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익산 쌍릉(益山雙陵)과 익산토성(益山土城)
☞익산 쌍릉(雙陵)
익산 금마에서 팔봉 간의 국도변 면(面) 경계쯤에서 미륵산 쪽으로 500여m 떨어진 야산에는 사적 제87호의 백제의 서동과 선화공주 무덤이라는 두개의 왕릉이 있다.
초등학교 소풍 때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교통이 좋은 길목에 있으면서도 늘 이곳 옆을 차량으로 통과할 때 도로가에 관광안내 표지판을 스치면서도 언제인가는 가본다 하면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여태껏 미루다가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답사를 하니 조금은 겸연쩍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조상문화는 백제인이라 하면서 고려시대에 왜구의 손모가지로 봉분을 파헤쳐 도굴해가고, 무슨 염치로 최근에는 발굴조사에 또 못된 손목댕이로 참여했는지 그놈들의 심보를 알 수가 없다.
무덤 형식은 굴식 돌방무덤이란다.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 중 크고 북쪽에 있는 무덤은 ‘말통대왕릉’ 또는 ‘대왕릉’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남쪽에 있는 규모가 약간 작은 능은 ‘소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의 ‘말통’은 서동의 이름인 마동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라 한다.
-관광 안내 표지판을 보니-
능은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분하는데 백제 말기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하며 좌향은 남향이다. 1917년 일인학자에 의하여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형의 봉토(封土) 주위에는 호석(護石)을 두른 흔적이 있으며, 내부에는 석실(石室)이 마련되어 있었단다.
대왕릉의 현실(玄室)은 장방형으로 벽은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세웠으며 천정과 벽 사이에 육각형의 말각부재(抹角部材)를 끼워 구축 하였으며, 현실 중앙에는 화강암의 관대(棺臺)가 있는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양으로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단다.
소왕릉은 전면 중앙에 짧은 연도(고분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가 있으며 입구는 판석으로 막아 놓았으며, 두 능은 모두 동시대의 것으로 안타깝게 발굴 조사 이전에 도굴 당하였으나 부패된 목관과 토기 등이 수습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출토 유물과 현실의 규모 및 형식이 부여능산리 고분과 비슷하여 백제 말기의 형식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익산토성(益山土城)
익산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서쪽 1.5km 떨어진(익산 쌍릉에서는 약 2km 정도임) 오금산(五金山)의 구룡상에 위치한 사적 제92호로 뒤에는 미륵산, 앞에는 익산평야가 보이는 곳에 있는 690m의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오금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 산성으로 일명 오금산성, 보덕성이라고도 한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반 친구들이 사는 동네이름 정도의 오금산으로만 알았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단순한 지명으로만 알았는데 2015년 세계문화 유적에 익산의 백제문화권이 등재되어 정부의 문화유적 발굴 및 보존에서 부각된 곳이기에 생전처음 찾은 곳이다.
이곳 산성입구까지 오는 데는 아직도 자동차 길이 정비가 안 되어 산골마을 도로정도의 길을 꼬불꼬불 휘청휘청하는 길이라 자동차를 달래가며 겨우 찾아 왔다.
마을 주차장에서 10분 정도 걸으니 익산토성의 발굴 현장에 도착하였다.
‘오금산성(五金山城)’, 보덕성(報德城)‘ 이라 불리어 지는데, 오금산성은 백제 무왕이 어려서 이곳에서 마를 캐면서 오금(五金)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리고 보덕성은 보덕국왕인 안승이 670년 6월 금마저(金馬渚=현 익산)에 자리 잡은 후 684년 11월까지 보덕국이 자리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정상 능선의 산성을 삥 둘러보는데 산성 안쪽에는 아직도 토기와 기와류 조각들이 즐비하게 내동댕이 쳐있어 토성을 쌓고 살던 시기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아우성의 울부짖음의 파편으로 보여서 마음이 편치 않아 눈을 다른 데로 돌려 긴 호흡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