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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팅의 학위수여식 연설문, 1994년 5월 15일, 보스톤 버클리대 음악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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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가장 이른 기억은 또한 저의 가장 이른 음악적 기억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칠때 제가 어머니 발밑에 앉아있던 일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이러저러한 이유로 탱고를 연주하셨습니다 - 어쩌면 그게 그 당시의 유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피아노는 닳아버린 구리색 페달이 달린 수직피아노였는데, 피아노를 치실때면 다른 세상에 가있는것처럼 어머니는 다리를 두 페달사이에서 리듬을 타며 흔드시고, 팔을 탱고의 희한한 가락에 맞추어 들썩거리셨고, 그와 함께 눈으로는 앞에 놓인 악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계셨죠. 어머니의 피아노 치는 시간 만큼은 제가 어머니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에만 어머니는 저를 무시하셨고, 그래서 저는 뭔가 의미심장하고 심각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알게됐습니다. 아마도 그 때 저는 어디론가 끌려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던것 같습니다. 어떤 신비, 바로 음악이라는 신비, 속으로요.
그러다가 저는 피아노에 들러붙어 앉아서, 오래만 매달리면 제 소음이 음악이되리라 착각하고 수시간을 뚱땅거렸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런 착각아래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수리공같은 억센 손을 가지고 계셨지만, 세련된 음악감각을 가지고 계셨기에 이런 저를 흉보곤 하셨죠.
하여튼, 우리는 피아노를 가난 때문에 팔아야만 했고, 잡음만 만들어내는 저의 엉터리 음악가 노릇은 다행히도 끝을 맺게됐죠. 그러다 캐나다로 이민가는 삼촌이 녹슨 5줄을 가진 스페니쉬 기타를 두고 갔습니다. 그 기타가 제 크고 촌스런 손가락의 '음악적 고향'이자, 저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된겁니다. 피아노 경우하고는 다르게 기타에서는 거의 직감적으로 음악을 만들수가 있었죠 - 멜로디, 화음, 노래구조가 제 손끝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라디오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그리고는 아무렇게나라도 그 노래를 따라 연주하는 시도를 할 수 있었죠.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매시간, 매일, 몇달이고 그냥 연주를 하고, 그 기적을 맘껏 즐겼습니다. 아마도 그게 제 부모님들을 거의 미치게 했었나봅니다. 그러나 그건 우선적으로 부모님들의 실수였던 겁니다.
음악은 중독성입니다. 음악은 종교이고, 질병입니다. 치료약이 없습니다. 해독제도 없습니다. 저는 걸려들었던 겁니다. 그 때 영국에는 라디오 방송국이 BBC 하나밖에 없었죠. 그 방송에선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를 모짜르트나 베토벤, 글렌 밀러를 약간씩 곁들여 틀어줬습니다. 블루스도 방송했죠. 이것이 저의 음악 교육이었고, 부모님들의 로저스와 햄머스타인, 러너와 로우,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차드, 제리 리 루이스 레코드 수집물들도 영향을 미쳤죠. 절충적인 형태의 음악교육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비틀즈를 들을 때까진 제가 음악을 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비틀즈는 저하고 비슷한 노동자 계층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죠. 그들은 영국출생이었고, 리버풀은 제가 살던 동네하고 별 다를게 없는 동네였죠. 그래서 제 기타가 외로움의 동반자에서 탈출의 수단으로 변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이후의 제 삶에 대해서는 쓰여진 책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뭐가 사실이고 아닌지를 기억할 수가 없군요. 저는 정식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짐작하기론 가끔 따르는 운, 우직함, 그리고 호기심에서 비롯한 대담함이 결합되어 성공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저는 똑같은 방식으로 해나가고 있지만, 음악에대한 호기심은 결코 완전히 만족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모르는 것이 꽉찬 음악책들로 여러분의 서재를 가득 채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겁니다. 배울 것은 언제나 넘치도록 많더군요.
음악가는 사회에서 그리 좋은 역할을 하는 범례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하죠. 바람둥이, 알콜중독자, 마약중독자, 가족부양금이나 떼어먹는 놈들, 세금 포탈자... 저는 지금 록 음악인들만 말하는게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가들또한 못지않은 악명을 가지고 있죠. 재즈음악인들도요(역주: 버클리 음악대학총장은 재즈음악가임. ^^;) - 지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 하지만 음악가가 연주할때를 보면,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 세계에 몰입해서, 마치 아이가 노는 것처럼 보일때도 있죠 - 순진하고 호기심많고 경이로움에 가득찬, 신비라고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그런 모습. 성스러운 신비라고도 부를만하죠, 뭔가 심오하고, 뭔가 다른, 기쁘면서도 슬픈, 뭔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무슨 의미냐 하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하루하루, 수년을 끊임없이 눈금을 누르고 아르페지오를 연주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건, 언젠가는 영광이나 돈, 명성을 얻게해주는 그 무엇일까요? 아니면 다른 더욱 심오한 뜻을 지니는 것일까요? 우리의 악기는 우리를 바로 이 신비와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음악인들은 그(혹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런 신비에대한 놀라움을 유지합니다.
저는 위대한 재즈 편곡자인 길 에반스(역주: 마일즈 데이비스와의 협연으로 특히 유명함)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그때까지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직도 새로운 생각에 열려있었고, 아직도 음악의 경이로움에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고, 아직도 호기심많은 아이였습니다.
우리는 여기 이자리에 우리의 망토를 걸치고 서있습니다. 우리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학위를 들고서. 누구에겐 단순한 명예일 뿐이기도 하고, 누구는 정말 성실히 공부해서 얻은 것이겠죠. 우리는 화음의 법칙을 익혔고, 대위법을 익혔고, 편곡과 교향악편성의 기술을, 주제와 리듬 동기를 발전시키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나 우리중 어느 누가 음악이 무엇인지 진실로 알고있습니까? 물리학일까요? 수학? 사랑타령? 장사거리? 왜 음악이 그렇게 우리에게 중요하죠? 무엇이 음악의 본질일까요? 아는 척하기도 어렵군요.
저는 수백곡의 노래를 썼습니다. 출판도 했고, 인기순위에도 올려봤죠. 그래미도 받았고, 정말로 제가 잘난척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성공적인 작곡가라는 것을 증명할 충분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누군가 어떻게 노래를 쓰냐고 묻는다면 저는 정말 모른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노래가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모릅니다. 멜로디는 항상 어느 모르는 곳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죠. 여러분들은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만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다른 때에 축복을 내려주십사 기도하는 것도 배워야만합니다. 가사도 똑같죠. 은유가 없이는 가사를 쓸 수가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시형이나 제창부, 브릿지(bridge)등을 지어낼수는 있지만, 중심 은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질문합니다, 멜로디와 은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들을 가게에서 살수만 있다면, 아마도 가게에 늘어선 줄 맨앞에 제가 있을겁니다. 예, 저는 제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신비한 조화를 찾으며, 영감을 찾으며 보냅니다.
모순되는 것같지만, 저는 음악에서 침묵의 중요성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한 절의 음악 뒤에 이어지는 침묵의 힘을. 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첫 4개 음표 다음의 극적인 침묵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의 솔로 연주에서의 여백. 음악에서의 침묵에는 뭔가 아주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연주가 끝난뒤, 피아노 페달에서 발을 떼고 정신을 집중하게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죠. 음악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침묵을 위한 '틀'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침묵 그 자체가 음악의 본질에 위치한 신비의 정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침묵이 가장 완벽한 음악일까요.
노래를 만드는 것은 제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명상방법입니다. 그리고 고요속에서만이 멜로디와 은유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진정한 고요함을 정말로 경험하기가 힘듭니다. 거의 우리자신이 그 고요함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죠. 삼분간의 고요함은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지죠. 그 고요함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마음을 집중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무섭게 느끼기도 합니다. 고요함은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고요함은 바로 우리 영혼의 파장이기 때문에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음악에 소리의 여백을 남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든 소리로부터 그 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없애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선 이 문제와 관련있는 어느 누구만큼이나 저도 죄가 많죠. 불안으로부터 태어난 음악은 종종 더 큰 불안만 만듭니다. 그리고 불안함 때문에 소리의 여백을 남기기를 꺼리는 것이겠죠. 위대한 음악은 음표 자체만큼이나 음표사이의 여백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음악입니다. 쉼표하나만큼의 쉼은 그 앞에 있는 32분 음표만큼이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 제가 종교적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늘 이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예, 저는 경건한 음악인입니다." 음악은 저를 지성을 넘어선 무엇인가와, 이 세상 것이 아닌 무엇인가와, 신성한 그 무엇인가와 접촉하게 해줍니다. 왜 어떤 음악은 우리가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까요? 왜 어떤 음악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울까요? 저는 바버의 "현악기를 위한 아다지오"나 포레의 "파반느", 오티스 레딩의 "만의 부둣가(Dock of the Bay)"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지겹지가 않습니다. 이 음악들은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인 언어로 제게 말을 건내옵니다. 그 음악들은 저를 깊은 명상의 상태로, 경탄의 상태로 이끕니다. 그 음악들은 저를 침묵하게 합니다.
말 음악을 얘기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말은 음악의 심오한 힘에 비하면 약합니다. 우리는 단어를 시의 형태로 정련해서 그 언어가 음악이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해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그 말들은 음악성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 음악은 아닙니다. 음악은 아마도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제의일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음악과 리듬을, 그들의 목적에 따라 영혼세계를 불러들이기 위해, 혹은 이 우주를 이해하기위해 이용했습니다. 아마도 최초의 사제는 음악인이었을거고, 최초의 기도는 어쩌면 노래였을 겁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말하려 하는 것은, 음악가로서 우리가 성공을 거두어 매일밤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거나, 혹은 그리 성공하지 못해서 바(bar)나 작은 클럽(club)에서 연주를 하거나, 또는 전혀 성공하지 못해서 아파트에서 홀로 고양이한테나 음악을 들려준다 해도, 우리는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우리 정신이 고장났을 때 그걸 고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수백만달러를 벌거나 혹은 단 일센트도 못벌건 간에, 음악과 고요함은 값을 따질 수 없는 선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그 선물을 지니고 다닐 수 있기를 빕니다. 그 선물이 여러분을 항상 사로잡고 있기를 바랍니다.
- 'STING'의 버클리음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연설문 -
첫댓글 이러니 잘될수 밖에!!!!
긴데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