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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림들이 일본의 내정간섭과 테러에 반발해서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이 일으키지만 이 또한 좌절되었다.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에 대한제국과 을사늑약 체결한 후 외교권을 빼앗고 점차 대한제국이 해체되면서 1910년 8월 22일 한일협방조약이 체결되고 일주일 뒤에 대한제국은 멸망하였다. 이로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본에 반대해 자결하거나 만주로 망명을 떠나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점령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뒤에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무력으로 통치하였고, 토지조사사업 등을 실시해서 경제수탈을 하였다. 헌병경찰제도는 무단통치를 하기위한 제도로 전국에 경찰서를 설치해서 헌병이 경찰의 업무를 대신하게 하고, 헌병분대장 겸 경찰서장에게 즉결심판권을 주어 바로 처벌하였다. 주로 태형으로 처벌하였는데 태형은 형판에 조선인을 묶고 소 힘줄에 납을 달아 때리는 것을 말한다. 이로인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또한 당시 일본은 군사력만 비대하게 발전하여 식민지 투자할 자본이 없어서 식민지가 필요한 나라가 아니였음에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사유지를 공유지로 만들어 토지를 빼앗아 상당수의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만들어 수탈하였고, 토지나 산림, 광산, 어장 같은 원시적 자본을 빼앗는 형태로 자본 없는 자본 형성을 하였다.
조선의 민중들은 일제의 폭력과 억압 그리고 경제수탈이 극심해져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3·1혁명이다. 3·1혁명은 민족대표 33인들이 주도한 사건인데 대표들은 모두 종교인으로 천도교계, 기독교계, 불교계 출신들이다. 또한 민족대표 33인중 6명이 청주 출신이라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3·1혁명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의암 손병희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으로 천도교를 대표한 인물은 의암 손병희로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는 그의 생가가 있다. 그는 22세 때인 188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손병희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하지만 농민군이 패하면서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 처형되었고, 손병희는 은신하여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동학세력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삼남지방을 떠나 황해도, 평안도 등 북부지방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동학세력은 조직력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등이었다. 이들은 1896년 1월 최시형으로부터 각각 의암(義菴), 구암(龜菴), 송암(松菴)이라는 천도교의 도호(道號)를 받고 교단 조직 재건작업을 주도하였다. 최시형은 교세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북부지역에서의 포교활동을 중요시하였으며, 손병희에게 도통(道通: 정통 계승자)을 전수했다. 손병희는 1897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가 되었으며,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교단을 통솔하게 되었다.
손병희는 1901년 일본으로 건너가 국제정세와 근대 문물을 살피는 가운데 문명개화운동으로 대대적인 노선 전환을 꾀하였다. 동학농민운동에서 드러난 동학의 입장은 반봉건(反封建)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노선이었다. 농민적 입장에서 신분제와 지주제로 요약되는 봉건지배체제의 변혁을 꾀하고,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망명생활을 통해 국내 지배층과 외세를 모두 거부하는 동학의 노선이 시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손병희는 서양의 발달된 물질문명을 보면서, 그것을 ‘천지가 크게 변하는 창시(創始)의 운(運)’이라고 생각하였다. 문명화가 세계의 대세라는 것은 국외에 있는 그에게 너무나 확연한 사실로 판명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농민층의 ‘반란세력’이 아닌 시세를 아는 대안세력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동학세력의 노선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국내 집권세력으로부터 엄혹한 탄압을 받고 있던 처지에서 동학을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화파세력과 동학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일본을 끌어들여 정치적 입지를 확대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문명개화 노선으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개화론으로의 전환을 위해 망명개화파,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손병희는, 1902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을 동학에 입교시켜 자신의 참모로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망명개화파 세력들을 끌어들인 손병희는 1903년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여 동학의 노선전환을 공식화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이라는 세 가지 싸움인 삼전(三戰)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원의 부원(富源: 경제적 부를 생산할 수 있는 근원이나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키자는 재전, 외교관을 양성하여 각국과의 외교를 잘하자는 것이 언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동학을 국교로 하자는 도전에 근본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명개화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한 손병희는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러일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리적 관계, 전쟁에 임하는 동기, 군략과 병기문제 등을 들어 일본이 승리하고 러시아가 패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형편상 반드시 러시아와 싸워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전쟁에 이길 만한 편에 가담하여 공동출병 하여 승전국의 지위를 얻어야 하고, 그 지위를 얻은 뒤에는 강화회담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국가만전(國家萬全)의 조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 당국과 한국 정치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뒤에 일본을 위하여 러시아를 치고 다른 한편으로 국권을 잡은 뒤에 제 방면을 혁신하면 우리 한국의 재생의 길은 이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일환으로 일본에 군자금 1만원을 헌금하는 한편, 국내의 동학조직에 일본군을 지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이용구(李容九)와 일본군 통역이었던 송병준(宋秉畯)을 매개로 일본 군부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였다. 일본군의 신뢰획득을 통해 한국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종교, 정치결사로서의 행동의 자유를 얻겠다는 의도였다. 동학은 배일세력이 아니며, 일본군의 군사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 역시 군사 행동상의 안정, 한국 국내 치안유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였다. 일본군의 지원이 확인되자 손병희는 이용구에게 동학세력을 기반으로 한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하였다. 민회 조직은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1904년 9월 진보회(進步會)로 연결되었고, 12월 일진회(一進會)와 합동하였다. 이들은 동양평화를 위해 러일전쟁에 참여한 같은 황인종인 동맹국 일본을 돕는다는 방침을 명확히 하고, 철도부설과 군수물자 운반 등을 통해 일본군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손병희는 일진회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일진회가 1905년 11월 보호국 찬성에 대한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친일행위를 노골화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일진회에 대한 일반 민중의 반감이 자신들과 일치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 명의로 『제국신문(帝國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천도교 창건을 알리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리고 손병희는 이듬해 1월 천도교인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하였다. 손병희는 귀국 직후인 1906년 2월 10일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발포하였다. 「천도교대헌」은 제1장에 대도주에 관한 항목을 두었다. 그 내용은 ‘1조 천(天)의 영감으로 계승함, 2조 도(道)의 전체를 통리함, 3조 교(敎)를 인계(人界)에 선포함’이었다. 특히 3조에는 교단 운영과 관련된 ‘종령(宗令) 발포, 공안(公案) 인준, 교직(敎職) 선임’ 등을 대도주의 역할로 규정하였다. 즉 손병희는 「천도교대헌」을 통해 천도교단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와 권한을 ‘합법적’으로 갖게 된 것이었다.
손병희는 「천도교대헌」에 따라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고문실(顧問室) 현기사(玄機司) 이문관(理文觀) 전제관(典制觀) 금융관(金融觀) 서응관(庶應觀) 등의 부서를 두었다. 교단 지도부는 도사(道師) 육임(六任), 연원대표인 교령(敎領) 등으로 구성되었다. 1906년 3월 3일 전국적으로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하고, 연원대표인 교령을 교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교무를 담당하는 임명직 교구장과 천주에 대한 성념(誠念)과 사회에 관한 교화(敎化) 등을 담당하는 종신직 교령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면서 교무행정 기구인 교구(敎區)와 정신교화 기구인 연원제(淵源制)에 입각한 이원적 조직체계가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손병희는 이용구, 송병준에게 “금일 일진회의 지부가 각 군에 배치되어 정계 대소사를 간섭하니 회의 범위 가히 팽창하다 할지나 그러나 지부 직원이 다 시무(時務)에 난숙(爛熟)치 못하고 집무상태에 정당면목(政黨面目)을 보지(保持)치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구시외겁(舊時畏㤼: 옛적을 두려워하고 겁냄)의 여기(餘氣: 아직 남아 있는 버릇이나 관습)로써 갑자기 대기발양(大氣發揚: 큰 기운이 일어남)의 시(時)를 만나 많이 남용과분(濫用過分)하는 자 있음으로 세상의 비방을 초(招: 초래하다)할 뿐이니 이로부터 지방 지부를 폐하고 단(但) 경성본부만 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용구․송병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일진회에 대한 일반민중의 반감이 천도교단에까지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손병희는 1906년 9월 ‘교정분합설(敎政合分說)’을 제시하며, 이용구와 송병준 등을 출교시키고 일진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천도교에서 떠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손병희는 천도교단의 중앙과 지방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천도교리의 체계화에 노력하였다. 각종 교리서들이 천도교중앙총부 명의로 편찬되었다. 특히 1907년 출간된 『대종정의(大宗正義)』에서 인내천(人乃天)을 천도교의 교의로 공식화하였다. 이후 손병희와 천도교단에서는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인내천 교리에 대한 체계화 작업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인내천은 한편에서 천도교 종교의식의 원천이 되어 온갖 도법(道法)과 교화(敎化)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천도교 정치사상의 근저가 되어 온갖 이론과 행동을 규정짓게 되었다. 즉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포덕천하(布德天下: 덕을 천하에 편다는 뜻으로, 세상에 천도교를 널리 보급함을 이르는 말), 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백성을 구제함)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지상천국 건설이란 ‘이 땅 위에 영육쌍전(靈肉雙全: 정신과 육체를 모두 온전하게 보존한다)의 천도교적 이상 세계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지상천국은 어떤 특정한 형식과 조건을 갖춘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시대 시대에서 각각 보다 좋은 신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상천국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천도교가 현실 사회 문제 개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여건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천도교에서는 새로운 사회(=지상천국)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종교적) 교화는 물론 물질적(=정치적)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종교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의 개혁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곧 ‘천도(天道)’의 완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이 성신쌍전(性身雙全), 교정일치(敎政一致: 종교와 정치는 일치함)라는 용어로 정리되어 1912년 4월 천도교 교리강습소 개소식에서 행한 손병희의 법설을 통해 천도교리로 선포되었다.
손병희와 천도교단은 3·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인 조직을 이용해 시위를 조직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각 기관이나 연원을 대표한 핵심지도자였던 손병희, 권병덕, 최린,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이종훈, 홍병기 등 15명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처럼 손병희와 천도교단이 3․1운동의 준비와 확산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은 ‘성신쌍전, 교정일치’라는 천도교리와도 무관치 않은 것이었다. 이는 손병희가 3·1운동 전날인 1919년 2월 28일에 대도주 박인호에게 준 ‘금일 세계 종족 평등의 대기운 하에서 우리 동양 동족의 공동 향복(享福)과 평화를 위하야 종시일언(終始一言)을 묵(黙)키 불능함으로 자에 정적(政的) 방면에 일시 진참(進叅: 참여함)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유시문(諭示文)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손병희는 3·1운동 관련 재판과정에서도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 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여, 정치와 종교의 유기적인 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강제병합 후 한국인을 항상 압박만 하고 관리로 채용하지 않는 등 정치적 차별이 심각함을 문제 삼았다. 손병희는 3월 1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상춘원에서 요양하던 손병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22년 5월 19일 향년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 정미의병 무적장군 한봉수
한봉수(1883-1972)는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8월 진천군 문백에서 일본 헌병 중위 등 3명을 사살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09년 문경에서 40여 명을 사살하고 망명을 기도하다가 서울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으로 출옥할 때까지 괴산 유목리, 미원, 낭성의 가래올, 장호원, 횡성, 전의, 목천 등 충청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4년간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34회의 전투를 통해 사살 70여 명, 무기노획, 포로 80여 명, 현금 77만 원 탈취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장으로서 의병을 모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4년 6개월동안 33전 1패의 격전을 치뤘다.
의병으로 봉기한 한봉수는 무적장군이란 별칭을 가진 그는 1909년 3월 청원구 내수읍 초정리 전투에서 일본군 중대장 이또오를 사살하고 보급탄환을 탈취하였는데 이때 이또오를 사살한 초정리 약수탕 뒷산 바위를 지금도 「한봉수 바위」라고 부르고 있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1910년 2월까지 2년 반에 걸쳐 모두 26회의 활발한 투쟁을 펼쳤다. 그의 투쟁 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 처단, 일본군과 교전, 우편행랑 습격과 군자금·무기 노획 등 다양하였다.
일제의 삼엄한 호위 하에 운송 중인 우편행랑을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것은 그의 대표적 활동이었다. 그는 6차에 걸쳐 우편행랑을 공격하는 투쟁을 벌여 모두 성공하였다. 그가 우편행랑을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행랑 속에 들어 있던 현금 때문이었다. 이 투쟁은 그의 정확한 정보수집 능력과 뛰어난 유격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우편행랑의 통과 일시와 지점, 호위병 수를 정확히 파악하였다가 유격하기 좋은 지형을 선택해 매복해 있다가 기습하였다.
이 같은 활동은 그의 고향인 가는다리와 초정 및 괴산과 진천 등지에서 전개되었다. 이곳 지형에 밝은 그에게 군자금 획득과 무기 노획을 위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노획한 현금을 군자금으로 활용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민중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또한 노획한 무기로는 열악한 무장을 보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일제의 의병탄압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한봉수를 지칭하며 "해가 갈수록 의병들의 첩보술과 경계술 등 전술이 일본 토벌대를 우롱할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고 실토한 것은 그의 활동을 잘 알려준다.
청주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진천을 가다 보면 문백면 옥성리에서 농다리로 가는 삼거리 국도변에 바위배기라고 불리는 조그만 동산이 있다. 이곳에는 매우 특이한 비석이 두개 서있다. 당초 그 정상부에는 1908년 6월 10일 우편행랑을 호위하며 이곳을 지나다가 한봉수의 사격으로 죽은 일본 헌병 상등병 시마자키(島崎善治)를 추도하기 위해 통감부가 세운 비가 서 있었다.
그런데 1977년 문백면 주민들이 그 비를 끌어내리고 주민 성금으로 만든 '한봉수항일의거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 당시 주민들은 이 비를 깨부수려 하였으나, 암질이 너무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자, 글자를 시멘트로 문질러버리고 한봉수항일의거비 아래에 세워 두었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의병장을 기리는 비와, 의병장이 사살한 일본군을 기리는 비가 함께 서 있는 의병투쟁의 현장이다.
공주지방재판소는 1908년 11월 20일, 궐석재판을 통해 한봉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는 그가 일제에 붙잡히지 않고 교묘히 활동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제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의병들의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에서도 일제는 그를 두려워하며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이 되자, 그도 대부분의 부하를 잃고 근거지를 상실한 채 피신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봉수는 충북경찰부에 '자수' 의사를 타진하였고, 전라지역에서 활동하던 문태수 의병장의 체포에 협조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충북경찰부는 그의 '자수'를 이용하여 문태수 의병장을 잡고자 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충북경찰부는 서울에 있던 그에게 형사대를 급파하여 체포해 버렸다. 그의 체포 소식은 즉각 통감, 경시총감, 헌병대장, 군사령관 등 일제 수뇌부에 보고되었다.
어떤 연구자는 그의 '자수 출원' 사실만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의 공적을 심하게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역사해석의 단견을 드러낸 것일 따름이다. 그가 '자수 출원'을 한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일제가 자수하겠다는 그를 서둘러 체포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그가 체포에 협조하겠다고 제시한 문태수 의병장은 1911년 8월에서야 붙잡혔다. 이때는 한봉수가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머물 때로서, 그가 문태수 체포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가 붙잡혀 청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일본인 검사와 내부 경무국장이 주고받은 전보는 그의 행적을 판단할 주요 근거가 된다.
즉, 일본인 검사가 그의 '자수 출원' 여부를 조회하자, 경무부장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체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회신하였다. 이는 그의 죄를 경감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자수 출원'에 따른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이해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죄 수범(首犯)으로 최고형인 교수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두 번째의 사형 선고였다.
만일 그가 의병 활동만으로 독립운동을 그만 두었다면, '자수 출원'은 흠결사항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합방대사령'으로 풀려난 그는, 3·1운동 때 고향에서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다가 피체되어 또 다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는 의병장 출신이 보통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만세운동을 벌인 유일한 사례이자, 의병과 3·1운동의 내재적 전승을 실증적 구체적 사례이다. 따라서 그를 독립운동의 전 과정 속에서 전인적으로 평가할 때 '자수 출원'을 흠결로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나라가 망하는 데 별로 책임이 없는 평민이었다. 고관대작으로서 국록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지식인으로서 도덕적 책무를 느끼지 않아도 될 그저 시골의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키자고 목숨을 걸고 의병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으나, 다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또 옥고를 치렀다. 그에게 '자수 출원'을 흠결로서 가혹하게 강변하는 것은 역사평가의 정도가 아니다. 역사 평가의 엄정한 잣대로 재단해야 할 대상은 한봉수가 아니다. 그 대상은 바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간 장본인들, 그리고 일제에 기생했던 관료와 지식인들이다. 이는 한봉수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와 밀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선언서를 배부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2일 세교리 장터에서는 내수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선생 엄익래를 계몽하여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부에서 보안법 위반 및 연속범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해방 후에는 청주시 내덕동에서 청빈하게 살다가 1972년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고 청주시 중앙공원에 공적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 청주의 고령 신씨와 대한민국
청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관 신규식(申圭植, 1880~1922).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경부 신백우(申伯雨, 1889~1962)가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령 신씨이지만 청주 상당산 동쪽에 거주해서 산동 신씨로도 불렸다.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는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훈·포장을 받은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는 504명이고, 청주 출신은 100명”이라며 “청주 출신 가운데는 명문 가문과 부자·모녀·부부·형제 독립운동가 등 특별한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독립운동 명문가로는 ‘고령 신씨’가 12명으로 전체의 12%를 차지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설계자 신규식
신규식(申圭植, 1879~1922) 1880년 1월 13일 충청북도 문의군(文義郡) 동면(東面) 계산리(桂山里)(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睨觀)이다. 신성(申檉)·여서(餘胥)·일민(一民)·청구(靑丘)·한인(恨人) 등의 별호가 있다.
16살 때 정치문란과 풍기(風氣)의 부패를 우려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사악을 배격하는 글로 민중의 경각심을 깨우고자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같은 가숙의 학우들과 소년대를 조직하여 동조하였다.
1896년 봄 고향에서 조정완(趙貞琬)과 혼인한지 3개월 후 신학문 수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중국어와 한국사, 지리 등을 배웠고, 한어학교 재학 중인 1898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주요회원으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00년 9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학교 당국의 부패와 불합리한 처사를 비판하곤 하였다. 부패한 군부를 개혁하고자 동기생 조성환(曺成煥) 등과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1년 고향인 인차리(仁次里)에 설립된 문동학원(文東學院)의 교육활동에 관여하였다.
1902년 7월 6일 육군보병 참위(參尉)에 임관되었으며, 견습생활을 거친 뒤 1903년 7월 3일 졸업증서를 받았다. 한편 같은 해, 고향에서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춘 덕남사숙(德南私塾)을 설립하고 산술, 측량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으며,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는 등 활약하였다. 1904년 육군 참위로서 시위대(侍衛隊)로 배치되었고 1906년 4월 시위 제3대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군대와 연락한 후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계획 실패로 비관하여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가 오른쪽 시신경을 다쳤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박탈하였고, 그 해 8월에 발포된 군대해산령에 저항한 시위대 군인들이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사망을 계기로 의거를 일으켰다. 이때 부위(副尉)의 신분으로 병사를 이끌고 대한문까지 진출하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군대는 해산되었다.
1908년에는 고향 신씨 문중 개혁인사들과 영천학계(靈川學契)를 결성하여 ‘구체신용(舊體新用)’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청주와 문의에 지회를 세우고, 청주에 청동학교(淸東學校)와 문의에 문동학교(文東學校)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9월말,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실업부 부원과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도 몸담았다. 식산흥업에 의한 민족자본을 육성하려는 시도로 군복무 중 동료들과 광업회사를 발기하였다. 1909년 1월에는 『공업계(工業界)』란 월간 잡지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서울 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사립학교인 중동학교의 중동야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10년 8월 중국 망명을 결심할 때까지 이끌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나철(羅喆)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1911년 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종교(大倧敎)의 신도가 되어 한민족의 부흥은 대종교의 발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1년 1월에는 대종교의 지교(知教)에 올라 대종교본사의 경리부장과 종리부장(倧理部長)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4월에는 신정(申檉)으로 개명하였다. 일요일에는 상하이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 교인들과 경배식을 올렸다. 3월 15일의 어천절, 10월 3일의 개천절에는 축하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국권 상실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단군 초상화와 한국 지도를 들고 다녔으며, 아침저녁으로 단군영정에 경배를 올리고 조국 광복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많은 우국지사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망명지로 택한 것과 달리, 상하이를 망명지로 택한 배경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상하이에서 중국혁명파 잡지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쉬쉬에얼(徐血兒)과 친분을 쌓았고, 그를 통해 중국혁명의 지도적 인물인 쑹자오런(宋敎仁),황싱(黃興), (黃克强), 천치메이(陳其美)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1911년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한 이래 천치메이와 우창혁명(武昌革命)에 동참해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1913년 7월 ‘위안스카이(袁世凯) 타도운동’이 일어났을 때 천치메이를 도와, 베이징정부의 ‘요주의(要注意)’ 감시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12년 (음)5월 20일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였다. ‘친목융화’ ‘간난상구(艱難相救)’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동제사는 최성기에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여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또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 독립운동단체의 효시로, 이후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협력단체인 한·중 연합 비밀결사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통해 중국 혁명세력의 지원도 확보하였다. 동제사는 1922년 9월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동제사의 이사장직을 맡아 총재 박은식(朴殷植)과 동제사 운영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동제사는 시민적 민족주의사상, 개량적 사회주의 사상, 대동(大同)사상과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의 국가적 신앙을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동제사 결성 후, 1912년 말~1913년 초 사이, 상하이에서 천치메이 등과 신아동제사도 조직하였다. 감독을 맡은 천치메이를 비롯해 쑹자오런·랴오중카이(廖仲愷)·다이지타오(戴季陶)·후한민(胡漢民)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 신해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들이었다. 신아동제사는 동제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양국 혁명가들의 협력단체로서 최초의 한·중 양국 혁명운동의 호조(互助)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명덕리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개설하고 한국에서 온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한국청년의 중국, 구미(歐美) 유학을 위한 예비교육이 주요 목표였으며, 영어, 중국어, 지리, 역사,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수학기간은 1년 반으로, 조성환(曺成煥)·박은식·신채호(申采浩)·홍명희(洪命憙)·문일평(文一平)·조소앙(趙素昻) 이외에 중국인 혁명운동가 농죽(農竹)과 미국계 화교 마오따웨이(毛大衛)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3기에 걸쳐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하였고, 중국 내 대학과 구미로 유학을 보내거나 학자금을 알선해 주었다.
이와 함께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텐진군수학교(天津軍需學校), 난징해군학교(南京海軍學校), 후베이강무당(湖北講武堂), 원난군수학교(雲南軍需學校), 광둥강무당(廣東講武堂) 등 중국의 각급 군사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써,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한편 1913년 말 또는 1914년 초, 중국 혁명지사들이 결성한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지사와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방향을 확보하였다. 이어 학생들의 유학알선, 직업지도 및 교육적 기능을 주 업무로 한 환구중국학생회(寰球中國學生會)에도 가입하였다. 이때 리덩훼이(李登輝)·탕원즈(唐文治)·왕페이순(王培蓀)·위르치(余日奇)·주자화(朱家驊) 등과 접촉하였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박은식·이상설(李相卨)·유동열(柳東說)·성낙형(成樂馨) 등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후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활용할 목적으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당의 규칙과 취지서는 박은식이 기초하였으며, 본부장에는 이상설을 추대하고, 외교부장 성낙형, 교통부장 유동열, 재정부장 이춘일, 감독 박은식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때 상하이지부장을 맡았다.
신한혁명당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중국 정부와 신한혁명당의 한국 망명정부 사이에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군사동맹 체결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낙형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제경찰에 붙잡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여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적 지위가 높아진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의 시점에서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했고, 외교중심론적인 상하이지역 독립운동세력과 무장투쟁론적인 베이징지역 독립운동세력이 연합하는 방법으로 추진하였다는데서 의미가 있다.
신한혁명당의 계획이 무산된 이후, 박은식과 함께 상하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였다. 대동보국단의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明德里)에 설치하였다. 1917년 7월 조소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대동단결(大同團結)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박은식·신채호·박용만(朴容萬)윤세복(尹世復)·조소앙·신석우(申錫雨)·한진교(韓鎭敎) 등 14명이 발기하였으며, 선언서는 조소앙이 작성하였다. 모든 해외독립운동 세력을 단결시키려는 취지로,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수립이라는 방향을 제시하면서 대동단결 운동은 진행되었다.
1917년 8월에는 조소앙 등과 조선사회당 명의로 스웨덴 스톡홀름(Stockholm)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전문을 보내었다. 전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발칸반도의 문제인 것처럼 일본의 노예상태에 있는 한국문제는 전쟁발발의 요인이 될 것이므로, 모든 민족의 정치적 균등, 국제정의 실현, 피압박민족의 원상복귀, 국제적인 독립한국의 실현 등을 회의의제에 반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1918년 11월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민족 대표 파견을 결의하자, 본인의 이름으로 한국독립 지원을 요구하는 전문을 발송하였다. 또 1919년 1월 하순 펑톈(奉天)의 정원택(鄭元擇)에게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파견 및 국내 및 미국 동지와 연계한 거족적 독립운동의 추진 구상을 알리고, 이 사실을 서북간도에 전해 대기응변(待機應變)토록 지시하였다.
이어 1919년 2월 만주, 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들 39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그 해 2월 초경 선우혁(鮮于爀)을 평안도지방에 잠입시켜 양전백(梁甸伯)·이승훈(李承薰)·길선주(吉善宙) 등에게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고,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촉구하였다. 또 조소앙을 도쿄에 밀파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 계획을 알리고, 이를 지원하는 독립운동을 거사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어 장덕수(張德秀)를 도쿄를 거쳐 국내로 잠입시켜서 일본에서 운동은 2월 초순, 서울에서 운동은 3월 초순에 거사할 예정이니, 양 지역에서의 정황을 통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도쿄의 2·8독립선언에 이어, 국내에서 1919년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상하이 여운형(呂運亨)·선우혁·한진교·김철(金澈)·손정도(孫貞道)·이광수(李光洙) 등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 선포하면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4월 제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충청도 구급의연금모집위원으로 선임되어, 같은 해 5월 초 정원택과 김덕진(金德鎭)을 국내로 밀파하였다. 이어 7월 14일 부의장직과 의원직을 사퇴하고 임시정부에서 물러났다. 1919년 9월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 국내에 있는 한성정부를 통합한 통합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이시영과 협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규식(金奎植)·안창호(安昌浩)가 내각에서 물러나 국민대표회의 추진을 본격화하고,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태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 같은 해 5월 16일 국무총리대리를 맡게 되었고, 5월 26일에는 외무총장직도 겸하게 되었다. 이때 워싱턴회의에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요구서’를 제출하였고,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중국 남방지역 외교활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친선전권대사 자격으로 광동호법정부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쑨원(孫文) 총통을 접견하고 5개조의 외교문서를 전달하였다. 호법정부와 임시정부의 상호 승인, 한국 학생의 중화민국 군사학교 수용, 차관 지원, 한국독립군 양성을 위한 조차허용 등 조항으로 포함되었다. 이때 호법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이끌어 냈으며, 중국의 각급 군사학교에 한인청년 수용 지시와 북벌 완성 후 한국독립운동 원조 약속을 받아내었다.
1921년 11월 18일, 호법정부가 북벌서사(北伐誓師) 기념식 때,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여 정식 외교절차에 따라 쑨원을 접견함으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와의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정부는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朴贊翊)을 광둥주재 임시정부대표로 파견하여 외교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1922년 2월, 태평양회의가 기대와 달리 성과 없이 끝나자 임시정부는 안팎으로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해 3월 내각은 외교적 실패 등을 이유로, 노백린(盧伯麟) 군무총장을 제외하고 사퇴하였다. 이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 찬성안이 통과되었고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이 결의되었다.
1922년 5월 이후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누워 한인들의 분열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단식하며 말하지 않고, 약도 거부하다가 1922년 9월 25일 사망하였다. 이후 상하이 프랑스조계 홍챠오만국공묘(虹橋萬國公墓)에 안치되었다가, 1993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사론집인 『한국혼(韓國魂)』과 시집인 『아목누(兒目淚)』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역사에 정통한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 신채호
신채호(申采浩)는 1880년 음력 11월 7일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於南洞)으로 할아버지인 신성우(申星雨)의 처가가 위치한 당시 행정구역으로 회덕군(懷德郡)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 도리미(桃林)라는 마을에서 한미한 농촌 선비인 신광식(申光植)과 밀양 박씨(密陽 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신숙주(申叔舟)의 후손인데 신채호뿐만이 아니라 일제 치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申圭植),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한 신백우(申伯雨) 등과 같은 항일 투사들을 배출하였다.
신채호의 성품과 항일투쟁 활동은 그의 호와 무수한 필명 및 가명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단재(丹齋)로 알려진 신채호의 호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단심가(丹心歌)의 ‘일편단생(一片丹生)’을 줄인 ‘단생(丹生)’, 이를 다시 단재(丹齋)로 고친 것으로, 청결과 지조를 중요시 한 신채호의 삶을 압축하는 것이다. 또 무명생(無名生), 금협산인(錦頰山人), 적심(赤心), 유맹원(劉孟源), 유병택(劉炳澤), 박철(朴鐵), 왕조숭(王兆崇), 왕국금(王國錦)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필명과 가명은 항일운동가로서 계속해서 신분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단했던 삶의 여정을 나타낸다.
신채호의 할아버지였던 신성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개화 사조에 대한 이해도 있었다. 신채호는 어렸을 때부터 이러한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는데, 학문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개화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며 학문에 소질이 있는 손자의 장래를 생각한 신성우는 자신과 동문수학했으며 학부대신(學部大臣)을 지낸 신기선(申箕善)에게 신채호를 맡겼으며, 신기선 역시 신채호의 재능을 높이 사서 성균관에 추천했다. 신채호는 19세가 되던 1898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905년에는 성균관박사에 임용되었다 .
신채호가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시기는 대한제국이 성립하는 한편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결성되어 국정의 자주노선을 요구하는 등 자강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던 때이다. 신채호 역시 성균관에 입학한 이후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하며 개화·개혁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활동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적 역량은 성균관에서도 발휘되었다. 당시 성균관에서도 학문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다양한 서적을 독파하던 신채호는 성균관 관장이던 이종원(李種元)의 총애를 받았지만 관직에 뜻이 없다며 출사하지 않았다.
성균관박사를 사직한 신채호는 향리로 내려와 신백우, 신규식 등과 함께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열고 인근 젊은이를 모아 교육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청원군 낭성면(琅城面)을 찾아 온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신채호를 알아보고 초청, 신채호는 『황성신문』의 논설기자가 되어 논객으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신채호가 성균관박사가 되던 해는 바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조선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해이다. 이에 장지연은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하여 그 울분을 표했지만, 이로 말미암아 『황성신문』은 정간되었다. 『황성신문』 정간 직후 신채호는 양기탁(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사주가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었기 때문에 일제 통감부의 언론 통제로부터 자유로웠다. 여기서 신채호는 ‘일본의 3대 충노(忠奴)’,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 ‘영웅과 세계’, ‘동화(同化)의 비관(悲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20세기 신국민’ 등과 같이 일제의 침략과 친일인사들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수호를 위한 논설을 집필하며 언론구국운동의 제일선에 섰다.
신문 논설만이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을 번역한 것을 비롯하여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1908),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 李舜臣傳)』(1908), 『동국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 崔都統傳)』(1909) 등과 같은 역사서나 위인전을 번역·저술하였다. 이는 역사가 몇몇 위인이나 영웅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영웅사관(英雄史觀)을 드러내는 한계를 보이지만 신채호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등과 같이 외적을 무찌른 구국의 장군들을 환기시킴으로서 국망이라는 현실에 직면한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 1908년에는 한국의 역사학에 있어 기념비적인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이는 한민족을 주인공으로 하여 역사를 체계화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유교주의 사관과 일본인들에 의해 제기된 식민주의 역사관을 거부·극복한 한국 근대역사학의 효시로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신채호는 이러한 집필활동과 더불어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이론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발기에도 참여해 ‘청년학우회 취지서’를 기초, 발표하는 등 항일구국을 위한 조직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국망이 눈앞이던 1910년 3월 신민회는 양기탁의 집에서 회의를 열어 안창호, 이동휘(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신채호 등을 국외로 망명시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신채호는 4월 평북(平北)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오산학교에 잠시 머물 당시 학교의 교사였던 이광수(李光洙)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광수에 의해 어디에 굽히기 싫어하여 세수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한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망명 직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친지에게 빌린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한 질만을 지니고 갔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망명을 단행했던 신민회의 간부들은 청도(靑島)에서 1차 회의를 열고 신한민촌과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신채호는 무관학교에서 국사와 한문 교육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10년 9월 설립 자금의 부족으로 다른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로 떠났다. 이곳에서 신채호는 이상설(李相卨),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인단체인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서적부장을 맡았으며, 회에서 발행한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로 초빙되었으며, 이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光復會)의 부회장으로서 항일의식의 고취와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권업신문』이 자금난으로 폐간되고 건강의 악화로 어렵게 생활하는 중 상하이에서 신규식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상하이에 머물던 1914년, 대종교(大倧敎)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桓仁縣)으로 간 신채호는 이곳에서 약 1년간 체류하며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교 교재로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하는 한편 이곳에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며 역사 연구를 계속하였다. 신채호의 역사연구는 다음 해인 1915년 이회영(李會榮)의 권유로 베이징(北京)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베이징에 머물면서 신채호는 『사상변천론(思想變遷篇)』, 『강역고(疆域考)』, 『인물고(人物考)』 등 역사관련 연구서를 저술하는 한편 생계를 위해 『중화보(中華報)』나 『북경일보(北京日報)』에도 다수의 논설을 썼으며, 자신의 독립사상을 극화한 소설 『꿈하늘』을 탈고하는 등 창작 활동도 병행하였다.
이처럼 신채호가 독립을 위해 국외에서 활동을 전개하던 중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벌어졌다. 신채호 역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겸 충청도 대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임정 조직 당시부터 한성정부의 법통을 따를 것을 주장하는 한편 윌슨에게 위임통치(委任統治)를 청원한 이승만(李承晩)의 국무총리·대통령 선임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임정과 결별하고 1919년 10월 신규식의 지원을 받아 주간신문 『신대한(新大韓)』을 창간, 반(反)임시정부 노선을 펼쳐 나갔다. 임정에서는 자신들이 발간하던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사장으로 신채호를 초청하였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임정에 반대하던 동지 40여 명을 규합하여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임시정부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신대한』의 발행이 중단되자 1920년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되돌아와 제2회 보합단(普合團)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신채호는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하여 만주 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며, 다음해인 1921년에는 국내외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을 목적으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여 무장독립투쟁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신채호의 활동으로 베이징은 무장투쟁 노선이 강화되고 반임정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베이징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채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였으며, 결국 이승만은 이해 5월 20일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임정의 개편을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1922년 12월 무장투쟁의 또 다른 지도자로서 의열단(義烈團)을 이끌고 있던 김원봉(金元鳳)은 신채호를 초청, 신채호는 상하이에 가서 1개월 여간 그곳에 머물며 의열단의 폭탄제조소를 시찰하고, 이들을 위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5장 6,400여자로 이루어 진 조선혁명선언은 집필에 들어간 지 한 달여 만인 1923년 1월 발표되었다. 여기서 신채호는 조선 민족의 적은 ‘강도 일본(强盜 日本)’임을 분명히 하고, 이 적을 무찌르는 것은 조선 민족의 정당한 선택이라면서, 일본에 타협하는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등 역시 우리 민족의 적이며,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장하던 임시정부를 비판하였다. 또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길은 오로지 민중의 직접 혁명밖에 없으며, 민중직접혁명을 통해 이족(異族)통치, 특권계급, 경제적 약탈제도, 사회적 불균등, 노예적 문화사상의 다섯 가지를 파괴하고 고유한 조선, 자유로운 조선민중, 민중경제, 민중사회, 민중문화라는 이 다섯 가지를 건설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이 문건은 혁명의 수단으로서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측면에서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가장 잘 정리한 것으로 의열단과 같은 의열투쟁 단체들뿐만이 아니라 독립을 바랐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때인 1923년 1월에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향후 진로를 둘러 싼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약 6개월 여간 계속된 이 회의는 임시정부를 유지하면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는 개조파(改造派)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는 창조파(創造派)가 팽팽히 맞섰다. 신채호는 국내에서 수립된 ‘대조선공화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론에 섰지만, 두 파의 대립으로 결국 6월에 회의는 결렬되고 창조파의 주요한 인물들은 임정을 떠났다. 이후 신채호는 창조파 동지들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활동을 계속하고자 하였지만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소련 정부가 이를 불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베이징으로 돌아와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신채호는 독립운동의 통일을 위한 활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좌절감과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며 불교 사상을 공부하였다. 베이징의 독립운동가들은 신채호를 자주 방문하며 그를 산속 절에 그냥 두지 않았다. 1924년 가을 환속한 신채호는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바로 이때 ‘조선사’ 총론을 완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사관(史觀)을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기록’이라고 천명하였다. 또 1925년 초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신문을 통하여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三國史記中 東西兩字 相換考證)’,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와 같은 고대사 관련 논문을 연이어 발표함과 더불어 10개월 가량에 걸쳐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조선사’ 총론과 더불어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이를 기점으로 조선의 역사를 ‘자주기’와 ‘사대기’로 구분하여 정리하고자 하였다. 1925년을 전후하여 발표한 역사업적은 신채호가 뤼순(旅順)감옥에서 투옥되어 있을 당시 발간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에 수록되었다.
한편 ‘조선혁명선언’을 쓸 당시 유자명(柳子明)과 베이징대학 교수 이석증(李石曾) 등으로부터 무정부주의를 소개받은 신채호는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다음해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無政府主義者東方聯盟)이 텐진(天津)에서 결성되자 이에 조선대표로 참여하였다. 1928년 4월에는 중국, 조선, 인도, 대만, 베트남 민족대표들이 모여 베이징에서 개최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했는데, 이 대회에서는 자금 마련을 위해 위조 외국환을 인쇄하여 일본, 대만 등지로 발송한 후 현지에서 이를 찾는 방안이 결정되었다. 신채호는 대만으로 가서 자금을 찾기로 하여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의 입국을 시도하던 중 상륙 직전 체포되어 다이렌(大連)으로 호송되었다. 체포 이후 기나긴 공판을 거쳐 1930년 7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라는 죄명으로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뤼순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투옥 기간 중인 1931년 안재홍(安在鴻)은 신채호와 연락을 취해 그가 체포되기 전 지인에게 맡겨두었던 원고를 받아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이를 기재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이다.
1935년 장기간의 투옥 생활의 결과 신채호의 건강은 악화되자 병보석으로 출감될 수 있었음에도 보석의 보증인에 친일 이력이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가출옥을 거부하는 지조를 보였지만 출옥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의식을 잃었으며, 3일 후 차디찬 감옥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