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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승정 신부님의 구약성경과 사순 1/ 회개의 창조신학적 의미
안녕하십니까?
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서 구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최승정 신부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
과 함께 나눌 이야기는 사순과 구약성경, 구약성경과 사순이라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이
라고 함께 전례 때마다 읽고 함께 기도하는 텍스트에는 구약성경이라는 텍스트와 신약성경이라는 텍스
트가 있는데 그 중에 구약,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까지의 구약의 텍스트 안에서는 사순이라는 그런 40일
의 우리들의 어떤 회개의 시간을 어떤 의미로 알아들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요번 주랑 다음
주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겠고요.
저는 특별히 제가 생각했던 거는 사순절 그러면은 어떤 의미가 중요하지요? 사순은 어떤 시기입니까?
회개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그 회개라는 것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신학 안에서 어떤 자리를 잡고 있
는가? 회개라는 것이 구약성경에서도 역시 중요했나?라는 것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오늘은 첫
번째로 그런 회개와 창조신학이라는 틀 안에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오늘은 "회개"의 창조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
먼저 제가 드리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구약성경과 사순이니까 구약이라는 거는 어떤 의미일까요?
뭐 항상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 구약 그러니까 ... ^^*~~ 우리 말로 풀어볼까요? 구약舊約, 옛 계약
또는 옛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신약 그러면 새로운 약속이 되겠지요. 약속 또는 계약이라고
그러면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나와 누군가가 함께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옛 계약이은 누구와 누가 맺은
계약일까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입니다.
* 구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구약은 이집트 탈출 후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예, 거기까지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애요. 이제부터 중요한 게 나오지요. 계약이면 이런 겁니다. 내가 어떤
분에게 뭐 돈을 얼마를 드릴테니까 그분은 나에게 살던 집을 주십시오. 이게 계약이죠. 하느님과 이스라엘
이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뭘 약속하셨습니까?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에게 땅을 주겠다." 그런데 보통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약
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땅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요?
*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
* 구약성경에서 땅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생명
제가 오늘 명동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명동 거리에서 아무나 만나는 사람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오늘
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뭐겠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명동
거리에서 만나는 그 서울 시민은 아마도 뭐라고 대답할까요? 돈이오라고 얘기할 겁니다. 하지만 구약의 그
런 히브리 사람들은 아마 제가 예루살렘 거리에 나가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데 꼭 필
요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라고 묻는다면 땅이오라고 얘기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소위 저희들이 얘기하는 신앙의 성조들이
뭐해서 먹고 살던 분들이었죠? 목축업 아닙니다. 목축업이라는 거는 뭐냐 하면, 자기 땅에다 말뚝 박고 소
나 돼지나 이런 거 키우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자기 땅이 없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땅
가진 사람한테 "여기서 우리가 양들이 풀을 뜯어 먹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들이 허락
해 주면 양이 풀을 뜯을 수 있는 거예요.
따라서 땅 주인들이 양 떼를 많이 몰고 오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롯이 자신들이 키우던 그런 양 떼들의 숫자가 커지자 함께 다닐 수 없고 따로 나뉘어야 하는 겁니다. 야곱
과 에사우가 서로 화해한 후라도 함께 다닐 수 없고 서로 나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양 떼를 몰
고 다니다 보면은 뭐 양들이 풀만 먹습니까? 아니죠. 물도 마셔야 되죠. 그래서 우물을 팝니다.
그래서 우물을 다시 파서 물이 조금 나올만하면 땅 주인이 와서 뭐라고 그럴까요? 이건 내 우물이다. 내 땅
에 있으니까 내 양들 내 가축들에게 물을 먹일 거니까 너는 나가라. 그래서 야곱이 우물을 몇 개나 팝니까?
야곱이 우물을 일곱 개나 팝니다. 그래서 '브에르 세바 (באר שבע)' 히브리 말로 '브에르' 그러면 '우물', '샘'
이라는 뜻이고 '셰바' 그러면은 왜 우리도 안식일 샤밧이라고 하는 이야기 들어보셨죠? 샤밧, 일곱이라는
뜻입니다. 일곱 개의 그런 우물을 판다라는 이야기를 저희들이 창세기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자기 땅이 있었던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땅이 없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자기 땅이 처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브라함이 자기가 사랑하던 아내 사라가 죽어요. 따라서
그 죽은 아내를 갖다 아무데나 놓게 되면 막 짐승들이 와서 그렇게 막 파먹고 그러겠지요? 그래서 장례를
치뤄줘야 되는데,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저기 어떤 히타이트 사람이 갖고 있는 막펠라라는 동굴이 있는 거
예요. 옛날 팔레스타인 땅들은 땅을 파서 시신을 묻기에는 조금 용이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의 장례의 풍습은 그렇게 동굴 같은 곳에다가 시신을 모시고 동굴 앞을 큰 돌로 막는 것
이 일반적인 장례의 풍습입니다. 나중에 예수님도 어떻게 장례가 치뤄집니까? 땅에다 묻지 않지요? 동굴에
다가 모셔 놓고 그 앞을 큰 돌로 막는 그런 어떤 예수님의 장례의모습. 옛날 아주 오래된 고대의 모습과 아
주 흡사한 겁니다. 그러니까 히타이트 사람한테 아브라함이 가서 "그 땅을 내가 사겠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니까, 히타이트 사람이 뭐라고 그럽니까?
"아이, 당신과 나 사이에 그냥 거기다가 묘지를 쓰십시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다
그 사람 마음이 변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꼭 내가 그 땅을 사겠습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그런 은을
갖다 주고 그 땅을 삽니다. '막펠라'의 이야기입니다. 이 막펠라의 동굴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보면은 다섯
번, 여섯 번 나와요. 오늘날 우리들이 읽을 때는 참 이상합니다. "아니, 거기 손바닥 만한 땅덩어리 하나 사
놓고 뭘 그렇게 자꾸 이야기를 하나?" 정말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땅이 자기들이 가진 첫 번째 땅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첫 번째 땅.
*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첫 번째 땅이 막펠라 땅
나중에 야곱이 열두 아들들과 함께 요셉이 이집트로 가서 거기서 재상이 되자 기근을 피해서 이집트로 가
지요? 그리고 야곱이 죽습니다. 그리고 그 야곱을 어디에다가 묻지요? 그 야곱을 이집트에 묻지 않고 다시
그 시신을 모시고 와서 막펠라에다가 장례를 지냅니다. 지금은 거기에 커다란 건물도 서고 그러면서 이스
라엘의 성조들을 기리는 작은 도시가 되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첫 번째 땅이라는 그런 의미로
막펠라를 기억을 하는 겁니다. 그만큼 땅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셨다는 겁니다. 반면에 그럼 그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
속하신 반면에 이스라엘도 계약이니까 하느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되겠지요? 땅 값을 내야겠지요? 이스
라엘이 치뤄야 하는 땅 값은 뭘까요? 이스라엘이 치뤄야 하는 땅 값는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겁니
다. 하느님의 법, 계명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입니다.
*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치뤄야 할 땅 값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
그런데 이제 신학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를 그냥 얘기하면 폼이 안 나니까 폼나게 얘기하는 거를 좋아
합니다. 율법은 히브리 말로 폼나게 토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은 결국 뭐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
엘에게 땅을 주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토라를 지키기로 약속한 그 계약입니다.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
지요?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은 전체의 흐름을 보면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뭐 이렇게 인생을 살아오다가 커다랗게 뭐 자기가 지금까지 이루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 보면서,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 우리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민족인데 이렇게 됐을까? 그러면서도 구약성경은 또 이스라엘의 그런 경전
이가도 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읽어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그와 같은 책이라고 우리가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순. 개념 설명을 좀 하지요. 사순四旬, 무슨 뜻이지요? 40일이라는 뜻입니다. 라틴말에서
콰드라제시마 그러는데 그것도 역시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왜 사순이라고 부를까요? 40일 동안이니까
사순이라고 부르겠지요. 요 다음 질문에서 신자분들이 좀 약해지시더라고요. 그러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40일을 얘기할까요? 재의 수요일부터, 여기서부터 대답이 막 엇갈려요.
예, 사순은 모두 6주까지 있습니다. 6×7= 42예요. 벌써 사순이 넘어요. 40일이. 그런데 전례를 전공으로
하는 신부님들이 설명하시기를 주일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때문에 사순 동안 우리가 1주, 2
주 이렇게 부르기는 하지마는 주일날은 이미 사순보다 조금은 더 높은 개념으로 생각해야 된다. 그래서
주일은 뺍니다. 그러니까 6×7= 42가 아니라 6×6= 36이예요. 다음에 아까 말씀하신 대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니까 수, 목, 금, 토 이렇게 4일을 더하면은 36에다가 4를 더하니까 40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성야 전까지가 딱 40일이라는 숫자가 맞춰집니다.
*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성야 전까지
그런데 오늘날 전례를 공부하시는 전문가들, 학자들은 좀 거기에다 덧붙여서, 그런데 성목요일, 성금요
일, 성토요일 이렇게 성삼일은, 하지만은 일반적인 사순이라고는 보아서는 안 되겠다. 40이라는 숫자는
좀 흐트러지지마는 성삼일은 사순보다 더 전례적으로 중요한 3일로 생각해야 된다라고 대부분의 전례를
공부하는 전문가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희들이 일반적으로 그러면은 40일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왔느냐? 그걸 꼭 맞춰서 얘기 하려면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성야 전까지.
그런데 마지막 성삼일은 일반적인 사순절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가 그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정도
로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될 거 같애요. 실지로 전례적인 등급에서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 미사
는 신자들에게 의무적은 아닙니다마는 전례적인 등급에서 주일보다 더 높은 등급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들이 특별한 일이 아니시라면은 성목요일 미사, 성금요일 십자가와 함께 하는 그런 전례에는 꼭 참석하
시는 것이 어떤 전례를 올바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전례의 삶이라고 설명의 말씀을 드리겠
습니다.
예, 아무튼 먼저 제가 설명을 드려야 될 첫 번째 이야기는 방주라는 거입니다. 히브리 말로 방주를 어떤
단어로 번역을 했나 보니까, 히브리 말로 테바라는 단어예요. 그런데 그 테바라는 단어가 노아의 이야기
빼 놓고 다른 데서도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방주가 또 등장한 적은 사실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등장하냐 하면, 여러분들 모세의 이야기 이렇게 읽어보시면은,
* 방주의 히브리어는 테바 tebah
모세가 어렸을 때, 모세가 태어날 때 파라오가 이스라엘에서 아기가 태어나면은 다 강에 던져서 죽여버리
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가 태어났는데 성경 구절이 좀 웃겨요.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이렇게 보니까 "아기가 잘생겼다"고 돼 있어요. 그래서 죽이지는 않아요. 예나 지
금이나 잘생기고 볼 일 ^^*~~~
그런데 그거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것도 역시 이제 히브리 말을 우리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
움 때문에 그렇게 밖에 번역할 수가 없었는데, 제가 해도 그렇게 밖에 못 했을 거 같애요. 이게 여기서 잘
생겼다는 게 어떤 뜻이냐 하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더라." 나오지요? 그 "보시니 좋더
라."라는 이야기가 "모세가 잘생겼더라." 하는 이야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보니까 "모세가 참 좋더라."라는 이야기인데, 이게 어떤 뜻이냐 하면,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이 다 있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의 모상을 따라서 창조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은? 미스코리아랑 관계가 있습니다. 진, 선, 미.
진(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 : 진眞, 선善, 미美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무슨 성형해서 아름다운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 참됨, 선함 이런 것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이다라는 뜻으로.
그런데 아기 모세를 보니까 바로 그런 모습이더라. 그래서 어머니가 모세를 강에 던지지 않고 그냥 키웁
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크다가 모세가 너무 커서 더 이상 감춰서 키울 수 없게 되니까 할 수 없어서 어머
니까 어떻게 합니까?
왕골 상자에다가 모세를 집어 넣어서 강에 데리고 가는데, 마침 파라오의 딸이, 공주가 강가에 나왔다가
아이를 보고, 그다음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키우려고 하는데 모세의 누이가 그 옆에 서 있다가 공주에게
가서 유모를 구해드릴까요?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가 이번에는 월급을 받으면서 ^^*~~~ 이거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게 그냥 거기에 일부러 의도적으로 쓴 겁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하느님의 도움 아래 이제는 그러
니까 그런 어떤 댓가를 받으면서 자신이 해야할 당연한 일까지도 하게 되는.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금붙이와 은붙이를 받아 가지고 나
오는 것과 상응하는 그런 대목이예요.
그런데 그 모세를 왕골 상자에 넣어서 잘 방수 처리를 해 가지고 강에 띄우잖아요. 그 왕골 상자를 히브
리 말로 테바라고 합니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와 모세를 구하는 왕골 상자는 같은 단어가 쓰입니다. 어떤
겁니까? 사방이 막혀 있고 그리고 거기에 잘 역청이나 타르 같은 걸로 잘 방수 처리가 되어 있는. 그래서
물이 새지 않는 노아의 방주도 그런 방주였다.
* 아기 모세를 담은 왕골 상자를 히브리어로 테바 tebah : 궤, 상자
즉, 테바 tebah는 사방이 막혀 있고 역청 등으로 방수 처리가 잘 된 상자
그리고 그것이 아라랏 산에, 40일 동안 비가 내린 후 아라랏 산에서 멈추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노
아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전에 노아의 이야기, 그러니까 창세기 6장, 7장, 8장 그
앞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길래 이런 40일 간의 홍수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었나? 하는 것에 대한 전 이
해가 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주제로 잡은 건 그런 창조 이야기, 세상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에
서부터 노아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갔나?라는 그 말씀을 이제부터 드리고자 합니다.
창세기를 시작하면은 창세기 1장 1절에 어떻게 시작하죠?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
다라고 얘기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건 뭔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딸랑 만들었다는 뜻일
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이라고 얘기하지만, 그 모든 것, 온 세상을 만
드셨다, 창조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이사야서 후반부에 보면, 세상에 대한 어떤 종말론적인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이사야가 얘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은 헌 하늘과 헌 땅이라는 걸
전제로 하겠지요? 그럼 이사야 예언자가 얘기하고 있는 헌 하늘과 헌 땅은 어떤 헌 하늘과 헌 땅일까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얘기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하늘과 땅은 이제 마지막을 맞이하고 하느님께서
새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따라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라는 고백으로 우리가 이사야서의 그
예언적인 선언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서 맨 처음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세상은 아직 꼴을 갖추
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비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심연, 암흑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
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여러분들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입
니까? 아니면 좀 혼탁한 세상입니까? 조금은 혼탁하고, 조금은 의롭지 못하고, 조금은 불의하고 그렇게
뭔가 부족한 그와 같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혼탁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교회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죠. 세상이 이렇게 혼탁
하고 그렇다면은 교회는 그 가운데에서 박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혼탁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거를 보면은 아, 우리가 뭔가 예수님의 어떤 길에서 벗어나 있구나. 우리가 잘 지
내고, 편안한 삶, 안락한 삶, 어떤 물질주의적인 세상 안에서 세속적인 행복 이런 거에 교회가 익숙해져
있구나. 그런 어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예, 세상이 공허하고, 비어 있었고, 암흑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하느님께서 첫째날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어라", "빛이 생겨라" 여기서 말하는 빛은 이런 환한 조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겁니다.
밤 길을, 칠흑 같은 밤 길을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깜빡깜빡 등불이 하나 비추는 거예요. 아주 시커먼 밤
바다를 배가 항해하고 오면서 도대체 지금 내가 올바르게 가는 걸까라는 어떤 불확실성 안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불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빛이 있어라라는 그 말씀입니다.
그게 제일 잘 구현되는 것이 저희들의 부활성야 전례입니다. 성당이 모두 캄캄합니다. 저 뒤에서 사제가
초 한자루에 빛을 밝혀서 들어오면서 뭐락 노래 부르죠? "그리스도 우리의 빛" 세 번 부릅니다. 그리고 신
자들이 그 빛을 나누어 받습니다. 그러면서 성당이 점점 밝아집니다.
* 창세기의 "빛이 생겨라"가 잘 구현된 것이 부활성야 미사 전례 때의 빛의 예식
본래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는 옛날에 이렇게 전등불이 없었잖아요. 그러면은 부활성야 밤 미사에 오기
전에 각 집마다 자기네 집에 호롱불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성야 미사에 오기 전에 그 불을 다 끕니다.
그리고 부활성야 미사에 와서 사제로부터 받은 ,그 부활초로부터 받은 그 빛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집에
불을 밝히고 그 불을 가지고 일년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제 전기불이 들어오고 이렇게 되니까 부활초를 받아가지고 조금 있다가 사회자가 뭐라
고 그러죠? "이제 끄세요."^^*~~~ 끄고 자리에 앉았다가 성세성사 갱신할 때 다시 한 번 붙이게 되는데
본래 그 불은 가정으로 가지고 가서 1년 내내 가정을 밝히는 그와 같은 어떤 불의 중심이 되는 것이 그리
스도교 전례의 본래의 어떤 흐름이었습니다.
아무튼 "빛이 있어라" 앞 못 보는 사람이 앞을 보게 되는 것, 구 못 듣던 사람이 듣게 되는 것, 아직까지는
몰랐는데, 세례는 받고 성당은 다녔지마는 하느님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알 수 없었는데 이제 아, 하느님
이 정말 계시는구나,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거를 아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입니다. 하느님
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빛이 생겨라."
또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귀머거리를 고치시면서 하시는 "에파타!" 이제 너는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고, 세상을 누가 이끌어가고 있고,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는 그것을 너는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빛이 있어라" 하시는 그 말씀이.
둘째 날은 궁창이라는 거를 또는 창공이라는 거를 만드십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바가지 같은 겁니
다. 세상은 물로 가득차 있었는데, 창세기 저자는 그 물을 누가 만든 건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세상은 물로 가득차 있었다, 어두웠다, 공허했다, 비어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물이라는 걸로 가득차
있는. 따라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땅이라는 것이 생명을 의미한다면 물이라는 거는 뭐를 의미하겠습니까?
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존재할 수 없게 끔 만드는 그와 같은 요소입니다. 물에 빠지면 죽으니까.
따라서 바가지를, 궁창을 하나 세웁니다. 여러분들 어디 가서 "내가 명동 성당 가서 어떤 신부님 강의 들
었는데 하느님이 바가지를 만드셨대." 그러면은 안 됩니다.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아무튼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을 나뉘면서 궁창이라는 공간이 생기는 겁니다. 그 공간에서 이제
비로소 생명이 생길 수 있는 작은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물과 물을 갈라 놓으셨다.
따라서 첫째날 창조와 둘째날 창조를 우리가 함께 읽어 봤을 때 굉장히 중요한 동사가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 "갈라 놓는다"라는 동사입니다. 첫째 날은 빛이 있었라 말씀하시고 빛과 어둠을 갈라 놓으셨다.
둘째 날은 창공을 만드셔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을 갈라 놓으셨다. 따라서 여기서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입니까? 질서 잡는 하느님, 모든 것을 제자리에.
* 창조를 위해 갈라 놓는 하느님은 질서를 잡으시는 하느님
엄마들이 아이들 방을 치우는. 책이 있는 곳에, 책장에는 책이 있고, 찬장에는 접시들이 있고. 그와 같은
자리를 찾아주는 그와 같은 모양입니다. 셋째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아래 물들이 서로 모이면서
비로소 뭐가 드러나지요? 땅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에는 계속해서 하느님이 이런
저런 것들을 갈라 놓으시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자 비로소 뭐가 등장했다는 겁니까? 땅이 등장
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구약성경의 중심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다라는 그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이라
는 거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은 이 대목이 감동적이라는 거를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아, 그래서 세상에 땅
이 비로소 생겨났구나.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에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이 반복됩니다.
넷째날에는 하느님께서 큰 빛물체와 작은 빛물체를 창조하시고 그와 함께 계절과 축제의 시간이 정해집
니다. 따라서 첫째날에는 낮과 밤이 정해지고, 넷째날에는 축제의 시간과 계절, 절기가 정해지는 걸 보니
까, 첫째날과 넷째날은 결국 어떤 게 만들어지는 겁니까? 예, 시간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첫째날,
넷째날은 하느님께서 시간을 만드셨다라는 고백입니다.
* 첫째날(낮과 밤)과 넷째날(축제와 계절)에는 시간
둘째날에는 창공을 만드셔서 물을 가르시는 게 둘째날이었죠. 다섯째날로 오게 되면 하느님께서 그 궁창
위에 하는 것과 하늘에 사는 것들과 궁창 아래에 사는 것. 물에 사는 것들을 만드십니다. 따라서 둘째날과
다섯째날은 궁창이라는 것에 좀 집중이 돼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로 얘기한다면 공간에 관한 이
야기입니다.
* 둘째날(창공)과 다섯째날(하늘과 바다에 사는 것들)에는 공간
첫째날과 넷째날은 하느님께서 시간을 만드시고 둘째날과 다섯째날은 하느님께서 공간을 만드셨다. 그리
고 셋째날과 여섯째날에는 땅이 만들어지고 여섯째 날에는 그 땅에서 사는 동물들과 인간들이 만들어 지
는 그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께서 시간을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공간을 만
드시고 그 시간과 공간 안에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셨다라는 이야기입니다.
* 셋째날(땅)과 여섯째날(땅에사는 동물, 인간)에는 생명
하나의 어떻게 보면은 어떤 물리학자가 쓴 거 같은 뭐 그런 어떤 과학적인 의미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내용인 거 같애요. 따라서 그와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생명의 질서 안에서 우리들이 인간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시죠? 그 모든 것들을
잘 드시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잘 다스리라는말씀은 그 모든 것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파괴하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조금 그렇게 잘못 이해한 거 같애요. 우리가 우리나라 근대사에도 볼 수 있는, 그런 오늘날까지
도 자주 듣는 개발, 재개발. 다시 말하면 어떤 뜻이지요?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훼손하는 겁니다. 강이 훼
손되고, 산이 훼손되고, 바다가 훼손되고, 우리에게 이익만 된다면, 속된 표현을 쓰자면, 돈만 된다면 무엇
이든지 훼손하고 상처내고 때려부셔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의 창조신학과는 조금 다른.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그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시죠? 동산은 만들
고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곳에 사람을 두십니다. 남자의 이름은 아담. 여자의 이름은 하와. 이게 조금은 그
안에 언어의 유희가 있는데요. 히브리 말로 아담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만 땅 또는 흙을 히브리 말로 뭐라
고 그러냐 하면 아다마라고 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말에는 흙, 땅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와라는 말 안에는 영어의 be동사와 같은 '존재한다', '있다', 내지는 '생명'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
서 흙에 생명이 함께 하니까 인간이 완성되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함께 있으니까 완성되는 겁니다. 아
담만 혼자 있다면은 이거는 진흙으로 사람 모양만 있는 겁니다. 하와만 있다면은 생명은 있는데 형제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함께 있을 때 인간이 완성이 된다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오늘 강의 듣고 집에 가셔서 여러분들 배우자를 보실 때, 어떤 마음으로 보셔야 합니까? 당신을
통해서 나의 존재가 완성됩니다라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배우자를 만나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정말 잘 지낼 수 있었는데 뱀이 등장합니다. 왜 뱀이 등장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 때 이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고요. 뱀이 등장해서 여인을 유혹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과악을 구별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되고 남자에게도 주니까 남자도
먹습니다. 그들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본질은 뭘까요? 그들은 왜
선악과를 먹습니까? 그거를 먹고 "너희도 신처럼 될 수 있어."라는 그와 같은 유혹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갖고 풍요롭게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신이되고 싶어하는 겁니다.
오늘날 물질주의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은 사실 그 점에 있습니다. 다음 문장을 한 번 완성시켜 보십시
오.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게 문제인 겁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누굽니까? 그건 신입니
다. 따라서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돈만 있으면 나는 신이 될 수 있어.
그래서 그것을 물신주의라고 부르는 것. 그런 물질주의, 물신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인간이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돈만 있으면 돈 없는 사람은 깔봐도 돼, 내리 눌러도 돼, 돈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법도 안 지켜도 돼. 뭣도 해도 돼. 이런 식의 물질을, 돈을 섬기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유혹도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그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에 아이를 낳습니다. 큰아들 이름이 카인이고 작은 아들
이름이 아벨입니다. 거기서 둘이 제사를 지내는데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카인의 제사는 안
받으세요. 그 이유가 좀 불분명해요. 카인의 제사가 조금 정성스럽지 않았던 거 같은 그런 어떤 행간을
읽을 수 있는데 이유가 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나주에 카인이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이거는 아담과 하
와가 지은 죄와는 조금 다른 유형입니다. 어떤 유형이죠? 이거는 폭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라면은 카인의 죄는 인간이 인간을 거슬러 짓는 죄입니다. 타락과 폭력.
*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라면 카인의 죄는 인간이 인간을 거슬러 지은 죄
어떻게 보면 십자가의 모양입니다. 십자가는, 로마가 로마의 제국주의를 거스르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
이기 위해.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거는 어떤 겁니까? 천천히 죽게 하는 겁니까? 아니면 빨리 죽이는 겁니
까? 예, 십자가 형은 심지어 기록을 보면 일주일 이상 십자가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사람들이 못 박혀 있
었다고 해요. 그렇게 천천히 죽이는 겁니다. 예, 천천히 죽이면서 다시는 제국주의를 거스를 생각을 하지
마라라는 일종의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모양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애요. 아, 인간이 짓는 죄의 두 유형
이 저 십자가 모양 안에 담겨 있구나. 하느님을 거슬러 짓는 죄 또는 인간을 거스르는 그와 같은 죄. 십자
가의 모양에 있구나.
* 십자가 모양에서 세로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
가로는 동료, 이웃, 인간을 거스르는 죄
* 마태 22,35-36: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복음에서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 이스라엘이 지
켜야될 이렇게 두꺼운 율법서가 있는데 그런데 율법서 중에 정말 제일 중요한 율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겠
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래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예, 먼저 신명기 6장을 인용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온갖 것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라. 하느님을 섬겨라. 그리고 하느
님 한 분 외에 다른 누구도 섬기지 말아라. 그리고 두 번째는 레위기 19장을 인용하십니다. 뭐라고 합니까?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그렇게 사랑해라.
* 신명 6,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레위 19,18: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얘기하시면서 우리들이 창세기에서 만나는 인간의 죄의 두 유형, 하느님
을 거스르는 죄와 인간을 거스르는 죄, 타락과 폭력의 상처를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새 계명
을 통해서 너희들은 치유해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 카인의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원하셨던 그 창조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창조질서가 무너지면서 세상이
점점 본래의 혼돈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은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인간이 종말을 향해 돌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창조의 질서는 무너뜨리는 행위들, 인간의 죄들.
* 창세기 6장에는 세상이 타락했고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
그러면서 이야기는 노아의 이야기까지 흘러갑니다. 여러분들 댁에 가셔서 노아의 아애기 창세기 6장을
읽어보시면 그 6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이 타락하였고,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하였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아까부터 제가 계속 히브리
말에 관한 말씀을 드리는데요. 따라서 노아라는 말은 히브리 말 동사에서 나왔는데 노아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는 히브리 말 동사의 첫 번째 의미가 뭐냐 하면 '후회한다'는 뜻입니다.
* 노아라는 말 안에는 히브리 말로 후회한다는 뜻이 있어 ...
* 노아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위로한다는 뜻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두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노아라는 단어에. 두 번째 의미가 뭐냐 하면,
위로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세상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고, 하느님께서
는 하지만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위로하신다라는 중복적인 의미로 노아라는 이름이 쓰여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 하느님께서는 비를 내리십니다.
자, 아까 창조의 그림으로 돌아갑시다. 세상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세상이 뭘로 가득했지요? 물로 가득
했습니다. 죽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죽음의 세상 안에 빛을 만드시고, 궁창을 세우시고, 물을 따로 모으시
면서 땅이 드러나는 그와 같은 창조의 첫째날, 둘째날, 셋쨋날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그게 본래
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 모든 질서가 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 노아의 홍수사건은 창조 이전 본래의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것
노아의 홍수를 이렇게 읽어보면 하늘에서 비만 내린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구멍에서도 물들이 솟아올라
옵니다.(창세 7,11 참조) 모든 물들이 다시 터져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물로 잠기는. 근본적인 요
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의 죄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노아의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읽어볼 수
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물이라는 표징은 성서 전체를 통해서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우리가 물
을 마셔야 살죠? 따라서 물은 전혀 정반대 개념, 생명을 의미하기도 하고, 물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하죠? 물로 씻죠. 정화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 물은 또 생명, 정화의 의미도 있어...
따라서 여러분들 세례 받을 때 여러분들 머리에 세례수를 붓잖아요. 본래 세례 성사에서는 물을 붓는 게
아니라 본래 세례 성사는 침수입니다. 침례하는 겁니다. 항아리에다가 사람을 푹. ^^*~ 요즘도 유럽에서
아이들 영세 줄 때 이만한 세례 수 항아리 갖다 놓고 아이들을 잠수시킵니다. 아이들이 막 놀래요. 어떤
뜻입니까? 완전히 너는 죽는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다. 죽음과 생명, 새로운 생명의 의미가 담겨 있고 또
그렇게 세례 받은 사람은 고백성사 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받고 나서, 신부님들이 성인 세례하고 나서 첫 고해를 언제쯤 줍니까? 한 달쯤 있다가
줍니다. 어떤 뜻입니까? 세례받으면은 세례받을 때 그때까지의 모든 죄가 다 사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성사 안에는 죽음, 생명, 정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 세례성사 안에는 죽음, 생명, 정화의 의미가 있다.
노아의 홍수 사건 안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단지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정화하
고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는 그와 같은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있고, 그리고 그와 같
은 노아의 사건 끝에 하느님께서 그런 세상에 그런 희망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늘에 무지개
를 만드셨다라는, 하늘에 있는 그와 같은 표징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우리들이 사순절을, 사십일을 보낸다면 노아가 방주 안에서 지
냈던 그 40일을 보내는 그 마음으로 우리가 이 40일을 보낸다면 한편으로는 죄속을 살아가던 그 인간이
죽었다가 그리고 정화되어 새로이 태어나는 40일의 시간이라는 그와 같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
다. 그런 사순절과 회개의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 40일을 보내면서 제가 신자분들에게 권하는 게 다음과 같은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다 본당
에서 십자가의 길 하시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걸었습니까? 아니면 혼자 걸었
습니까? 뭐 베로니카도 등장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궁극적으로 혼자 걸었던 거 같애요.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혼자 걸으셨어 ...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함께 살아가고는 하지만 마지막 하느님
나라로 갈 때는 누구와 같이 갑니까 아니면 혼자 갑니까? 혼자 갑니다. 그래서 제가 꼭 권하고 싶은 거는
적어도 사순절 동안에 한 번은 적어도 한 번은 내 마음에 정말 와 닿는 그런 어떤 십자가의 길 책을 한 번
가지고 혼자서 십자가의 길 하시면서 예수님이 걸었던 그런 고난의 길을 묵상하시면서 내 삶에 어떤 힘듬,
어려움, 수고로움을 봉헌하는, 내가 일대일로 만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런 체험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 더 덧붙일려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러다가 한 5처쯤 갔는데 그 5처가 너무 마음에 와서 닿
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럼 그 자리에서 멈추십시오. 꼭 14처를 다하지 않으셔도 아무 상관 없
습니다. 정말 내 마음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5처든, 6처든, 7처든, 8처든 ... 그 어느 장소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시는 그와 같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뭐 14처를 한바퀴 쭉 도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어떤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 머무시면서 진정 하느
님께 봉헌할 수 있고, 우리들을 정화할 수 있고, 새로운 생명을 희망할 수 있는 40일의 그런 사순의 시기
를 걷는 것.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회개가 갖는 창조신학적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 지루한 강의
오랫동안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시간 : 구약성경과 사순 두 번째 시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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