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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세계에서는
1636년: 아메리카, 하버드 대학 창립
1651년: 영국 홉스, "리바이어던"
지금도 이준 열사의 무덤이 있는 화란의 헤이그 시에 가면 스피노자 거리가 있고 스피노자 하우스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그 집 아래층은 어떤 변호사의 집부실로 되어 있었고, 스피노자가 빌어 살던 2층과 3층은 젊은 화가 부부가 세들어 있었다. 집무실 서가에는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스피노자의 저서들 이 꽂혀 있었다. 2,3층에는 스피노다와 인연이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피노자 당시에는 한 노파가 집의 소유자였고, 스피노자는 혼자 세들어 살았던 비교적 크고 좋은 집이다. 집 앞 스피노자 거리에는 스피노자의 좌상 동상이 있었으나 주변에는 병조각 등 물건들이 어지러이 버려져 있었다. 청소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스피노자가 유대인이 아니고 화란인이었다면, 그 집은 기념관으로 길이 남겨지고 이름있는 유적지로 가꾸어졌을 것이다. 세계 어디에 가든지 유대인들은 그 나라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도 있다. 스피노자도 본래 화란에 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남부 유럽에 살던 상인이었으나 종교적 자유를 얻지 위해 화란으로 이주해왔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종교적 신앙 때문에 유대교에서 파문을 당했다. 자유로운 기독교 신앙을 택해던 까닭이다. 일찍부터 학문을 사랑한 그는 중세철학, 유대철학, 아리비아철학을 거쳐 데카르트를 연구한 뒤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계속 수학, 자연과학, 스토아 철학에도 깊은 연구를 기울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철학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B, 러셀도 스피노자의 초상화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자다운 삶이 좋아서라고 하면서... 그는 일체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고 명예나 지위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 렌즈를 갈아 그 수입으로 청빈한 생계를 영위했으면 소유를 초월한 삶을 즐겼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학문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학문에 지장이 되는 가정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피노자의 라틴어 선생인 엠덴이 몸이 불편한 때는 그의 딸이 대신 강의를 했는데, 그 딸과의 사이에 서로 따뜻한 감정을 느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랑에서 결혼에로의 길은 불가능한 여로였다. 말년기에는 스웨덴 왕실에서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조용히 학문의 길을 택했다. 프랑스의 볼테르 같은 이는 투기까지 한 일이 있었음에 비하면 스피노자는 가난한 선비의 모범이라 하겠다. 어린애같이 순박하고 만사에 감사하면서 사는 어린 도사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집주인 노파가 전하고 있다. 렌즈 가는 일이 심한 노동이었는지 모른다. 1677년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데카르트를 연구한 스피노자는 철학적 방법의 근거를 수학과 기하학에 두었다. 역시 대륙철학의 줄기를 계승한 셈이다. 그의 고전적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인 저서는 "에티가(윤리학)"다. 그 책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한 5가지 문제'라는 내용이다. 이 책의 제목은 윤리학이지만, 그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전체적인 체계를 만들고 있다. 모든 철학적 과제가 논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방법이 기하학의 증명방법과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를 명제로 제시해놓고는, 정리1에 의하여 무엇이 증명되고 계측 3에 의하여 무엇이 증명되기 때문에 그 명제는 진리일 수 있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식으로 논증하고 있다. 그만큼 그 당시의 학문들이 합리적인 연역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좋은 본보기의 하나인 셈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존재는 하나이면서 전체로 나타나야 한다. 수적으로 보면 하나일 수밖에 없고 양적으로는 전체인 것이다. 그 존재는 자연계이다. 자연존재를 떠나서는 있을 것이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전체존재와 더불어 있어야 한다. 자연은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나, 그것은 하나의 존재의 다양한 모습인 것이다. 신은 그 전체와 더불어 있으면서도 일자인 것이다. 신은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 현상적인 것이 되나, 일자로서의 실체성을 갖기도 한다. 즉, 신은 존재의 실체이면서 자인존재다. 모든 지적 내용은 신의 속성은 만상의 내용이 되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사유와 연장이 공존되어 있다. 이런 철학적 견해는 자연히 범신론의 성격을 띠게 된다. 판테이즘(Pantheism)의 결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지적 활동이나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을 영원한 형상밑에서 바라보며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 최고의 인식과 통하게 된다. 따라서 그의 범신론은 자연히 신비주의 사상과도 일맥 통하게 된다.
범신론과 이신론:스피노자의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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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세계에서는
1653년: 인도, 타지마할 묘 완성
1679년: 영국 버넷, "영국 종교개혁사"(--1714년)
지금은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것 같은 범신론을 그대로 믿거나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그런 사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스피노자가 범신론을 내놓은 뒤 1세기가 지나 독일의 철학자 셸링이 그 사상을 물려받아 동일성의 철학을 수립한 것을 보면, 범신론적 사고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성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파리에 가면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판테온이 있다. 혁명적 기여를 한 위대한 프랑스 지도자들의 묘소인 것이다. 데카르트도그 지하실에 안장되어 있고 J.J. 루소도 잠들어 있다. 나폴레옹도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판테온에 잠드는 일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다. 물론 나폴레옹은 더 큰 무덤에 잠들어 있기는 하지만... 로마에 가도 판테온이 있다. 더 오래 된 묘소건물이다. 이 판테온(Pantheon)이라는 말은 여기 잠들어 있는 모든 사람은 신이라는 뜻과 통한다. 'Pan'은 모두를 뜻하기 때문이다. 판테이즘(Pantheism)과 통하는 전통의 내용이다. 일본인들은 신사를 짓기 좋아한다. 그 신사에는 여러 죽은 지도자들의 영을 모신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을 위해 죽은 모든 사람의 영을 모시는 곳이다. 역시 범신론적인 생각과 통하는 바가 있다. 영적인 존재는 신적인 존재와 통한다고 보는 다신론과도 맥을 같이하는 정신일 것 같다. 이에 비하면 유일신을 믿으며 그 인격적 신관을 견지하는 기독교의 신은 Theism으로 통한다. 그래서 같은 유신론이지만 The-ism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Pantheism은 미신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유신론이기 때문이다. Pantheism은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신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는 신에 취해서 신을 잃어버렸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닌 신이었기 때문이다. 범신론은 어떤 이는 만유신론이라고도 부른다. 모든 것은 신이며, 어디에나 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 하나의 신관, 유신론이 있을 수 있다. 이신론(Deism)이다. 주로 계몽주의 이후에 영국 철학자들이 택한 유신론이다. 그들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신이 자연의 법칙과 세계의 질서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인간적 삶과 세계질서는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예배를 드린다거나 기도를 하는 일 등은 의미가 없다. 그 법칙과 질서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은 인간과 어떤 인격적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세계질서가 신앙의 기틀이 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들 가운데 무신론을 택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적지 않은 철학자들이 이신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 합리적인 이성론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적지않은 이신론자들이 있다. 어쨌든 스피노자는 대표적인 범신론자가 되었고, 그의 철학은 종교 및 신학과도 깊은 관련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관심은 언제나 유럽 사회에서 큰 문제거리다 되어왔다. 인격적인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까지는 신에 관한 연구는 대개가 철학적인 것이었다. 죽 자기자신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을 신으로 본다는 철학적 신관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 철학 이전의 신화시대에는 신화의 주인공들로서의 신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사회관념으로 무리없이 전달되었다. 그리스 인들이 연출한 연극의 내용들은 대부분이 그런 신화적인 것들이었다. 인간과 신, 자연과 신, 신들을 매개로 한 인간적 삶의 내용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의 얘기를 했을 때 누구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비판하거나 분석해 본 바는 없었다.
그런 철학적인 자연신관이 지배적이었을 때 기독교가 서구의 종교로 등단하면서 이 모호였던 신관에 큰 변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신관을 갖는가에 따라 참신앙과 이단이 구별되기도 했고, 그 신관의 차이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중세기가 지속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Theism으로서의 기독교적인 신관 Pantheism으로서의 철학적 자연신관, Deism으로서의 합리적인 과학적 신관을 가려본 것이다. 그리고 이 구별은 서양철학과 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학이 고대로부터의 철학적 신관이라면, 기독교의 신학은 믿음의 학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는 구별을 내리고 있다. '신들'은 철학적이나, '신'은 신앙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니체는 '신들은 이미 죽었다'고 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