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고대와 중세의 미학에서는 객관주의 이론이 우세했고, 근대에서는 주관주의 이론이 우세했다.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미학 간의 논쟁, 다시 말해 주관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아름답다’고 하거나 ‘미적’이라고 칭할 경우, 우리는 그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질 또는 본래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것에게 준 특질이 그 사물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는가? 대개 우리는 그 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질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아름답다거나 미적이라고 부를 경우, 그것은 우리가 그 사물이 쾌감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주관주의 미학이 주장하는 바다. 이러한 논쟁의 이유는 첫째, 미적 주관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주관주의는 이미 고대에는 관습으로, 중세에는 습성의 결과로, 근대에는 연상의 효과로 설명했다. 둘째, 미의 주관성 또는 객관성의 문제는 단순히 ‘예스’나 ‘노’로만 풀리는 것이 아니고, 다원적인 입장 즉 ‘예스와 노 모두’, 또는 중간적, 상대적 입장 즉 ‘예스도 노도 아닌’ 것으로 풀린다는 점이다. 이 해석에서 미는 대상의 특질도 주관의 반응도 아니고,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가 된다. 셋째, 주관주의의 논제가 흔히 상대론, 다원론, 비합리론, 회의론 등과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의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는 근대에서 주를 이루었던 주관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간혹 미는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니라는 회의적 입장을 취하기 하는데 그 것 또한 주관주의 색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가 싶다. 왜냐하면 백지상태는 어떤 것이든 수용할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개성 있는 멋을 추구하고 있다. 개성 있는 옷차림, 개성 있는 얼굴, 개성 있는 성격, 등등을 선호한다. 아름다움의 선망 대상인 연예인들 중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들이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대는 획일적인 것은 사장되고 다양하고 창의적이고 독특한 사고와 취향을 우대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사람들 각자가 서로 다르게 부여하는 의미를 우리는 인정해 준다. 친구와 함께 쇼핑을 가서도 한 옷을 가지고 난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친구는 별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취향이 나쁘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각자의 미적 가치를 인정한다. 또 미팅을 나간 자리에서 나는 한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친구는 그 남자를 폭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란 객관적인 사물의 속성이 아니라 그 사물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정서, 감정이고 또 둘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미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모든 이들에게 아름답다라는 속성을 가진 어떤 감정을 주어야 하는데 사실을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작품이나 객관적 실체의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나는 객관주의보다 주관주의 미학에 손을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