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온통 은빛갈채다. 빛나는 아침햇살이, 달려가는 수많은 은륜(銀輪)에 반사되어 온 다리를 가득 메워 반짝인다. 은빛축제 같다! 우리 입사동기들이 새로 받은 자전거로, 첫 출근하는 행렬이 다리위에 벌어진 것이다. 바로 형산강 다리다. 다리 아래엔 푸른 강물이 넘실댄다.
나는 젊은 날 포항에서, 자전거와 더불어 우리나라 첫 일관제철소의 직원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자전거는 연수원 도입교육 때, 회사의 알선으로 연수생들이 함께 신청하여 받았다. 투박하던 일반자전거와는 달리, 날씬하고 스마트한 신형 자전거다. 강산이 세 번 반이나 바뀐 지금도, 그 첫 출근 날의 설렘은 가슴속에 살아있다. 형산강 다리위에 영일만 푸른 꿈 머금은 이른 봄바람이 휘돌아 오르고, 따사한 봄빛이 미끄러지는 은륜들을 어루만지며 희망을 쏟아내던 날…. 그날의 감격이, 지금도 눈앞에서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것만 같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눈보라가 쳐도, 자전거는 나를 태우고 하루에 두 번씩 어김없이 형산강다리를 건넜다. 주말이면, 자전거는 포항인근의 시골길을 나를 싣고 많이도 쏘다녔다. 지금은 시청이 들어서있는 대잠 못 안쪽의 못골, 말골을 필두로 연오랑·세오녀의 전설 깃든 오천도 달렸다. 환호동, 송동 등 가까운 곳의 논밭 사이 길과, 야산자락 오솔길들도 신나게 달렸다. 어느 봄 휴일에는 다른 자전거들과 어울려, 칠 번 국도를 헤집고 경주 불국사까지 달리기도 했다.
결혼 한지 석 달 만에 직장을 옮기면서, 출퇴근 자전거는 필요 없게 되었다. 새 직장에는 출퇴근 버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년을 정든 자전거는, 우리 신혼부부의 신접살림 짐을 싣고 온 트럭에 실어 고향에 보냈다. 자전거를 보내는 것이 못내 섭섭했다. 하지만 아버님과 동생들이 탈뿐 아니라, 고향에 갈 때마다 그립던 고향 길에서 또 다른 느낌으로 나도 탈 수 있다는 사실이, 한 편으로 기쁘기도 했다.
자전거를 고향에 보낸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새 자전거를 샀다. 보낸 것 보다 조금 더 튼튼한 것으로 골랐다. 시장을 보거나 볼일이 있을 때, 아내도 나도 타기 위해서다. 쉬는 날, 걸어 다니기에는 제법 먼 죽도시장에 장보러 갈 때, 자주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결혼 만 삼년 차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전거에 세 명이 탔으나, 실은 네 명이 타고 시장을 보러가는 날도 많았다. 돌이 갓 지난 맏아이는 안장 앞에 붙인 작은 어린이의자에 태우고, 둘째를 배 속에 품은 아내가 뒤 짐받이에 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해도동 지역의 비포장도로는, 마치 중학교시절 통학하던 신작로와 노면상태가 흡사하였다. 어릴 때 익힌 내 자전거 타기 실력이, 이 때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 무렵, 우리 부부는 순전히 자력으로 살 집을 처음 짓기 시작했다. 신혼 초부터 아내는, 알뜰살뜰 초긴축살림으로 내 급여의 대부분을 저축하며 살아냈다. 아내가 결혼 전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종자돈을 합해, 신혼 이 년차에 택지 한 필지를 구입했다. 이 택지가 우리 집을 짓는 계기가 된 것이다. 택지를 싼 곳으로 바꾸어 남은 돈과 그동안 모은 돈을 합치고, 모자라는 것은 직장금고에서 대출받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공사업자를 정하고, 재료는 주인이 사 대는 방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우리는 집짓기를 시작했었다싶다.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임신 중인 젊은 아내는 자전거에 갓 돌이 지난 맏이를 태우고 목재상으로, 건재상으로, 철물점으로, 철근대리점으로 바지런히도 돌아 다녔다. 보다 질 좋고, 값싼 건축자재를 사기 위함이었다.
그해 어린이날, 조금 늦은 오후였다. 공휴일이기에 짓는 집의 내장재로 쓸 나무를 보러가자는 아내의 말에, 그녀와 맏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목재상에 갔다. 주인과 아내와 내가 목재상담을 하며 아이에게서 잠시 눈을 뗀 사이였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아이 우는 소리가 났다. 쳐다보니 울며 서있는 아이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목재상 내부를 걸어 다니며 놀다가, 목재를 쌓아놓은 받침 각목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하필 콧잔등이 앞 받침각목의 모서리에 부딪쳐 찢어진 것이다. 더욱이 찢어진 아래 부분의 그 작은 코가 덜렁덜렁 움직였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아내와 나는 아이가 잘못될까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얼른 부근 약방에 자전거를 타고 가, 약솜과 거즈와 반창고로 응급 지혈시키며 바로 아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변변히 마취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는 아이의 찢어진 콧잔등 부위를 생잡이로 꿰매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 남자 조무원이 머리와 팔다리를 움켜잡은 채다. 겁을 잔뜩 먹은 아이는, 굵은 바늘이 생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자지러지듯 울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면서, “됐다!, 가자!, 집에 가자!”를 계속 절규하듯 외쳐댔다. 팔을 잡고 아이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실신하고 말았다. 나는, “엄마가 정신 못 차리면 어떡해!”하고 큰 소리를 질러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네 바늘을 꿰매는 수술은 잠시 후 끝이 났으나, 아이는 그새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다 해야 십여 분 걸렸을 병원에서의 그 가슴 찌르는 고통의 시간이, 우리 부부에게는 왜 그리도 길었던지!…. 다행히 아이의 코는 탈 없이 잘 나았다.
자전거는 달려야만 바로 선다. 멈추면 넘어지고 만다. 생각해 보면, 내 삶도 자전거와 닮았다 싶다. 태어나 지금껏 바로서서, 삶의 길을 용케도 예까지 달려온 것이, 달려야 바로 서는 자전거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는 자기의 자전거, 바로 ‘인생자전거’를 한 대씩 타고 사는 게 아닐까. 멈출 수 없이 달려야 하는 인생자전거를…. 어릴 때부터 여태 자전거를 즐겨 타며 살아온 내 삶은, 보이지 않는 내 인생자전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었을 게다.
내 인생자전거는 이제까지 어떤 길을 달려왔을까. 어린 시절엔 고향에서 친구들과 진달래꽃 꿈길을 달렸다. 청소년기에는 타지에서 공부하며 홀로서는 길을 향해 달렸고, 군을 제대 하면서부터 홀로서기를 스스로 강요하는 길을 달렸다. 그러나 내 인생자전거가 제대로 달려 홀로 서기 시작한 곳은 바로, 포항이라 여긴다. 포항에서 비로소 내가 벌어, 내 삶을 처음 온전하게 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했으며, 엉뚱한 길로 접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릴 때 가랑이타기로 자전거타기를 배울 때처럼 넘어지면 또다시 일어났다. 비틀거릴 때는 다잡고, 엉뚱한 길을 갈 때는 바로잡으면서 달렸다.
고향에서 나고 자란 기간과, 배우거나 군 생활을 위해 타지에서 산 기간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아온 포항. 취직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두 아들 낳아 기르며 살 집을 짓고, 주경야독으로 삶의 터전을 닦아내어 바로 선 곳. 내 인생자전거가 가장 오래 달리며 길들여진 또 하나의 고향, 정든 해맞이고장 포항….
오늘도 나는 달린다. 햇빛, 달빛 가득 서린 영일만 품은 어링이불의 곳, 포항 길을 달린다. 사라지지 않는 ‘은빛갈채’ 속에 내 인생자전거를 타고…….
( 2009. 10. 9. )
< 포항시 승격 60주년기념 포항소재문학작품공모 수필부문 최우수상 당선작 >
<당선소감>
글 꿈길
강길수
근년에 풀 수 없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언덕길을 오르다가 목적지가 눈앞인데 길이 좁아진다거나, 군대생활의 모습이 보인다든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다든가 아니면, 비행기를 보는 등의 꿈들이다. 들은풍월로 아는 프로이트나 융의 꿈 이론들을 동원해 궁리해 보았으나, 꿈 풀이의 실마리를 못 찾으며 살았다.
그제 저녁, 심사위원으로부터‘수필당선’전화를 받고나서 감격과 마음 들뜬 순간을 잠시 보내고, 밤엔 별 꿈꾼 기억 없이 잤다. 어제, 숲 속에서 문득 근년의 꿈 생각이 난 것이다. 비우고 산다고 믿던 내 마음 깊은 한 자락에, 판도라의 상자가 아직도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로 알아챘다. '그래. 돈벌이에 대한 마음은 비웠는데, 글 꿈이 바닥에 남아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늦깎이로 '수필'의 길을 걸으며, 두어 번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길은 멀다는 사실만 확인하며 지냈다. 그러던 차에, 포항시 승격 60주년기념‘포항소재문학작품현상공모'를 접했다. 소재가 주어지므로 순수문학과 거리감이 느껴져, 망설이다가 응모하였다. 삶의 구체적 환경은 충분히 문학소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기대하지 못한 큰 상이 주어져 기쁘다. 우선, 모자란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3년간 함께 배우고 체험하며, 서로 격려한‘보리수필문학회’회원들께도 고마움을 드린다. 끝으로, 이 당선이 내 글 꿈길을 더 열심히 가라는 격려라 믿기에, 처음의 마음으로 꾸준히 걸어가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