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이 청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중심에는 강진청자의 산 증인 이용희(77·무형문화제 제36호 청자장·동흔요 대표)청자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현재 동흔요 대표로 강진청자의 맥을 이어가며 청자연구와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청자의 터줏대감 이 청자장을 찾아 청자이야기를 들어본다.
“청자가 뭣인지도 모르며 살던 어린시절부터 지천에 깔려 있던 청자편을 주워 모으고 청자편으로 소꿉놀이를 하며 성장했습니다.”
강진의 고려청자 도요지 발굴사와 재현사업의 산증인이며 무형문화제 제36호로 지정된 청자명인 이용희 청자장은 1939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태어나 맺어진 청자와의 인연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600년 묻혀있던 청자를 세상밖으로 끌어내게 된데는 속이 없을 때, 뭐가 뭔지도 모를 시절, 그냥 색깔이 고왔던 청자편을 주워 모은 것이 청자와의 운명적 조우였으며 숙명같았다고 회고한다.
당시 할머니나 어머니는 청자편을 주워오면 귀신 붙었다고 내다버리라고 성화였지만 이 청자장은 그때부터 청자를 보는 남다른 시각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군대가기전까지 소쿠리에 차곡차곡 주워모으면서 가난한 살림살이었으나 결코 쌀 한되나 보리 한 말로 바꾸지 않았다는것을 보면 이 청자장은 청자를 대했던 부분이 남달랐다.
이 청자장이 군대를 재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건 1964년 3월. 본격적으로 청자에 관심을 갖고 발굴과 재현사업에 몸담게 된 계기가 마련된다.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자발굴 예비조사를 위해 이 청자장 집을 방문했다가 이 청자장이 모아뒀던 청자편을 가지고 갔고 그 편이 청자발굴과 재현의 발판을 가져온 중요한 자료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굴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인 1914년 일본총독부에서는 대구면 일대에서 청자를 발굴하기 시작했고, 1925년부터 28년까지 3년동안 대구면 일대를 조사한 결과 18만여평에 100여개소의 가마터가 발견돼 1939년 호적 107로 지정해 놓은 상태였다.
드디어 강진에서도 64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작업을 위해 최순우 문화재관리국미술과장과 정양모 학예연구사(전 박물관장), 박물관 직원 등 많은 인원이 마을을 찾아와 청자발굴작업이 시작됐다.
이 청자장 집 마당을 파기 시작하자마자 청자기와편이 나오기 시작했고 담 밑에서는 청자 퇴적층이 나오자 성과가 너무 좋아 1주일 연장하면서까지 이 청자장 집부근 발굴작업을 했고 학계에 보고되지 않는 새로운 자료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당시 이 청자장은 발굴 첫해부터 잔심부름부터 인부 인선작업, 발굴된 자료를 구백화물로 부치는 작업까지 담당하며 청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동기부여의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 청자장은 농사가 주업이었기에 농사일을 그만둘 수 도 없는 상황이어서 새로운 농법이나 작물을 선택해서 심고 가꾸는 선도농업을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1157년 정충년 4월 궁전동쪽에 양의정이라는 의종의 정각을 지으면서 지붕을 청자기와로 덮었다는 고려사 기록만 있었지 그 편은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1차 발굴작업을 통해 얻은 500여점은 분명 고려청자를 대구면 사당리 117번지 주변에서 만들었다는 증거라며 학계에서 큰 이슈가 됐다.
이때 나온 건물터는 물론 항아리, 명문, 정능 등은 고려말까지도 강진에서 고려왕실의 도자기를 만들었을것이라는 증명과 결론인 셈이었다.
하지만 청자 가마터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청자퇴적층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 가마터가 있을 것이라는 당시 정양모 박물관장이 이 청자장에게 가마터를 찾아보라는 특별지시를 내리게 된다.
운명이었을까. 1968년 이 청자장이 자신의 논에서 일을 하며 지금의 보각 안에 있는 100여평의 가마터를 발견하게 된다. 1973년부터 77년까지 3회에 걸쳐 이 가마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광복이후 사당리 발굴작업에서 고려시대 청자를 굽는 가마터를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강진에서도 자체적으로 청자를 재현해보자는 유지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마침내 1977년 6월18일 김창식, 김현장, 김기삼, 조기정씨 등이 주축이 된 사단법인 청자재현사업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대구청년이었던 이 청자장에게 주어진 청자재현의 기회는 그리 녹록하지 않아 몇번의 실패를 거쳐 78년 2월 본벌구이를 하기 위해 이틀간 불을 때 600년만에 강진땅에서 처음으로 청자 33점을 요출했다.
이후 해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비교분석표를 만들어가며 작품을 모아 82년 최초로 100여점을 전시.판매하게 된다. 그야말로 이 청자장은 이 전시회를 계기로 큰 용기를 얻어 청자재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86년 1월 7일 청자활성화를 위해 관요체제로 바뀌면서 사)추진위원회를 해체하고 청자사업소를 개소하게 된다. 이 청자장은 1964년부터 청자요지 보호관리원으로 참여해 2005년 9월 30일 관요의 발전과 강진청자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고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 2008년 한국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라며 45년간 자신이 수집하고 소장해 왔던 청자유물과 문양집 등 문화재적 가치가 적지 않은 500여점을 청자박물관에 기증했다.
한편 이 청자장은 수많은 공예경진에서 입상실적을 올려 그 기능을 인정 받아왔고 많은 인력을 양성했으며, 청자소지 개발, 청자 유약의 특성 조사연구 등 연구실적을 갖고 있다.
또 강진군 고려청자사업소 연구개발실장을 역임하면서 2004년 무형문화재 제36호 청자장으로 지정 받았으며 현재 한국무형문화 예술교류협회 이사, 전남 신지식인 제1호이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청자문화를 꽃피워 나갈 수 있도록 청자의 발굴은 물론 재현과 연구·생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던 이 청자장을 청자의 터줏대감으로서의 가치에 대한 보존이 필요하다. 또한 그에 맞는 역할과 더 큰 관심을 우리들이 만들어 나가야 함이 아쉬움이자 큰 과제로 남는다.
이 청자장은 퇴임 후 2남 1녀의 자녀들과 낳고 자란 터에서 동흔요를 운영하고 있다. 동흔요 문의전화는 강진군 대구면 청자촌길 21-11, 061-432-3100, 010-8608-4004번으로 하면 된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