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나는 열심히 일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나"와 결심을 하는 "나"는 같지 않다.
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나”라는 존재는 하나가 아니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행위를 하는 “나”와
생각하고, 추리하고, 판단 결정하는 등
정신적인 작위를 하는 “나”가 따로 있다.
다시 말하면 5감(五感)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나”와
그것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생각이나 상상으로만 인정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나”가 따로 있다.
후자(後者)에는 마음에 속하는 “나”와
마음 밖에서 지켜보는 인식자인 “나”가 있다.
흔히 자아(ego)라고 말하는 “나”는 마음에 속하는 “나”이며
인식자인 “나”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인 의식이다.
흔히 물질적인 “나”는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삼라만상이 다 가지고 있으나
비물질적인 “나”는 정신활동이 가능한
존재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편의상 스스로 성장, 번식이 가능한 것
즉 생명력를 가지고 있는 것을 생명체라 하고
외부의 힘에 의하지 않고는 변화되지 않는 것은
무생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생물에도 그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나 분자들을
결속시키는 에너지가 있고 원자 자체도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수소는 양 전하를 띤 프로톤(proton)주위에
음 전하를 띤 전자(electron)가 돌고 있으며,
이 프로톤 2개가 결합하면 헬륨이 된다.
이런 식으로 프로톤의 숫자가 증가하여 물질들이 형성된다.
생명체란 이러한 물질들이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
질서 안에서 고유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생성 소멸이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이 질서를 유지시키는 힘을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외부에서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자체의 분자들의 결합, 배열 등에서 생성된 것일까?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에너지나
이들 원자를 결속하여 분자를 만들고 이것들을 결합하여
물질을 만드는 에너지, 그리고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생명력,
이러한 에너지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의 능력은 아직 이것을 설명하는데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우리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를
가정하여 그를 이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연 발생적인 것이라 하며 진화론을 주장하기도 하다.
현상계를 중심으로 한 진화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무생물에서 생명체가 발생하여 단세포 생물,
식물, 동물을 거쳐 인간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세균에서 꽃을 피우는 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식물들은
스스로 움직여 위치를 바꿀수 없으며 동물에서 볼 수 있는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인 능력이 없는 생명체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동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며
생명체의 구성 단위인 세포에는 세포벽이 없고,
보다 고등한 것에서는 감정, 사고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신적 능력은 인간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이는 신경계 특히 중추신경(뇌)의 발달에 의한다고 본다.
뇌의 변연계는 감정을 갖게 하고 대뇌 피질의 발달은
정신능력을 갖게 해 준다고 한다.
현대에는 의학의 발달로 신경에서 분비되는 신경물질과
감정의 변화와의 관계, 사고와 뇌파와의 관계가
일부 밝혀져 있다. 예를 들면 뇌에서 분비되는
몰핀의 일종인 엔돌핀은 쾌감을 일으키고,
도파민은 의욕, 창조력 등 정신기능을 증진시키며
이것이 부족하면 치매나 파킨슨씨병이 생긴다.
세로토닌은 환각현상을 일으키며
부족 할 때는 우울증이나 수면장애를 일으킨다.
한편 긴장하거나 화가 나는 등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노아에피네프린이, 공포 상태에서는 에피네프린 분비가 증가한다.
뇌파의 경우 수면중이거나 명상 상태에서는 알파파가 많아지고,
깊은 잠에서는 쎄타파, 활동중이거나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베타파가 증가한다. 이런 것들은
인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 할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감정이나 사고 발생의 원인 일 수도 있고
그런 활동에 수반되는 현상일 수도 있다.
한편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자를 가정하고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 것은 우리가 신(神)이라 부르는 비물질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종교마다 나름대로 이름을 갖고 있는
브라흐마, 알라, 하느님, 창조주, 우주의식 등등....
우리는 5감으로 이 존재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직관이나 영교(靈交)를 통해서는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창조주(우주의식)에 의한 인간 창조의 가능성을
살펴보기고 하자
인간이나 동물에서 뇌의 일정한 부분을 마비시키거나 제거했을 경우,
그 특정한 능력이 상실됨을 알 수 있는데,
이 결과 뇌의 그 부분이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영적 존재를 인정하듯이 의식이라는 비물질적인 실체가
물질과는 따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의식이 현상세계에서 활동하고 물질적인 존재들에
어떠한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질을 통해야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물질(육체)과 비물질(의식)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중추신경계(뇌)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과학이 흔히 생각하듯이 뇌에서 의식이 발생하여
정신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존재하는 의식이란 실체가
뇌를 통해서 육체가 자신의 의도를 인식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5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의식이,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뇌의 발달을 유도하고,
그 뇌의 기능을 통해
육체에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뇌는 TV의 수상기나,
컴퓨터의 하드웨어(hard ware)같은 기능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방송되는 전파나 소프트웨어(soft ware)의 프로그램은
다른 장치의 도움없이는 우리 5감으로 인식이 불가능하나
수상기나 하드웨어를 통해 감지가 가능하게 되듯이 말이다.
수상기나 하드웨어의 어떤 부분이 고장나면
방송내용이나 프로그램 내용을 전달받을 수 없듯이
뇌의 부분이 이상이 생기면
인간의 인식작용이나 활동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받아들인다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자가 바로 의식이며,
전파를 받아 방영하는 안테나나 수상기는 뇌에 해당된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수상기나 하드웨어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제작된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고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작자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방송국의 송신장치를 통해
전파로 송신하며, 그것을 받아 화면이나 소리로 방영하는 것이
바로 수상기이며 하드웨어인 것이다.
뇌는 이렇듯 하나의 수상기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창조주란 개념이 그럴 듯 하게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높은 차원의 의식인 창조주는
우주를 창조한 과학자이며 제작자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계획을 펼치기 위해 우주라는 시공간을 포함한 물질세계를
먼저 만들어 놓고, 이 물질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수 있는 기계인
수상기나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해, 생명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 생명체들을 점차 진화시켜 중추신경계의 발달을 이룩함으로써,
즉 인간으로의 진화를 이룩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고 실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짧은 시간에
그것을 이룰 수도 있을 터인데 왜 몇 십억 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시공간 개념은 이 현상세계의 기준일 뿐,
차원 높은 세계에서는 시공간 개념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긴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우주의 역사가 의식의 세계에서는
한 순간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과학이 말하는 진화란 것도 결국 창조주의 능력에 의해
진행되어 온 한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떤 의도나,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뤄졌든 간에
현재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창조주의
의도에 맞는 것이며 자연의 섭리에 부합된 일일 수 있다.
창조주에 의해 프로그램 된 우리들은, 소프트웨어나 텔레비젼의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자동화된 프로그램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대처해서 프로그램의 지엽적인 내용을
수정해 가면서 대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프로그램말이다.
이 능력이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으로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근간은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운명론이란 것도
반드시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유의지에 의해 일부 사소하고 지엽적인 프로그램 수정은
가능할지 몰라도
근간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어찌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나는 무엇이며 어디에 존재하고 있을까?
위의 가정을 통해 본다면 뇌를 포함한 육체는 참나가 아니며
의식에 의해서 활동하는 로봇과 같은 것이다.
진정한 나는 정신기능을 주관하는 의식 그것일 것이다.
그러면 그 의식은 어디에 존재할까?
우리 육체의 어느 부위에 있을까?
아니면 육체 밖 어느 곳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을
것이므로 한 곳으로 고정시킬 수 없고
어디에나 존재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신(神)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바로 우주의식이며
우주를 관장하는 에너지일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체는 우주의식이며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일 수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만 다를 뿐 그 본래의 실체는 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현상, 모든 사물은
우주의식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람의 세기, 방향에 따라 파도는 각양각색이다.
바다는 우주의식이고 파도는 현상계이다.
파도는 바다가 일시적으로 드러낸 모습일 뿐이다.
바람이 없어지면 다시 잔잔한 바다 그 자체가 된다.
우리의 현상계는 파도이다.
바람이 자면 곧바로 바다로 될 파도이다.
파도는 바람 부는 대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물보라를 튀기기도 하며 그대로 순응한다.
그러나 인간파도는 바람이 없는데도 스스로 높아지려
기를 쓰며 더 아름답게 보이려고 안달을 한다.
자신을 바다의 일부라 생각하지 않는다.
따로 떨어진 독립된 존재라 생각한다.
그것이 망상이며 자아(ego)의 실상이다.
정체성 운운하며 자아를 중요시 하지만 그것은
인간파도가 바다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망상에 기인 된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삼라만상은 바다의 일부분이며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바다이다. 모두 하나이다. 우리는 둘이 아니다.
하나이다. 근본은 다 같다. 우주의식이 그 근본이다.
이것을 체험할 때 비로소 깨달은 자가되고
그 경지가 열반이요 천국일 것이다.
한편 힌두교적 관점(우파니샤드)에서 본다면 영원한 것,
변하지 않은 것만이 진리이며
그 외의 것들은 환영이며 허구인 마야(maya)라고 한다.
존재했다가 없어지는 것들은 환영(幻)이란 것이다.
꿈은 없던 것이 수면 중 나타났다가
잠이 깨고 나면 다시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 하며 실체로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고있는 사물은 존재했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나라고 알고 있는 존재(ego)도 죽어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의 환영이며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의 본질은 변화가 없을 것이나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은 바뀌고 사라지게 되어있다.
우리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형만 볼 수 있기에,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은 허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유(萬有)의 본질은 우주의식(神)이며 그것이 참나이다.
그래서 참 나는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 석헌/허경용 -
첫댓글 나는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글쎄 ???????... 이머꼬.......지금 존재하는 나는 ??????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닌 하나요, 이것이 곧 한 마음이라,
그래서 오늘부터 더 열심히 일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