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보와 허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 매카시 열풍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이익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목적을 내걸고 ‘반미 활동에 관한 미의회 위원회’가 결성됐던 겁니다. 그때 위원회는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고 그들의 창작행위를 꺾어버렸습니다.
달튼 트럼보는 영화 대본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였습니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엑스트라, 조명, 음향 등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할 때 지지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영화를 더욱 잘 만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고, 합리적인 분배를 통해 협동심을 배가 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트럼보는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11개월을 감옥에서 지나다 나오니 영화사를 지배하는 자들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위원회’가 영화사를 관리 감독하면서 그의 각본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기 힘들었던 트럼보는 결국 열 개의 가명을 가면처럼 쓰고 대본을 써서 팔았습니다.
그 시절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의 딸이 물었습니다. 아빠가 쓴 영화 시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음료수를 뿌리며 “공산주의자!” 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빠는 정말 공산주의자예요?”
그러자 한참을 고민하던 트럼보는 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가 있다면 그와 도시락을 나눠먹겠니, 아니면 너 혼자 먹겠니?”
“사이좋게 나눠먹어야죠.”
“아빠도 사람들과 사이좋게 나눠먹자고 주장했을 뿐이란다. 그런데 그걸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우리 딸도 공산주의자구나.”
영리했던 딸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고 수줍게 웃었습니다. 그 후 딸은 아버지의 대본을 아무도 몰래 영화사에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아버지와 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성장한 딸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왜 아직도 아빠의 정체를 숨겨야 하나요? 이젠 진실을 말해도 되지 않나요?”
아버지의 대본이 아카데미상을 두 번이나 받게 됐는데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서글픔이 딸에게 한처럼 쌓였던 겁니다. 트럼보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밝힙니다. ‘로마의 휴일’과 ‘용감한 사람’의 작가라는 것을!
우리나라에는 허균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홍길동전”을 썼던 문인이었습니다. 사대부들이 한글을 업신여기고 있던 그 시절, 그는 많은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홍길동전”을 한글로 썼습니다.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척결하고, 지금의 비정규직 같은, ‘서얼’ 차별 철폐를 위해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새로운 왕국을 건설해 나가는 이야기를 소설화시킨 것이지요.
그는 세상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며 백성을 세 부류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로 항민이 있는데,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는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원민이 있는데, 모질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윗사람들을 원망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호민이 있는데, 세상사를 날카롭게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이 오면 새로운 것을 실현하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는 사람들을 무한경쟁으로 몰아넣어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살아가면서 실감이 나다 못해, 끔찍한 현실로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 정권을 쥐고 있는 무리들은 무한경쟁만이 살 길이라고 온몸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분리, 정규직과 정규직의 분리, 그 ‘분리의 진실’은 노동자들을 적은 임금으로 부려먹고, 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가로막고, 노동자들을 손쉽게 부려먹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수많은 말과 언어로 포장하고 있지만 성과급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수단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말 안 들으면 해고시키겠다는 서슬 퍼런 칼날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허균이 말한 호민이 돼야 합니다. 인간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무리들에 대항해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백성이 돼야 합니다. 트럼보처럼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와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그 길에 철도 노동자들이 앞장서는 모습, 보기 좋고 든든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하고 싶어 미약하나마 글로 외칩니다.
우리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성과연봉제’를 즉각 중단하라!
* 이인휘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8년 무크지 “녹두꽃”에 중편소설 ‘우리들의 억센 주먹’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활화산”, “내 생의 적들”, “날개달린 물고기”, 소설집 “폐허를 보다”가 있다. 2016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