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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이 걸어온 길
Ⅰ. 세계협동조합의 발자취
1. 협동조합운동의 토양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전통적인 농업은 개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지역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왔다. 이런 다양한 공동체들은 생산과 소비, 생활과 문화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공동체가 경제의 중심일 때에도 시장은 있었다. 쓰고 남은 물품들을 정한 날짜에 열리는 시장에 가져와 교환하는 시장은 이미 고대나 중세에도 있었다. 이 때에 시장은 경제의 보조 기능을 담당했다. 하지만 생산력이 점차 발전하고 원거리 무역이 늘어나면서 시장은 점차 확산되었다.
산업자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시장은 단순한 교환의 공간에서 벗어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제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개인은 큰 자본들이 움직이는 시장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적 약자들은 공동으로 대응하여 자신의 권익을 지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최초의 현실적인 실험은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85)에게서 나왔다. 그는 뉴하모니 공동체 운동 등 다양한 협동조합과 공동체 활동을 실험했다. 다양한 실험과 이론이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지만 현실가능한 원리를 찾지 못해 40여 년 가량 실패를 반복하게 되었다.
2. 최초의 성공적인 협동조합 :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세계 최초의 근대적인 협동조합으로 인정받는 것은 영국의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이다. 로치데일의 성공은 실사구시적 관점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로치데일 지역의 노동자들이 모여 적정가격으로 믿을 수 있는 품질의 일용 생필품을 공동으로 구매하는 낮은 단계의 활동부터 시작하여, 장기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통합하는 협동조합 사회를 만들자는 웅장한 비전을 공유하면서“로치데일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들은 기존 협동조합의 문제점을 토론을 통해 분석하면서 1)시중가격과 같이 공급하는 시가주의 원칙 2)현금거래 원칙 3)출자금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한 만큼 수익을 나눠주는 이용액 배당의 원칙을 채택했다. 이 세 가지 원칙이 로치데일을 성공시킨‘ 혁신적 상상력’이었다.
1844년 12월, 28명의 조합원이 모은 돈으로 초라한 가게를 열어 시작한 로치데일협동조합은 정확한 물량,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는 품질, 정직한 판매, 이용액 배당 등 로치데일의 주민들이 원했던 사업방식을 통해 큰 인기를 얻었고 급속히 확대되었다. 소비자협동조합의 시작이었다.
3. 유럽 전역으로 협동조합이 확산되다
영국에서 성공적인 협동조합이 만들어져 확산되는 모범사례가 있다는 소식은 유럽 전역에 전파되어 여러나라의 선구자들이 직접 견학하러 왔으며 성공의 교훈을 각자의 나라에 전파했다. 지드(Gidle)는 프랑스에, 후버(Huber)는 독일에, 마찌니(Mazzini)는 이탈리아에 협동조합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 나라들은 각각 자본주의의 성숙 정도나 사회경제적 여건이 달라 사정에 따라 적합한 방식으로 중요한 내용이 자리잡게 된다.
프랑스는 아직 해체되지 않은 소규모 생산자들 혹은 농촌지역의 농민들이 주도하는 생산협동조합이 확대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도시지역의 생산협동조합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농업협동조합은 현재에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독일은 자본주의 발전이 늦어 사회 전반적으로 자본축적이 미흡한 상황이었다. 당시 라인 강변의 소농(小農)들은 농사를 지을만한 돈을 마련하기 어려워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49년 라이파
이젠은 프람멜스펠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했다. 이 조합은 농민들이 가축을 구입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60명의 조합원이 무한연대책임으로 자본가의 돈을 빌려 가축을 사고 5년 분할 상환을 하는 새로운 방식의 협동조합을 도입하였다.
이 조치로 농민들의 생활이 눈에 띄게 나아지자 농촌을 중심으로 라이파이젠 계열 신용협동조합은 크게 확산되었다. 라이파이젠 신용협동 조합은 마을이나 교구 등 조합원이 서로 얼굴을 알 수 있는 작은 규모로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협동조합간의 여유자금이나 부족자금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연합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런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1872년 라인주에서 만들어진 75개의 신용협동조합을 회원으로 하는 연합회 성격의‘ 라인농업협동조합은행’이 설립되었다. 협동조합연합회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도 영국 등 당시의 선진국에 축산물을 공급할 수 있는 시장이 열린 점을 잘 활용하여 농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이 발전했다. 1882년 낙농협동조합과 1887년 양돈협동조합이 등장하였으며 1890년까지 목장의 1/3이 협동조합에 우유와 돼지를 출하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4. 국제협동조합연맹의 결성과 협동조합 원칙의 제정
이런 다양한 국가별 실험들은 지금은 협동조합이란 동일한 조직운영원리 하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이 19세기 후반에는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비자협동조합과 생산자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의 지도자들은 이들 협동조합이 같은 종류의 사업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컸다. 각각의 법인격도 모두 달랐다.
1884년 프랑스와 영국의 협동조합운동가들이 국제적인 협동조합 교류를 제안한 후 11년만인 1895년 런던에서 국제협동조합연맹(ICA) 1차 대회가 열렸다. 이 11년의 기간은 각 나라의 협동조합들이 유사한
원리를 가졌다고 서로 합의하는데 소요되었다. 이런 낮은 수준의 합의를 바탕으로 국제협동조합연맹은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을 포괄하여 설립하되 협동조합 원칙에 대해 지속적으로 토론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협동조합 원칙을 합의하는 데에도 이후 40여 년의 기간이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다양한 협동조합의 경험에서 나타난 의견차이를 좁혀야 했기 때문이다. 주된 논점은 이용액 배당의 의미, 정치, 종교적 중립에 대한 입장 등이었는데 많은 토론 끝에 단일한 원칙을 합의하게 된다. 설립 40년만인 1937년 프랑스 파리대회에서 7대원칙을 정했고, 이후 196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수정원칙을 제정했으며, 협동조합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1995년 100주년 행사에서 영국 맨체스터에서 현재의 원칙을 담은“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을 발표했다. 현재 국제협동조합연맹은 96개국 267개 회원 단체가 가입하고 조합원수는 10억명에 달하는 UN산하 최대 비정부 기구로서, 소비자, 농업, 주택, 신용, 노동자생산, 어업협동조합 등 모든 협동조합유형을 포괄하고 있다.
5. 새로운 협동조합들의 탄생 1 : 몬드라곤(Mondragon)
협동조합은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경제학적 설명이 있다. 또한 실제 프랑스 등에서 실험한 생산협동조합이 실패로 돌아가자 노동자들이 직접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56년 시작된 스페인의 몬드라곤에서 꽃 핀 협동조합복합체의 사례가 세계로 알려지면서 협동조합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스페인 북부에 있는 바스크지방은 우리나라의 강원도와 유사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1941년 프랑코 정권에 패배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가 몬드라곤이란 작은 마을로 부임했다. 호세 마리아 신부는 바스크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1943년 소년들에게 산업기술을 가르치는 직업기술학교를 만들었다. 20명으로 시작된 기술학교는 11명이 졸업하였으며, 이 가운데 5명을 인근 지역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들 5명이 힘을 모아 1956년‘ 울고(ULGOR)’라는 석유난로를 생산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다른 지역의 사례와 달리 몬드라곤에는 노동자협동조합을 금융과 창업컨설팅, 연구개발, 사회복지사업을 담당하는 전문협동조합과의 접착제로 활용함으로써 크게 발전해 나갔다. 현재는 120개의 협동조합과 130여 개의 자회사가 있는 스페인 고용순위 3위의 협동조합그룹이 되었다. 대표적인 공업협동조합인 파고르(PAGOR)는 유럽 전체에 걸쳐 냉장고 등 전자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기술연구소의 역량은 NASA의
우주항공사업 프로젝트를 함께 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몬드라곤은 인간과 지역이 통제할 수 있는 자본,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첨단기술이란 꿈이 말 뿐만 아니라 실제 실천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 주고 있다.
6. 새로운 협동조합들의 탄생 2 : 사회적협동조합
1974년 이탈리아 볼로냐에는 독특한 협동조합이 선을 보였다. 그 전까지 협동조합은 사회경제적 약자인 조합원들이 힘을 모아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가는 공익(共益)을 추구했지만, 새로운 협동조합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공익(公益)을 추구하려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축적된 자본이 많아지면서 사업의 경쟁은 심화되고 기대되는 이윤율은 낮아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속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자본금의 최소수준이 높아지게 되는데, 어려운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필요한 출자금을 확보하고 사업역량을 갖추는 것은 19세기 중엽보다 더 어려워졌다. 따라서 헌신적이고 역량있는 협동조합운동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복지관련 예산, 기존 협동조합들의 협력 등 다양한 자원을 연결하는 새로운 협동조합이 필요했다.
이를“ 사회적협동조합”이라 하는데‘ 카디아이’(CADIAI)는 그 최초의 사례이다. 가사노동이나 간병노동을 하던 27명의 여성들이 모여 불안정한 비정규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카디아이’ (CADIAI)는 이후 이탈리아에서“ 사회적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지고 공적기관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영역이 확장되었다. 현재 직원은 1,246명이며 노인, 장애인, 어린이 등을 포함해 한해 27,400여 명에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매출액은 400억원 정도이다. 협동조합의 원칙인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는 협동조합의 사업 자체로도 가능하다는 모델을 보여준다.
7. 새로운 협동조합들의 탄생 3 : 협동조합의 모델과 경영의 확대
1945년 이후 세계경제는 본격적으로 다국적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 협동조합들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따라서 작은 협동조합들은 합병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기도 하고 필요한 자본금을 확보하기 위해 자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농산물가공사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조합원이 물량을 내는 만큼 출자금을 매년 조절하고 조절된 출자금에 비례하여 의결권을 행사하는 협동조합과 주식회사를 반쯤 섞은 듯한 새로운 협동조합이 출현했다. 이를 신세대협동조합이라고 하는데 썬키스트(Sunkist)가 그 대표적인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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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태양(Sun)의 입맞춤(Kissed)! 썬키스트(Sunkist)”
-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감귤의 대표 브랜드
- 도매상들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감귤재배 농가들이
공동으로 판매와 유통을 직접 수행
- 현재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주의 6,000여 감귤 재배
농가를 조합원으로 하고 엄격한 품질관리로 유명
(* 자료출처 : 한국협동조합연구소 발간“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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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의 진보적인 사회와 함께 하려했던 대학생들은 1970년대 사회로 나와 대거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유럽의 소비자협동조합과 달리 일본의 생활협동조합은 좋은 생활필수품을 구매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5~10가구를 하나의 소조직인 반(班)으로 묶었다. 생협은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환경문제나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도의견을 제출하고 조합원들의 공동행동을 만들어 나갔다. 이런 일본생협의 모범사례는 이후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협동조합의 역사를 간단하게 훑어보면 성공적인 협동조합은 어떤 것이든 당시 사회가 가장 필요로 했던‘ 무엇’을 상상력을 동원해 사업형태로 구상하고 조합원의 참여를 유도하는 혁신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협동조합의 역사는 현장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의 역사이다.
Ⅱ. 한국협동조합의 발자취
1. 해방 이전의 협동조합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두레’ 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협동조직과 ‘계’와 같은 근대 협동조합과 거의 유사한 성격과 조직을 갖춘 협동 조직들이 잘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를 맞이하여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철폐하기 위해‘ 계’모임을 금지하고 1920년대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협동조합들을 탄압하고, 자산을 몰수하면서 일제시대 협동조합운동은 해방 후까지 전승되지 못했다.
2. 정부 주도의 협동조합
1961년 농협법과 수협법,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 중앙회를 먼저 만들고 단위조합을 만드는 방식으로 도입된 이런 산업육성 중심의 협동조합들은 조합원들의 아래로부터의 자조와 자립의 자율적인 조직이 아니라 준(準)국가기관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농민을 잘 살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농촌에 들어간 많은 농협운동 지도자들은 농협의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을단위의 이동조합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협동조합 정체성이 약한 속에서도 농협은 쌀수매 대행, 상호금융 취급 등 제도적 지원을 바탕으로 점차 자립적 경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가고, 도시의 자금을 모아 대부분의 농민조합원에게 영농자금을 저리로 공급하여 농민들의 고리사채 부담을 덜어주었다. 한편 농협을 더 나은 협동조합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그런 노력을 통해 1989년 농협조합장 직선제가 이뤄졌고,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가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또 이런 운동에서 성장한 지도자들이 농협의 조합장이 되면서 모범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다.
3. 신용협동조합의 성장과 위축
정부가 주도했던 생산자협동조합과 달리“ 신용협동조합”은 아래로부터 민간의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확산되어 갔다. 캐나다 신용협동조합의 모범을 보고 감동받은 부산의 메리가별 수녀와 서울의 장대익 신부가 주도한 신협운동은 1960년 각각 1개의 신협을 창립했다. 이후 신협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제도적 정비를 위해 신협법 제정 운동을 시작했다. 많은 노력 끝에 1972년 신협법이 제정되었고 1973년에는 277개 조합을 회원으로 하는 신용협동조합연합회가 공식 발족하였다. 이후 신협은 한국협동조합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협동조합 관련 서적을 출간하고 연수원을 설립하여 협동조합교육을 활발하게 추진하였으며 생활협동조합 등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의 지원기지가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경영이 안정되면서 오히려‘ 협동조합 사상의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협조합원이 확대되면서 조합원의 평균적인의식이 낮아졌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임직원도 인재난에 허덕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은행과 경쟁이 격화되면서 신협은 점차 경영주의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충분한 자율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부실이 발생 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IMF를 통해 극적으로 폭발했다. 방만한 대출로 인해 1997년말 1,666개 신협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영위기가 발생 하였으며, 그 결과 433개소가 해산 혹은 청산하게 되어 2002년 말 신협의 수는 1,233개소로 줄었다. 경영위기가 발생했지만 제대로 육성되지 못한 조합원은 일반 금융고객과 마찬가지로 신협에서 이탈했고 그 결과 조합원은 10% 감소, 조합출자금은 22% 감소해서 위기를 심화시켰다. 결국 신협은 경영안정을 위해 예금보호공사로부터 4조 8천억여 원의 공적자금을 받게 되고 금융기관의 관리감독을 받게 되면서 협동조합 운동의 불씨는 크게 줄었다. 한국 신협의 역사는 초기의 성공한 협동조합운동이 내·외부적인 문제로 인해 훼손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협동조합은 장기적으로 조합원의 수준만큼 중기적으로는 지도자의 수준만큼 발전하며 이를 위해 지속적인 지도자의 양성과 조합원의 교육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는 신협운동의 성장과 위축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한 지역의 신협은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지역운동과 연결되면서 다양한 새로운 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주민신협이 지역공동체운동이나 공동체주택운동을 위해 자산을 활용하는 것, 밝음신협이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의 든든한 맏형으로 역할하는 것 등 지역의 협동사회경제 활동이 활발한 곳에는 여지없이 건강한 신협이 있다는 점은 앞으로 신협의 새로운 발전전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4.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
현재의 생협의 첫 출발로 1985년 무점포 생협사업 방식을 도입한 안양의“ 바른생협”과 1986년 도농직거래를 위한“ 한살림농산”의 사업 시작을 들 수 있다. 이후 1999년 생협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생협법이 발효된 2000년 생협조합원은 모두 4만6천여 명 정도였는데 2010년에는 43만명으로 10배 정도 증가하였다. 전체 가구수로 따지면 약 2.5%이다. 공급액도 2000년에는 300억에서 2010년에는 5200억원으로 17배 정도 증가했다. 식품시장 규모 120조원에 비해보면 0.4% 수준이다. 하지만 친환경농산물 시장 4조원에 비해 보면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조합원의 증가와 공급액의 증가는 경영상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런 활동을 전개하면서 생협은 ‘윤리적 소비’‘로컬푸드’‘도농교류’와 같은 새로운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확산시켰다. 식품안전성 보장과 지역의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에 조합원들의 참여가 활발하다. 건강하고 대중적인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4개 생협연합회를 합하면 매년 2천여건 이상의 지역모임과 1천여건 이상의 교육을 진행 하고 있다.
친환경농산물 위주의 소비자협동조합 운동은 현실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소비자들이 조합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생협법의 개정으로 인해 다양한 생협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더욱 확장된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이 필요한데 협동조합기본법상의 다양한 협동조합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