m에 달하는 장신, 기타를 치는 신중현은 1m60㎝나 될까말까한 땅딸이. 색소폰 연주자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왔다갔다하며 연주하는 기타리스트의 모습이 객석의 폭소를 자아냈다. 현미와 패티김이 주축이 된 '현시스터즈'도 우리 공연에 합류해 클럽데이트는 성황을 이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중현은 내게 미8군을 떠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는 그룹사운드 '애드포'를 결성했다. 주로 동두천에서 활동했는데 인기가 최고였다. 이 시절 신중현의 주옥같은 명곡들이 쏟아졌다. 봄비, 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 님은 먼곳에... 김추자, 펄시스터즈, 임희숙, 박인수, 바니걸스, 임성훈 등 수많은 가수들이 신중현의 손에서 배출되었다.
나는 말수 적고 사람 좋은 후배 신중현을 사랑하고 아꼈다. 그는 최고의 연주를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악명 높은 내 드럼 창고 옆에 저도 움막을 하나 만들고 그곳에 틀어박혀 날이 새도록 기타 연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 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의 그룹사운드가 내는 기타의 '쉰소리'가 너무 신기해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적이 있다. 궁리 끝에 내가 이태원에 가서 시계태엽에 쓰이는 강철을 구해왔다. 그것을 신중현의 기타에 묶고 그 떨림을 이용해 소리내기를 시도했다. 마침내 '그억 그억' 하고 쉰소리가 나는데 얼마나 기특한지 둘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 신중현. 후배인 그를 통해 나는 록을 알게 됐고 블루스에 눈을 떴다. 그는 내 드럼 연주를 최초로 인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블루스 연주에 김대환 따라갈 사람 없다"고 말해 당대의 뮤지션들 앞에 내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나는 신중현을 떠났다. 비트 강한 록보다 부드러운 블루스가 좋아 우린 결국 헤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때의 일이 미안하고 미안하다.
- 21세 조용필과 특별한 만남
신중현의 '애드포(Add 4)' 이후 그룹사운드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조영조, 윤항기가 주축이 된 '키보이스(Key Boys)', 김홍탁이 만든 '히 파이브(He 5)'를 선두로 각양각색의 그룹사운드들이 생겨나 극장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그룹사운드를 관리하고 후원할 협회가 조직되기도 했는데 그 초대회장으로 내가 선출됐다.
각종 쇼 무대를 전전하며 바쁘게 살아가던 당시 나는 또 한사람의 재목을 만난다. 경기도 이천이었던가. 미8군 쇼단의 여자아이들이 와서 노래 잘하는 신인이 하나 들어왔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내 앞에 나타난 작고 귀여운 얼굴의 청년. 조용필이었다.
21살. 음악이 좋아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고 했다. 숫기도 없고 붙임성도 없었지만 노래 하나는 잘했다. 시간 날 때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비틀즈, 롤링스톤즈 등의 노래에 귀기울였고 복잡한 영어 가사를 잘도 따라불렀다.
천부적인 목소리를 타고난 용필이를 데리고 김트리오를 결성했다.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 최희철과 드럼의 나, 그리고 용필이에겐 보컬과 세컨드기타를 맡겼다. 얼마 안 있어 최희철 대신 이남이가 합류했다. 밤무대에서 김트리오의 인기는 높았다.
그만큼 연습도 많이 했다. 게으름을 피우면 가차없이 주먹이 날아갔다. 용필이도 고백하지만 나를 떠올리면 매맞은 기억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용필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함께 활동했던 가수나 연주자 중 나한테 안 맞은 후배들이 별로 없다. 때리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다. 내가 무슨 '조폭'이라고. 다만 술 먹고 연습에 게으른 모습을 눈뜨고 못 보는 성미였다. 스캔들은 더더욱 용납하지 않았다.
집을 떠나 갈 곳 없는 용필이와 한집에서 먹고 자며 가난했지만 열정 어린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하면서 용필이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TV와 라디오 방송에 하루가 멀다하고 불려나갔고 자연히 나에게서도 멀어졌다. 그의 타고난 음악성과 지칠 줄 모르는 투지는 대단했다. 대마초와 갖가지 스캔들에도 불구, 용필이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후배의 승승장구하는 모습에 가슴 한쪽에선 서운하고 울적했던 것도 사실이다. 질투도 섞여 있었을 게다. 용필이가 하룻밤 출연하고 수백만원의 개런티를 받을 당시 우리 같은 연주자는 배나 곯지 않으면 다행이었으니까. 그가 있는 곳은 양지였고, 나는 음지에 있었다. 내가 밤무대를 떠나 재즈로 몰입하면서 용필이와는 더더욱 만날 일이 없어졌고 나중에는 TV를 통해서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연락이 오지만 서먹서먹하다. 사람들은 내가 조용필을 '키웠다'는 표현을 종종 쓰는데 옳지 않다. 인재는 혼자서 큰다. 황무지에서도 꽃을 피우는 사람이 진정한 스타다. 다만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뛰어난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어질고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 신과 손을 잡은 '세서미각'
내 이름 석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음악 때문이 아니다. 세서미각(細書微刻)을 하는 '기이한 사람'으로 세인들은 나를 주목했다. 청년시절 조봉암 선생을 호위하면서 글씨쓰기의 매력에 일찌감치 빠져들었지만 세서미각과 서예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생계를 잇기 위해서였다.
세서각을 처음 알게 된 것은 68년이었다. 미8군 쇼단의 동남아 순회 공연 중 대만고궁박물관을 구경갔다가 16세기에 세각으로 새겨진 글과 그림을 보고 그 정교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글씨와 그림을 저렇듯 작고 섬세하게 새길 수 있다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드럼을 치는 틈틈이 나무토막에 세서각을 시도했다. 그림보다 글씨 새기는 일이 더 어렵고 매력적이었다. 점 하나라도 빠지면 실패작이 되는 만큼 온 신경을 기울여 칼을 다뤘다. 그것이 재미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세서각으로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서경보 스님 등 당대 서예가들의 글씨를 본떠 그대로 새겨나가는 작업.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니 억울했다. 그들은 반야심경을 몇 시간만에 쓰고 수백만원의 돈을 받는데 나는 그것을 열흘이나 걸려 조각해주고는 십만원도 간신히 받았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내 글씨를 써서 새기자고 마음먹었다.
모든 밤무대 출연을 중단하고 경기도 군포에 있는 야산으로 들어갔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고 마는 성미라 마누라도 눈물을 흘리며 따라 들어왔다. 움막을 하나 지어놓고 글씨에만 몰두했다.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글씨를 완성하는 데만 전념하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신문지에 줄기차게 연습을 했다. 값나가는 화선지는 아끼고 아껴서 썼다. 맹물로 써서 말리고 다시 쓰고. 10번쯤 그렇게 쓰고 말리고 하다보면 나중엔 걸레마냥 너덜거리는데 그때 마지막으로 먹을 쓰는 식이었다. 매 끼니를 라면으로 때울 만큼 참으로 궁색하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기를 5년여. 만족스러운 글씨는 아니었지만 아내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는 데다 바깥소식도 궁금해 짐을 싸서 산을 내려왔다. 연주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글씨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북을 두드리다 싫증이 나면 글씨를 쓰거나 세각에 몰두했고, 내가 세각한 문갑, 항아리, 약장, 버선장 등은 생계에 적잖은 보탬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냐'라는 어린 시절의 의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섯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던 조봉암 선생. 열 손가락이 온전히 있는 나는 세각의 한계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단순히 잔 글씨를 새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미각(微刻). '신의 손'이라야 가능하다는 조각의 끝. 상아, 금, 거북이등껍질 같은 미각의 재료와 45배까지 확대되는 공업용 현미경, 그리고 가느다란 철필을 구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급기야는 쌀 한 톨에 도전하기로 했다. 어떤 중국 사람은 머리카락에 글씨를 새겼다지만 쌀에 새겼다는 기록은 없었다. 무른 탓이다. 다들 미쳤다고 혀를 내둘렀지만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쌀 한 톨에 새긴 '반야심경'
쌀에 글씨를 새기는 일은 성공률이 1%도 안 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구나 '반야심경' 전문 278자를 새겨 넣겠다니. 그것은 1mm 두께의 폭에 6줄의 글자를 새겨 넣는 세각의 극치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끝없는 훈련과 인내 앞에 당해낼 장사가 없다는 게 나의 철통같은 신념이었다.
45배까지 확대되는 공업용 현미경을 구했다. 처음엔 0.8mm의 텅스텐핀을 갈아 끝이 휘게 만든 철필로 새기다가 나중엔 0.2mm 텅스텐핀으로 교체했다. 쌀은 날이삭을 주워다 껍질을 벗겨서 우둘투둘한 표면을 곱게 연마한 뒤 사용했다. 다른 세각처럼 본을 뜬 뒤 글자를 파는 게 아니라 직접 새겨야 하는 탓에 반야심경 전문을 달달 외운 채 몸의 감각만으로 써나가야 하는 작업이었다. 오른손으로 텅스텐 칼을 잡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쳤다. 양손에 몸의 기가 모이는 순간이다. 손의 감각이 아닌 어깨의 떨리는 감각으로 글씨를 새겨나갔다. 겉에서 보면 손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각가의 머리는 항상 큰 글씨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야 획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극과 극의 상반되는 감각으로 써나가는 미각(微刻)은 마치 자연의 기를 다루는 듯 신비하고 오묘했다.
실패를 거듭했다. 바늘보다 가늘고 첨예한 세각도에 찔리고 베어 손가락은 성할 날이 없었고 그 안에서 수천수만 개의 쌀알이 깨지고 갈라졌다. 잠시 한눈만 팔았다 하면 깨지기 십상.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도 부서지고, 쌀알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백열등 열기에 녹아 갈라졌다. 글씨가 새겨지고 있다는 사실도 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지할 뿐. 한 줄을 판 뒤 줄이 겹치지 않도록 촛불의 그슬음으로 글자에 색을 입히면서 돌려 파나갔다.
불가능은 없었다. 5년 만에 나는 쌀 한 톨에 반야심경 전문을 새겨 넣는 일에 성공했다. 기록 연도와 내 이름까지 합해 모두 283자. 그로부터 5년 뒤인 90년 내 이름은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 89년 11월에는 신라호텔에서 '반야심경'이란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간의 내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 쌀에 새긴 반야심경 외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상아에 새긴 금강경 5,222자, 손톱만한 거북이 등껍데기에 판 반야심경 등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자리에 사람들은 기인 김대환과 쌀 한 톨에 새겨진 먼지 같은 글씨를 보겠다고 문전성시를 이뤘다.
요즘도 나는 새벽에 일어나 세각에 몰두한다. 그것은 북을 두드리는 일과 함께 나의 몸과 정신을 맑게 단련시켜주는 일이다. 전혀 상관없는 분야인 듯 보이지만 소리찾기와 세각은 내게 있어 하나다. 둘다 두드려서 생명을 깨운다는 점이 같다. 자연의 소리를 일깨우고 죽은 나무토막에 아름다움을 불어넣는다. 요령이나 지름길이 있을 수 없다는 점도 닮았다. 모든 예술은 기의 표현이다. 여기엔 반드시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란 몸의 단련이다. 단련하고 단련해 저절로 몸에 배이면 거기서 비로소 기가 발산하고 '몸의 공부'인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신중현과 헤어져 블루스를 하겠다고 나선 70년대 중반은 재즈가 유행하던 때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재즈 음반 하나 들고 다니는 게 자랑이었고, 재즈가 흘러나오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흐느적거리는 리듬에 몸을 흔들었다. 음악판에서도 재즈를 연주한다 하면 우쭐거렸고 유명한 재즈맨들의 이름과 라이프 스토리, 계보를 줄줄 외는 사람이 최고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머리가 나빠 시시콜콜한 사연들을 외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는 연주자도 없었다. 재즈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음악보다 마스터하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싸구려 드럼으로 흉내만 내다 본격적으로 재즈에 입문한 것은 강태환 때문이었다. 스탠더드를 시작으로 재즈의 세계에 한없이 빠져들고 있던 태환이는 '프리재즈(Free Jazz)'라는 낯선 장르를 저 혼자 힘으로 개척하고 있었다.
밤무대를 떠나 일정한 소속 없이 어정쩡한 생활을 하고 있던 내게 태환이는 재즈밴드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강트리오. 알토색소폰 강태환, 트렘펫 최선배, 그리고 퍼커션을 내가 맡았다. 이때부터 나는 드럼과 결별했다. 소리가 바깥으로 현란하게 휘어나가는 드럼에 싫증이 났다. 대신 소리가 안으로 굽어 웅장하면서도 은은한 울림을 내는 북과 대고, 로토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당시 유일한 콘서트장이나 다름없던 이곳에서 상설 재즈무대를 마련하겠다고 나서자 뮤지션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우리 말고도 이봉조, 길옥윤 등 당대의 연주자들이 솔로나 듀오로 무대에 섰는데 시간이 흐르자 하나 둘씩 떨어져나갔다. 기대했던 것보다 청중이 적었고 그만큼 돈이 안됐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셋만 남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관객이 둘이든 셋이든 멈추지 않고 공연했다.
그러기를 10년. 나는 프리재즈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것은 기존 음악에 대한 반란이자, 자유 그 자체였다. 정해진 악보가 없었다. 음정이나 박자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화음을 맞추기 위해 연주자끼리 따로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프리재즈의 인간적인 면모도 가슴에 와닿았다. 혼자, 많으면 셋이서 연주하는 프리재즈는 '양보의 음악'이었다. 서로의 눈빛, 서로의 소리를 보고 들으며 순간순간 대화를 나눠가는 형식. 그것의 생명은 서로의 소리를 '들어주고' 상대의 소리가 빛을 발할 수 있게 '받쳐주는' 데 있었다.
테크닉의 차이가 큰 사람들끼리도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이 프리재즈였다. 클래식의 경우 한치라도 연주 수준이 뒤떨어지면 앙상블이 불가능하지만 프리재즈는 잘하는 이가 못하는 이를 이끌고 받쳐주면서 더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다. 그 자유롭고도 비합리적인 음악이 나는 좋았다. 듣는 이의 귀를 괴롭히는 불협화음의 묘미를 사랑했고, 연주자들의 호흡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솟구치는 쾌감은 마약과도 같았다.
- 일체의 소리는 '한번 때림'
소극장 '공간사랑'에서의 10년은 강트리오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한국의 재즈 역사가 그곳에서 시작됐고, 우리의 프리재즈는 국내외에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던지며 골수팬들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점에서 나는 재즈와 결별했다. 그 역시 울타리라고 느껴졌다. 더 자유로운 무엇이 없을까. 그것은 음악이 아닌 소리였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었다.
소리를 찾는 기나긴 여행에 나섰다. 우선 움직임의 예술 속에서 소리를 구현해보기로 했다. 무용 연극 마임을 닥치는 대로 감상하고 비디오로 찍어 공연에 쓰인 음악을 낱낱이 분석했다.
나는 타악기의 소리만으로 무용 음악을 만들었다. 음정 없는 조음악기. 피아노나 마림바처럼 음정이 있는 타악기의 경우 인간의 귀로 음정을 식별할 수 없는 가장 낮은 음과 가장 높은 음만 썼다. 낯설고 괴기스럽기조차 했으나 강렬하고 신선해서 내게 무용 음악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김기인, 남정호, 강송원, 김삼진, 김마래, 홍신자, 안은미... 그들이 일궈내는 수만 가지 몸짓에 내가 만든 소리들이 어떻게 녹아들고 튀어나오는가를 실험했다.
전통음악도 파고들었다. '공간사랑'에 느지막이 합류한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는 우리 소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시냇물처럼 잔잔히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천지가 떠나가라 두드리고 부서지는 리듬. 그 중에서도 한 소절에 32박을 때리는 칠채장단에 매료된 나는 우리 소리를 공부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우연한 술자리에 나와 앉은 늙은 작부. 눈길을 끌만한 미모도 아니어서 시큰둥한데 곁에 있던 친구가 "이 사람 젓가락 장단 한번 들어보슈. 기똥차."라고 한다. 자존심이 상했다. 내 아무리 무명 연주자이지만 어떻게 내 두드림을 작부의 젓가락 장단에 비교한단 말인가. 그 순간 '따악!' 하고 첫박이 터져나왔다. 그때 받은 충격이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한 박 한 박에 진하게 묻어나던 그녀의 한과 설움, 사랑과 눈물. 술 취한 행인의 어그러진 노래에도 흐느적거리며 맞아 들어가는 그 애절한 두드림은 섬뜩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렇다. 모든 박자는 일박에 통섭된다. 한번의 때림! 그것으로 소리는 완성된다. 모든 박자, 모든 음의 장난은 한번의 때림일 뿐이며, 한번 때림의 연속일 뿐이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느낌을 그대로 받아 토해내는 소리. 뇌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감성의 소리. 박자도 음정도 없는 자연의 소리. 나는 재즈도 블루스도 국악도 모두 버렸다. 드럼도 팀파니도 로토톰도 버렸다. 북 하나로 세상에 숨겨진 모든 소리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신 6개의 서로 다른 스틱을 사용했다. 오른손 검지와 장지 사이엔 묵직한 방망이를, 장지와 약지 사이엔 북채를,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엔 장구채를 끼었다. 왼손에는 새끼손가락으로부터 장구채, 서양드럼채, 두꺼운 북채를 끼었다. 두 손이 흔들릴 때마다 이 6개 때림의 주체들이 살아 움직이리라. 이슬방울 떨어지는 미음(微音)에서 천지의 대함성까지 일궈내리라. 나는 음악의 모든 정형을 거부하기로 했다.
고행이 시작됐다. 세상의 숨겨진, 사라진 소리를 되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연습실에 처박혀 북을 두드리는 일은 외롭고 고달팠다. 하루 8시간 북채를 놓지 않고 맹연습을 했다. 손목에 납덩이를 달아 힘을 길렀다. 6개의 스틱은 손마디가 찢겨져 흘러나온 피로 검붉게 물들었다. 이런 나를 심우성이 독려했다. "장인은 북에서 징소리를 찾고 징에서 북소리를 찾는다." 마음의 소리를 일구라는 뜻일 터.
미각(微刻)은 보다 섬세한 소리를 찾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목판을 파고드는 칼끝의 사각사각하는 소리는 내 귀의 미세한 감각을 살려냈고 소리의 세계를 더 깊고 풍요롭게 했다. 뇌성벽력에서 이슬방울 굴러가는 미음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소리, 무질서한 감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것을 북소리로 구현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내 소리를 알아본 곳은 일본이었다. 85년 세계적인 음악 평론가 소에지마와 재일교포 강정자의 주선으로 강태환과 함께 참가한 '도쿄미팅'을 시작으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공연은 성황을 이뤘다. 일본 재즈학회가 외국인 최다 공연자로 꼽을 만큼 무대는 날이 갈수록 왕성해졌다. 타악으로만 구성된 첫음반 <흑우(黑雨)>(91년)가 일본에서 나왔고, 유명한 예술잡지 <무진조>는 97년 5월호에 '김대환 특집'을 내보냈다.
세계 곳곳에서 전위음악을 하는 연주자들이 몰려드는 도쿄. 그곳에서 아프로-아프리칸음악의 선구자격인 미국의 세계적 트럼펫주자 레오 스미스를 만났고, 일본의 정상급 프리재즈 피아니스트 야마시타 요스케와 호흡을 맞췄다.
도쿄를 발판으로 내 이름은 미국과 유럽 각지로 소문이 났다. 동양의 북소리를 들으려는 요청이 쇄도했고 급기야 나는 할레이 데이비드슨을 타고 세계 연주 여행에 나섰다.
88년 여름의 인디언페스티벌 연주회는 잊을 수 없다. LA에서 산타페까지 1,800km를 달려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로 했다. 3일 동안 산타페까지 가야 하는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료탱크의 열쇠가 없어졌다. LA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하루를 공치게 되자 주최측은 비행기로 갈 것을 제의했다. 고개를 저었다. 페스티벌쪽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올 나를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다. 이틀이 남았으니 하루에 900km(서울-부산 왕복거리)를 달려야 했다. 사막의 폭염을 뚫고 밤낮으로 달렸다. 끝도 없이 이어진 '죽음의 도로'. 황혼녘 오토바이 위에서 넋을 잃었던 그랜드캐니언의 장관. 거대한 자연을 뚫고 지나는 길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행복했다. 예정대로 8월16일에 도착했다. 녹초가 된 나를 환호와 열광의 몸짓으로 맞아주던 파란눈의 관객들. 그때 나이 56세였으니 감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베이징에서 하얼빈까지의 장정도 기억이 새롭다. 장마 기간이라 고생을 무지하게 했다. 곳곳에 다리가 끊어져 오토바이로 달릴 수가 없었다. 자동차와 배에 번갈아 실어가며 겨우겨우 도착한 하얼빈. 안중근 의사의 혼이 살아숨쉬는 하얼빈역 광장에 서서 '쿵!' 대고를 두드리던 순간 어찌나 감개무량한지 북채를 잡은 손끝과 가슴 한복판이 뜨거운 열기로 차올랐다.
매일 아침 나는 늙은 아내와 실랑이를 벌인다. 시계 탓이다. 거실 창가에 놓인 그 시계는 4명의 '일꾼'이 쉬지 않고 노를 저어야 초침이 움직이는데 아내는 밤마다 그걸 꺼놓는 것이다. 끄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밤새워 일하면 쟤들이 얼마나 힘들겠느냐"며 굳이 끄고 만다. '일을 해야만 시간이 간다'는 내 병적인 인생관도 통하지 않는다. 그만큼 아내는 착하고 여린 사람이다.
권명희(58). 꽃처럼 고왔던 그녀는 28살에 시집을 왔다. 내 나이 36살이었으니 다들 도둑놈이라고 했다. 여고까지 마친 재원이 가진 거라곤 고집 하나뿐인 '딴따라'의 어디가 좋았는지. 믿기 어렵겠지만 아내는 이날까지 불평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숙맥 같은 여자다.
아내가 지어주던 새벽밥은 따뜻했다. 미8군 무대에서 밤새 뛰고 새벽 3시쯤 집에 들어오면 꼭 새 밥을 지어 이불 속에 파묻어 놓고 나를 기다렸다. 지금도 새벽 4시만 되면 잠에서 깨는 나를 위해 아내는 정성껏 '새벽상'을 마련한다. 물 한잔, 소주 한잔에 약간의 안주. 퍽 귀찮은 일인데도 30년 간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아내는 큰 시련을 겪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신혼초. 딸아이는 부산 할머니댁에 맡기고 둘이서 셋방살이를 했다. 조선호텔 나이트에서 연주하고 새벽에 들어왔는데 방안이 잠잠했다. 섬뜩한 기분에 문을 열어제치니 아내가 쓰러져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다행히 생명은 구했지만 후유증이 깊었다. 셈하는 법, 구구단 외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고, 어눌한 말씨에 행동도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있을 때 집에 있는 녹음기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뚜껑이 열린 채로 가져왔다. 닫으면 혼날까봐 그랬다고 했다. 때 낀 가스레인지를 닦은 뒤 조립하는 방법을 잊어 아내는 끙끙댔다. 외국 공연으로 집을 비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밥을 못 해먹고 있던 것이다. 내가 돌아와서도 혼날까봐 말을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이것 좀 다시 가르쳐줄래요" 하고 내미는데 울지는 못하고 가슴이 미어졌다.
그런 아내에 대한 사랑을 나는 가슴 깊이 묻고 산다. 사랑을 표현할 줄은 모르지만 집사람이 허락하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술을 무척 좋아하지만 반드시 집에 와서 마신다. 이 세상에서 아내가 따라주는 술만큼 맛있는 술은 없다. 바깥에서 마셨어도 안마신 체하고 들어와 아내에게 또 한잔 얻어 마신다.
어쩌면 북을 두드리는 것도, 글씨에 몰두했던 것도 아내를 위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김대환의 아내' 하면 어딜 가나 대접받게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가난과 굶주림, 내 못된 괴벽까지 묵묵히 참아내고 뒷바라지한 아내. 일로 바쁜 남편, 독립해 분가한 딸로 아내는 혼자 얘기하고 혼자 대답하며 산다. 아침에 내가 싫은 소리를 지껄여도 꼭 따라나와 머리를 빗어 묶어주고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베란다 바깥으로 나와 손을 흔든다.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한 여자. 저승문전까지도 같이 가고 싶은 나의 아내. 그녀와 함께 비행기를 탈 때 나는 행복하다. 같이 죽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무지무감 속에서 '김대환'이란 작품을 만들어낸 그녀에게 내 모든 영광을 바친다.
사람은 인생의 벗을 잘 만나야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아내와 함께 내 인생에 큰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이 있다. 유재만. 그는 세상 사람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을 때 나를 지켜보고 후원한 은인이며,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세상물정 모르는 내 뒷바라지를 성심으로 해주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30년 전. 대가가 되겠노라고 산에서 글씨를 공부하고 내려온 나는 명필 서경보 스님의 후광을 업고 그와 함께 서예와 미각 전시회를 열고 다녔다. 그때 우리들 전시를 따라다니며 스님의 일을 봐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그 청년이 유재만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몸매에 총명한 눈빛을 지닌 그는 불교신도회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어찌나 일을 야무지고 매섭게 잘하는지 나보다 10살이나 어렸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인사동을 지나는데 누가 "형님!" 하고 불러세웠다. 돌아보니 유재만이 거기 서 있었다. 인사동에 '인사마트'라는 이름의 슈퍼마켓을 차린 그는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살아가던 나를 딱하게 여겼다. 아직도 세서미각을 하느냐고 묻고는 "어려운 일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하는 것이다.
그냥 빈말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왕래하며 내 곤궁한 삶을 목격한 그는 밥도 굶은 채 미련하게 써내려간 세서미각 작품을 나 대신 팔아주겠다고 나섰다. 언변도 좋고 장사 수완도 있어서 내가 생계를 잇고 연주활동을 다시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 내 작품을 사준 몇몇 사람들을 모아 '김대환후원회'란 걸 만들었다. "저 사람이 나중에 크게 될 음악가다. 우리가 밀어줘야 한다"고 '사기'를 쳐가며 공연비를 마련해주고 악기를 사주었다.
89년에는 내게 크나큰 선물을 주었다. '김대환박물관'. 자신의 슈퍼마켓 2층을 내 연습실 겸 작품 전시실로 무상 제공한 것이다. 아무리 우정이 깊다지만 금싸라기땅에 세를 내줘도 큰돈을 벌 텐데 그 알짜배기 공간을 소득도 없는 내 연습실로 내준 것이다. 나는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사동에서 지내며 북을 울리고 미각을 했다. 지금도 이 연습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 꼭두새벽이라도 달려오는 것이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유재만은 의리와 집념의 사나이다. 3∼4년 전 절친한 친구의 부탁으로 옥외 광고업체를 경영하게 되었는데 IMF로 고비가 닥치자 친구가 저 혼자 떠나버렸다. 회사가 다 망하게 생겼는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방팔방으로 손을 쓰고 새 기술을 개발한다고 몇 달을 세우더니 기어이 그 분야의 가장 큰 업체로 키워놓고 만 것이다.
그가 후원하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 결혼 후 아내를 따라 기독교로 귀의한 그는 지체부자유자들이 사는 '샘솟는 집'의 아이들을 수 년째 돌보고 있다. 30년 우정을 쌓아온 그를 위해 아무리 바빠도 1년에 한번 공연을 열어주는데, 그곳에서 보는 유사장의 모습은 또 다르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따뜻한 미소.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는 내 평생의 벗이다.
매일 새벽 찾아가는 내 인사동 연습실은 악기들로 가득차 있다. 대고와 징, 심벌즈와 북, 팀파니와 스네어. 그 옆에는 드럼세트 2대가 놓여있고 여기저기 스틱들이 널려있다. 그 중에는 50년 연주 생활을 처음부터 지켜본 해묵은 악기도 있고, 얼마 전에 구입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것도 있다. 명품으로 소문난 독일제 소노 드럼세트는 4년 전에 구입했다. 연주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젊은 시절 싸구려 드럼만 갖고 연주하면서 평생의 소원으로 꼽았던 일이었다. 그 꿈을 62살에 이루었다.
세상의 숨겨진 소리를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 그 세월을 나와 함께 살아온 북은 나의 분신이며 연인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에 드럼을 버리고 북을 찾아간 나는 그 가죽 하나에서 수많은 소리를 찾아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북은 '때리는' 게 아니라 '울리는' 것이다. 북을 때리면 가죽이 채를 밀어내고, 북을 울리면 가죽이 방망이를 껴안는다. 가죽을 잘못 다루는 사람이 북을 치면 제아무리 굵은 채라도 부러지고 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북을 울리려면 타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손이 아닌 어깨로 쳐야 북은 운다. 손이 가기 전에 가슴이 먼저 나가야 한다. 여인을 포옹할 때 가슴이 먼저 나가 손으로 껴안듯이. 손끝이 아니라 가슴으로, 어깨의 힘으로 쳐야 깊이 울리는 것이다. 그 울림은 때려서 나오는 소리보다는 거세지 않지만 부드럽고 인간적이며 감동을 준다.
또 훌륭한 연주자는 좋은 북, 나쁜 북을 가리지 않는다. 북은 생김새대로 다뤄야 한다. 북의 소재인 가죽은 날씨에 따라 소리를 달리 낸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리면 가죽이 눅눅해져 소리가 풀풀거린다. 사람들은 그 풀죽은 소리를 살려보려고 불에 말리고 별짓을 다한다.
웃기는 짓이다. 날이 흐려 눅눅하면 눅눅한 대로 북은 그에 걸맞는 제소리를 낸다. 사람도 비가 오고 날이 우중충하면 기분이 가라앉듯이 이런 날엔 풀풀거리는 가죽의 울림이 더 정겹게 들리는 것이다. 비 오는 날 북만 뺑뺑하게 치면 초상집에 가서 웃는 거나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세상에 악기 탓하는 사람이 제일 바보라고 충고한다.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연습실 한 구석에 조립식 드럼세트가 놓여있는데 이 악기의 소리가 매우 안 좋다. 가죽이 통이 아니라 낱장으로 돼있는 탓이다. 그러나 이것을 잘 치는 사람이 진짜 연주자다. 나쁜 소리도 갈고 닦으면 정든 소리가 된다. 힘을 부리지 않고 살살 달래가면서 소리를 내면 그 악기만의 독특한 음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천성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나아가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나무라기보다는 칭찬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악기가 저마다 고유한 소리를 갖고 있듯이 사람도 저마다 지닌 성품과 재능이 다른 것이다.
이 악기들과 더불어 나는 온종일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땐 멀리 여행을 떠난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동서양의 구분이 없는 태초의 소리를 들려주려 하는 것이다.
- '딴따라' 문화 정책의 현실
쓴소리 좀 해야겠다. 나는 우리 문화당국에 불만이 많다. '우는 애기 젖 준다'지만 당국은 우는 예술인들 입에 사탕 몇 개 물려주면 그걸로 끝이다. 밑바닥에서 목구멍에 근근이 풀칠해가며 연명하는 무명 예술인들에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무슨 법은 그리 많아 그저 '못하게만' 한다. 잘 나가는 인기 연예인, 세계적인 예술가들만 대접해주지 무명인들이야 굶어죽든 말든 상관치 않는다. 정책이란 것도 장관 바뀔 때마다 돌변한다. '미래'라고는 없다. 그러다보니 당국에 로비 잘하는 약삭빠른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스타 된 사람 중에 온전히 예술성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더 울화가 끓는 것은 예술인에 대한 정부의 태도다. 예술가로 존경합네, 말만 앞서지 실제로는 '딴따라'로 깔보는 일이 태반이다. 내 경우 한국보다 외국 공연이 많다. 내가 외국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외국 사람들은 1년 전부터 스케줄을 신청한다. 한국인들은 멀면 2달이다. 대개 1-2주 전에 섭외를 해서 다짜고짜 시간을 내란다. 시간이 없다고 하면 이렇게 으름짱을 놓는다. "정부가 하는 일이다. 나오는 것만 해도 영광으로 생각하라."
개런티에 대한 억지는 더욱 황당하다. "정부가 돈이 어디 있느냐"며 막무가내다. 대신 TV에 나온다, 신문에 소개된다 하고 허풍을 떠는 것이다. 국민이 가난과 굶주림을 무릅쓰고 평생을 쌓아올린 재산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거저 가져가려고 하는 심보가 괘씸하다. 돈이 아쉬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장애인들이 내 북소리를 듣자 하면 맨발로라도 달려간다. 그러나 국가가 주관하는 무슨 공연이다 하면 나는 최고의 개런티를 고집하는 것이다.
나라의 문화 정책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무대 예술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본은 알고 있어야 뜻을 모으고 항변할 수 있다. 또 나라에서, 국민에게서 '딴따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치열한 프로 근성을 지녀야 한다. 무대 예술인은 하루의 무대를 위해 10년을 극복해야 한다. 대통령 앞에서도 꽁지머리에 운동모자 쓰고 침 뱉어가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무대 예술인밖에 없다.
그런 자부심을 갖고 '나만의 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자기 팬이 없는 것은 자기 음악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기웃대지 말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한 분야를 파고들어야 한다. '뭐든지 다 한다'는 것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관객이 '저쯤이면 나도 흉내내겠다'라고 여기면 감동이 발생할 수 없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요술을 부려서도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비로소 감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배짱도 있어야 한다. 무대인에 대한 탄압을 밥먹듯 했던 유신시대. 비위생적이고 풍기 문란하다고 내 긴 머리에 가위를 들고 달려드는 경찰을 향해 나는 두눈 부릅뜨고 소리쳤다. "나는 무대인이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러오는 관객들을 위해서 자를 수 없다."고. 이젠 숱도 없고 허옇게 삭아 볼썽사납지만 나는 지금도 이 꽁지머리를 자존심으로 여기며 산다.
나는 유난히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가 오면 집사람이 헬멧을 꺼내준다. 헬멧을 쓴 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의 쾌감. 비내리는 풍경 때문이 아니다. 빗방울이 헬멧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좋다. '타다...타다닥...투두두둑...'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도에 따라 거세졌다가 다시 은은해지는 그 불규칙한 리듬의 묘미.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예외가 아니다. 아내와 둘이 우산을 받고 거리로 나서면 우산을 향해 떨어지는 빗방울의 탄력적인 비트에 전율한다. 빗소리. 자연의 소리. 내가 찾아 떠도는 태초의 소리이다.
비를 이루고 있는 '물'은 내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생명이 있으면서 일정한 형태가 없는 것. 그릇, 즉 남의 형태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물의 희생 정신을 사랑한다. 또 제 양에 차면 기꺼이 흘려버리는 절제의 속성을 숭배한다. 이슬에서 소나기까지. 한줌 햇빛에 증발되는 작은 것이면서 때로 산을 허물고 바위를 구르게 하는 위대한 힘. 내가 걸어온 삶, 내가 찾아온 소리는 이 극과 극의 속성을 지닌 물을 닮고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첫음반의 제목이자 나의 호인 <흑우(黑雨)>는 물처럼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보이지 않는 소리'를 찾고 싶은 뜻에서 지어졌다. 검은 비. 세상에 감추어진 소리. 그것을 찾고 구현하기 위해 살아온 50년 세월은 '연습의 인생'이었다.
나는 연습을 연습한다. 연습은 일종의 구도다. 공연을 앞두고 반짝하는 소나기연습은 소용없다. 연습은 일상 생활과 같아야 한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고 마음이 불안해져야 진짜 연습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콘서트를 하고 나면 진이 빠져 쓰러지지만 나는 콘서트를 휴식처럼 생각한다. 콘서트가 끝나면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난 듯 마음이 가뿐해져 다음 날 더 일찍 나와 연습을 하는 것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검은 재킷, 검은 부츠, 검은 안경을 쓴 채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생에 청춘이란 어느 특정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다. 나이 70을 먹든 80을 먹든 마음의 상태가 청춘이면 청춘이다. 내가 연습하고 있는 한 나는 청춘이라고 느낀다.
20세기를 산 모든 예인들의 삶이 그러하듯 나 또한 비천과 허영이 엇갈린 역사의 뒤안길에서 영욕을 한몸에 맛본 인생길을 걸었다. 때론 죄도 지었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좌절한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내가 해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었다. 타고난 재주는 눈꼽만치도 없었으나 인내력 하나로 버텼으며, 미각이든 북소리든 한 고비씩 극복할 때마다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벅찬 기쁨을 누렸다.
내가 일생을 바쳐 사랑했던 음악. 사지가 움직일 때까지 연습하고 연습해서, 죽어 없어져도 '김대환의 소리'는 영원히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물결치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