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후우, 뭐 조금 생각을 해보도록 하죠.
남강현을 떠난 무영 일행은 조금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무영은 당초양이 신선단을 몽땅 태워 버린 일로 약간 충격을 받아 한동안 산에 오르지 않았다.
신선단을 만들 기분이 아니었다. 이대로 산에 올라 재료를 채집하고 신선단을 만들어도 제대로 된 신선단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무영은 자신의 이런 상태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간 신선단을 만들어 오며 숱한 경험을 했다.
만드는 데 실패하기도 하고, 만든 신선단을 짐승에게 도둑맞기도 했다. 때론 눈앞에서 신선단을 뭉개는 모습도 봐야 했다.
그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충격은 처음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무영이 신선단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흑수검마......'
흑수검마에게서 느껴졌던 그 기이한 기운이 무영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복잡하고 기괴한 기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내 뇌기를 막으려던 그 방법.......'
예전에 한 번 봤던 동작이다. 당시 너무나 강렬한 느낌이었기에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금령이 강악의 뇌기를 막아낸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럼 구대흉마가 사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단 뜻이로군. 그리고 은왕도......'
무영이 흑수검마의 복잡한 기운에 계속 신경을 쓰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거기서 은환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흑수검마는 분명히 은환을 복용해 그 힘을 얻었다.
'어쩌면 구해흉마 모두가 그랬을지도 모르지.'
분명 그랬을 것이다. 무림맹과 싸우다 죽었다고 알려졌으니, 다시 어머어마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치료로는 회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은왕이 그들을 거둬 은환으로 회생시켰다면 얘기가 맞아 떨어진다.
'은왕......'
너무나 복잡했다. 은왕에, 금령에, 구대흉마까지.
모든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다. 금령이 무영에게 했던 무림을 도모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 무림을 도모하려는 자는 은왕일 것이다.
'그래서 그때 그런 말을 했구나.'
당시 금령은 신선단의 보답으로 무영을 잠깐동안 가려주겠다고 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은왕으로 부터 가려주겠다고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후우."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다가 신선단이 몽땅 재가 되어 버린 일까지 뒤섞이니 절로 한숨이 새 나왔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무영이 고개를 돌려 보니 서하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서하린 옆에 있던 모용혜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무영은 그녀들에게 빙긋 웃어줬다.
"괜찮아. 생각이 좀 많아져서 그래. 생각이 너무 많으면 수련에는 도움이 안 되는데 말이야. 하하."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가 억지로 미소를 그려냈다. 억지 미소인 게 확연히 보였지만 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무영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무영은 두 여인의 미소를 보고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그녀들의 미소는 무영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무영은 잡스런 생각들을 털어 버렸다. 칼로 자르듯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충분했다. 무영이 마음을 달리 먹으니 일행의 분위기가 급격히 좋아졌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거죠?"
모용혜가 묻자, 무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목표는 천천히 약을 만들어 팔면서 운남으로 넘어가는 거였다.
한데 분위기를 보니 사천에서는 약을 팔기가 좀 곤란할 듯하지 않은가.
물론 당비연과 함께 있으니 그 정도 문제는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영은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운남으로 가야지."
무영의 말에 당비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가에 잠깐 들르시는 건 어떤가요?"
무영은 또 생각에 잠겼다.
"흐음, 당가라......."
궁금하긴 했다. 당비연과는 아직 서먹한 사이지만, 그래도 당백형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다.
가족이 없는 무영에게 어떤 이유로든 항상 무영을 챙겨주는 당백형이나 강악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무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들러 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대신 좀 더 빨리 갈 겁니다."
무영의 말에 당비연이 반색을 했다.
당가로 데려가면 당초양이 태워 먹은 신선단의 대가도 지불할 수 있을 것이고, 당백형을 살린 것도 모자라 내공까지 덧붙여준 엄청난 약의 보답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요."
결정이 나자, 일행은 일단 기세를 내뿜었다. 수레를 끄는 말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일행은 사천 성도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강악과 당백형은 바람처럼 이동해 단숨에 무한에 도착햇다. 밤에도 쉬지 않고 경공을 전개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사람들인데, 무영을 만난 덕분에 더 강해졌으니 며칠 정도 잠을 자지 않고 꾸준히 진기를 운용하는 것쯤은 우스웠다.
"드디어 도착했군."
강악의 말에 당백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 직후 신선고로 상처를 치료하고 달려왔기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먼지가 잔뜩 묻어 거지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일단 장원으로 돌아가야겠지?"
당백형이 고개를 저었다.
"먼저 정협맹과의 일을 마무리해야지."
"하긴, 빨리 처리애 버려야 홀가분하게 쉴 수 있겠지. 좋아."
강악이 정협맹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백형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뇌룡장이 있는 방향을 힐끗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악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금세 정협맹에 도착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처음에는 거지꼴을 한 사람 두 명이 나타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까이서 그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정문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이내 그나마 직급이 높아 보이는 무사 하나가 뛰쳐나와 강악과 당백형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맹주님과 장로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강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게."
무사는 다시 한 번 정중히 허리를 숙인 후,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강악과 당백형은 정협맹 안으로 들어서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만간 또 한 판 크게 붙을 모양이군."
강악이 중얼거리자, 안내하던 무사가 몸을 한 번 움찔했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악이 자신에게 말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강악과 당백형은 무사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꽤 크게 싸울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사는 맹주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기별을 넣었다.
이내 밖으로 나온 무사는 두 사람을 맹주의 집무실로 안해한 후,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돌아갔다.
맹주의 집무실 안에는 맹주를 비롯해 내외당주와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었겠지만, 지금 방에 들어서는 두 사람은 웬만한 사람이 아니다.
강악과 당백형이 들어서자 오히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위축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강악과 당백형은 아주 자연스러운 기세로 좌중을 압도했다.
맹주인 남궁무학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예전보다 더 괴물이 되어 버렸군.'
현 십대고수 중 첫 손가락에 꼽는 자는 혈마맹주 마철령이다.
비록 정파의 자존심 때문에 소림의 항마권왕을 마철령과 비슷한 경지로 꼽지만, 실제로는 마철령이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깝다고 은연중 인정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 강악과 당백형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을 접어야 할 듯했다. 이들이라면 마철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못 보던 새 뭔가 새로운 깨달음이라도 얻으셨나 보군요. 축하드립니다. 허허허."
남궁무학의 웃음에도 당백형과 강악은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까닥였다. 내심 부아가 치밀었지만 남궁무학이나 다른 장로들은 일단 꾹 눌러 참았다.
"우리도 빨리 쉬고 싶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 무림맹이 정협맹과 손을 잡기로 했네."
강악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미리 전서구를 통해 남궁명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강악과 당백형에게 듣는 것과는 감회가 달랐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맹의 일에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신 점 다시 한 번 감사를표합니다."
맹주의 말은 비록 정중했지만 일어서지도 않고 한 말이었다. 당백형과 강악은 코웃음을 쳤다.
"소문은 들었나?"
당백형은 느닷없는 말에 맹주는 물론이고 다른 장로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라니요?"
"혈마맹이 움직였다는 소문 말이야."
대번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다. 물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는 받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정협맹을 향한 움직임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허튼 소리나 늘어놓을 이유가 있나?"
당백형의 말에 맹주가 입을 다물었다. 당백형과 강악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두 사람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걸렸다.
집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에 불쾌함이 어렸다. 아무리 십대고수라지만 너무 심한 반응이었다.
"왜,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드나?"
강악이 시비조로 말하자 모두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맹주를 비롯한 장로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강악을 노려봤다.
"흥, 다 뒤집어엎으려다 참았더니. 쯧."
강악의 말에 남궁무학이 막 나서려는 찰나, 당백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궁명인지 하는 놈이게 보고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당백형이 너무나 적절한 순간에 흐름을 끊었기 때문에 남궁무학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잠시 굳은 남궁무학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다시 앉았다. 이 자리에서 화를 내봐야 자신만 손해다.
"보고는 받았습니다만......"
보고는 받았다. 무림맹과 손을 잡았다는 보고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남궁명이 무림맹주를 잘 설득해 사마를 척결하기로 했다는 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군."
남궁무학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무림맹으로 가는 도중에 혈룡대를 만났다는 보고는 받았나?"
당백형의 말에 좌중이 한 차례 술렁였다. 혈룡대라니!
"하면, 정말로 혈마맹이 움직였다는 말입니까?"
강악이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맹주를 쳐다봤다.
"그놈 아주 잘 도망치더군."
"예?"
남궁무학은 강악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궁명인지 뭔지 하는 놈 말이야. 혈룡대가 나타나니까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란 말이지. 우리는 모두 내팽개치고."
순간 집무실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설마 남궁명이 그런 일을 했다고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십대고수 씩이나 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남궁무학은 문득 지금 중요한 건 남궁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럼 혈룡대는......!"
"더 이상 혈룡대는 없다."
"오오!"
장로들이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환해졌다. 혈마맹이 보유한 무력부대는 세 개뿐이다. 그 중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십대고수에 의해서.
'과연 십대고수 둘이 모이니 다르구나. 천하의 그 누가 혈룡대를 괴멸시킬 수 있단 말인가.'
탄성이 잦아들자, 강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혈랑대와 혈호대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누구도 탄성을 지르지 못했다.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놀란 것이다.
"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 설마......"
강악과 당백형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사라져 버렸다.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는 모두의 눈에 있었는데 문을 나선 순간,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경지였다. 남은 사람들의 눈빛에 경탄과 질시, 그리고 은은한 절망이 뒤섞였다.
"후우, 정말로 아쉽기 그지없소."
남궁무학이 한숨을 쉬자, 여기저기서 비슷한 한숨이 새 나왔다. 오늘은 정말로 십대고수의 무서움을 톡톡히 경험했다.
"결국 혈랑대와 혈호대를 각각 하나씩 맡아서 해치웠단 뜻이니, 정녕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밖에......"
장내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정협맹에는 그런 절대고수가 없다. 그 아랫단계의 고수는 어느 곳보다 많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맹의 힘은 뛰어나고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당백형이나 강악 같은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절대고수의 힘이 절실하다.
"끌어들일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텐데......."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당백형은 사천당가의 사람이다. 사천당가는 정협맹과는 가는 길이 달랐다. 그들은 그저 사천을 장악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천수독왕은 몰라도 굉뢰번천장은 가능하지 않겠소?"
남궁무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도나 해봅시다. 외당주가 맡아주겠소?"
맹주인 남궁무학의 말에 외당주 서문공복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 보겠소."
그렇게 강악에 대한 일은 일단락되었다. 장로들이 얼굴에 은근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남궁 총관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총관의 물음에 남궁무학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곘소.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남궁무학은 내심 괘씸했다. 어찌 되었건 일이 끝났으면 맹으로 돌아와 직접 보고를 해야 옳다. 한데 달랑 서찰 한 장 보내고는 끝이다.
무슨 일이 더 있는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내 그렇게 일렀거늘......'
떠나기 전 남궁명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이번 일이 잘 풀리고 흑사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새로운 맹주가 될 준비를 하라고. 그러려면 일단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서 맹의 장로들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
'쯧쯧쯧.'
남궁무학은 속으로 혀를 차며 서문공복을 슬쩍 쳐다봤다. 차기 맹주 자리를 노리는 것은 남궁세가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골치 아픈 상대가 바로 서문세가였다. 남궁무학은 때때로 번득이는 서문공복의 눈빛을 살피며 조용히 한숨지었다.
정협맹을 나선 강악과 당백형은 홀가분한 얼굴로 힘차게 걸었다. 일단 뇌룡장으로 가서 무영이 준비해 놨다던 신선주라도 한 잔 마실 생각이었다.
꽤 피곤했지만 신선주 한 잔이면 피로 따위는 깨끗이 날아가 버릴 테니까.
뇌룡장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우뚝 멈춰 섰다. 떠나기 전과 전혀 변함없었다. 장원도, 정문도, 그리고 은은히 느껴지는 분위기도.
"왠지 아주 오랜만인 것 같구나."
강악의 중얼거림에 당백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역시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떠나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다. 한데 십 년은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다.
"들어가 볼까?"
정문으로 다가가자, 문이 열리고 안에서 무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색 무복을 입은 무사는 강악과 당백형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어르신!"
무사는 급히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뇌룡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악과 당백형은 뇌룡장으로 들어서며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빙긋 웃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우를 몰려왔다. 가장 머저 달려온 것은 뇌룡대였다.
"대주님을 뵙습니다!"
뇌룡대는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서 동시에 포권을 취하면 인사를 했다. 강악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얼마나 지독하게 수련을 했는지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예전과는 또 달랐다.
"허, 정말로 지독한 놈들이구나."
당백형은 얼마 전 사용한 신선단과 신선고가 떠올라 진저리를 쳤다.
뇌룡대는 그 신선단을 밥 먹듯 먹고 신선고를 목욕을 하듯 발라대며 수련을 한다. 그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쳤다.
"에잉, 독한 놈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굉장히 감탄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빠르게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수십 년을 수련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나 저 벼락 늙은이 수준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검법과 검진, 게다가 심법까지 갖췄으니 수련만 제대로 한다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었다.
뇌룡대는 뇌룡장에서 발전 가능성이 가장 큰 무사단이자, 가장 빨리 강해지고 있는 무사단이었다.
"그나저나 산적 놈이 안 보이는구나."
강악이 두리번거리며 엽광패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표중산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녹룡대주와 내총관께서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손님?"
강악은 그렇게 반문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과연 소명학도 보이지 않았다.
"양소소라는 분과 양소칠이라는 분입니다."
"양소소? 양소칠?"
강악은 물론이고 당백형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소한 이름이었다.
"무림의 인물은 아닌가 보구나."
표중산은 강악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림의 인물은 아닌 듯하지만, 양소칠이라는 분은 상당한 무공을 익힌 듯했습니다."
"그래? 뭐, 호위무사인가 보지."
강악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후, 씨익 웃었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
강악은 휘적휘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선주를 마실 생각에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당백형은 그런 강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로 하나둘 사라졌다.
뇌룡장은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영 일행은 당가가 있는 성도로 들어섰다. 보통 수레를 끌고 빠르게 이동하면 남강현에서 성도까지는 보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무영은 그 기간을 대축 단축시켰다. 물론 고생은 무영과 함께 있는 네 여인이 했다.
넷 중 가장 고생이 심했던 것은 당비연이고, 다음은 하미령이었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녀들 입장에서는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는데다 매일 신선주까지 마시니 힘들 이유가 없었다.
일단 성도에 들어서니 당비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이제 이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나와요."
당비연이 넓은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당가에 그냥 남는 게 어때요? 돌아다니면 고생이 심할 텐데."
무영이 넌지시 묻자, 당비연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끝까지 따라갈 거예요."
당비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자신이 일행의 짐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긴 싫었다. 여기서 그냥 당가에 남아 버리면 마치 도망자가 되는 듯해서 더 싫었다.
'어떻게 하면 나도 도움이 될까?'
엄밀히 말하자면, 무영을 따라다니는 네 여인은 모두 도움이 안 된다.
무영과 다른 사람들과의 능력이 너무나 차이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무영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다.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십대고수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당비연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당가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당가 사람이다. 당연히 당가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걸 몰래 가져와야겠어.'
당비연은 한 가지 물건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당가는 정말로 거대했다. 정협맹이나 무림맹의 규모도 어마어마했지만 당가는 그보다 규모가 더 컸다.
"정말 대단하네요. 규모에 압도당할 것 같아요."
하미령이 감탄하자 그 말을 들은 나머지 일행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천의 패자로군."
당가 정문은 사천의패자라는 말에 어울리 정도로 컸고, 지키는 무사도 많았다.
여덟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정문 안족으로도 꽤 많은 무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당비연은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달려갔다.
"헉! 아가씨!"
무사 중 하나가 당비연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당비연은 당가에서 나올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나왔다.
비록 나중에 당백형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당가로 소식을 보내주긴 했지만 당가 내에서는 당비연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당비연의 미소에 무사들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가주님께서 많이 염려하셨습니다."
가주라는 말에 당비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는?"
무사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당비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일단 들어가 볼게요."
당비연은 일행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사들이 그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아가씨. 이분들은 누구십니까?"
"아! 함께 여행하는 동료예요. 그리고......"
당비연은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떠오른 말을 과연 해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당비연은 결국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은인이기도 하죠."
당비연의 말에 당가 무사들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비연의 할아버지라면 당백형을 말한다. 십대고수이자 당가의 자랑인 천수독왕 당백형의 은인이라는 뜻이다.
"헉!"
그들은 놀란 눈으로 무영 일행을 바라봤다. 당비연은 그들의 반응에 내심 한숨을 쉬며 일행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정문 안쪽에 있던 무사 몇 명이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려 당가 내부로 사라져 갔다.
당비연은 그 광경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누가 왔다고? 지금 비연이라고 했느냐?"
현 사천당가의 가주이자 당백형의 아들인 당군위는 눈을 크게 뜨며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는? 아버지도 함께 오셨느냐?"
"아가씨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라는 분들을 데려오셨습니다."
"동료?"
"아가씨의 말로는 은인이시라고......"
"은인?"
"예. 천수독왕 어르신의 은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뭐라!"
당군위는 깜짝 놀랐다. 설마 당비연이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천수독왕 당백형이 누구인가. 무려 십대고수다. 십대고수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자다.
그런 당백형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그것도 은인이라 불러야 할 정도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안내해라!"
당군위의 외침에 당가 무사는 당황하며 급히 대답했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곧 도착할 것입니다."
당군위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흥분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이라면 인연을 엮고, 사실이 아니라면 치도곤을 내면 된다.
당군위가 완전히 마음을 가라앉혔을 때, 당비연이 도착했다.
"아버지......"
당비연은 활짝 열린 집무실의 문을 통해 당군위를 발견했다. 당군위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고, 이내 노기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직접 눈앞에서 확인한 당비연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아버지. 소개해드릴 분들이 있어요!"
당비연은 위기를 넘기기 위해 급히 외쳤다. 일행들 앞에서 혼나기는 정말로 싫었다.
당비연의 외침은 그대로 먹혔다. 당군위의 시선이 당비연 뒤에 있는 일행에게로 향한 것이다.
당군위가 당비연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당군위는 넘어가주는 척 하면서 당백형의 은인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피고자 했다. 하지만 당군위는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다들 지나치게 젊은데? 모두 우리 비연이 또래 아닌가.'
당비연은 서둘러 일행을 소개했다.
"이쪽에 있는 분이 화무영, 화 소협이고, 이분이......"
당비연은 일행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했다.
모용혜나 서하린을 소개할 때는 당군위도 눈빛이 흔들릴 정도로 놀랐다. 일단 그 미모에 한 번 놀라고, 그녀들이 가진 기운에 또 한 번 놀랐다.
'상당한 고수로군. 어찌 저 나이에 저런 기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당백형 때문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당군위도 굉장한 고수다. 사천의 패자라 불리는 당가의 가주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웬만한 무인의 경우 자세나 기세만으로도 얼마나 고수인지 파악할 수 있다.
당군위가 보기에 서하린과 모용혜는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을 듯했다.
"허어, 정말로 대단한 친구들을 데려왔구나."
당군위의 말에 당비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모든 위험을 벗어난 것이다.
"거기 서 있지들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너라."
당비연은 배시시 웃으며 일행을 이끌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님이 은인이 함께 왔다고 하던데, 내 안목이 짧아서 누구인지 확신이 안 서는구나."
당군위가 당비연을 슬쩍 보면 말하자, 당비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당비연은 조심스럽게 무영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자신이 한 말이 무영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염려가 되었다.
무영은 당비연의 시선을 받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비연의 표정이 다시 환해졌다.
"여기 이분이에요. 할아버지를 구해 주셨어요."
당군위의 날카로운 시선이 순식간에 무영을 훑었다. 당군위는 내심 상당히 당황했다. 무영에게서 별다른 특별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나칠 정도로 평범했다.
"허어, 그게 사실인가?"
당군위가 무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기에 본인에게 한 번 확인을 하고 싶었다. 물론 무영의 대답을 그대로 믿기로 어렵겠지만.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어르신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시지 않습니까."
무영의 말에 당군위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비연은 이렇게 어영부영 상황이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별로 없다니요!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을 잃었을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는데요!"
당군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무영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그게 정말인가?"
무영이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당군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군. 내가 아는 아버님은 그리 위험해질 일이 많지 않으신 분이라서 말일세."
당군위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백형이 어떤 사람인가. 천하에 그 누가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단 말인가.
당비연은 자신의 말을 부친이 쉽게 믿어주지 않자 답답해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나서서 설명을 했다.
정협맹의 일을 돕기로 한 것부터 시작해서 혈룡대를 만나고 또 혈룡창에 당백형이 당한 것까지 열심히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당군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게 정말인가?"
"아이 참, 정말이라니까요. 제가 몽땅 목격한 일이에요. 제 눈으로 본 것만 얘기한 거라고요!"
당군위가 놀란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당금 당비연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무영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무인을 살리고 내공까지 급증시킬 정도로 대단한 영약을 만들 수 있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당군위는 당비연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을 모두 믿기에는 얘기가 너무나 허황됐다. 보통 영단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약왕문의 영단인 영생단의 경우 하나를 연단하는데 무려 십 년이 걸린다.
한데 당비연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백형을 살린 영약은 고작 며칠 만에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사태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과장되었겠군.'
당군위는 일단 그렇게 판단했다.
"하면, 자네는 지금 약장수라는 뜻이로군."
"예."
무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영은 약장수라기보다는 뇌룡장주라고 해야 옳다.
그들에게는 그게 훨씬 더 중요하다. 십대고수가 둘이나 있는 뇌룡장의 주인이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무영에게 있어선 뇌룡장주보다 약장수가 훨씬 더 친숙하고 중요했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당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피곤한 사람들을 너무 오래 붙잡아 뒀나 보군. 이제 가서 좀 쉬도록 하게."
당군위는 그렇게 말하고 손짓을 해서 집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던 시비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이 아이를 따라가면 될 걸세. 그리고 비연이는 남거라."
당군위의 말에 무영을 비롯한 세 여인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고, 당비연의 안색은 조금 창백해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무림맹주 옥청학은 안균과 지경복을 노려봤다. 두 사람은 옥청학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실패를 했으면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아니오!"
"크흠. 일단 취하긴 했소이다만......"
"당분간은 좀 어려울 것 같소이다."
안균과 지경복의 말에 옥청학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눈빛이 분노로 가득했다. 맹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안균이 급히 나서서 설명을 했다.
"그들은 지금 사천에 있소. 당가의 눈이 미치는 곳이라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고 하오."
옥청학의 눈이 차가워졌다. 물론 안균의 말을 이해한다. 사천은 당가의 영역이고, 지금의 무림맹으로서는 당가를 건드리기가 상당히 껄끄럽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균의 말은 실패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실패에 대한 대가는 변명이 아니라 책임지는 것으로 치러야 한다.
"그래서, 그놈들이 계속 당가에 숨어 있게 만들 셈이오?"
안균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맛만 쩝쩝 다셨다. 보다 못한 지경복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그놈이 언제까지 사천에만 있지는 않을 거요. 일단 사천에서 나온 이후, 아니, 당가의 눈이 떨어지기만 하면 즉시 처리하도록 하겠소."
지경복은 이번 일에 자신이 비밀리에 키운 힘 모두를 쏟아부었다. 은환으로 키워낸 살수들을 몽땅 투입한 것이다.
그것은 안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당가와 얽히지만 않으면 언제라도 무영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옥청학이 한심하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그렇게 한단 말이오?"
안균과 지경복이 말을 못하고 다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옥청학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놈이 당가에 머무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으리란 보장을 할 수 있소? 당가는 사천 그 자체요.
당가가 알게 되면 사천 전역에 소문이 퍼질 거요. 그러면 어찌 되겠소? 천하가 몽땅 알게 만들 셈이오? 난 지금 이 순간도 이렇게 불안한데!"
옥청학의 말에 그제야 안균과 지경복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곤경에 빠지자, 청수진인이 슬며시 나섰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약속을 헌신짝처런 내버릴 사람은 아닌 듯했소만......"
청수진인은 지금 이 자리가 너무나 불편했다. 자신은 이미 이들에게서 빠져나가기로 작정을 한 사람이다.
은환으로 얻은 힘은 모두 버렸다. 그리고 금제에서도 벗어났다. 혼자만 빠져나가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마음은 정말로 편했다.
'날 진창에서 구해준 은인인데...... 그 은인을 죽이고자 논의하는 자리에 태연히 앉아 있어야 하다니......'
청수진인이 씁쓸한 표정을 짓자 옥청학이 묘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래서 그냥 두고 보기만 하겠다는 거요? 무당파는 빠져나갈 구멍이라도 파 놨단 뜻이오? 정말로 그런 뜻이오?"
옥청학의 추궁에 청수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오."
"설마 그놈이 청수진인의 말처럼 입이 무겁다 해도 우리는 그를 제거해야 하오. 계속 불안에 떨면서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소? 그리고 그놈을 살려두면 나중에 분명히 걸림돌이 될 거요."
청수진인은 더 이상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집무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옥청학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문을 내면 어떻겠소?"
"소문이라니요?"
"그놈이 신단을 만들 수 있다고 소문을 내는 거요."
장로들이 눈을 번득이며 옥청학을 바라봤다. 옥청학은 그들의 눈빛에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알아보니, 생각보다 기이한 소문들이 많았소. 그놈과 관게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선이니 약선이니 하는 자들에 대한 소문이 여기저기 퍼져 있더란 말이오."
"그런 소문이야 어리석은 무리의 과장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
의선이나 약선에 대한 소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하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소문마다 등장하는 의선이나 약선이 동일인물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베풀면 금세 의선이 되고, 약을 무상으로 주면 바로 약선이 되기도 한다.
"그놈의 행적을 조금 파고들었더니, 꽤 대단한 약을 여기저기서 만들고 다닌 모양이오. 상처를 단번에 치료하는 금창약이라던가, 내상을 단숨에 낫게 하는 요상단 같은 것 말이오."
"호오, 그거 정말 대단한 약이로군요. 그 정도면 약왕문의 호심단보다 훨씬 뛰어난 약 아니오?"
약왕문의 호심단도 굉장히 뛰어난 요상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단숨에 내상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내상이 아주 가벼운 경우라면 몰라도 깊은 내상을 입으면 어러 날 동안 정양을 하면서 호심단을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
"뭐, 조금 기묘한 소문이 있긴 하지만 뛰어난 약은 맞는 모양이오."
"기묘한 소문?"
"그 약을 먹으면 고통에 몸부림쳐야 한다던가, 뭐 그런 소문이었소."
옥청학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의 내용이 좀 얼토당토않았다.
약을 먹으면 치료가 되어야지 고통을 주면 어쩌잔 말인가. 그러면서도 뛰어난 약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옥청학은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그놈이 여기저기 약을 뿌리고 다녔다는 거고, 약선이나 의선에 대한 소문이 곳곳에 퍼져 있다는 거요."
그제야 장로들의 눈이 다시 번득였다. 옥청학은 바뀐 분위기를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그 소문과 그놈의 행적을 적절히 조합해서 그럴듯한 소문을 만들어내 퍼트려야 하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거요."
내공을 키워줄 수 있는 영단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욕심을 내는 물건이다. 그런 영단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욕심을 내는 부류가 생긴다.
"힘 있는 무가에서 눈에 불을 켜겠구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영단을 제조하려면 약재가 필요하다. 보통은 영약이 필요하지만 소문은 그렇게 내지 않을 것이다.
희귀한 영약이 아니 그저 뛰어난 약재들만으로도 영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누구라도 욕심을 부릴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면 오히려 우리의 비밀이 알려질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소?"
"그럴 위험은 낮을 거요. 한두 명이 모여들 것도 아닌데 그런 혼란스런 와중에 우리의 비밀에 대해 말할 정신이나 있겠소? 그리고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것도 아니니 위험은 훨씬 적을 거요."
옥청학의 말에 장로들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제 남은 자들도 감춰둔 힘을 꺼내 놓을 때다. 장로들이 결연한 눈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당가에는 얼마나 계실 건가요?"
"글쎄. 난 한 사흘 정도로 예상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네."
"공자님, 사흘은 벌써 지났어요."
무영 일행이 당가에 머물기 시작한 지도 벌써 닷새가 지났다. 이제 슬슬 떠나야 하는데, 당비연이 문제였다.
"그냥 비연이는 두고 가는 게 어때요?"
"이미 약속을 했으니 그래선 안 돼요."
하미령이 급히 나섰다. 그녀는 당비연과 꼭 함께 가고 싶었다. 서하린과 모용혜가 하미령을 슬쩍 쳐다봤다.
가만 생각해보면 굳이 따라올 필요가 없는 사람은 바로 하미령이다.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미령은 두 여인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해. 곤란해 하시잖아. 나도 하 소저와 생각이 같아. 일단 약속을 했으니까 되도록 기다려 줘야지."
서하린이 조용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따라야지요. 누구보다 급한 분이 바로 오라버니신데......"
무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나저나 정말 이제 슬슬 당 소저도 결론을 내려야 할 텐데......"
당비연은 지금 당군위의 허락을 받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당군위는 물론이고 당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비연이 당가를 떠나 여행하는 걸 원치 않았다.
무영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하미령이 눈을 번쩍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무영이 흠칫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만큼 하미령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박력이 대단했다.
"화 소협께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하미령의 말에 무영은 물론이고 서하린과 모용혜마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당비연의 문제는 당가의 문제다. 그런 문제에 외부인이 끼어들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미령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전혀 곤란하지 않아요. 화 소협께서는 천수독왕 어르신과 친분이 있잖아요. 그걸 이용해서 당 소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하미령은 무영에게 허리까지 숙이며 부탁을 했다. 무영은 잠시 그 모습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뭐 조금 생각을 해보도록 하죠."
무영의 대답에 하미령이 환한 표정으로 연방 허리를 굽혔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소협."
무영은 그 모습을 어색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첫댓글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즐독...감사...꾸벅
재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