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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와 한국적 성령운동
1. 한국교회와 1907년 대 부흥
대 부흥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년 6월 25일 서울에서 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교 레이놀즈W.D. Reynoldes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 있었다. 그 동의에 의하면 "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하나의 한국 민족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 '한국기독교회'라 하리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의 자립·자주적인 민족교회의 형성, 그것도 교파의 구별이 없는 단일한 기독교회의 형성에 대한 범주적인 요청은 이렇게 해서 널리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에 한 획기적인 모멘트가 그 형성력에 부여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1907년도의 한국 교회의 대 부흥이었다.
부흥회의 원류
이 부흥회를 가능케 해서 전국을 휩쓸게 한 물결은 두 군데서 흘러 왔다. 한 흐름은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원했다. 1903년 원산元山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 연구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장로교와 침례교 교인들까지 가세하게 되었고, 이때 남감리교 선교사 의사 하디Dr.R.A. Hardie는 몇 해 동안 애써온 자신의 선교 활동의 열매 없음에 고민하던 중 선교사로 오게된 자신의 동기에 대해 회개하게 되면서 급기야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1904년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삼파 연합의 사경회 도중 장로교의 로브Rev.A.F. Robb가 특별한 성령의 감화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당시 은혜에 깊이 젖어있던 전계은全啓恩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를 했고,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또 하나의 흐름은 바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깊은 신앙 생활의 경건에서 왔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들의 내성內省,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한국인들의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흘러 왔던 것이다. 목사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 한국 최초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던 그의 성령에의 뜨거운 열정이 바로 1907년 대 부흥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부흥의 용솟음치는 성령의 샘은 원산의 전계은, 정춘수와 아울러 평양의 길선주, 이 세 한국 목사의 신앙 체험에서 연원했고, 따라서 그 부흥 뒤의 한국 교회의 신앙도 이들의 영성이 농도 짙게 그 언저리에 스며있게 된 것이었다.
1907년 1월 13일, 평양 장대현
전날 하디 선교사의 집회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부흥회는 다음 주일 밤 길선주가 인도한 집회에서 그 성령의 불길이 터져 올랐다. 교인들의 감동은 놀라웠다. 교회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였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힘있는 영적 압력이 베어 구속하는 듯하였다. 다음날 월요일 밤에도 장중한 신비의 세력이 임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성령의 임재를 압도당하듯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전형적인 평양 대 부흥의 분위기가 감격 넘치게 펼쳐지고 있었다. 런던타임즈의 기사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하자마자, 밖으로부터 흠뻑 밀려드는 강대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했고, 그 감동의 격류는 몇 일 밤낮을 계속했다. 통성 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그 통회 자복의 광경을 묘사하는 한 여 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저런 고백들!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젖힌 것과도 같다. ...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저 죄악의 고백들,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이 무엇으로 이런 고백들을 강제할 수 있으랴? 많은 한국 교인들이 하나님에의 두려움에, 마루에 얼굴을 가리우고 슬피 탄식하였다."
2. 길선주의 생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19대 후손
1869년에 안주安州에서 태어난 길선주는 고려조의 학자 야은 길재 선생의 19대 후손이었으며, 영계靈溪는 그의 도호道號가 된다. 그의 모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정숙 온화하였으나 자녀 교육에는 엄격하였다. 선주는 4세 무렵부터 가정에서 어머니에게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7세 무렵엔 당시의 이름 높은 어느 한학자 문하에 들어가 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선주는 막내였던 고로 어머니의 교훈을 많이 받고 자랐으며, 그 나이 또래에 비해서 총명하였다고 한다. 선주가 12세 되던 무렵의 일이다. 한문 사숙에서 공부할 때, 서동書童들이 오언 한시를 제각기 지었는데, 그 가운데서 선주의 시 세 귀三句가 관주를 맞고 장원을 했다. 번역해 보면 이렇다.
농부의 아내 되게 하지 마라 해마다 고생이 이 같으니
옥같은 손에는 고초가 끊임없고 꽃다운 마음에는 한이 쌓이는구나
청루에 그 뉘 댁 규수였던고 이제 밤마다 끌리는 옷 닳는 소리 뿐이로고.
생生의 회한과 선도仙道 입문
안주가 속한 관서 지역은 대대로 중앙 정부의 견제를 받아오던 지역이었다. 아울러 1811년의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고, 또 좌절되면서 민심은 더더욱 흉흉해지고 사회는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1885년, 선주의 나이 17세 무렵,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혀 집으로 난입한 모리배들의 폭행에 선주가 거의 죽다시피 할 정도로 상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흥분한 선주의 부친은 복수의 일념으로 평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한에 사무친 앙갚음의 칼을 갈아오는데, 그 모리배 일당이 예기치 않은 일로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되었다.
이 무렵 선주는 우주 공리의 엄연히 살아있음과, 선과 공의가 인생사의 주초가 되고 있음을 느껴가고 있었으나, 워낙 깊은 심신의 상처를 입은 터라 세상은 허무하고 인생은 무상하기만 하였던 것 같다. 이로 인한 염세적인 생각들은 선주로 하여금 장차 영계靈界를 더듬게 했고, 영원 세계에의 탐구로 몰아 갔는지도 모른다.
인생사에 대한 환멸과 병약한 몸으로 심신이 기울던 19세 무렵, 선주는 관우 장군을 섬기는 관성교의 제문 몇 가지를 정성 들여 외우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다. 관우와 어느 중이 논쟁하고 있길래, "승속僧俗이 유별하거늘 어찌 감히 관공을 희롱하는가?" 했더니, 곁에 있던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 보정대사保精大師를 몰라 뵈는가?" 하더란다. 선주는 깜짝 놀라면서, "만일 그 대사님이라면, 관공과도 논쟁할 자격이 있겠습니다" 했더니, 바로 그 사람이 말하기를, "대동강변의 을밀대로 가거라" 하더란다. 이윽고 꿈이 깨었다.
을밀대의 경치에 취해 오르던 그 이튿날의 산행에서, 선주는 우연히도 창일倉日 선생이라는 도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얻게된 그는 며칠 뒤 대성산 두타사에서 밤낮으로 주문을 송독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정신을 주문에 집중하자, 마음에 서려 있던 잡념이 점차 사라지고 무아경에 이르게 되면서, 삼일 째에 이르자 접신이 되면서 몸이 떨리고 기력이 되살아나며 힘이 솟기 시작하였다. 선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창일 선생이 일러 준대로 7일의 정성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신이 상쾌해 지고 몸에 힘이 났다. 입맛이 되살아나고, 소화력이 왕성해 졌으며, 그 동안의 중병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비로소 삶의 비결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쁨이 솟아올랐다. 이로써 선주는 선도仙道를 수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입산수도入山修道
선주는 그 이후 장 선생이란 도인으로부터 구령삼정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을 얻어 심산 유암에 들어가 몇십만 번을 외우고 또 외웠다. 몇 해 동안 육경신일六庚申日마다 밤을 새워 송독하였다. 선주는 19세 무렵부터의 관성교 연구에 이어서, 21세 무렵부터는 이처럼 입산 수련에 정력을 기울였다. 해마다 서너 번씩 심산 유벽 깊고 외진 산사에 가서 옥경玉經을 연구하고 주송하기를 21일, 혹은 49일, 혹은 백일을 지새웠다. 대성산의 두타사, 상원의 백운암 등이 그의 치성 제단이 세워지던 곳이었다.
선도의 수련 기도라는 것은 묵상과 송독을 겸한 것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고행이었다. 이 기도는 신통력을 얻고 신통神通이 되어야 하므로 심혈을 기울여야 했으며, 사邪가 단 한 순간의 틈도 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예정한 기일 동안에 집중된 정신을 적은 틈이라도 해이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과 낮을 불구하고 기도를 쉴 사이 없이 계속하며, 심신의 피로로 잠이 올 때는 삼동 대한을 가리지 않고, 반석 위에 서서 얼음물로 목욕하여 잠을 깨우기도 하고, 밀 심지에 불을 붙여 손가락 사이를 지지기도 하며 공부에 진력하였다. 이처럼 진력하는데, 방안에서 진동하는 옥 피리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하며, 간혹 옆에서 총소리처럼 폭발하는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 같은 선도 공부가 무르익으며, 선주는 그토록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했다는 기쁨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다.
예수교로의 전향
"삼령신군三靈神君이시여! 현 세계를 움직이는 예수교가 참 도道이오니까? 거짓이오니까? 밝히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교 전도지를 내미는 평양 거리에서 예수교인과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이 있은 후, 이렇게 기도하기를 몇 날이 지나자, 자신이 신봉하던 선도를 영생불사 도리로 알고 있던 선주의 마음에 점차로 의심이 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환영이 보였다.
"아래로는 만경창파요, 위로는 층암절벽이 솟았는데, 이편과 저편에 각기 동아줄이 드리워 있는지라, 내가 이편 줄을 잡고 오르는데 보아하니 위가 썩은 줄이로고. 하여서, 잡았던 줄을 놓고 저편의 것으로 옮겨가려 하니, 이제는 그 줄마저 튼튼한 것인가 의심이 먼저 나는지라..."
이제 다시 선주는 번민에 휩싸였다. 10여 년을 매진해 온 선도仙道에의 회의와 아울러, 예수교에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다시 그를 병고의 길로 내 몰았다. 이내 심신은 다시 쇠약해 갔다. 선주는 전도자가 주고 간 천로역정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그 책 중 인물의 역정에 자신의 지난 생이 투영되어 눈물이 책장을 적시었다. 그러나, 하나님에의 깨달음은 물론, 예수에 대한 조그마한 신뢰감마저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 전도자가 다시 일러 준대로 선주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의 방식대로 천부天父를 상제上帝라 부르며, 깊은 밤이며 이른 새벽마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상제님이시여! 저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여러 해 정성을 다한 선도仙道는 이제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확신치 못하고 있사오니, 저는 실로 민망하여 죽을 지경이오니이다. 저를 긍휼히 여기사 심령에 안식을 주시옵소서!"
이 같은 내용의 기도가 수삼일 지속되던 어느 날 밤, 오고가는 인적은 끊기고 사방은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선주는 홀로 꿇어 엎드려 간곡히, 예수가 과연 인류의 참 구주인지를 기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방안에서 예의 그 청아한 옥 피리 소리가 진동하며, 요란한 총소리가 사방을 뒤흔드는 듯 하더니, 이윽고 공중에서 "선주야, 선주야, 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음성에 놀라 두려움에 몸을 떨며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엎드린 그 자세로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
비로소 마음이 터지고 입이 열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방성 대곡하였다. 몸은 불덩이 마냥 펄펄 끓었고, 선주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가운데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해가 1897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었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기수
길선주 목사는 기미 만세 사건의 주역 33인 중 기독교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한 죄목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뒤, 얼마쯤 자택에서 휴양하고 다시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다. 목사는 가는 곳마다 말세학末世學을 강의하였다. 머지 않아 큰 전쟁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예고하였다. 당시 국내 정세의 되어감이나 세계 정세의 흐름이 심상치 아니했던 동시에, 세계적 전쟁과 재난이 임박해 오고 있던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세의 징조를 확연히 느끼게 하였다. 목사는 가는 곳마다 주님의 재림을 교회에 경고하였던 것이다.
길선주 목사는 출옥 후 1935년 상반기까지는 평양을 중심 한 평안도 근방과 만주, 북간도 일대를 돌며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사명에 불타는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건강을 돌아볼 여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복음을 온 국민에게 전하기에 정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가 전국을 돌며 행한 부흥회의 설교가 2만여 회를 넘었고, 청강자가 당시로 연 380만 명을 넘었다. 설교 메시지는 성서를 근거로 예언적이었으며 영감적이었고, 그가 길러낸 목사, 장로, 교사, 사회운동가가 800여명에 이르렀다. 세례를 직접 베푼 교인이 3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새로이 설립한 교회가 60여 곳에 이르렀다.
그러던 1935년 8월, 평안북도 신천군 신천면 월곡동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을 일으켜 강단에서 쓰러졌다. 신천 기독병원에서 13일간의 치료를 받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목사는 평서노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뿌리치지 않았다. 1935년 11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임차면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마지막 날, 집회의 폐회 축도를 마친 그 자리에서 길선주 목사는 다시 뇌일혈로 쓰러졌다. 그날의 그 축도가 한국민족교회를 향해 기도하던 그의 마지막 기도가 되고 만 것이었다. (길진경의 '영계 길선주, 종로서적'을 참조하라.)
3. 길선주의 영성사적 위치
한국적 성령운동의 전형
길선주 목사가 한국 민족교회 성령운동의 기수로 등장한 것은 1907년 평양에서의 대부흥회부터이다.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이래로 겨레는 나라의 역사가 잠시 끊어졌다 할지라도, 결코 단절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필연코 언젠가는 압제자가 심판의 검 앞에 굴복하고야 말 것이라는 신앙과 역사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적 신앙과 역사의식을 한국 민족교회에 절절히 심어간 이가 바로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대부흥의 실질적 구형자構形者였고, 그 독특한 유형의 신앙을 형성해 나간 인물이었다.
새벽 기도회는 세계 교회사상 그가 한국에서 처음 실시하여 그 전형이 되게 하였고, 통성桶聲기도라 하여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함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의식儀式도 그가 창안하였다. 성령의 임재臨在하심에 대한 체험적 고백이나 그 정서적 표현에 감싸이는 신앙생활의 유형도 모두 실상 이때로부터 그 근원을 서려두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체험적 신앙과 함께, 길선주 목사와 그의 부흥회에는 성서와 교회사적 전통에 대한 신앙적 계승이 시종 드러나고 있는데, 이는 그 스스로가 일만 여 회를 독파한 계시록 묵상과 아울러 성서 전반에 걸친 그의 피나는 숙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부흥회에서의 길선주 목사가 행한 설교가 넘치는 영력과 함께 퍼부어 놓는 성서 구절들이 줄줄이 구슬처럼 이어져 연결되게 하는 은혜로운 해석으로 일관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부흥사경회 인도 중 쓰러진 그의 마지막 임종 길에 들려지던,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라는 찬송과 함께, 그의 운구가 마지막으로 장대재를 떠날 때 한 조객이 이런 글을 남긴 바가 있다.
"선생이 나심에 근세조선에 위인이 있었고, 선생이 기독교회에 개종하심에 조선교회의 반석이 섰으며, 선생이 1906년 새벽기도를 시작하심에 세계에 새벽 기도가 시작되었고, 선생이 1907년 성신의 불을 드시매 (조선)천지에 대 부흥이 시작 되었다... 선생이 최초로 한인韓人 목사가 되시매 조선에 노회老會가 조직되었고, 선생이 계시록을 일만독一萬讀하시매 무궁세계의 길이 만인 앞에 밝아 지도다... 선생의 손에 직접 세례 받은 자 삼천 인 이상이요, 구도자가 칠만 인이라 하니, 기실은 사십만 조선교인 중에 선생의 감화 받지 않은 자 심히 적고 적으리라."
길선주의 말세학
길선주의 사상은 종말론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사상적 근거는 요한계시록과 요한서신들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의 신비주의가 그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소망의 소재를 먼 미래에 두고,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不遠하니, 저 천국 얻을 자 회개하라'는 찬송이 영가靈歌처럼 늘 울려 퍼져 나오던 독특한 그의 심령부흥회는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던 시대의 갈망에 응답하여 그 맡은 바 소임을 훌륭히 다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종말론은 현 질서에 대한 부정적 자세이기는 했지만, 계시록의 천년왕국을 저 앞에 있는 인류의 다가올 발전적 미래의 낙원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사상적 의미를 갖는다. 바로 지상천국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지상적 실현을 선뜻 믿었다. 선도仙道에 있었던 지난 역정에 힘입어 그가 성서에서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상체계를 두고 당시의 한 저명한 학자는 조선신학朝鮮神學이라 명명한 바도 있다.
길선주의 이러한 신앙적 현세성現世性이 그의 위대함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신앙 속에 은둔과 피안성彼岸性을 그 전통으로 물려준 것이 분명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살아있는 겨레와의 동행에서 증거 되는 것이었고, 역사 속에서야 비로소 선교될 수 있는 성육적成肉的 사건인 것이었다. 교회와 사회를 연결시키고, 범인凡人이 찾는 열락悅樂을 성령의 사랑으로 채워 가는, 민족과 대중의 신앙 바로 그것이 길선주 목사가 부흥회에서 선포하고 간 신앙이었다. 3. l 운동의 민족 대표로서,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 부흥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사실상 한국교회 일대一代의 기록이었고, 따라서 한국교회는 그의 활동과 서거를 계기로 해서 새로운 전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4. 길선주의 영성적 후예들
불의 사역자 김익두
김익두金益斗 목사는 길선주 이후의 한국교회 부흥회를 대명代名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27세 무렵의 1900년에 기독교로 전향했고, 1902년 세례식에 임하기까지 신약성서를 일백독一白讀해낸, 열정과 기도의 소박한 전형적 한국 기독교인이었다. '가슴을 칼로 찢는 듯한' 성령 체험을 경험하고 나서, 불같은 성령의 임재와 기적의 신유神癒 은사를 가져오는 부흥 목사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에게서 본격적인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 사경회 때부터다. 그때 박수진朴守眞이란 이름의 아래턱이 떨어져 늘어진 희대의 불구자가 그의 기도의 능력으로 고침 받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1919년의 조선! 심각한 민족적 좌절의 아픔과 몰려드는 세속문명의 도덕적 황잡, 혁신적 기풍으로 휩쓸려 넘치던 사회주의 무신론적 투쟁 분위기 등에 동요되는 신앙적 혼돈은 겉잡을 수 없었다. 그날에 목사 김익두가 길선주에 이어 거인처럼 한국 강산을 짊어지고 지켜 선 것이다. 기미 만세의거 이후에 김익두의 부흥회가 없었더라면?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특한 사명을 짊어지고 나선 한국교회 전환기의 인도자였다.
그의 이적은 이후 계속되었다. 풍증風症, 혈루증血漏症, 고령의 반신불수, 어린 꼬마 앉은뱅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신유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교계에서는 '김익두 목사 이적증명회'를 결성하여, 그의 신유의 능력을 검증해 나가기까지도 하였고, 장로교 황해노회에서는 장로회 헌법 제 3장 1조 문항, '현하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노라.'라는 조문을 수정할 것을 건의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1923년 총회에서 수락하기에 이른 일도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신앙에 대한 한 지향의 표시였다.
그는 영적 사랑과 함께 교회의 사랑을 강조하였고, 성신의 능력과 기도의 힘, 그리고 소박한 신앙과 역경 후엔 반드시 복락이 따라온다는 복음을 계속 전하고 전하였다. 1919년 이후 몰아닥친 도전에 대하여, 교회는 이런 형식으로 대응해 나가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부흥사경회적 신앙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1926년 이후의 교회 안팎에서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배척은 1926년 이후 공산주의 계열의 표면적인 반反기독교 운동 전략 체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몇 가지 예로, 간도 용정龍井에서의 집회에선 폭도들이 철근을 휘두르며 가하는 공격을 받아 예배가 중단된 일이 있었고, 그해 5월 전북 이리裡里 집회에선 민중 운동가들의 연명으로 발생한 반종교적 시위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김익두 목사가 특히 사회주의 계열에게 배척과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성장 배경과 메시지에 있었다. 교육적 배경이 별로 없이 저자 거리의 한량과 같은 생활에 젖기도 했던 그는 한촌 유벽지 출생이었다. 그러한 김익두 목사가 한국교회로서는 일찍이 접근하지 못해내던 빈곤과 병고 무뢰無賴의 소외 계층을 흡수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이들 소외계층 특유의 사회적 정서, 다시 말하자면 겸손, 양보, 가난, 정서적 소박성 등 이러한 생태를 찬양하면서, 부富에의 경원과 현 질서의 종말을 심판적으로 외쳤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천년왕국적 종말론은 현실의 죄악성에 대한 단죄 때문에 빈곤과 멸시의 소외 계층에게 환영받았고, 더욱이 그의 설교 언어형태와 구성 역시 이들과의 동질적인 삶의 체험에 힘입어 그 호소력이 매우 강했으며 따라서 수용적受容的일 수 있었다.
더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속에 내재하는 성령 강림 체험으로의 그의 인도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약속해 줄 수 있었고, 그래서 기존 사회적 불균형에 대한 저항의식을 신앙에의 몰입으로 전환시켜낼 수 있게 해주었다. 분명 목사 김익두의 메시지는 길선주와는 달리 내세 지향적이었다. 바로 이것이 민중의 긍지 확보에의 길을 열어주는 채널이 되었고, 이는 동시에 민중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와의 결별에 필지必至하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공산주의 계열이 그에게 거세게 반발하게 되었던 주원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최후의 충성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유일하신 하나님에의 신앙은 일제의 천황 숭배에의 항거를 함축하고 있었고, 또 새로운 신앙적 사회 혁명을 불러오는 신비적 종파의식이 발아할 수 있는 양분이 되고 있기도 하였다. 시련과 오해 속에서도 이렇듯 성령의 불길을 좌절되고 혼미해 있던 군상들에게 일으켜주던 목사 김익두의 부흥회가 멈칫한 1930년대, 그 자리를 경건의 새 박력과 영감의 능력으로 채워간 성도가 하나 있었으니 이용도李龍道가 바로 그 사람이다. (민경배의 '한국기독교회사'를 참조하라.)
일사각오의 주기철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유명한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한국교회의 투쟁에 있어 그 대표적 선봉으로서 유명하다. 17세 무렵엔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고당 조만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 상과대 재학 중 병고로 휴학, 고향에서 요양 중이던 1920년 9월, 바로 김익두 목사가 인도한 마산 문창교회 사경회에서 큰 은혜와 감화를 얻고, 이어 동년 11월, 역시 김익두 목사의 창원 웅천읍교회 집회에서 마침내 결단하여 신학을 결심하고 주의 길로 매진하게 된 인물이다.
그후 부산의 초량교회와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각각 5년여씩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성공적인 목회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으나, 그가 정작 한국교회의 전면에 선봉적 투사로서 등장하게 된 기간은 신사참배 강요의 파도가 거세게 한국교회를 뒤엎어 질식시키려하던 무렵, 바로 1936년도부터 1944년 그가 감옥에서 순교하기까지의 평양 산정현교회 목회 시절이다.
당시 평양에서는 교회의 교세가 대단하여 주일날엔 거의가 상가의 문을 내렸고, 교회 종소리가 동서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이러한 제 2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던 평양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는 바로 길선주 목사가 시무한 장대현교회였고, 구역이 많고 경제적 기반이 든든하며 민족주의 지사들이 많이 운집해 있기로는 의당 산정현교회였다. 산정현에는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되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 장로로 봉직하고 있었으며, 재력 있고 기개 있는 장로들이 기라성같이 자리잡고 있어 가히 조선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회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 교회에 1936년 40세의 주기철이 당회장 목사로 들어선 것이다.
두 해를 넘긴 1938년 2월 총독부는 신사참배 강요를 위한 첫 타격 목표를 전국에서 교세가 제일 강하기로 유명한 평북노회에 두고 총공세를 펴왔다. 결국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고, 연이어 평양신학교가 폐교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한국교회의 어두움에의 침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1938년 6월, 시국이 어지러운 가운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매우 암담하였다. 전국 24개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노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한 종말의식이 주기철 목사의 생각을 압도해 가고 있었다. 그는 사태의 진전이 여러모로 심상치 않게 보이자, 이제 비로소 주의 제단에 몸을 바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다음은 그의 일지에 보이는 필적 유고의 일부분이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했느냐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외다.
1939년 3월 제 74회 일본제국의회는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켜 조선교회를 지배하는 일에 법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과거에도 올가미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제 떳떳이 식민지교회를 지배하거나 없애버릴 수도 있게된 것이 그들의 큰 위세였다. 이에 일경은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라는 친일단체를 조직, 조종하기로 모의하는 등 조선에 대한 정신적 지배의 마수를 펼쳐오고 있었다. 이는 신사참배 가결에 버금가는 중차대한 사건으로, 만의 하나 부결되기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큰 암적 존재가 있었으니, 조만식, 김도원, 오윤선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비호하고 있는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였다.
서쪽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한 발자욱 두 발자욱 걸어가신 자욱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네.
일제당국도 속수무책이었다. 고문으로도 설득으로도 주기철 목사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네놈은 감옥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놈이로구나!"라고 결론을 내리고, 석방과 재 구속을 반복하던 중 1940년 제 5차 구속을 집행하였다. 연행되기 직전 주목사는 몸져누우신 어머니께 큰절을 하였다. "하나님께 어머님을 부탁드렸습니다." 그의 최후 고별 인사는 이 한마디였다.
이에 앞서 주목사는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한 평양노회가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한 소식을 듣고, 이렇게 변모해 버린 조선교회의 모습에 찢어지는 가슴으로 목이 메었다.
"사람에게 쓸려 버리우는 예수님의 고독한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이 핏자국에 엎디어 우리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합니다."
마침내 그는 견딜 수 없는 고문을 4년에 걸쳐 계속 받아내던 중, 그 인내의 지구력이 육신의 나약으로 무너질세라, "순교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하며 기도하다가 1944년 4월 22일 옥중순교의 숨을 거두었다. "내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 누군가가 그의 마지막 기도를 들었다. (김요나의 '일사각오, 한국교회 뿌리찾기선교회'를 참조하라.)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이용도
1930년대의 한국교회는 38만여 명의 교세였으나,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지식의 황잡, 게다가 심각한 정치적 위기가 곁들어져 망망한 황원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여기에 교회 신앙의 내면화가 그 절정에 이르러, 신비적 열희悅喜로의 전향과 몰 현세적 침잠에로 그 영혼의 안식을 찾아 들어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필경,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나와의 고독한 대면을 갈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용도李龍道(1900-1933)는 감리교의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다. 재학 시절부터 가슴깊이 새겨진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따라, 감격과 열정으로 전국에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교파?? 구별이 없이 부흥회를 인도했던 저명한 부흥사이기도 했다. 그는 겨레의 서러움에 목메어 울고, 교회의 형식화와 교권의 창궐에 매서운 비판을 가하던 당시 전형적 경건의 한 모델이었다.
그가 25세 되던 해, 뜻밖의 각혈 血 때문에 신병을 돌보려 친구의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정양의 길을 떠났을 때, 그의 일생을 좌우한 결정적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곳의 작은 교회로부터 설교요청이 있었는데, 그는 강단에 서자 아무 말도 못하고 내내 목메어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고, 여기에 교인들도 은혜를 받아 다들 흐느껴 목메어 울었다.
오 나의 주여! 사랑의 주님이시여! 내가 기원祈願의 눈을 뜰 때에, 님의 전체는 보지 못한다 하여도 다만 옷자락만이라도 안개와 같이 고요히 드리워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그것이 설사 꿈이라 하여도, 나는 거기에 입맞춤을 얻어 만세의 질고와 천고千苦의 원한을 세례하고도 남음이 있사오리다.
말과 언어가 없이도 백의민족의 설움을 매개로 신앙적 정서가 서로 상통되어 교감되었던 것이다. 그날의 설교 제목과 날짜마저도 그의 일지에 명기되어 있지는 않으나, 눈앞을 압도해 오는 '고난의 십자가 상像', 그것은 1930년대 한국 겨레의 비운과 교회의 참담한 시련으로 인하여 더욱 절절히 가슴에 메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한과 설움이 그에게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몸부림치는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 바 되는 이 합일合一의 원리原理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며, 일심으로 주만 바라보라 잠시라도 놓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그리하여 나의 시선에 잡힌 바 되신 주님은 영원히 나의 사랑 속에 거하시리라.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모함은 상징적으로 신랑과 신부의 사랑으로서 밖에는 그 언어적 표현이 어려웠다. 이 사모함의 정은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에 안겨 그의 입술에 입맞추는 순간의 환희로 노래되고, 그의 떠나가심에 통탄해 마지않는 구슬픈 아가서적 가락으로 표현되어 나타났다.
그대는 진실로 염념사지念念思之하여 주님의 사랑을 찾고 찾으라
그리하여 저 깊고 깊은 사랑의 내전內殿에까지 찾아 들어가라
그 곳은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지성소니 그곳에서 사랑을 노래하라!
기독교의 진수가 믿음보다는 사랑에 있다는 확신이 그의 생을 지배했다. 요한복음을 가장 소중한 성서라 권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학과 교리의 기독교를 공격하면서 신비주의의 공통적 특성에 들어서고 있었다. 더욱이 '내 말을 듣고 생명을 얻으라. 나의 말은 진리..'라 쓰던 그의 표현은 실로 대담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의 동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자기를 고난 당하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양들은 누구를 보고 주를 생각하며, 누구의 생활을 통해 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쓴 유명한 그의 고별사적 산문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울어라 성자聖者야! 울어라 성녀聖女야! 겟세마네는 어디 있어 나의 피 눈물을 기다리누.. 오, 나를 위하여 홍포를 깁는 자여, 가시관을 엮는 자여.
1933년 감리교에서 휴직休職 처분을 받은 이용도는 얼마 후 해주海州에서 반대하는 여러 교인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하고, 원산 광석산기도원에서 요양하던 중 지병인 폐결핵으로, '아름다운 내 본향 목적지 삼으니, .. 거기엔 풍파가 일지 않으리'라는 찬송 가운데 파란의 생을 마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함으로 온전히 닮아 내고자 하던 그의 열망과 같이도 33세의 나이였다.
이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野花 이제는 소문 놓고 노방路傍에 찢길, 이름 좋은, 그러나 역시 고독한 백합화!
오, 주여! 당신만이 내 구주이오니 주 외에 달리 무엇을 구하오리까?
그의 이 절규에는 소박한 신뢰가 있었고, 눈물겨운 환희가 있었다. 그 진실을 의심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는 실로 1930년대, 서구 선교사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져 가고, 교회가 사회 변화의 도전에 신음하던 그 때에, 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의 자립과 토착화에의 실험에 나서서 고고히 음성을 발하다 사라져 간 고독한 신앙인 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후로도 13년간 지속된 일제 치하의 교회가 십자가를 걸머진 채 지켜 나갈 수 있었던 유일하고도 불가피한 신앙형태를 대표하고 있었다.
5. 썬다 싱과 길선주
썬다와 길선주의 발화發火
기독교의 역사가 땅 끝 아시아로 찾아들게 되고, 1905년 영국 웨일즈와 인도 그리고 조선에 동시적인 성령의 역사가 발화되고 있을 때, 분명 그 불길을 들어 자신을 태우고, 나아가 자신이 속한 민족교회를 활활 태워가야 했을 영성사적 사명이 1910년 인도의 썬다와 1907년 조선의 길선주에게 있었다. 그러나, 길선주가 조선교회의 사무엘의 자리에 서서 미스바의 불길을 드높이 치켜 세워주는데 성공해 나오고 있었던 바와는 달리, 썬다는 인도에서도 나아가 티벳에서도 그러함의 역사를 이루어 내는데 실패하고 마는 모습을 보인다.
수천 년의 문화적 토양이 동일하게 비옥했고, 사색적 깊이의 맛을 아는 조예가 동일하게 깊었으며, 멸시와 박해 속에서 쌓아올려진 거의 동일한 교회적 심정을 소유한 인도와 조선의 땅에서, 거의 동시에 점화된 하늘로부터의 성령의 대 역사가 이제 비로소 서양 선교사들의 손에서 인도와 조선의 민족교회의 어깨위로 그 웅대한 미스바 사무엘적 도약을 위한 사명을 이전시키려 할 때, 어쩌면 썬다와 길선주의 정서와 성향으로 대표될 수도 있는 인도와 조선교회의 그 차이점에 의하여 너무도 상이한 결실을 보기에 이른다. 간디와 타고르를 잉태했던 인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철과 이용도의 숙성熟成
카돌릭과 개신교의 한국교회가 150여 년 그 선교역사 속에서, 마치 아합왕 치세의 북 이스라엘에서와도 같이 바알과 아세라적 파도에 휩싸여 질식해 숨을 죽이려 할 때, 분연히 일어서 저항하는 자들의 전면에 나서, 엘리야적 투사로서의 자신의 소임과 그러함으로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불굴의 일사각오 결의로 겟세마네를 지켜내며, 죽음의 골고다로서의 모리아 산을 올라낸 이들의 상징적 인물이 주기철이었다.
그리고 동시대의 한국교회가 세속적 격랑과 권위주의, 형식과 논리의 만용이라는 또 다른 미운 물건에 굴복되어 갈 때, 또한 한국교회가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처럼 신비적 묵시운동 속의 의義의 교사에 비견할만한 소망으로 안타까울 때, 교회의 영성적 질고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 몰리어지는 아사셀 양羊으로서의 구세적 소명을 스스로 자인하며 예표하는 자로서의 또 다른 엘리야적 심정의 길을 걸어 보인 인물이 바로 이용도였다.
하나의 성령운동가적 후예로서 김백문金百文이나 나운몽羅雲夢의 분파적 성령운동이 있기 이전에 이미 주기철과 이용도가 한국 강산에 그 엘리야적인 심정적 전형을 먼저 이루어 내고 있었고, 그러함의 영성적 에너지가 응결되기까지 아직 채 깨어나기 직전 아시아 대륙의 인도와 조선교회에는 썬다 싱과 길선주가 나란히 먼저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서구 기독교회의 영성과 전통적 동양 영성이 통합된 기반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로의 사랑의 경주에서 우승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심정을 받아 내리는데 앞서고 있었던 길선주였고 당시 조선의 교회였던 것이다.
6. 프란치스코와 이용도
막달라 마리아적 영성의 부활
필자는 중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20C 초엽 한국의 목사 이용도를 통해 막달라 마리아적 영성의 부활의 흐름을 목도하게 된다. 프란치스코에게로 흐르던 막달라 마리아적 영성은 이미 교부시대 사막 수도자들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유유한 흐름 속에 목사 이용도에게서 다시 대표적으로 발현된다. 흔히 도미니크를 지성적 수도원 운동가로, 그리고 프란치스코를 이에 비하여 감성적 수도원 운동가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프란치스코를 특히 '여성영성의 소유자'로 읽는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가난과 겸손을 일컬어 자신의 '누이요, 신부'라 했으나, 정작 자신은 바로 '예수의 신부'이기를 추구했던 인물의 전형이다. 기독교 영성가 치고 누군들 아니 그랬을까마는 프란치스코에서는 그것이 더욱 크게 발현된다.
프란치스코는 막달라 마리아적 영성 접근으로 예수께 다가선 기독교사 최고의 인물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 사랑의 사도라 하면 요한을 꼽는다. 그리고 요한신학을 일컬어 사랑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기독교 역사에서 진정한 사랑의 사도는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평가한다. 마리아의 영성이야말로 '사랑과 성령의 영성'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어찌 그가 예수님만을 편애했을까. 그의 영성과 사랑의 폭과 높이와 넓이는 분명 교회의 진정한 모본이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이 막달라 마리아적 영성을 많이 상실한다. 교회를 통하여 중세시대가 예수를 친근히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은 곧 예수께서 부활 동산에서 가장 먼저 찾으셨던, 친근한 사랑의 사도 막달라 마리아의 영성 상실을 의미한다. 만약 당시 예수께서 교회를 향해 "죽었다"고 외치셨다면, 그 죽음의 요소 중 한 핵심에 바로 이 영역의 상실이 거론되었을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읽은 당시 중세의 교회적 영성 현실은 바로 그 '죽음과 고독'이었다. 신랑이 즐거이 임하여 찾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신부된 교회가 느끼는 그 사랑의 박제감剝製感 말이다. 프란치스코는 교회의 붕괴가 바로 그 생명력의 상실에 있다고 읽었다. 그리고, 그가 성 다미안 성당에서 '내 집을 수리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살아있는 부친을 영원히 떠날 때, 그는 이미 막달라 마라아적 자세로 열렬히 예수께 매료되고 있었다. 어찌 육중한 사명감만으로 그런 아름다움의 생애를 그토록 가뿐히 살아갈 수 있었을까?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어, 목사 길선주와 김익두가 20C 초엽의 한국강산을 '회개와 치유의 불'로 달구어 갈 때, 비로소 그 일구어진 심령의 산하에 뿌려질 씨앗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마음 비운 여인의 이슬 맺힌 눈망울 속의 사랑'임을 당시 한국의 현실 속에서 누구보다도 이용도는 명확히 읽었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세상 속에서 버려진 '길가의 야화野花'라 표현했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이 '예수의 품에 안긴 사랑하는 여인의 심성'으로 세상을 향해 써내려 간, 예수를 향해 영원히 떠나는 자의 심정적 글귀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교회의 영성자리엔 유독 막달라 마리아적 영성 요소가 강하다. 언급한 바대로 이는 분명 서구적 신학을 통해 형성된 것은 아니다. 메마르고 번잡한 신학논리 저편으로 흐르는 예수를 향한 사랑의 영성이 발현되어 나온 것이다. 흔히 이용도를 요한신학의 후예라 일컫지만, 그것은 기독교회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성서의 분량 속에 막달라 마리아의 서신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7. 수운 최제우와 한국적 셰키나 운동
수운 최제우의 시대적 배경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은 1846년 9월 15일에 처형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조선의 역사적 상황에 서구 카돌릭의 신앙을 접목시켜 가는 길목에서 피어난, 처절한 순교 역사의 중심부에 서게 된 상징적 인물이 바로 이 김대건 신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당시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가히 '살육의 광기'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1866년 이른봄부터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조직적으로, 전국적으로 자행된 병인박해에 비하면 말이다. 이때 직접적으로 순교한 이들이 8,000을 넘었고, 한국통사韓國痛史에 의하면, 이에 연관된 사상자들이 12만에 육박했을 정도다.
하여튼 서구 카돌릭의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에 전교하면서 시작된 조선으로의 서학西學 유입은 급기야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이후 신앙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조선의 전통적 사상 및 문화와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1880년대 이후 시작되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성공적 프로젝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조선은 개화와 발맞추어 기독교회의 선교자유를 허락하지만, 최 수운水雲이 맞던 1850년대는 무언가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던 실로 답답한 시기라 아니할 수 없다.
수운의 지속적인 셰키나 체험
최제우(1824-1864)가 31세였던 1855년乙卯, 꿈에서 진기한 체험을 한다. 이른바 천서天書를 받는 체험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55년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득 밖을 보니 낯선 스님이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는 금강산에서 수행하는 스님인데, 어느 날 백일기도를 마치고 돌아보니 뜻밖에 기묘한 서책이 평상 위에 놓여 있더란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내용들이어서, 동서사방을 찾아 그 책을 해독할 인물을 구하는 중에 우연히 내게 이르렀단다. 그런데, 날 보니 문득 하늘의 서기가 있는 분이라 생각되어, 그 책을 드리노니 부디 해독해주십사 한다. 그 책을 받아 펼쳐보니 과연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내용이었다. 하여 3일을 말미로 신청하고 다시 오라 하였다. 3일 동안 연구한 내용을 그 스님에게 설하니, 참으로 흡족해 하며, 부디 자중하시라 한다. 답하여 절하고 보니 그 스님이 간 곳이 없더라. 하여 책상을 보니, 책도 홀연 보이지 않더라. .. 선생께서 .. 그 뒤에 깊이 이치를 살펴보니 책속에는 기도祈禱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崔先生文集道源記書)
"지성감천至誠感天 아닐런가, 공덕功德이나 닦아보세, 자고급금自古及今 전해오는 세상 말이, 인걸人傑은 지영地靈이라 하니, 승지勝地에 살아보세, 명기明氣는 필유명산하必有名山下라!" (夢中問答歌)
이른바 천서天書요, 천명天命의 상징으로 수운이 받아들이는 대목이다. 이후로부터 수운은 명산을 찾아 공덕功德을 쌓기에 주력한다. 분명 그가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감록鄭鑑錄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볼 수 있다. 하여, 수운은 이듬해 1856년 경상남도 양산군의 천성산千聖山에서 49일 동안 치성을 드리다가, 집안에 일이 있어 47일로 중도 포기했는데, 이를 한스러이 여겨 1857년 다시 입산, 이윽고 49일의 적공을 마친다. 그의 나이 34세의 일이다.
이로써 시작된 수운의 본격적인 적공수행은 가난한 집안의 전답을 팔아가며, '하느님의 천명'에 모든 것을 걸게 되는 그것이었다. 이 동안 그가 영통靈通했다느니, 신묘한 조화를 부린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나, 그 스스로는 심히 불안한 시기를 보낸 듯하다. 천명을 받은 이로서 가히 합당한가 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결국 수운은 1859년 후반기에 고향인 경주 견곡면에 있는 구미산龜尾山에 들어간다. 이곳은 과거 부친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용담정龍潭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살림을 동반한 힘겨운 수행이었다. 그러나, "어찌 세인들의 길로 돌아서리오?"世間衆人不同歸 하며 자신을 다그쳐 나갔다. 그러다, 문득 1860년 4월 5일 수운은 신기한 영적 체험을 통해, 자신이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았다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날은 조카 생일이던 날이었는데, 집안에서의 입장도 불편하고, 몸도 조금 이상하고 해서, 잔치 집에 가던 길을 돌려 집으로 다시 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마구 떨리고, 정신이 어찔어찔하여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이러한 순간에 하늘에서 외치는 천음天音이 들려왔다. 그는 이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경신 사월 초 오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득도如夢如覺得道로다" (龍潭歌)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집안사람 거동 보소 경황실색 하는 말이, 애고애고 내 팔자야 무슨 일로 이러한고" (安心歌)
이 이상한 체험을 통해 수운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그의 행위도 결정적으로 달라져 갔다. 그에 따라 수운에 대한 소문이 널리 자자해져, 그의 가르침을 바라는 이들이 차츰 늘어갔다. 그러나, 수운은 이듬해 봄까지 은인자중하며, 자신이 받은 도道를 무르익히는 데 힘썼다. 이러는 동안 마음이 정돈되고, 자신감이 잡히자 그해 봄, 1861년 자신이 받은 새로운 도를 포덕布德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동학東學의 시작이다.
"나도 거의 1년 동안 그 가르침을 잘 익히면서 미루어 생각해 보니, 과연 그 도道에 당연한 이치가 있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주문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降靈의 방법을 정리하고,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잊지 않기로 맹세하는 주문을 지었다." (論學文)
분명히 수운은 강신降神을 통한 하늘과의 신령적 교감交感과 체험을 소중히 하고 있었고, 또한 49일 정성 등으로 익힌 자신의 셰키나 체험을 체계화하고 있으며, 주문을 통해 마음을 하늘에 바치는 '기초적 기도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는 분명 히브리 예언자에게도 있었던 셰키나 현상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운이 신구약성서를 체계적으로 접하지 못한, 구한말 조선의 아들이란 점을 간과치 않는다면 말이다.
동시대 중국 홍수전의 셰키나 체험
1850년 7월부터 1864년 7월까지 존속한, 중국 최대의 농민반란인 동시에 일종의 천년왕국운동이었던 태평천국太平天國운동과 그 운동의 창건자 홍수전洪秀全(1814-1864)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최수운보다 10여 년 먼저 태어나, 역시 10여 년 먼저 천년왕국의 기치를 들었으나, 불행히도 두 사람은 같은 해 7월과 3월에 각각 자결과 교수형으로 그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시기적 유사성 외에도 중국淸과 조선이라는 유사한 문명권에서 일어난, 유사한 셰키나 체험을 기초로 한 종교운동이며, 그 기저에 반드시 중국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초적 기독교서적들이 자리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뒤에 스스로 태평천국의 황제가 되는 홍수전의 초기 셰키나 체험은 다음과 같다.
"홍수전의 나이 33세 무렵 1837년 3월, 세 번째 과거시험에 낙방한 그는 고향에서 이름 모를 중병에 걸린다. 그 병은 40일 남짓 계속됐는데, 그 동안 그는 끊임없이 환상적 영적 체험을 한다. 병상에 있는 동안 그는 환상 속에서 천상계天上界로 인도된다. 거기서 흑의黑衣를 입은 당당한 노인에게서 "세계 만물을 창조한 나를 경배하라. 귀마鬼魔를 숭배해선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검劍과 인수印綬를 하사 받는다. 그리고, 홍수전은 그 노인에게 이끌려 하계下界를 내려다보고 사람들이 사심邪心과 죄업罪業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목도한다.
또한 환상 속에서 홍수전은 중년 나이의 사람과 더불어 사신邪神을 찾아 여행하면서, 이들을 베어 멸하였다. 이 중년의 사람을 그는 장형長兄이라고 불렀다. 어느 때인가 홍수전은 노인이 공자孔子를 힐책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자는 부끄러워하면서 죄를 참회하고 있었다.
환상을 보는 동안 홍수전은 방안에서, 마치 강적과 싸우고 있는 병서처럼, "요妖를 베어라, 베어!" 하면서 큰소리 외치고 뛰며, 승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다. 환상 속에서 요마妖魔는 새나 사자 등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면?? 그에게 덤볐지만, 노인에게서 받은 인수로 막자 곧 물러났다. 그는 멀리 북쪽 끝까지 요마를 쫓아가 이를 멸하고, "유덕한 청년이 세계를 유랑하며, 친구를 구하고 적을 살殺 하였네"라고 노래를 불렀다.
홍수전의 집에서는 그의 병을 그저 숨기기만 하고, 도사나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으며, 홍수전의 기괴한 행동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수전秀全이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환상을 체험하는 동안 홍수전은 천왕대도군왕전天王大都君王全 즉 '천왕이자 대도의 군왕인 홍수전'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도교道敎적 문구를 붉은 글씨로 종이에 써 방문에 꽂아 놓았으나, 아무도 이 글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미이시 젠키치의 '중국의 천년왕국'을 참조하라.)
이상은 그의 사촌 홍인간이 Theodore Hamberg에게 전했다는 증언을 기초로 한 사료다. 그 이후 6년이 지난 39세 무렵 1843년, 홍수전은 네 번째 과거 시험에 낙방한다. 고향에 돌아온 홍수전은 또 다른 사촌인 이경방이 읽고 있던, 당시 중국 기독교회 입문서였던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서, 비로소 6년 전의 환상의 열쇠를 발견하고서 매우 놀란다. 환상 속의 흑의의 당당한 노인은 천부상제天父上帝 즉 야웨요, 요마를 주살 할 때 자신을 도와준 중년의 사람은 구세주 예수이며, 요마는 우상이요, 하계의 형제자매란 곧 세계인류였다. 이를 나름대로 이해한 홍수전은 오랜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느꼈다.
홍수전과 이경방은 권세양언의 서술에 따라, 독자적으로 세례를 행하고, 공자상孔子像을 버리고 상제上帝를 경배하였다. 이리하여 1843년 7월 홍수전은 사촌 홍인간과 친구 풍운산을 동지로 삼고, 이렇게 4명이 야훼를 숭배하는 상제회上帝會를 결성하고, 권세양언을 숙독 음미했다. 물론 권세양언은 기독교 입문서였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사고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했다. 홍수전은 이 책이 자신을 위해 쓰여졌다고 생각했기에, 본문에 나오는 너汝, 나我, 그他 등의 대명사를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었다. 또 본문에 혹 전全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홍수전은 자신의 이름과 관련지어 이해했다.
이후 1847년 홍수전은 중국 광주부에 살던 아이작 로버츠라는 사람 밑에서 2개월 정도 지내며, 신구약성서 및 신학서적 그리고 전도 팜플렛 등을 접한다. 그나마 자의적인 수용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홍수전은 구약 유대교와 신약 기독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거기에서 신천상주황상제神天上主皇上帝의 의지와 뜻을 본다는 시각을 가졌다. 구약성서와 유교적 이상국가론을 결합한 것이다.
홍수전은 중국 고대의 이상세계였다는 삼황三皇의 시대를 '에덴'과 같이 보았고, 노아의 홍수심판을 역사전개의 위대한 원리로 보았다. 즉, '요마에 대한 괴멸'이라는 역사적 에너지의 분출을 읽은 것인데, 그 요마妖魔는 유교적 역사론에 따라, 진시황제 이후 청조淸朝까지의 부패한 정치체제로 읽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세울 이상세계는 반드시 청조 타파를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그로부터 4년, 1850년 7월, 드디어 홍수전의 상제회上帝會가 돌연 복합적 농민군사조직으로 탈바꿈하여 봉기했다.
이로부터, 14년에 걸쳐 중국 동남부 일대를 요원의 불길처럼 휩쓸었던 태평군太平軍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 태평군의 행진에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뚱은 분명 영감 받고 있었는데, 이때 홍수전이 봉기할 당시 인민의 계급 구성을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이렇게 전한다.
"홍수전의 고향 금전촌 부근의 객가출신 신자 약 1천명, 자형산 지구의 숯구이출신 신자 약 3천명, 그리고, 기타 지역의 객가, 기민, 실업광부, 난민 약 2만명, 그 중엔 노인과 부녀자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전투 가능 인원은 약 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이 연전연승하며 북경을 향해 진격할 때, 수십만인지 수백만인지 모를 끝없는 행렬이 그들 뒤를 합류해 따라오고 있었다."
태평천국과 동학
분명 수운의 셰키나 체험은 홍수전의 그것에 비하여 상당히 부드러워 보인다. 이는 수운과 홍수전의 심성적 차이에도 기인하겠지만, 수운이 필시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전해듣고 있었을 '태평천국의 난리'가 그에겐 어쩔 수 없이 혹세무민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운의 종교성을 계승한 해월 최시형의 리더십이 '노인의 유약함'으로 보여, 훗날 전봉준은 다시 홍수전의 태평천국 방식을 택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당시 전라도 일대 산천을 떠돌던 최수운이나 목포에서 가까운 전북 고부에 살던 전봉준이 이른바 '태평천국 난리'를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홍수전의 1850년 거병擧兵과 최수운의 1861년 포덕布德 사이에 10여 년이라는 세월이 들어 있다. 이 기간 중에 최수운의 1855년 을묘천서 체험이 있었고, 그 해 태평천국은 최고 전성기였다. 그 와중에 수운은 기존의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한계를 절실히 통감하는데, 그가 '유교에 대한 기대'를 확실히 단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유교의 본산인 중국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 필히 수반되지 않았을 수 없다. 하여 수운은 어떤 경로, 어떤 시각으로든 태평천국에 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최수운은 천주교의 천주天主에 자신의 하느님을 어느 정도 동일시하던 면이 있는데, 조선 당국도 초기엔 최수운을 서학西學쟁이로 인식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1864년 최수운 처형과 1866년 병인박해의 시기적 유사성은 당시 조선 당국이 조선천주교회와 최수운의 동학東學 무리들을 유사한 집단으로 분류하면서도, 서로를 분리시켜 각개격파 해나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수운의 그것을 서학西學의 동류로 몰아세우면서도 둘 사이를 파고들어 양 세력을 제압한 것이다.
당시 중국 당국에 의해 해석된 '태평천국의 수괴' 홍수전은 아무리 예수회 신부들의 열린 시각에서 볼지라도 이해키 어려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당국에 의해 진압되고 있던 1857년 이후의 태평천국은 또 다른 부패와 혼돈의 왕조 그것이었다. 그러한 정황을 조선에 들어 온 서양 신부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들이 조선천주교도들을 통해 전해들었을 최수운과 그의 체험에 관한 소문은 필시 초기 홍수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으리라. 따라서 당시 조선의 서양 신부들이나 조선천주교회 지도부로서는 최수운과 동학에 대해 우호적 접근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곧 조선천주교가 '자생적 사교邪敎'에 휘말리거나, 조선천주교회의 괴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조선 당국 역시 태평천국처럼의 종교적 농민봉기가 조선에서도 발생하지 말라는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하여 시작된 개별적 각개 격파 전략은 조선 천주교내 서양 신부들의 최수운 운동에 대한 이해부족, 그리고 최수운 자신의 카돌릭 신학에 대한 이질감과 언어학적 한계 사이로 주요하게 파고들어, 점차 수운水雲으로 하여금 양교兩敎의 셰키나적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굳이 탈서학적 동학이라는 '울타리'를 천명하는 안타까운 편향을 부추기고 있었다. 결국 조선의 교회는 김대건 이후로 길선주가 등장하기까지, 서구적 사유와 동양적 영성 사이의 간극 속에서 안타까운 행보를 지속하게 된다.
8. 수운 이후의 개벽운동전개
최해월, 셰키나적 성향의 약화
해월海月은 스승인 수운의 죽음으로부터 본격적인 활동전환을 갖기에 이른다. 동학의 사활이 자신의 어깨 위로 놓이게 된 것이다. 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이 서학 천주교와 동학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일이었다. 해월의 시대에 이르러 동학은 탈서학적 특성을 뚜렷이 하게 된다. 글자 그대로 '동학'이 되어가고 있었다. 훗날 3대 교조 손병희가 이러한 교명敎名에 깃 든 편향적 이미지를 극복해보고자 천도교天道敎라 개명하지만, 해월의 자성自省 지향적 신앙관은 이미 조선천주교와의 셰키나적 동질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창도자 수운의 셰키나 체험이 사라져 가는 해월의 자성지향적 신앙관이 모든 동학 사람들에게 즉각 동의되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봉준의 등장으로 인한 동학 교도들의 동요라 할 수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봉기를 격발 시킬 무렵, 시골의 일개 서생書生이었다는 얘기도 유명하지만, 사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무인武人적 기질이 흐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전봉준의 이러한 무인적 모티브를 통한 집단 에너지 결집은 본래 최수운이 보인 모범과도 연결된다. 당시 동학교도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기로 수운에게는 조상으로부터 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수운 스스로도 무술과 검을 익혔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동학의 무인적 잠재 에너지를 전봉준이라면 크게 읽고 있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그것을 수운의 셰키나적 카리스마를 대체할 새로운 개벽 에너지로 표출시켰을 것이고, 이에 동조한 많은 동학교도들도 전봉준의 방식이 창도자의 가르침을 역동적으로 다시 펼칠 수 있는 하나의 발전적 방편이라고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들의 눈에는 해월의 시대에 이르러 수운의 셰키나적 카리스마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을 수 있고, 더욱이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해월의 방식은 결정적으로 그들 눈에 무기력으로 보였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전봉준에 동조한 동학교도들은 이미 해월을 떠나 홍경래나 홍수전의 예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봉준의 방식은 비극으로 막을 고하고, 해월이 좀더 옳았음으로 동학교도 내부에서 결론지어 지면서, 동학은 결국 최수운의 셰키나적 요소를 상실한 채 해월의 자성지향적 신앙관을 의지하고 오늘에 이른다. 창시자 수운의 웅혼했던 셰키나적 서기瑞氣를 상실해 버린 뭔지 모를 아쉬움을 간직하고서 말이다.
강증산, 신명접신을 통한 우회右回
강증산(1871-1909)은 25세에 전봉준?? 동학 봉기를 조소어린 눈으로 맞는다. 그는 나아가 해월을 넘어, 수운 최제우의 능선에 맞닿으려 했고, 급기야 수운과 쌍벽을 이루던 김일부金一夫의 인식을 기초로 수운의 친親유학적 한계를 넘어서려 한다. 김일부가 정리한 사상은 중국의 주역周易에 뿌리를 둔 정역正易이라는 책으로 등장하는데, 강증산은 이 원리에 심취했던 듯 하다. 즉, 김일부의 인식과 그 명성을 기초해 최수운의 셰키나적 능선을 우회해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던 1901년 그의 나이 31세에 '하늘의 도道를 이룬' 뒤, 9년 동안 불과 수십 명의 제자들을 형성하다가, 1909년 음력 6월 돌연 '스스로 몸의 정기精氣를 흩어' 운명을 고한다.
이 같은 강증산의 짧은 생애를 보면, 최수운의 체험에 유사한 강렬한 영적 체험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러나, 그가 수운과는 다르게 서교西敎 즉 기독교를 크게 천시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성경을 구해 오라 하여 불사르는 등의 행동을 보이며, "서교西敎가 신명神明을 박대하니 능히 성공치 못하리라"는 등의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본다면, 그의 영적 체험의 기초는 수운의 셰키나적 하느님 체험과는 달리, 영계 신명神明들과의 인간적 접신接神에 놓여 있었던 듯하다.
또한, 최수운의 2-3배 정도의 활동 기간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도를 체계적으로 역사화 및 조직화 해내는 일에는 그 관심정도가 시원치 않았던 듯 하다. 그리고, 그 9년의 기간마저도 지나칠 정도의 상징적 움직임으로 점철하여, 훗날 제자들이 십류백파十流百派로 갈라져 도저히 강증산 사상의 본원을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 되도록 하는 계기를 남겨 놓기도 했다.
박중빈, 셰키나에 대한 거절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은 강증산 계파들의 접신接神적 개벽관을 크게 우려한 토대 위에서 등장한다. 그의 깨달음은 그가 25-6세 되던 무렵 들었다는 입정(入定)에 기초하고 있다. 이로써 크게 깨달음을 얻어 '대각大覺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후 소태산은 자신의 입정入定과 대각大覺에의 경로가 석가 세존의 그것에 제일 가까이 닿아 있다 하여, 스스로 유교를 벗어나 석가 세존에게 연원淵源을 내리게 된다. 즉, 처음부터 불교 신자로서 시작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사상적 세례를 비켜 갈 수 없었다. 따라서 원불교는 그들을 선구자로 대하고, '미륵彌勒 부처님 소태산'을 이 시대의 주세불主世佛로 여긴다. 그리고, 강증산은 선구자로 보되 상당히 조심스레 여과시켜 이해한다. 소태산의 초기 제자들이 증산계파에 몸담고 있었던 연유도 있거니와, 강증산의 영적 체험이 야기한 훗날 증산계파들의 영적 혼돈과 이른바 '개벽병開闢病'이 원불교로 하여금 '허령虛靈의 나타남'을 철저히 경계케 하는 역사적 모범으로 작용한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소태산이 수운의 셰키나 체험을 로고스에 가까운 석가 세존의 법신불法身佛 체험으로 대체한 점이다. 증산계파의 영적 혼돈과 오해를 거치면서 수운의 셰키나 체험은 소태산에 의해 상당히 거부되었고, 아예 자성自省중심적 마음공부를 지향하게 되어버린 점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오늘날의 원불교는 외부 사람에게 그들의 종교를 마음공부라 지칭한다. 1850년대 이 땅의 수운 최제우에게 선뜻 다가왔던 셰키나를 그들은 이미 상실해버린 것이다.
소태산의 초기 제자 중에는 특이하게 기독교 장로 출신인 조송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만큼 소태산의 초기 흡수력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소태산의 가르침은 종교 조직으로서의 안정감을 위해 불교의 그것에 안착해 갔고, 결국 유불선儒彿仙 통합의 기치와 개벽開闢에의 비전이 오히려 불교 지향적 이해로 상쇄되고 있었다. 자성중심적 마음공부, 그것이 오늘날 세인들이 느끼는 원불교의 안정된 긍정적 모습인 동시에, 폭발력 있게 분출되던 최수운의 셰키나적 에너지를 상실해버린 천도교天道敎와의 유사성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9. 길선주와 한국적 성령운동의 소명
조선신학
비로소 1907년 평양의 대 부흥회에서 목사 길선주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셰키나는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세네파의 영성과 한반도 영성사를 관통하던 유불선儒彿仙 사상을 하나로 융합해내고 있었다. 당시 길선주 역시 동학의 시대적 세례를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길선주가 구체적으로 동학에 입문하거나, 적극적으로 접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성장 지역이 동학의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평양 근처였고, 특히 야은 길재 선생의 19대 후손이라는 유가儒家적 긍지가 그를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정신적 엘리트로 자처하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었을 터이니, 아무래도 하층민 속으로 파고들던 동학東學의 대중운동보다는 좀더 '고매한 방법'의 개인적 선도仙道수련을 택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한국교회에 입산入山수련, 혹은 입산기도라는 특이한 형태의 수련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유럽의 수도사들이 벌이던 수도원 운동과는 약간 차이를 둔다. 길선주의 그것은 사회적 현장 속에서 역사적 구성원으로 강렬한 역동성을 발휘하는 영적 에너지를 취하고자 하는 방편적 입산이었기에 그렇다. 오히려 엘리야 등 히브리 예언자들의 그것이나, 또 최수운으로 대표되는 한국 전통적 영성수련에 가깝다.
따라서, 길선주가 28세 되던 1897년경 예수교로 개종하고, 몇 년 후 1907년 조선장로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한국 초대목사 7인 중의 1명으로 취임하면서도, 그의 내면에는 유불선 통합적 사류思流와 동학농민봉기를 통해 보게 되었던 강렬한 대중 결집의 에너지가 기독교적으로 새롭게 융합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길선주의 신학을 이른바 조선신학朝鮮神學이라 칭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길선주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셰키나에 기초하여 중국의 홍수전과 동학의 최제우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로는 가히 천재적이었다 싶을 정도로 길선주는 조선기독교회의 한복판을 관통하며 동서양 종교영성 융합에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었다. 이는 물론 당시에 길선주의 독창적 사상결집을 제어할 만큼의 동양사상적 식견을 갖춘 서양선교사나 해외 유학파 조선인 신학그룹이 형성되기 이전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안디옥, 그리고 한반도
사도행전은 2장 1-4절에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된 성령강림과 대 부흥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본격적으로 안디옥에 자리를 잡고 알렉산드리아 필로의 사상적 기초에 입각한 바울 자신의 나사렛 예수 와 로고스를 헬라지역에 정력적으로 전파하기 이전까지의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단편적 흔적들을 나름대로 보여준다.
과연 바울의 헬레니즘적 기독교사상이 아니었으면, 역사적 초대교회는 그 생존을 보장받지 못했을까? 필자는 단연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미 그 당시 세계는 로마, 파르티아, 쿠샨, 그리고 서한西漢이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문명적 벨트를 이루며, 동서간 무역로가 번창할 만큼 국제적 안정을 이루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국제적 세력 균형은 AD.200년 전후, 파르티아의 멸망, 쿠샨제국의 해체, 그리고 서한의 붕괴가 시작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중심부에 섰던 바울의 헬라 편향적 기독교론은 이미 파르티아와 쿠샨 그리고 서한의 제 국민들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편향적 지역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례로, 훗날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 전교傳敎를 시도할 때, 그들은 중국의 전통적 사상을 중국인에게 새로 배워야만 했으며, 그것을 다시 로마 교황청에 보고하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회 신부들의 유럽적 신학은 결국 중국의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오히려 민중이 다가선 것은 예수회의 로고스적 관념보다는 홍수전의 셰키나적 에너지였다.
바울이 유브라테스를 건너 바빌론 유대공동체를 찾아 나서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필시 그의 심상心想적 한계에 기인한다. 예수의 영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가라 하신 것은 바울이 상대적으로 로마문화에 적합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역으로 그가 바빌로니아 유대공동체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던 인물이었다는 추론을 이끌어 내준다. 로마제국의 영토는 당시 세계 대륙의 서쪽 끝에 있었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에 형성된 파르티아 제국이야말로 대륙 동방으로의 진출을 가능케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 중심부에 당시 바빌로니아 유대공동체가 견실히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이 당시 세계문화권의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영적 에너지는 마니와 무함마드의 경우에서처럼 반복적으로 동방에서 분출되고 있었다. 서방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반대편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대표적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을 터득 분출해 내고 있었고, 길선주 이후 한국기독교회를 점차 서구적 해외 유학파가 장악해들던 1950년대 무렵, 헬레니즘 토양 반대편 동양사상 토대 위에서 통일교회 창시자 문선명이 자신의 사명감을 피력 분출해내고 있다. 이 역사적 현상을 명확히 직시하지 못한다면, 세계기독교회는 이슬람과 통일교회라는 비非서구적 종교운동들이 왜 탈 기독교적 입장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결코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새 천년은 동서양 영성이 통합적으로 융화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분출되는 히브리 영성적 본류의 섭리를 기다리고 있다. (2004,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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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년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성령운동을 벌이다 이단시비에 휘말려 목사직에서 파면되었던 고(故) 이용도 목사가 복권됐다. 지난해 기독교대한감리회 23차 총회에서 그의 명예회복과 복권조치가 결의된 것이 금년 3월 9일 제19차 서울연회에서의 자격심사과정을 거처 전격 추인된 것이다. 서울연회는 '이용도 목사의 성령운동이 과거 신비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측면이 있으나, 오늘날 그와 같은 맥락의 오순절성령운동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이목사의 성령운동을 이단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이목사의 복권은 감리교뿐 아니라 전체 한국교회에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체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령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복권된 것은 그의 신학에 대한 무죄선고를 의미한다. 또, 그 동안 진행됐던 그의 신앙운동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 된 것은 물론, 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적인 특징이 현실적으로 이단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복권조치로 인해 이목사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1999.3.13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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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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