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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 세계분파는 중시조 문정공의 四세손인 휘 현영은 시호가 문헌공인데 일파(一派)가 되고
일파(一派) 문헌공파는 17개 세파로 다시 분파 되느데 그 분파도는 제일 하단을 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저희 조상님이 속하는 곳은 감사공파입니다.
50대 정지년 老松亭公(노송정공)님의 4째 아들인 51대 정효본님의 후예로 감사공파로 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족보상에 보면 판서공파는 큰아들 효항님의 후예 제안공파는 둘째 효상님의 후예 참의공파는 셋째 효종님의 후예 이기에 저희는 4째 아들 효본님의 후예로 감사공파로 세파를 분류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형님들및 아버님은 유명하시어 하단에 따로 기재 하였습니다.) [문과] 세조(世祖) 6년 (1460) 경진(庚辰) 별시1(別試) 을과(乙科) 3위
증조부(曾祖父) 정인검(鄭仁儉) 조부(祖父) 정렴(鄭濂) 부(父) 정지년(鄭知年) 첫째형(兄) 정효항(鄭孝恒),둘째형(兄) 정효상(鄭孝常) 셋째형(兄) 정효종(鄭孝終)
정지년님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문과] 세종(世宗) 20년 (143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위로 급제 하셨으며
관직은 사예(司藝: 정4품)를 지내셨습니다. 부친은 (49대) 증이조판서 정렴(장남)이시며 조부는 (48대) 증병조참판 정인검(정종보님의 4째아들)이시며 * 관직에 증이 붙는 이유는 실제 역임한 관직이 아니라 죽은후에 추서한 관직입니다. 그래서 높은 관직임에도 찾을수도 없고 아주 유명하신 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증조부는 (47대 )정종보님입니다. 하기 캡쳐그림을 보시면 아실수 있듯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부탁으로 단종을 보살피다 단종이 손위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종숙인 정홍덕님(세종 원년 무과급제 정종보님의 둘째아들의 장남)과 함께 남원의 교룡산에 은거하셨습니다.* 이때 저희 조상님은 남원에 거주 하였습니다. 정지년(鄭知年) 증좌찬성
그의 큰아들 정효항님은 성종때 서거정과 더불어 동국여지승람및 동국통감을 찬수하셨습니다. ([생원진사시] 세종(世宗) 29년 (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54위
대사성(鄭大司成)정효항(鄭孝恒)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렴(鄭濂)의 손자이고 정지년(鄭知年)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1) 생원으로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부교리로서 좌익 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7년(세조13) 지평이 되었다. 성종(成宗) 때 서거정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수에 참여하고, 벼슬이 대사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내심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파주 금촌읍 금릉리에 묘가 있다. 자는 可淸, 본관은 慶州, 좌찬성에 추증된 知年의 아들이다.
그의 둘째 아들인 정효상님 1432(세종 14)~1481(성종 12). [문과] 세조(世祖) 12년 (1466) 병술(丙戌) 중시(重試) 이등(二等) 4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구(可久).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지년(知年)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했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집현전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455년(세조 1)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다음해 6월 경연사경, 1459년 승문원부교리에 임명되어 한관독서(閑官讀書)를 했다. 이후 이조좌랑·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1468년(예종 즉위)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남이(南怡)·강순(康純) 등 적개공신(敵愾功臣) 세력을 제거하는 옥사에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예종 때는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를 거쳤고, 성종이 즉위한 뒤 왕권에 위협이 된 구성군(龜城君)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여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다. 이후 경상도관찰사·공조판서·이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했고, 1476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제안(齊安)이다.
[활동사항]
1451년(문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54년(단종 2)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경연사경(經筵司經)으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다.
1455년(세조 1) 12월에는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9년 6월 승문원 부교리라는 한가한 관직을 제수받게 되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한관독서(閑官讀書)의 혜택을 입었다. 이후 감찰, 이조좌랑, 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1468년(예종 원년) 10월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가선대부에 올라 계림군에 봉해졌다. 그 뒤 우부승지,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정헌대부에 올랐다. 1472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겸하였고, 이후 12년 동안 공조판서,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파주 금촌읍 금릉리에 묘가 있다. 자는 可久, 본관은 慶州, 좌찬성에 추증된 知年의 아들이다.
총명한 아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하여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한데 이어,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부수찬에 오르고, 1455년(세조 1) 12월 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6월 경연사경으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으나 겨우 화를 모면하였다. 1459년 6월 승문원부교리로 임명되어 한가한 관직을 제수하여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閑官讀書의 혜택을 받았다. 이후 감찰·이조좌랑·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10월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鷄林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를 거쳐 1471년(성종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에 올랐다. 1472년 경상도관찰사를 겸하였고, 1474년 공조판서에 승진,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476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7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평소 주위사람들과의 우애를 중시 여기는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다. 시호는 제안이다.
그의 3째 아들인 정효종님은 예조 참의를 지내셨습니다. [문과] 세조(世祖) 4년 (1458) 무인(戊寅) 별시(別試) 을과(乙科) 3위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 이조판서를 역임하셨습니다.
慶州鄭氏 文獻公派 分派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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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를 올려줘서 정말고맙네! 먼저 결혼을 축하하며 행복하길 바라네! 그런데 내가 일전에 강원도 동강에있는 청용포에서 숭정 99년 이라는 년호를 발견하였는데 우리들의 선산(솔때봉)묘비에(넘어진 묘비)숭정 몇년이라는 연호가 기억나기에 그 조상님의 연대가 그때쯤이 아닐까? 여겼는데 이글을 보니 어림짐작은 할수있을것 같네.이렇게 한가지씩 찾아 우리조상님들의 발자취를 더든어 자부심도찾고 후손들에게 자긍심도 심어줄수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좋은글 고맙고 행복하길 기도할께!!!사랑한다.동두천 당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