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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2.18 03:30
프랑스가 주는 '로마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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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빌라 메디치. 로마 대상 수상자에게는 빌라 메디치에서 공부할 기회를 줬어요. /빌라 메디치
젊은 연주자가 이름과 실력을 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권위 있는 콩쿠르나 오디션 등에 참가해 높은 성적을 올리는 것입니다. 높은 순위가 음악가로서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이름을 알리기 위해선 필수가 된 듯해요. 그런데 연주 분야에 비해 작곡가 콩쿠르는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높은 명예와 특전을 보장하는 제도를 둬 많은 작곡가를 지원했습니다. 바로 '로마 대상(Prix de Rome)'입니다. 로마 대상은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한 학생에게만 응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훌륭한 프랑스 작곡가가 로마 대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베를리오즈와 드뷔시는 중도 하차
로마 대상은 로마에 있었던 '아카데미 드 프랑스'가 주관했습니다. 아카데미는 1666년 창립됐는데, 첫 번째 상은 이보다 앞선 1663년 수여됐습니다. 처음엔 장학금 제도였던 이 상은 나중에 1등 수상자가 로마에 3~5년 체류하며 공부와 함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그 특전이 바뀌었어요. 1등상을 받은 학생들이 머물고 공부하던 곳은 여러 번 그 장소가 변하다 1803년부터 로마에 있는 '빌라 메디치'로 고정됐습니다. 같은 해 기존 회화·조각·건축만 있던 수상 분야에 작곡이 추가됐습니다.
로마 대상을 받고 로마 유학길에 올랐지만, 정작 로마에 가서는 기존 교육 내용에 의심을 품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인물도 있었습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는 낭만 시대 초기 활동했던 대표적인 프랑스 작곡가입니다. 자신의 작품 속에 실험적 시도를 서슴지 않아서 주변의 기대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베를리오즈는 1830년 네 번의 시도 끝에 로마 대상을 획득하고 유학을 떠났습니다.
빌라 메디치 교수들의 환대에도 베를리오즈는 로마에서의 생활이나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베를리오즈는 교육보다는 이탈리아 자연과 문학 등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때마침 그곳을 방문했던 작곡가 멘델스존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경험도 쌓은 그는 결국 의무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기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로마를 떠났죠. 그가 로마 대상을 받은 직후인 1830년 12월 초연된 환상교향곡은 음악으로 이야기나 등장인물 등을 묘사하는 '표제음악'의 시작이라 불립니다.
베를리오즈보다 두 세대 정도 뒤 인물인 클로드 드뷔시(1862~1918) 역시 1884년 로마 대상을 받아 빌라 메디치로 유학을 떠났는데, 권위적이고 답답한 분위기가 싫어 여러 차례 이탈을 시도했습니다. 거기에 필수적으로 써야 하는 과제곡 4곡도 제출하지 않아 아카데미를 고민에 빠트렸죠. 드뷔시 역시 기존 교육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1885년 학생들 앞에서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드뷔시 역시 의무 교육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 있을 당시 그가 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은 과제곡이 아닌 폴 베를렌의 시를 바탕으로 한 6곡의 가곡집 '잊힌 노래'입니다.
'로마 대상' 재수한 비제
상을 받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거나 결국 수상에 실패한 유명 작곡가도 있습니다. 조르주 비제(1838~1875)는 불과 열 살 나이에 파리 음악원 입학을 허가받을 만큼 천재였어요. 그는 열여덟 살이었던 1856년 로마 대상에 응시했지만, 그해 작곡 부문에서 1등상을 뽑지 않아 수상에 실패했어요. 실패에 낙담하지 않고 비제는 이듬해 다시 도전해 결국 상을 받았고, 1858년부터 1860년까지 빌라 메디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주어진 기간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비제는 앞의 작곡가들과 달리 로마 생활에 만족했습니다.
다만 비제 역시 아카데미에서 내준 과제곡보다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오페라 작품 등에 더 관심을 기울였어요. 로마에서 돌아온 후 거듭되는 실패에도 오페라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그는 1875년 오페라 '카르멘'을 발표했어요. 그의 인생은 갑작스럽게 끝납니다. 지금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는 걸작 '카르멘'이지만, 초연 당시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작품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비제는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3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을 받지 못해 오히려 큰 화제가 된 작곡가도 있습니다. 모리스 라벨(1875~1937)은 1900년부터 무려 다섯 차례나 로마 대상에 작품을 보냈지만 끝내 1등상을 받지 못했어요. 당시 신예 작곡가로 많은 찬사를 얻고 있던 라벨의 실패에 대해 격론이 일었고, 결국 파리 음악원 원장이 교체되기까지 했습니다. 기존 음악 언어와 질서를 바꾸고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라벨의 음악을 일부 보수적인 음악원 교수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급진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을 옹호했던 음악인들은 이에 반발했죠. 결과적으로 로마 대상이 20세기 초 다양한 음악 스타일이 공존하던 파리 음악계 단면을 보여준 셈입니다.
아버지와 딸 2명이 로마 대상과 인연을 맺은 경우도 있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한 에르네스트 불랑제(1815~1900)는 주로 코믹 오페라(희극적 내용이 있는 오페라)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로 1835년 로마 대상을 받았어요. 그의 두 딸 나디아와 릴리 역시 작곡가가 됐는데, 릴리는 1913년 20세 나이로 로마 대상을 받아 최초 여성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언니 나디아는 1908년 참가해 2등에 머물렀으나, 24세에 세상을 떠난 동생 릴리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9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곡 교수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콩쿠르나 대회 입상이 음악가로서 대성(大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자기 성찰과 노력이 있어야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죠. 최고 권위를 자랑했던 로마 대상 입상자들의 뒷이야기가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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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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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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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조르주 비제.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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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피아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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