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99)>
-장희빈(6)
기사환국으로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장희빈으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졌듯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인현왕후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숙종은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이 단칼에 권력 교체를 해버린 후 곧 “예로부터 임금은 참작하고 선처하여 용서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이제 은혜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폐비를 별궁으로 옮겨 수직하고 늠료(봉급)도 주도록 하라”
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별궁으로 옮기는 날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이제 별궁으로 옮기면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이에 인현왕후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며 숙종이 보내 온 의대를 사양하셨습니다.
- 천만 뜻밖의 옥찰이 내려오니 감격에 눈물만 흘릴 뿐 무슨 말씀을 하리이까
의대를 받네 안받네를 두고 몇번의 연애 편지를 더 주고 받은 후 인현왕후는 궁궐로 다시 들어왔고, 숙종은 자신의 경솔을 용서하라며 버선 발로 맞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궁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된지 5년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 35세 였습니다.
이어서 인현왕후를 중궁전의 주인으로 삼은 것은 물론입니다.
한편 인현왕후 환궁에 크게 기여한 숙원 최씨는 이 일로 숙종과 인현왕후 사랑을 동시에 받게되었고, 숙빈 직첩을 받은뒤 급기야 왕자를 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왕자가 훗날 영조가 됩니다)
졸지에 중전에서 밀려난 장희빈의 충격과 낙담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과연 장희빈은 장희빈...
장희빈은 제주에 유배된 오빠 장희재, 그리고 희재의 첩이었던 숙정과 일부 남인을 동원해서 중궁전을 다시 탈환 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번 더 바뀌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느냐)
그러나 장희빈 뜻대로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 부터 7년 후 오히려 비극의 종말이 다가 왔습니다.
1701년(숙종 27) 8월14일 인현왕후가 승하하였는데, 그 직후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했던 일 등이 모두 발각된 것입니다.
안 그래도 죽은 인현왕후에게 부채 의식이 있던 숙종은 “ 내 그럴줄 알았다”며 대노해, 장희재를 참형 시키고, 장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 등 소론을 몰락시켰으며, 드디어 장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대신들은 장희빈 아들인 세자를 생각해 사사만은 면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숙종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장희빈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했다는 죄목으로 42 년의 생애를 마감하고 사사되고 말았습 니다. (묘소는 서오능)
장희빈의 인생 역정은 궁중 여인으로는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다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00)>
- 유약한 왕 경종 즉위
46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 효종, 현종 때와 다른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켰습니다.
숙종이 반정의 위기 없이 여러 차례 환국 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사대부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상대 당에 대한 원한에 사로 잡혀 숙종 환국정치에 편승했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상대 당을 제거하기에 바빴으며, 또 다른 환국을 우려해 임금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숙종의 정치는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숙종은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하였고(전성기 때 광해도 못한 일),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유통시키는 등 어느 정도 의미있는 치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널리 알려진 도적인 장길산이 이때 활동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만 합니다. 장길산 일당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서 활동한 대규모 도적 집단으로 조정에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많은 상금을 내걸기까지 했지만 끝내 잡히지 않았습니다.(대단합니다)
성호 이익은 그를 홍길동, 임꺽정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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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1720년(숙종46년) 6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경종이 이었습니다.
세 살에 세자 책봉되고, 14살에 생모인 장희빈의 죽음을 맞이 했으며, 생모가 죽고 난 후 19년을 불안과 긴장 속에 보냈습니다.
부왕 숙종은 살가운 애정을 걷어 들였고, 막강한 정치 세력인 노론은 애초부터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방에 그의 실수만 바라는 눈들이 번득였습니다.
세자 생활이 무려 30년, 그 중 특히 근심 걱정하며 하루 하루를 보낸 것이 19년이니, 몸은 병들어 갔고 정신은 피폐해져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나마 경종을 지켜 준 것은 소론, 그러니 새 임금 경종은 소론 임금이라 불러도 좋았습니다. (조선 후기는 붕당의 시대!)
그러나 조정은 노론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소론은 기반이 약했으며, 경종은 판세를 뒤집을 만한 힘과 지략이 없었습니다. 경종의 앞날이 암울합니다~
담에 이어서~
장희빈으로 인한 개벽할 역사적 결과는 지금까지 본 것처럼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연유와 경위로 하늘과 땅을 거푸 밟았는지 알 수 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장희빈의 인생은 영원히 드라마의 극적인 소재가
될 수 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역사는 비록 한줄로 기록되지만 이처럼 많은 사연의 결과물들의 축약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에너지 또한 넘치기에 상상의 나래를 펴면 스토리를 지닌 역사의 매 순간이 드라마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우리의 역사는 오천년의 유구하고, 찬란하고, 강인하게 이어져 왔다고 배웠는데 알것 다 알게 된 나이
되니 최근 천년은 그리 맞는 말은 아닌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 맞는 말은 아니지만 그 동안 역사를 보며 주변국과의 관계를 읽는 혜안들을 지니셨을 겁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101)>
- 노론의 무리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노론세력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경종을 압박했습니다.
사실 노론세력은 경종의 생모 장희빈을 제거한 데 대한 보복을 우려해 경종의 즉위를 막아 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바도 있었습니다.
노론세력은 소론세력이 경종을 충동질하여 보복을 하거나, 경종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 엉뚱한 종친을 양자로 삼아 세자에 책봉해 버리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노론 세력이 밀고 있는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습니다.
노론세력은 경종의 심신이 매우 허약한 것을 노려 경종 1년에 계획한 바를 밀어 붙였습니다.
이정소가 다음과 같이 총대를 멨습니다.
-바야흐로 국세는 위태롭고 민심은 흐트러졌나이다. 그런데도 대신들이 저사를 세울 것을 청하지 않으니 신은 이를 개탄 하옵니다.
-빨리 이 일을 대비마마께 여쭈시고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심이 사직의 대책을 정하는 길이옵고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는 길인 줄 아옵니다.
경종이 보위에 오른 지 겨우 1년, 나이는 고작 서른넷이었고, 재혼한 왕비 이씨는 겨우 열일곱이었습니다.
이 때까지 자식이 없다면 득남을 위한 섭생을 권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일 것인데, 노론세력은 거침 없이 경종이 득남하지 못함을 전제로 또는 경종이 곧 죽을것임을 전제로나 할 수 있는 무리한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경종은 노론 위주 대신과 삼사의 거듭된 압박을 이기지 못해, 결국 노론은 경종의 배다른 동생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세제로 세우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수렴 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비의 결재를 받는 무례마저 뒤 따랐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어찌되었든 아직 젊은 나이였던 경종에게 신하들이 선동하여 동생을 세제로 삼도록 한 행위는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였습니다.
그런 뜻에서 노론 그리고 노론과 한배를 탄 연잉군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자 운명을 건 승부수였습니다.
이 대로 허약한 경종이 요절한다면 자신이 왕위를 넘겨 받을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경종이 후사를 본 후 후계 구도를 새로이 하거나 또는 선왕 숙종과 같은 강력한 환국을 추진한다면 연잉군이나 노론세력 모두 경종의 손에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102)>
- 경종의 함정
노론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세제로 삼도록 한 것은 엄연한 무리수였습니다. 소론이 이 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 소론 유봉휘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습 니다.
- 비록 그 성명을 다시 논의할 수 없을지라도 신하가 임금을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긴장한 노론은 즉각 유봉휘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습니다.
- 명이 내려져 온 나라가 기뻐하는데 유봉휘는 무슨 심장으로 국본을 흔드는 것인지 알수가 없으니 국문하여 저의를 밝히소서
논란 끝에 유봉휘는 유배를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조정이 온통 노론세력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세제를 세우는 일에 성공한 노론은 자신감을 얻은 김에 다음 단계의 일을 추진 하였습니다.
세제 책봉이 있은지 보름 후, 노론 조성복이 총대를 멨습니다.
- 전하께서 신료들을 만나거나 일을 결정하실 때 세제를 불러 시좌케 한다면 나라 일에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세제에 의한 대리 청정을 감히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는 물러나라는 주장 못지 않은 위험천만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경종은 즉각 대리청정을 수용하는 비망기를 내렸습니다.
-내게 병이 있어 만기를 친람할 수 없으니, 영명한 세제로 하여금 대소 국사를 모두 청정하게 하라.
궁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소론 최석항은 늦은 밤에 달려와 청대해서는 명을 거두어줄 것을 울며 빌었습니다.
그러자 경종은 한번의 물림이나 망설임도 없이 대리청정의 명을 회수해 버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자 대리청정을 말리지 않은 노론계 대신들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은 죽기로 이를 말리는 것이 왕조시대 신하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소론 대신들이 이를 비판하자 노론계는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반격을 가하였습니다.
- 중신 최석항 깊은 밤 청대는 규례에 어긋 나는 일이니 최석항과 이를 아뢴 승지를 벌하소서.
그러나 모처럼 기세를 잡은 소론은 물러나지 않고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었으며, 밀리면 역도로 처단될 수도 있는 노론 역시 사생결단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말 없이 지켜보던 경종은 다시 비망기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세제로 하여금 대리 청정토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왔다리 갔다리~ 경종이 남모르게 함정을 파는 분위기입니다.
담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