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1일(음력 9월16일)에 의정부시 용현동 379-32에 자리하고 있는 충덕
사(忠德祠)에서 행한 충의공(忠毅公)의 추향제(秋享祭)를 보고난 뒤, 참가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음복하고 조반을 함께 먹었다. 그러고 나서 필자는 충의공(忠毅公)
을 비롯한 해주정씨(海州鄭氏) 문중의 묘역을 둘러보았다.
충덕사(忠德祠) 정문을 들어와 경내에서 바로 앞으로 향하여 비탈진 언덕을 조
금 오르면, 왼쪽에는 농포 정문부(農圃鄭文孚)장군의 신도비(神道碑)가 비각(碑
閣) 속에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복제품이 서있다.
북관대첩비 앞에는 이 비(碑)의 이동 상황과 우리나라에 반환된 과정을 설명해
두었다.
충의공 정문부(忠毅公鄭文孚)장군의 신도비(神道碑)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조선의 두 왕자인 임해군(臨海君)과 순화
군(順和君)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긴 반역자인 국세필(麴世弼), 국
경인(鞠景仁) 등을 잡아 처단한 것과 3천의 군사로 왜군(倭軍)을 무찌른 사실
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충의공(忠毅公)·농포(農圃)·정문부(鄭文孚 : 1565-1624)선생의 묘소는 의정부 송
산묘역의 제일 아래 쪽에 위치해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기념물 제37호)로 지정
되어 해주 정씨(海州鄭氏)를 명품 가문(名品家門)으로 격상(格上)시킨 자랑스런
문무(文武)를 겸한 분이다. 많은 방문객의 참배를 받고 있으며, 묘소는 장대석
(長臺石)으로 단을 쌓아 평평하게 한 봉분(封墳)에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와
합장(合葬)하였고, 인상이 후덕해 보이고 귀가 큰 문인석(文人石) 한 쌍과 혼유
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묘표(墓標) 등이 있다.
봉분(封墳) 가운데의 묘표(墓標) 전면에는
行亞卿 贈貳相 諡忠毅公鄭文孚之墓 貞敬夫人 高靈申氏 祔右
(행아경 증이상 시충의공정문부지묘 정경부인 고령신씨 부우)
라고 쓰여 있다. 일반적으로 생전에 지냈던 벼슬이름과 추증(追贈)
받은 관직명을 쓴 묘표가 많은데, 충의공(忠毅公)의 묘표는 조금 다
르게 쓰여 있다.
여기에 있는 글귀를 풀어 보면 아경(亞卿)이란 공경(公卿) 다음 가는 벼슬로
<벼슬-경(卿)>자가 정2품의 관직인 육조(六曹)의 참판(叅判)과 의정부(議政
府) 좌우참찬(左右叅贊),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의 직급으로 행아경(行亞
卿)은 바로 참판(叅判)의 벼슬을 지냈다는 의미이다. 이상(貳相)의 <서로-상
(相)>자는 정승(政丞)을 일컫는 말로 이상(貳相)은 삼정승(三政丞) 다음가는
관직으로 정승 바로 아래 벼슬인 종1품직인 의정부 좌찬성(左贊成)과 우찬
성(右贊成)을 말한다.
증이상(贈貳相)은 찬성의 벼슬에 추증되었다는 의미이며, 시충의(諡忠毅)는
시호(諡號)가 충의(忠毅)라는 뜻이므로 농포공(農圃公)은 참판(叅判)의 벼슬
을 지냈고, 찬성(贊成)의 벼슬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의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貞敬夫人 高靈申氏 袝右(정경부인 고령신씨 부우)라는 말은
정종일품(正從一品)의 문무관(文武官)의 아내에게 내리는 봉작(封爵)이 정
경부인(貞敬夫人)인데, 부인은 고령신씨(高靈申氏)이다. 부우(袝右)라는 말
은 부부합장(夫婦合葬)으로 되어 있는데, 부인은 충의공의 오른편에 묻혀
있다는 뜻이다.
贈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提學 世子左賓客
行通訓大夫內資寺正 鄭愼之墓 貞夫人江陵金氏之墓
(증자헌대부예조판서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홍문관제학 세자좌빈객
행통훈대부 내자시정 정신지묘 정부인강릉김씨지묘)
자헌대부(資憲大夫)는 조선시대 문신 정2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좌참찬(左
叅贊)·우참찬(右叅贊)·판서(判書)·판윤(判尹)·대제학(大提學)·세자좌빈객(世子
左賓客)·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도총관(都摠管)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지경연(知經筵)은 조선시대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맡은 정4품 관직인데, 의금부(義禁府)에서 춘추관사(春秋館事)와 홍문
관제학(弘文館提學) 및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같이 맡아 지냈다는 뜻이
다.
의금부(義禁府)는 조선시대 특별사법 관청이며,
춘추관사(春秋館事)는 춘추관의 으뜸 벼슬로서 정2품 이상의 타관이 겸임
하기도 한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은 세조9년에 홍문관을 설치하면서 대제학(大提學:
正二品)과 함께 종이품 관직으로 두었다. 제학(提學)은 모두 전임관이 아닌
타관(他官)이 겸직하였다.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은 정이품(正二品) 문관
(文官)으로 우빈객(右賓客)과 함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일원이다.
문산계(文散階 ; 문관 벼슬의 위계제도)에서는 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通政
大夫)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 하고, 하계인 통훈대부(通訓大夫)이하를 당
하관(堂下官)이라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태조 원년(1392)에 문산계
가 제정될때 정3품 상계(上階)는 통정대부, 하계(下階)는 통훈대부로 정하여
져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내자시(內資寺)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기 위하
여 설치되었던 호조(戶曹)소속의 관서인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소속 관원
으로 정(正 ; 정3품), 부정(副正 ; 종3품), 첨정(僉正 ; 종4품), 판관(判官 ; 종7
품), 주부(主簿; 종6품), 직장(直長; 종7품), 봉사(奉事; 종8품) 각 1인을 둔 것
으로 되어 있다. 내자시정(內資寺正)은 이 내자시(內資寺)의 가장 우두머리
으뜸벼슬이다.
行通訓大夫內資寺正鄭愼之墓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당하관(堂下官)의
품계를 받고,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정신(鄭愼)의 묘”라는 뜻이다.
♥ 寺란 글자를 여기서는 <절-사>로 읽으면 안 되고,
<벼슬-시> 또는 <관청-시>라고 읽어야 한다.
♥ "叅과 參" 을 대부분 옥편에서는 '叅을 參의 俗字 또는 參과 同字' 라고 설명해
두어 많은 사람들이나 심지어 컴퓨터사전에까지도 근래에는 모두 參으로 바꿔
쓰는데, 조선시대의 벼슬이나 직위에서는 叅이라고 썼다. 즉 참판(叅判)이나 참
의(叅議)라는 벼슬에는 叅이라고 썼다. 필자가 과거 가마골(양주 장흥면 부곡리)
叅判公 선조의 묘사에 가서 시도기(時到記)에 參判公이라고 썼다가 집안어른들
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던 일이 있다.
淑夫人和順縣崔氏之墓 通政大夫戶曹叅議鄭忱之墓
(숙부인화순현최씨지묘 통정대부 호조참의 정침지묘)
贈資憲大夫 吏曹判書鄭公諱希儉之祭壇 配贈貞夫人平山申氏
♣ 정희검(鄭希儉)은 충의공의 증조부(曾祖父)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참의공 정침(叅議公鄭忱)의 아들이며, 정연경(鄭延慶)의 아버지이다.
贈嘉善大夫丞政院 都丞旨鄭公諱延慶之祭壇 配贈貞夫人淸州慶氏
♣ 정연경(鄭延慶)선생은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냈고, 벼슬이 승정원도승지(丞政院
都丞旨)에 이르렀다. 장남으로 태어난 정희량(鄭希良)은 총명하고도 연구하는 학자였다
虛菴鄭先生諱希良 配淑人江陵崔氏 配淑人安東金氏 之祭壇
♣ 허암 정희량(虛庵鄭希良; 1469~1502?)선생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의 문하생이다. 김전(金詮 ; 1458~1523)·신용개(申用漑 ; 1463~1519)·
김일손(金馹孫 ; 1464~1498)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힐 정도로 학문이 높
았다.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사초문제(史草問題)로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1501년
풀려났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셔 시묘살이로 지내다가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2009년에 인천에서 연산조의 문신인 정희량이 은거하던 옛 집터인 허암 정희량 유허
지(虛庵鄭希良遺虛址)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검암동(黔岩洞)의 허암산(虛庵山) 북
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첫댓글 정문부 장군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두류봉이 충의공 농포 정문부(忠毅公農圃鄭文孚)장군의 묘역을
답사하고, 해주정씨 집안의 묘비에 기록된 문안들을 그냥 해설해
본 것인데,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