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수기
이홍규
1969년에 입교해서 담을 넘어 교회로 다녔다.
중학2년생 이긴 하였으나 무서움도없었다.
아버님께서 불교정성이 대단하신 분이라
그리고 목수로서 절에 일 나가시면 6개월이고
3년이고 절에 계시면서 절을 보수 하시고
계신 터라 항시 만나뵙기 힘더나 어머님 께서
기독교즉 통일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밤에 몰래 담을 넘어 교회에 다녔다.
난 그리고 진안탑사를 세우신 이갑룡 후손으로써
그런지 몰라도 외로움을 달랠 때면 산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도 많았다.
고1때는 성화학생들이 힘을 모아 성미사업도 하게되었고
내가 학생회장으로 이끌어 나오면서 xx전투경찰
위문도 가게되었고 학생숫자가 점차 늘어나자 반대가 심해졌다.
윤리선생이 수업시간에 일어서게해서 이여석이
남묘호랑객교회 나간다며 조롱하며 반대가 심해졌고
모든억울함을 맘으로 삼키고 집에와 다시홀로
교회에가 밤이새도록 하늘앞에 업드려펑펑 울고말았다.
그이후로 학생들이 한두명씩 찿아와 전도됨으로 인연으로 맺어갔다.
76년도에 군에입대했다.
3개월 후부터 통일세계가 붙혀왔는데
그것을 보고 고참병들이 이단교회 나간다고 밤에 조용히 불러내어
몽둥이 찜질을 했다.
열대정도 맞았더니 아픈것도 못느꼈다.한참 지났을까 주일에 종교시간에 시내교회 나가는것 허락해 주었다.
그이후2년정도 주일이면
시내우리 통일교회에 나갈수 있었다.
1982년 10월14일6천가정 축복을 받았고 그 이전 1979년
초부터 청파동 2가 9의1번지 구 본부교회에서 약 7년간 철야기도를 했다.
0시부터 04시까지 하늘과 사탄의 싸움이라
잡담도 통하지 않았다. 찬송과 기도만이 진행되었다.
7년 동안 김재산 권사님과 함께했는데 옥세현 어머님 홍학실 권사님 신옥순 순회사님
그외 본부교회 출석하시는 분들이 중간중간 참여하시는 분들도 계셨다.(그 당시 옥세현 어르신을
어머님이라 불렀다.)
매일같이 철야를 할 때면 속옷이 땀으로 훔뻑
젖었고 몸은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은혜가 넘칠땐 세벽 4시가 지나도 김재산
권사님께서 간증도 해주셨는데 처음 입교 당시 부산 범냇골 성지를 태양으로 인도하심 따라
찿아가시어 범냇골 성지에서 참아버님을
만나셨다고 하셨다. 1980년 초에는김재산 권사님과 전세금을 합해 교회주변 2층집을 단독으로 얻어 (임대로)
재단을 만들어 놓고 매일같이 그곳에 함께 거주하면서 밤에는 교회에서, 낮에는 그곳에서 정성을 이어갔다.
김재산 권사님과 기도할 때면 예수님도 찿아오셨고 참아버님께서는 늘 찿아오시어 앞 오른쪽
의자에 앉아계셨다. 유효원 전협회장님 께서도 수시로 찿아오셨고 통성기도를 할 때는 나의 몸
전체를 불덩이로 만들었다.
일본 조총련 지도자를 위한 기도도 했다.
그들이 무엇이든
털어놓고 하나되고 하늘과 협조해 나가라고
1,200명 지도자 명단을 놓고 기도했다. 그 명단은 전 일본 정사무총장님의 사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후 일본땅을 복귀하기
위한 기도로 이어졌고 경제 복귀에 전심전력을
다하시는 모든 식구님들께 기도의 힘을 실어 드렸다.
한때는 안수의 능력도 부여해 주셨고 만나는 분들마다 만지면 회복되는 은사의
힘도 부여해 주셨다. 이후 성전 중심의 기도는 산기도로 이어졌고 7일 간의 천마산 산상 철야기도는 악마들과 치열한 싸움의 한판이기도 했다.
주위에 산짐승 울음 소리도 들려와 우리의 기도를 방해했고 추위로 더 이상 산기도를 이어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도 꿋꿋이 이어나갔다.
힘이 없어 쓰러질 것만 같아도 우리는 중심을 하늘에 두고
기도를 이어갔다.
다음은 도봉산 도선사
산상 기도 등 산기도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다시 본부교회 기도실로 옮겼다.
기도중 어느 때는 몸이 하늘로 치솟는 현상도 벌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은 목사님께
보고 드리며 지혜롭게 응하면서 난관을 지혜롭게 이겨 나갔다.
7년 동안의 파주원전 참배도 잊을 수 없다. 이때는 우리 가족 전체를 내 차에 태워 매해 1월 1일이면 파주원전으로
향했다. 어느 때는 눈길을 달려가다 언덕위를
넘어서면서 옆으로 미끄러져 2바퀴나 굴렀는데 30m 절벽 바로 입구에서 풀뿌리에 걸려 목숨만 지켜낼 수가 있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군인이 그 광경을 보고
부대에가셔서 큰 트럭을 몰고 와서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지나가는 분들이 다른데 신고했는지 견인차도 달려와서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 함께있었으므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참 동안 애들은 놀라 떨고 견인차가
지나간 후에야 군인이 저가족을 구해주었다.
제주 남원 수련소에서 일본 여성지도자16만명
집회 땐 눈이 내리는 겨울날씨인데도 참아버님
께서 땀이 심하게 날 때면 와이셔츠를 벗어던지시고 말씀은 계속이어 가셨다.
참어머님께서는 해외 순방길에 오르셨고
행사 때마다 직접 전화하시고 격려해 주셔서 참부모님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참 어머님께서귀국하실 때는 참아버님께옵서 직접
문앞까지 나오셔셔 꽃다발을 직접 참어머님께 걸어주시며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고생했다. 힘들었지?" 눈시울을 적시며 해주시는 아버님의 그 말씀에 우리 마음도 울적했다.
다음날 정은주 비서실장님과 제주시내에
함께 나가서 전국에서 오실 목사님과 사모님들의
선물을 하나씩 드리기 위해 제주 시내로 향했다.
정은주 실장이 어떤 넥타이를 고를까 망설이다가 참어머님 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색상을 선정해 놓고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300여점을 사와서 제주 수련소에 참석한 목회자들과 그외 참석한 모든 식구에게 참아버님 께서 집어주시는 것을 참어머님께서 받아 직접 걸어주셨다.
남성은 넥타이를 여성은 스카프를 받았다. 그리고 참아버님께서 지명하시는 대로 노래 한 곡씩을 불렀는데 나는 조용필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렀다.
참아버님께서 아침 일찍 지귀도에 나가시면 몇몇 직원들도 따라나섰는데 참아버님께서는 바다에 나가면 바다의 왕이 되시고 강단에서는 온 우주의 스승이 되셨다. 아버님의 옆자리에는 그림자처럼 동행하시는 참 어머님이 계셨다.
아무리 피곤하셔도
이겨내시는 참어머님의 모습에서는 우주를
품고도 남을수 있으신 따뜻한 사랑이 보였다.
6천가정 남자 동원 때는 낮에는 사업팀에 가서 일을 했고 밤에는 계속 철야로 기도가 이어졌다.
어느 때는 천마산에서 추위를 이겨가며 일주일 철야를 할 때면 배가죽이 감각이
없어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철야 때에는 냉수목욕도 잊지 않고 계속 진행됐다.
아버님께서 모스코바 대회를 위한 준비기도를
할 때는 정성이 부족하면 안 된다고 하시어
(김재산권사님과 저는) 피를 한 대롱씩 뽑아 뿌려서라도 정성의 도를 넘어서야 된다고 하시며
망우리(동민의원)모가정의 의원에서 피를 뽑아
통일동산에 정성을 드리기도 했다.
7수 탕감행사도 해야 했는데 40일 정성을
드리고 후일 통일동산에서 산 제물 7종류를 드렸다.
깊은 내용은 여기에서 설명 못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후로 참아버님께서 모스코바대회의 승리를 위해 한없는 기도와 정성을 이어갔다.
신앙을 한 단계씩 정성으로 모아갔는데 생활비가 걱정되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해서 가정은 더더욱 어려운 지경에 몰리게 되었고 청파동 전세집을 빼서 수리하는 동안 그것마저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날려보내고 가건물에 둥지를 틀어 6년째 접어들었는데 옆집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동사무소에 연락하고 집에 돌아 와보니 우리집에 옮겨붙기 시작했는데 불길은 더 크게 번지면서 큰 화마로 변해 우리집을 삼켜버렸다.
애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펄펄 뛰고 책 하나 내가 즐겨 모아오던
사진이며 우표 한 장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참혹했던 시간들 그나마 4남매 생명을 지켜 주심을 하늘 앞에 감사드렸다.
이후로 주야간 모든 일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심한 것이 청평 가서 내 마음의 병부터
정리하고자 40일 수련을 들어가서 이어 40일
연장해 80일 수련을 끝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귀가해서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기로 하고 최선을 다했다.
여름 때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더더욱 빛나던 별 하나 나에게 달려와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그렇게도 걱정이 많나 하늘을 알게 된 것이
보배중 보배란다.
돈은 때가 되면 주머니가
차는 법 돈 찿아 달려가지 말고 쉬임없이 기도하라 모든 것 채워 줄 것이라는
암시의 말씀 오늘도 뜻에 대한 불변의 심정으로
앞만 향해 전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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