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내포하다
문경희
씨마늘이 발을 내렸다. 파종 전에 하룻밤 침지를 했더니 밑둥치에 하얀 실밥 같은 뿌리를 내민 것이다. 왕성한 생명의 피돌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뿌리가 정精이라면 발은 동動이다. 끝내 한자락만 파고드는 것이 뿌리의 속성이라면. 끊임없이 앉은자리를 박차게 만드는 도구가 발인 까닭이다.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만 겨울이라는 냉혹한 계절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다는 다그침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마늘에 뿌리가 아닌 발을 달아주기로 했는가 보다. 나도 그들을 흉내 내며 마늘이 내민 뿌리를 발이라 읽는 중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발이난 마늘을 꾹꾹 눌러 심는다. 얼었다 녹았다, 비록 월동의 가풀막이 험난하다하여도 발의 투지가 저리 다부지니 옹골찬 봄을 의심할 수는 없겠다. 마늘을 심으면 마늘이 나온다는 당연하고도 싱거운 이치에 들떠 엉성한 초보 솜씨로나마 번잡을 떨어본다.
시골에 터를 잡은 후 씨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백지를 앞두면 야릇한 의무감부터 발동하는 글쟁이로서의 본능 때문인지 모르겠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화단을 보면 알 수 없는 부채감이 나를 다그쳤다. 꽃씨를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름은 물론,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씨가 맺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이 태반이었다. 그런 처지에도 길을 걷거나 남의 집 담벼락을 기웃거리며 욕심껏 꽃 진 자리를 훑었다. 뿐인가. 농군들의 SNS에 씨앗 나눔글이 올라오면 체면불고 염치불고 '저요!'를 외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구걸한 씨 덕분에 올봄 우리집 화단이 제법 봄다웠다.
흙이라는 모태에 수십 가지 꽃의 자식들을 묻었다. 해토머리를 지나자 그들은 연둣빛 기척으로 생존신고부터 했다. 정성의 밑거름을 두둑하게 깔아놓고서도 기다림이라는 인고의 추비를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만개에만 환호하던 나로서는 줄기와 잎을 거쳐 꽃에 다다르는 느리지만 꿋꿋한 씨의 보법에 조갈이 나기도 했다. 그런들 우물에서 숭늉 찾는 우愚를 범하랴. 저만치 앞서는 마음을 불러들이며 줄탁동시의 주문을 고명처럼 얹었다. 몇 번의 기대와 몇 번의 허탕 끝에 만났던 첫 꽃의 환희라니. 씨, 그 고요한 반전은 번데기를 탈피한 한 마리 날 것의 비상처럼 경이로웠다.
'여기가 머리구요, 여긴 심장. 심장 뛰는 소리 들리시죠? 손가락, 발가락도 모두 정상이고, 건강하네요.'
까마득한 초음파실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내 안에 착상한 작고 까만 점에서 심장이 쿵쾅거리는가 싶더니, 손발이 나오고 눈코입이 선명해지는,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더러는 웃기고 더러는 울려가며 좌충우돌의 사춘기를 보내고, 이제는 나보다 훌쩍 덩치가 커버린 아이들 역시 0.05mm, 티끌만 한 씨에서 발원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 한다면, 뿔처럼 솟구쳐 원성을 샀던 아들 녀석의 송곳니도, 딸아이의 손톱 속 하얀 초등달도, 두 녀석 공히 말수가 적은 성향까지도 씨 속에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백일홍이 피고, 분꽃과 채송화와 달맞이와 맨드라미와…, 각양각색의 꽃들이 돌림노래처럼 화단으로 번져갔다. 어렵사리 발아한 시계초 씨는 시계를 똑 닮은 연보라색 꽃을 내다 걸었고, 해바라기는 세숫대야만 한 얼굴로 담장 밖을 노랗게 기웃거렸다. 호기심으로 묻어두었던 박 씨에서는 조롱박, 자루박, 청자박이 꽃만큼이나 환하게 허공을 밝혔다.
붉고 푸른 색감의 꽃과 형언 못할 향기까지, 씨는 자기만의 순서로 가진 것들을 끄집어냈다. 붕어빵 속에는 붕어가 없다지만. 씨는 이미 자신이 만들어 낼 완성체까지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알갱이들의 분투 덕분에 무덤덤하던 일상에 연일 총천연색의 감탄사가 만발했다. 내가 발견한 씨의 내포는 역동성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경탄케 한 것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 씨였다. 씨의 시간을 동행하며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었어도 결국 처음이 되는 요상한 사칙연산이 그들만의 세계에 있었다. 장난감 요요처럼, 제 세상을 양껏 구가하고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씨. 그것이야말로 물화된 미래지향이요, 종種을 완성하는 한 권의 모노그래프monograph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씨에 연연했던 것은 새로운 출발선 상에서 희망을 캐는 작업이었노라고 은근슬쩍 미화를 해본다.
어느새 등줄기가 서늘하다. 겨우 마지막 마늘을 꽂은 참인데 내 그림자가 저만치 멀어져 있다. 종자로서의 한 톨 마늘 속에는 자신이 뜨겁게 극복해나갈 겨울의 시나리오가 마련되어 있으리라. 하여, 서리가 내리고 한파가 몰아쳐도 꽁꽁 언 동토를 헤집으며 튼실한 뿌리의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 초 긍정의 주문으로 툴툴 하루를 털고 일어선다.
먼 산자락에서 태양의 뿌리가 들썩인다. 태양이 숭덩 뽑혀나간 세상에는 절망 같은 암흑천지가 할거를 할 것이다. 비록 쫒기듯 귀가를 서두르지만, 주눅 들지는 않는다. 밤이 파종해 둔 어둠의 씨가 무엇을 품고 있을지, 웬만큼은 어림치기 때문이다.
첫댓글 씨를 주제로 어쩌면 이렇게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3회 순수필 문학상 수상작이더군요. 한 번 감상해보세요. ㅎ
참으로 강렬합니다. 글이 총천연색을 띠고 있네요. 뭔지 모르게 굵은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꾹꾹 눌러 공책 뒷면까지 툭 불거져 나오도록 쓴 느낌이랄까요??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 듯 합니다. 근데 희한하게 너무 잘 써서 질투가 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여백’이 느껴지지 않는 건 왠일인지요? ㅎㅎㅎ
다리아샘, 읽어줘서 고마워요. 회원님 감상하시라고 책 보고 열심히 타이핑해서 올렸어요. ㅎ
회장님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만 직접 타이핑하셨다는 글에 놀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