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대림 시기부터 미사 중에 사용하는 표현 일부가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에 대한 응답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바뀌었습니다.(그런데 사제의 영만 함께 하면, 샂의 육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영성체 직전 사제가 하는 말 중에 "보라!"하는 단어가 "하느님의 어린양" 앞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특히 눈에 뜨이기도 하고 논란이 있었던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사제가 빵을 들고 성체를 축성하며 하는 기도 중에, 예전에는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바치는 내 몸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너희와 많은 이를........" 이라고 바뀐 부분입니다.
"모든 이"와 "많은 이", 과연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어떤 것이 더 맞는 표현일까요?
이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구원론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포괄적인 것일까요 아니면 배타적인 것일까요?
정답은 안타깝게도 배타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배타적이다!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느껴지시나요?
여기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우리말로 배타적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배제하는, 제외하는
2) 독점적, 특권적, 우선적
예를 들어 영어로, This is exclusive hotel이라고 하면, 이 호텔은 배타적이다. 또는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호텔이라고 번역하나요?
오히려 그 반대로,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호텔 즉 누군가에게 독점적인 호텔이라는 의미가 더 맞습니다.
이처럼 배타적인 구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소외시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특별히 그들에게 먼저 구원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선적인(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의 관점에서는 배타적일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 특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 즉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야 한다는 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선적 선택을 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 구원의 도구로 쓰이게 됩니다.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구원의 목적은 당연히 온 세상의 포괄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미사 거행 중에 모든 이가 아니라, 많은 이를 선택하여 사용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도 직접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너희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으리 피다."(마태26,28; 마르14,24 참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님은 굳이 모든 이가 아니라, 많은 이라고 하셨을까요? 우선 많은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를 가리킬까요?
예를 들어, 100억 원은 많은 돈이라고 할 수 있나요? 당연히 저 같은 사람에겐 100억원이라는 돈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단위입니다.
그런데, 지나 2018년 여름, 미국 기업 아마존의 창업자와 이혼한 사람은 위자료로 한국 돈 43조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즉시 절반을 기부했고, 나머지 돈도 자기가 쓸 만큼 쓴 후에 몽땅 기부하겠다고 했답니다.
그 사람에게도 100억 원이 적은 돈은 아니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엄청나게 많은 돈은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이라는 개념은 매우 상대적입니다. 동시에 한도 끝도 없다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이를 위하여라고 표현하신 것은 누군가를 제외하거나 배제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구원이지만 강요하거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대신에 많은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주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바로 자유입니다.
사랑한다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창조된 인간에게 완전한 자우, 전적인 자유를 주셨고, 그래서 인간은 의지적으로 자유롭게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구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 말장난 같지만, 이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깊은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선택할 권리가 없고, 게다가 중요한 것은 죄다 누군가가 정해준다면, 그런 사람을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의 인간다운 삶은 제한됩니다.
때로는 자유가 제한되더라도, 더 좋은 것, 더 중요한 것, 특히 구원에 필요한 것은 강제적으로라도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맞는 생각인가요? 하지만, 구원에 꼭 필요하니 사람들을 억지로, 강제로라도 매주 혹은 매일 미사에 오게 하고, 매일 기도하게 하고, 사소한 죄라도 지으면 아주 강력하게 처벌한다면 어떠시겠습니까?
구원받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제한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전체주의이고 각종 사이비 종교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그 길을 가도록 돕습니다.
세례 받고 성체를 모시는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이들 중에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보증받았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는 사람, 예수님의 몸을 자신 안에 정성껏 모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구원은 멀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이것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