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2003년 12월 18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시와산문사 사무실
참가 : 시와산문문학회 회원
주제 :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의 생애 및 작품세계
토론 : 이충이 진행
교제 : 팜플렛, 작품, 기타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의 프로필
1927년 10월 폴란드 자유시 단치히에서 출생하다. 10세에 소년단에 가입하고, 14세에 히틀러 유겐트에 편입되는 등 나치 치하의 독일 청소년이 겪었던 일반적인 경로를 걷는다.
1944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2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미군의 전쟁포로가 된다.
1949년 조각가가 되기 위해 뒤셀도르프 예술대에 입학한다.
1952년 베를린 조형예술대학으로 옮겨 1956년까지 금속 조각술을 공부한다.
1954년 무용수 안나 슈바르츠와 결혼, 전후 문학동인 ''47그룹'' 가입한다.
1958년『양철북』의 미완성 초고 강독으로 ''47그룹 문학상''을 수상한다.
1959년『양철북』출간. 이 첫 작품으로 ''게오르그 뷔히너'', ''폰타네'', ''테오도르 호이스''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다.
1960년 독일 사민당에 입당하여 빌리 브란트를 위해 선거운동을 벌이는 등 맹렬한 정치활동을 벌인다.
1961년 이후『고양이와 쥐』,『개들의 시절』,『단치히 3부작』등을 출간한다.
1976년 미국 하버드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 받다. 이후 장편 소설『넙치』,『텔그테에서의 만남』, 『암쥐』 등을 출간한다.
1992년『무당개구리 울음』을 출간한다. 그리고 사민당을 탈당한다.
1996년 토마스만 상을 수상한다.
1999년 장편『나의 세기』를 출간한다. 같은 해 독일 문학가로는 7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 1927 ~ 의 생애
귄터 그라스(Gunter Grass)는 1927년 10월 16일 단치히(Danzig)(現 그단스크)에서 식료품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폴란드계 독일인으로서 나치즘이 위력을 떨칠 당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라스는 독일인들이 어떻게 나치즘에 동의하고 합의했는지를 똑똑히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그 역시 독일 소년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나치즘에 대한 태도는 변명이나 합리화 또는 양심의 가책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냉소적으로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17세에 징집되어 나치의 전차병으로 최일선에 배치되었다. 종전 후 부상당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수용소에 잡혀 있었다. 포로생활을 한 후 전후 1947에서 1948년까지 뒤셀도르프에서 석공기술 등의 일을 하다가 미술을 배우며 암시장거래, 묘비제작, 재즈 악단 드럼 연주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Kunstakademie Duss eldorf)에서 그래픽과 조각을 익혔다. 그러던 중 40년대 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서베를린에 정착한다 .1953년부터 1956년까지는 베를린 예술대학(die Hoch schule fur Bildende Kunste in Berlin)에서 조각을 배웠다. 1956년부터는 파리에서 생활하였다. 1956에서1957년까지 예술작품 전시와 별도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1958년까지 단문, 시, 희곡 등을 발표한다. 1958년 미완성된「양철북」이 47그룹 문학상을 받고 다음해 출판됨으로써 그는 하루아침에 폭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데뷔작「양철북」은 즉시 양극화된 평가를 몰고 왔다. 한쪽은 ‘제어할 수 없는 생동성’ ‘시적인 힘’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찬사였다. 다른 한쪽은 ‘구역질나는 오물적 상상력’ ‘새디즘적 성욕’ ‘교회에 대 한 외설적 공격’이라는 비난이었다.
실제로 나치즘과 2차 대전의 비극적 참상을 경험한 그는 <양철북>, <고양이와 쥐>, <개들의 시절>, <무당개구리 울음>, <넙치>, <광야> 등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독특한 수법으로 독일 전체주의 정신과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1959년에 매우 묘사적인 언어로 나중에 영화화되기까지 한 양철북(Die Blec htrommel)을 발표한다.《양철북》으로 그는 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으로 세계 문학계에 이름을 날린 독일작가가 된다. 1960년부터는 서(西)베를린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집《두꺼비들의 재능》(1956), 희곡《대홍수(大洪水)》(1957), 소설《고양이와 쥐 Katz und Maus》(1961), 《단치히 삼부작(Danziger Trilogie)》,《개들의시절(Hundejahre)》(1963),《넙치(Der Butt) 》(1979),《암쥐(Die Rattin)》 (1986),《광야(Ein weites Feld)》(1995),《게 걸음으로 가다(Im Krebsgang) 》(2002) 등 다방면에 걸친 작가활동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와 위트가 넘치며 익살과 직설적인 현실폭로로 속세와 시대를 비평하는 것이 특징이다. 700페이지에 이르는 대표적 장편소설《양철북 Die Blechtrommel》(1959)은 대전 후 불모지였던 독일 문학계에서 큰 주목을 끌었다. 1965년 에 뷔히너상(B犧hner賞)을 받았다. 1999년에 나치즘의 광기를 신랄하게 풍자한 《양철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노벨문학상이 독일의 귄터 그라스에게 돌아감으로써 독일은‘베를린 천도의 해’를 맞아 1972년 하인리히 뵐 이후 27년 만에 노벨상을 다시 안는 기쁨을 누리게 됐다. 독일 벨렌도르프의 자택에서 수상소식을 접한 그라스는'만족스럽고 기쁘며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말했다. 그라스는 장편소설 양철북(59년)으로 전 세계에서 방대한 독자를 확보한 전후(前後) 독일문학의 거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만년후보’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문에 독일은 슈타이들출판사를 중심으로 괴팅겐에서 세계 귄터 그라스 번역자 세미나를 여는 등 그의 노벨상 수상을 범국가적으로 지원해 왔었다.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체코), <양철북>의 귄터 그라스(독일), 타하르 벤 젤룬(모로코), 미셸 투르니에(프랑스)와 장 마리 르 클레지오(프랑스), 위고 클라우스(벨기에), 세에스 노테봄(네덜란드) 등이 거론되었다. 또한 빌리 쇠렌센(덴마크), 토마스 트란스트뢰머(스웨덴), 바실리 나그로도프(러시아), 도피 생활중인 살만 루시디(영국),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중국 시인 베이 다오(北島), 노먼 메일러(미국) 등도 거론의 대상이 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라스가 1959년에 발표한 첫 장편 <양철북>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양철북>은 그라스 특유의 우화적 기법으로 전후 독일 세대의 기억 속에 파묻힌 시간들을 정교하게 추적해 내었다. 그는 사람들이 떨쳐버리고 싶어했던 거짓말과 피해자, 패배자 등 잊혀진 역사의 얼굴을 그려내 당대의 역사를 성찰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20세기 문학이 거둔 최고의 성과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그라스는 독일 북부 벨렌도르프의 자택에서 수상 소식을 듣고 "존경해온 작가 하인리히 뵐에 이어 영광을 얻게 돼 기쁘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 의 작품세계
* 양철북Die Blechtrommel 1959
양철북 의 주인공 오스카 마체라트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지난날을 회고한다. 이 작품은 주로 단치히(현 폴란드령)를 무대로 20세기 초반과 중반의 파행적 독일 역사를 오스카를 통해 형상화시켰다. 나치 치하에서 성장하여 전쟁에서 살아 남은 독일 전후세대를 대변한 탁월한 작품이다. 이 악한소설은 다양한 문체들을 구사하는 다채로운 성격의 작품으로 폴란드와 독일의 이중적 속성을 지닌 단치히에서 평범한 가정들이 나치즘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과 전쟁기간의 피폐, 소련군의 진입, 전후 '경제적 기적'을 이룬 독일의 자기만족적 분위기 등 그의 개인적인 체험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을 상상력으로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이야기를 엮어나갔다. 무질서한 환상의 저변에는 도덕적 진지함이 깔려 있기 때문에 그는 이 소설로 '전후세대의 양심적인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라스는 이 작품에서 세 살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의도적으로 난쟁이가 된 오스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을 통해 나치즘의 광기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 후 나치즘에 동조했다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독일 문학에 이 작품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를 펼쳤던 그라스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정치의식은 작품과 현실에서 함께 이루어졌다.
그라스의 정치활동은 그를 독일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작가의 정치 참여가 작품 속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활동으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양심인 것이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시대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던 그의 저항정신 때문이다.
* 넙치Der Butt) 1979
『넙치』는 석기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남녀간의 전쟁에 관한 저속한 내용의 우화이다. 1977년에 발표되어 귄터 그라스만의 독창성이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귄터 그라스의 대작이다. 발표 후 2년 동안에만 45만 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이다. 당시 그라스는 수익금의 일부로 베를린 예술원의 후원 하에 알프레드 되블린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라스는 그의 쉰 번째 생일을 맞기 5년 전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로서 대작을 쓰기로 결심하고 시, 스케치, 짧은 에피소드 등을 통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뒤셀도르프 및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한 그라스는 『넙치』와 관련하여 상당량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얼마만큼 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70년대 그라스는 작품『넙치』등을 통해 독일 중산계층의 속물근성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90년 서독정부의 일방적인 통일과정에 관해서도 동독인을 무시한 서독 위주의 급속한 통일을 비판하였다
* 나의 세계
『나의 세기』는『양철북』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그라스를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1년에 하나씩 모두 100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세계대전, 베를린 올림픽 등 역사적 사건들을 현장에 있었던 주인공의 눈을 통해 서술함으로서 그라스가 겪었던 20세기를 회고하는 작품이다. ''그의 세기''를 통해 ''우리의 세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 의 문학과 사상
「양철북」「고양이와 쥐」「나의 세기」등의 대작을 발표한 그라스는 관념과 교양에 몰두해온 독일 문학전통의 적자는 아니었다. 패전 후 농부, 광산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47년 뒤셀도르프에서 석공과 석각 견습공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뒤셀도르프 예술대학,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우며 묘비제작, 재즈악단 드럼 연주 등으로 근근히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40년대 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서베를린에 정착하며 문인의 길로 들어서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작가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문장실력이 어망이었고 독일어 맞춤법조차 잘 몰랐다. 그가 지닌 것이라고는 문학에 대한 열정, 예술적인 재능, 빈곤 속에서 겪은 폭넓은 경험이 전부였다.
독일작가협회인「47그룹」의 격려에 힘입어 작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그는 1956년 파리로 갔다. 이때 오직 경제적인 문제에만 매달릴 뿐 과거의 죄는 생각지 않는 독일인의 모습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 진보적 소설가로 거듭 태어났다. '잘 길들여진 독일 문단에 나타난 야생의 괴물'이라는 수식은 그의 문학적 입장을 잘 대변한다. 이 수식이 드러내듯 귄터 그라스의 관심은 독일문학이 무시해온 감각, 소시민, 알레고리 등 주변과 물질적 세계의 쪽이었다. 귄터 그라스의 작품세계는「양철북」의 경우처럼 역사를 벌거벗은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우의'(寓意)라는 문학장치를 통해 굴절시켜 보여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분명 그의 작품은 20세기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항의의 절규이지만 이러한 역사의 형상과 절규의 음성은 서술의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알레고리를 통해 지극히 미학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다.
그 역시 현실변혁에 직접 몸을 던져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참여작가이다. 이때의 참여는 '민족의 양심'이라는 권위와 엘리트주의적 소명의식의 소산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자명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는 민주적 시민의식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미 고향인 단치히에서 히틀러 청년운동을 겪었다. 16세에 징집 당한 뒤 부상을 입고 전쟁포로가 되었었다. 작가협회인 '47그룹'(Gruppe 47)의 격려로 시, 희곡을 써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 파리로 가서〈양철북〉(1979 영화화)을 썼다. 잇달아 중편소설〈고양이와 쥐 Katz und Maus〉(1961), 서사소설〈비참한 세월 Hundejahre〉(1963)을 출판하여 단치히 3부작을 완성했다.
그 밖의 소설들도 정치적 시사문제를 다루었다.〈넙치 Der Butt〉(1977), 30년 전쟁 막바지의 가상적인 작가모임 '1647그룹'(Gruppe 1647)에 대한 텔그테에서의 만남 Das Treffen in Telgte〉(1979), 인구폭발과 핵전쟁의 위기 속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냐 말 것이냐로 몹시 고민하는 젊은 부부를 그린 출산 Kopfgeburten:oder die Deutschen sterben aus〉(1980) 등이 있다. 사회참여작가로서 그는 서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의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사회적, 문화적 신념을 위해 열렬히 싸우는 한편 정치적인 논문도 썼다. 그의 극작품들은 외젠 이오네스코, 새뮤얼 베케트의 부조리극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양철북과 귄터 그라스에 수여된 세계 권위의 문학상 - 47그룹 문학상(1958), 게오르그 뷔히너 상(1965), 폰타네 상(1968), 테오도르 호이스 상(1969), 알렉산더 마야코프스키 상(1979), 토마스 만 상(1996), 노벨 문학상(1999) 등이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1972)의 최신작으로 20세기를 한 권의 소설에 담고자 하는 기획에서 씌어진 작품이다. 이 책은 1900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100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마다 그라스 자신이 그린 수채화가 한 점씩 딸려 있다. 이번 번역판에는 수채화들의 일부는 화보로 처리되어있다.
각 장에 각기 다른 시각과 목소리를 가진 화자를 등장시켜 그 해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들, 잇따른 정치적 비극 등, 역사의 모든 장을 두루 살피고 있다. 1994년 10월19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파울루스 대성당에서는 독일서적상협회가 주는 올해의 평화상 기념식이 열렸다. 자국의 실상에 대한「매수되지 않은 눈길」로 가난하고 착취 받는 자, 정치적 인종적 이유로 박해받는 자들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 수상 이유였다. 이 자리에는 또 한사람의 주인공이 있었다.
수상자 자신의 특별요청에 따라 축사를 한 독일의 대표적 작가 귄터 그라스였다. 마침 그는 10월16일 70회 생일을 맞은 직후였다. 독일의 현실에 혹독한 비판을 계속해온 그는 독일 정부를 향해 다시 한번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라스는『독일이 그저 경제강국으로 전락한 것이 부끄럽다』면서『독일 정부가 터키에서 박해받는 쿠르드인들의 정치망명을 거부하고, 터키에 무기판매를 묵인함으로서 우리는 소수민족 학살의 공범자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최근 독일 극우세력으로부터 터져 나오고 있는「외국인 적대」의 고함과 폭력은 정부 외국인 정책의 메아리에 다름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헬무트 콜 총리내각의 대변인은 그라스의 발언에 대해 이례적으로 논평을 발표해『사실과 어긋난 주장으로 작가로서의 지성적 몰락을 보여준 그는 진지하게 귀담아 들을 문학인이 못된다』고 대응했다. 이렇게 연방정부가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나설 정도로 여전히 강력한 그라스의 영향력은 최근의 대대적으로 열렸던 그의 고희(古稀) 축하행사에서도 감지된다. 독일의 거의 모든 주요언론들이 예술가로서의 그의 일생을 정리하는 글을 실었고, 제 1국영방송은 주요 뉴스시간에 인터뷰까지 방영했다.
때맞추어 그의 86년작「암쥐」가 방송사에 의해 영화화되어 방영했다. 문학계에서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귄터 그라스는 그러나 시 소설 극본 에세이 연설문 등에 뛰어난 문학인으로서만 명성 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래픽과 석판화, 조각으로도 인정받는 미술가이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실제 정당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해 왔다.
한때 사민당의 외국인정책에 실망하고 당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를 도와 적극적으로 선거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50년대 중반 가난한 결핵환자인 무명시인으로 처음 47문학그룹에 나타났을 때 그는 차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그래픽을 팔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런 양극화는 그 후 새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거의 연례행사였다. 그는 내면적 성찰의 작가라기보다 혼탁 한 현실의 실제 모습을 거칠 고 토막 난 문장으로 시위하는 힘의 작가다.
대표작으로 꼽히는「양철북」「개들의 세월」「넙치」에서부터 통일문제를 다룬 최근작「광야」에 이르기까지 그가 독자에게 들이대는 거울 속의 모습은 괴기하며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는 냉소주의자가 아니고 이상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가 문학적 스승으로 늘 일컬어온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현실과 예술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이 최근의 평가다.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것,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의 사고와 행동의 기본철학이다.
최근 그는 나치의 희생자인 집시 족을 위해 재단을 설립하고 25만 마르크의 창립 금을 쾌적했다. 독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새 작품을 약속하고 그 약속대로 화제작을 선보이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관심과 애정을 행동화하고 있는 노익장 귄터 그라스, 그는 아직도 청년이다.
참고 문헌
* 귄터그라스의 양철북
- 난장이 그리고 그 희화적 세계 자연사랑
참고논문
* "난장이 Oskar의 정신적 불구성-Gunter Grass의 작품 'Die Bletrommel'에서-" 효성여자 대학교 연구 논문집 제28집
* "독일에서의 삐까로 문학 전통과 Gunter Grass의 '양철북', 효성여자대학교 연구 논문집 제 31집
* "Gunter Grass의 '양철북', Die Blechtrommel' 연구-불구적 세계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G. Grass의 소설 '넙치' 연구-모계사회의 신화를 중심으로" 효성여자대학교 어문학연구 제5집
* "귄터 그라스의 소설 '넙치'에서 동화형식 연구" 독일문학 제51집
* "귄터 그라스 작 '고양이와 쥐'에 대한 장르적 고찰" 효성여자대학교 어문학연구 제7집
* "귄터 그라스 소설에서 사물이 갖는 역할과 기능" 독일문학 제58집
* "귄터 그라스의 소설 'Der Butt'에 나타난 여성의 우월성" 효성가톨릭대학교 연구논문집 제57집
* 귄터 그라스 Gunter Grass 작 "광야 Ein weites Feld"의 신문서평에 관하여. 독일어문학 제14집
별첨
* 작가 귄터 그라스Gunter Wilhelm Grass 의 탐구
- 슈피겔과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와의 대담
1995년 늦여름 라이히 라니츠키가 2년만에 다시 슈피겔 표지에 등장했다. 두 표지 그림의 차이점이라면 1993년에 개의 모습으로 등장했다가 이번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라면, 공통점은 여전히 책을 찢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찢는 그의 모습은 여전하지만 던지는 의미는 다르다. 1993년에 그에게 찢긴 책이란 독일의 문학 일반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고 있는 귄터 그라스의 신작 소설인 광야Ein weites Feld(1995)였던 것이다.
그는 귄터 그라스가 단찌히 4부 작 이후 발전과 변화가 없는 것에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그라스의『양철북』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귄터 그라스가 슈피겔의 표지로 등장한 것은 1963년 36호, 1969년 33호, 1979년 18호 세 번이었다.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직후에도 그의 모티브를 담은 표지가 준비되었지만 사민당 당내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간 직전에 교체되었다.
전 유감없습니다. "Ich bedaure nichts" 싸우고 나서 한 이야기가 아니다. 귄터 그라스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묻는 슈피겔의 기자에게 답한 라이히-라니츠키의 대답이다. "축하합니다" 또는 "기쁜 일입니다"가 아니었다. 귄터 그라스가 199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후《슈피겔》(40호)은 라이히 라니츠키와 회견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첫 질문을 던졌다.
슈피겔 : 라이히 라니츠키씨, 대통령과 수상 그리고 마틴 발쩌와 같은 저명인사들이 귄터 그라스의 노벨상 수상 소식에 기뻐하였습니다. 당신도 그렇습니까?
라이히 라니츠키 : 전 그 소식을 취리히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택시 속에서 들었습니다. 옆에 앉은 아내에게 그랬죠. '음, 마침내!' 그가 상을 타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슈피겔 : 그건 마치 안도의 한숨(ein Seufer der rleichterung)처럼 들리는군요.
라이히 라니츠키 : 독일 작가가 다시 상을 받아야 할 때가 벌써 여러 해 되었어요. 1972년에 하인리히 뵐이 그리고 엘리아스 카네티가 1981년에 받은 후 그리고는 없었지 않습니까.
(라이히 라니츠키는 회견에서 독일 작가에게 상을 주어야 할 스톡홀름의 위원들에게 귄터 그라스 말고 또 무슨 경우의 수가 있었겠냐고 주장한다.)
키라이히 라니츠키 : 생각해 보세요. 마틴 발쩌가 그 상을 받는다면, 저에겐 그건 날벼락일 것입니다. 아니면 그 멍청한 페터 한트케요! 재앙이지요. 스톡홀름에겐 귄터 그라스 말고는 없었어요.
(노벨상을 받게 된 동료작가를 위한 공치사마저 사양하는 라이히 라니츠키. 그는 그라스를 축하하지도 않았고 축하할 의향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슈피겔 : 당신은 노벨상 수상을 축하 해 주었나요, 예를 들어, 전보를 친다든지.
키라이히 라니츠키 : 아니오.
슈피겔 : 앞으로 할건가요?
라이히 라니츠키 : 아뇨. 내가 왜 그래야 지요? 그도 나를 축하해 준 적이 없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축하해 주고 있지요. 난 거기에 끼지 않겠습니다.
(라이히 라니츠키의 회고록『나의 인생 Mein Leben』에는 귄터 그라스가 적어도 9번은 등장한다. 이들은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을까?)
라이히 라니츠키 : 1958년 봄 바르샤바였어요. 나는 그와 오후를 같이 보낸 적이 있지요. 난 마틴 발쩌와 지그프리트 렌쯔, 알프레드 안데르쉬, 볼프강 쾨펜과 그리고 흥미를 갖고 있던 젊은 독일 작가들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귄터 그라스는) 뭔가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그는 특이한 시각을 가졌지요. 나중에 보니 그 날 귄터 그라스는 보드카 한 병을 완전히 비웠더군요. 하지만 그는 똑바로 서서 바른 걸음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지요.
(귄터 그라스는 이날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형이란 인상이 들었다. 그의 이런 문학적 편협함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라이히 라니츠키는 (『나의 인생 Mein Leben』에서 고백하듯) 자신이 초기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1954, 1955년경에 이미 여기서 벗어났으며 그리고 그 후 3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라스를 만났다고 주장한다. 그들 사이에 화해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슈피겔 : 당신들, 독일에서 제일 유명한 문학비평가와 이제 제관을 쓰게된 독일에서 제일 유명한 이야기꾼인 그라스 사이에, 무엇이 좋은 소설이라는데 대한 합의점이 있을 수는 없나요?
라이히 라니츠키 : 아뇨. 전혀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라스는 저와는 전혀 다른 취향을 갖고 있어요. 그는 토마스 만과는 오랫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요. 토마스 만 상을 탄 후에는 약간 달라졌지만. 또 알프레드 되블린을 자신의 모범으로 칭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 (...) 우리가 문학적인 합의를 이루는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아요.
(47 그룹 회합에 참가한 라이히 라니츠키는 동료작가들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바르샤바 수용소를 탈출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이때 귄터 그라스는 그에게 이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쓰고 라이히 라니츠키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림을 선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후로 두 사람은 개인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다. 라이히 라니츠키는 이것을 귄터 그라스의 탓으로 돌린다.)
라이히 라니츠키 : "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오직 그의 근작에 대한 나의 평가에 달려 있죠. 이건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지요."
(종종 마틴 발쩌와 귄터 그라스를 비교하는 라이히 라니츠키. 그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과 그림들로부터 시적 재능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광야 Ein weites Feld』의 경우에서 보듯이 귄터 그라스 근작에 대한 라이히 라니츠키의 평가가 극히 좋지 않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와 당대 최고의 작가의 화해를 촉구하는 슈피겔 기자의 물음들은 꽤나 어줍잖아 보였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오히려 독일 문단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데...)
별첨
* 독일문학獨逸文學에 관하여
독일어로 쓰인 독일어권 문학의 총칭. 문학작품에 독일어가 사용되는 지역은 현재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같은 독일어권에 걸치는데 과거에는 여기에 더해 슐레지엔 동(東)프로이센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등도 포함되었다.이 모든 지역을 포괄하여 논하는 것이 독일문학의 통례이나, 오스트리아 스위스에는 독자적인 문학전통이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대체로 독일문학의 특성에 대한 견해이다.
지금도 19세기 이래의 국민문학사관에 의거하는 바가 크다. 깊은 내면성, 소박한 생활감정, 비극성과 사색적 요소 등 민족의 독립 정신적 속성으로서 강조된 것이 암암리에 적극적인 가치기준이 되기 쉬운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시각에서 문학사 전체에 걸친 재검토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과거의 독일문학 형태를 해체하면서도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 중세8~16세기
고대 고지독일어기(高地獨逸語期8~11세기)의 문헌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다. 당시 문자로 된 중요한 것은 성서의 번역이라든지 그리스도교의 설교문 등이다. 그밖에 고대게르만 가요인《힐데브란트의 노래(850년경)》도 남아 있다. 오토왕조(작센왕조) 르네상스 기(10세기)에는 라틴어만이 사용되었었다. 고전고대(古典古代)의 문물이 게르만인 지역에 유입됨에 따라 <독일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비로소 개화되는 기초가 되었다.
중세 고지독일어의 시기(11~14세기)에는 슈타우펜왕조에 의한 중세의 정치체제가 완성이다. 그에 따라 기사계급이 새로운 문화의 주도자가 되고 전승되는 게르만 영웅전설에 그리스도교문화 고전고대문화 프로방스궁정문화 이슬람궁정문화 북방신화권문화 등이 합류하여 독일중세문학이 탄생했다.
궁정에서 구송(口誦)된 서사시는 소재면에서, ①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이바인(Iwein)》이라든지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파르치팔(Parzival, 1200년경)》과 같이 아서왕과 원탁기사의 전설을 중심으로 한 것 ②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트리스탄과 이졸데(1210년경)》등의 트리스탄전설을 다룬 것 ③《니벨룽겐의 노래(1200년경)》나 쿠드룬의 노래(Kudrunlied, 1230년경)》와 같이 게르만전설에서 생긴 것 등의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각각 모두 강한 혼합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존하는 사본이 가장 많은《파르치팔》은 당시 가장 애독된 작품으로서 각 문화권의 요소가 가장 복잡하게 조합되어 있다. 이들 서사시의 기초에 깔린 윤리는 행동에 절도를 지니고 조화있는 삶을 추진하는 것이었으나 궁정사회가 혼란해져 그 윤리가 공동화(空洞化)함에 따라 장편의 서사시형식은 유지되지 못하였다. 베른헤어 데어 가르테네레의《마이어 헬름브레히트(Meier Helmb recht)》와 같이 신분사회의 혼란을 그대로 그려내는 짧은 형식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골계담(滑稽譚)>이라는 영역을 개척하여 풍자문학의 창시자가 된 것이 D. 슈트리커이다. 서정시에서는 트루바두르의 양식을 계승한 미네장이 성립하여 귀부인에 대한 사랑의 봉사를 최고의 이념으로 하는 노래가 많이 만들어졌다. 라인마어 폰 하게나우를 정점으로 하는 성시(盛時)의 미네장은, 이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까지 결부시키려고 했다. 한편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신분이 낮은 처녀를 등장시켜 세속의 사랑을 읊거나 정치적 발언을 담은 격언시를 지었다.
나이트하르트 폰 로이엔탈 등에 이르면 기사와 농민간의 역학관계의 혼란이 패러디의 형태를 취하여 농촌을 무대로 한 시(詩)에 반영된다. 한편 궁정시와는 별도로《카르미나 부라나》와 같이 편력학생(遍歷學生)이나 농민이 부르던 항간의 노래가 활발하게 확대되어 갔다. 그 원형은 후에 낭만파의 손에 의해 집성된 <민요> 등보다 훨씬 거칠고 혼돈된 것이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 연극과 산문이 싹트기 시작한다. 14세기에는 점차로 융성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부활제극(復活祭劇) 수난극이 상연되었다.
15세기에는 그것이 세속적인 발전을 보여 사육제극(謝肉祭劇)이 되는데 그 주도자가 된 것은 길드의 직인(職人)들로, 실생활 속에서 웃음거리를 발견해내어 촌극으로 만들었다. H. 작스 등의 《장인가요(Meistersang)》도 이것과 같은 기반에서 생겼다. 한편, 산문은 다른 차원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법률서인 《작센 슈피겔(Sachsen Spiegel)》이 독일어로 쓰여진 것이 하나의 실험이 되어 M. 루터나 T. 뮌처같은 종교개혁자의 논설로 민중에게 깊이 침투하였다.
루터의 성서번역과 인쇄술의 발명이 통일적인 문장어의 성립과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맡고, 종교개혁과 농민전쟁 때에 배포된 다수의 선전지 및《틸 오일렌 슈피겔(Till Eulen Spiegel, 1515년경)》 등의 민중본(民衆本)도 그것을 조장하는 효과가 있었다. 맨위로
■ 근대17~19세기초
17세기는 비참한 30년 전쟁의 영향을 전면적으로 받아 국토가 황폐하고 일반적으로 염세관이 강한 시대였다. 반종교 개혁운동으로 가톨릭이 힘을 되찾아 바로크문학이 꽃을 피우게 된다. 시는 이 시기에 다채로운 표현기법을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였다. M. 오피츠는 《독일시학(詩學)》을 저술하여 프랑스시법을 독일어에 적용하도록 하고, 슐레지엔파(派)가 이탈리아로부터 매너리즘을 이식하여 수사적 과장의 기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그 실례이다.
언어의 유희나 우의화(寓意畵)의 시도도 이 시기에 생겨났는데 이것은 독일의 비참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하여 강한 표현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극에서는 에스파냐 극작가 P. 칼데론의 순교극 흐름에 맞추어 예수회연극(Jesuitendrama)이 활발해져 근대극의 기초가 되는 무대기술상의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산문에서 이채를 띠는 것은 에스파냐 악한소설(惡漢小說)을 계승한 그리멜스하우젠의《짐플리치시무스》이다. 이와 같이 외국의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부르봉왕조 치하에서 고전주의가 개화한 프랑스와 전쟁의 황폐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한 독일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문학자 사이에서 독일어를 정비하여 자국문학의 독자성을 주장하려는 바람이 강해짐에 따라 다음 시대에서 국민문학 탄생의 밑바탕이 만들어졌다.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르상티망(怨恨)도 여기에서 발생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종교의 속박이 느슨해짐에 따라서 한편에서는 합리적인 사유(思惟)에 의한 생활규범의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로운 감정의 비상(飛翔)에 의한 자연으로의 귀의가 일어났다. 교훈적인 우화는 전자를, 전원시(田園詩)는 후자를 표현하는 장르로서 즐겨 이용되었다. F.G. 클로프슈토크가 고대 그리스 무운(無韻)의 시형식을 독일시로 이식하는 데 성공하엿다. 이후에 서정시 자체가 자연의 숨결을 직접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존중되었다.
연극은 J. C. 곳셰트가 예수회연극의 종교적 색채를 씻어내는 정화운동을 일으킨 이후 합리적인 사상의 표현에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G. E. 레싱이 극장이야말로 <정신계의 학교>라고 주장함으로써 시민극으로 시대의 문제를 명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연극은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되었으나 이 경우도 그 인도자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셰익스피어 극(劇)이다. 레싱에 이은 슈투름 운트 드랑기(期)의 연극은 다시 계몽정신을 넘어 이른바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그리게 된다.
소설도 영국의 소설이나, J. J. 루소를 본보기로 하여 계몽적 교훈소설에서 내면적인 정감을 토로하는 고백소설로 진전하였다. 그 정점에 괴테의 젊은베르테르의 슬픔(1774)》이 올라서게 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풍자문학의 계보를 이어받아 C.M. 빌란트의《압데라의 사람들》이 쓰여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고백성과 풍자성이 그 후의 독일소설의 2대 지주가 되기 때문이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의 의의를 재발견한 18세기 독일의 최대 관심사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해방에 대한 희구는 프랑스대혁명이 그 선례를 나타낸다. 혁명의 현장으로부터 잔혹한 사실이 연이어 전해지자 이념에 찬동하던 독일의 지식인도 혁명의 실행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게 된다. 그 경향은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독일을 침공하자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시대배경 아래 과격한 행동을 배척하고 개인의 내면적인 형성에 의해 조화 있는 인간성의 실현을 지향하고자 하는 바이마르고전주의가 성립한다. 주로 괴테와 실러의 연극에서 완성되고 산문에서는《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교양소설로 전개되어 가는 것이 그것이다.
자유의 이념은 내면의 자유와 외국지배로부터의 해방으로 변형된다. 또 내면의 자유에서는 체념의 사상이 생겨나 사회에 대한 절도 있는 봉사를 미덕으로 삼는 개념이 자라나게 된다. 낭만주의도 본래의 원리로 친다면 개인의 삶에 있어 고조되는 자유가 사회의 억압을 타파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독일낭만파의 활동기에 나폴레옹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낭만주의적 에너지는 외국지배로부터의 탈피를 요구하는 민족의식의 고양으로 흡수되어 갔다. J. G. 헤르더의 제창을 계기로 민요의 연구조사가 추진되고 중세문학이 발굴되는 등 자국의 유산을 발견한 공적은 크다.
거기에 민족성을 미화하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난다. 이것이 독일의 반동적인 정치체제와 결합되기 쉬웠다. 그러나 낭만파가 이룬 정신과 문학권에서의 업적은 컸다. 그 때까지 문학의 장르는 문학적 표현을 위한 불가결한 범위로 여겨지고 있었다. F. 슐레겔은 각 장르 속에 공통되는 문학공간이 있음을 간파한다. <보편(普遍)포에지>를 주창하여 참된 창조는 그 원천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 때문에 비평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평은 각 장르 사이를 연결하여 끊임없이 포에지의 소재를 환기하는 자유로운 표현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문학의 보편적 원천과 구체화된 표현의 장(場)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슐레겔 형제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문예비평가가 되었다. 한편, 고전주의와 낭만파의 중간에 위치하는 H. 클라이스트 F. 횔덜린 J. 파울은 각각 고유한 파멸적인 인생을 통하여 강렬한 작품을 남겼다. 괴테적인 기준으로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낭만파 운동 중에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창작면에서는 이 세 사람이 각각 연극 시 소설의 각 분야에서 가장 낭만주의적인 뛰어난 작품을 쓰고 있다.
또 이 시기에 프랑스혁명에 등을 돌리고 세계사의 진전에 거역하는 형태로 국민의식이 육성되었다. 그것이 주류를 이룬 것은 사실이나 혁명이념의 침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조류는 J. G. A. 호르스터의 기행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자유로운 산문형식으로 구현되었다. 그것은 H. 하이네의《하르츠 기행》등의 청년독일파의 산문작품으로 계승되었다.
■ 19세기
1830년 이후 사회의 변동에 따라 문학의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이미 낡은 귀족지배체제는 탄압을 강화할 때마다 약한 기반을 드러낸다. 반면 시민계급이 실권을 서서히 확장하여 하층민에게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조화를 이룬 인간적인 성숙보다는 뒤쳐진 독일의 정치상황을 반영하여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변혁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이네가 정치시(政治詩)는 어느 당파의 강령을 읊는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의 상황을 충실히 전달해야 한다. 이것을《독일 겨울동화》로 실증한 것은 이미 노선논쟁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 한편에서는 정치에 등을 돌리는 E. 뫼리케라든지 A. 드로스테 휠스호프와 같은 시인도 이 시대의 일면을 대표하고 있다. 비더마이어라는 이름으로 총칭되는 이러한 작가들은 신변의 생활이나 자연을 응시함으로써 오히려 시대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었다.
산문이 문학의 중심 장르가 되는 것도 이 시대이다. 그러한 산문은 기행문 평론 수필 등을 포함한다. K. L. 임머만에서 T. 폰타네에 이르는 사실주의의 본격적인 소설이 중심을 이룬다.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나는 대중소설, G. 베르트로 대표되는 풍자소설 등 매우 여러 방면에 걸천다. 그 중에서도 긴밀한 구성과 엄격한 문체가 요구되는 단편소설은 19세기의 고유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기의 두드러진 한 가지 현상은 다수의 문학사(文學史)가 쓰여진 점이다.
G. G. 게르비누스의《독일국민문학사》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작은 국가 할거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통일적 국민의식을 함양하려 했다. 프로이센에 의해 강행된 71년의 독일통일 이후, 이 군사적 정치적 통일에 결여되고 있었다. 문화적 내실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층 더 국민문학에 대한 의식이 강화되어 문학연구를 통하여 국수주의의 핵심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반면 E. 졸라 H. 입센 O. O. W. 와일드 L.N. 톨스토이 등 다수의 외국작가가 수용되어 독일문학은 사상과 표현의 폭을 대폭 확대시킴과 동시에 내부에 심각한 긴장을 갖게 되었다.
이 동안에 자연주의는 실제 서민생활의 표현으로 특히 현대연극의 길을 개척한다. H. 호프만스탈 등이 개척한 시극풍(詩劇風)의 단막극은 데카당스의 사상과 예술에 표현의 장(場)을 부여하였다. 극작가 F. 베데킨트가 프랑스로부터 이식한《카바레》는 대중예술의 싹을 키웠다. 이 시기에는 한편에서 작가들이 예술계의 엘리트라는 의식을 갖는다. 일부에서는 종교와도 견줄 만한 고매한 정신작업에 종사한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일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과 기술의 진보에 따라 문학의 대중화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었다.
이 확대와 그에 따른 출판업의 성립은 세기전환기(世紀轉換期)에 따른 기본적인 특징이다. 뮌헨 베를린 빈의 각 도시가 3개의 특색 있는 중심을 형성하여 서로 겨루는 형태가 된 것도 이 시기이다. 뮌헨에서는 반(反)부르주아를 주장하는 예술가 정신이 잘 육성되고, 베를린에서는 공업문명이 생겨나는 도시의 문제가 일찍부터 주제화되었다. 빈에서는 전통의 대중극에 외국의 세기말 문학이 혼합되어 독특하고 완숙된 문학이 생겨났다. 그 첨단에서는 언어표현에 대한 회의와 정신의 위기를 차츰 느끼게 되었다.
■ 20세기
20세기의 문학은 인간정신의 위기적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우선 직면했다. F. 카프카 H. 호프만스탈 R. 무질 등 오스트리아계(系)의 작가가 선진적인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국가사회의 붕괴가 특히 그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산문은 19세기의 소설에 특유한 것이었던 이야기문체에서 탈피, 새로운 표현영역을 개척하여 즉물적(叩物的)언어에 의한 정신 상황의 표출을 시도했다.
이것은 표현주의자들의 실험을 거쳐 P. 베를렌 등으로 대표되는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의 산문으로 확대되어 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19세기의 소설을 계승발전시킨 T. 만의 활동이라든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본류를 이룬 A. 츠바이크 등의 활동이 있어 소설은 결국 실험 사실(寫實)이라는 2갈래의 길로 크게 나누어지게 된다. 이 양자의 상극(相克)을 드러낸 것이 1937년에 망명작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표현주의 논쟁이다.
시는 19세기의 민요조(民謠調) 매너리즘에서 탈피를 꾀한 H. 호프만스탈이라든지 R. M. 릴케에 의해 그리스계 내지 라틴계의 오랜 형식이 이용된다. 또 그것을 변형 붕괴하는 과정에서 현대시로서의 표현형태가 탐구되었다. 이러한 면에서의 표현주의 시인들의 기여도 컸다. 여기에 쉬르리얼리즘의 수법이 더해졌다. 이것이 제 2차세 계대전 후의 시인들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1920년대에 B. 브레히트는 예술적 순수시의 무효를 선고하고 사회개혁을 위하여 실효 있는 <실용시>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 이후 하이네의 시풍을 계승하는 정치시도 다채로운 전개를 보인다. 나치스 체제에 짓밟힌 쓰라린 경험 때문에 전후에는 그것이 더욱 끈질기게 전개되고 있다. 연극은 자연주의에서 표현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현실을 무대 위에서 추구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토대로 브레히트의 <서사연극(敍事演劇)>이 성립했다. 관객을 환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생각할 재료를 제공하여 발견과 인식에 자극을 주었다. 브레히트의 기본자세는 그 이후의 독일연극의 중심적 지주가 되고 있다.
낭만파에 의해 개척된 비평의 장르는 세기의 전환기에서 1920년대에 걸쳐 F. 메링이나 W. 벤야민 T.W. 아도르노 등 뛰어난 비평가를 배출한다. 국민문학의 이념과는 전혀 다른 면에서 독일문학의 근원과 진수를 구명하고 비평의 창조성과 전위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들의 진가가 이해되게 된 것은 겨우 60년 이후의 일이다. 나치스정권하의 지배 아래 독일문학은 나치스에 협력하는 문학과 반(反)나치스의 망명문학으로 분열했다.
나치스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왜곡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그 사상적인 토대 구축을 위하여 <피와 흙의 문학>으로 총칭되는 작품이 양산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또 오랫동안 배양되어 온 여러 인접 국가에 대한 <르 상티망>의 귀결이기도 했다. 망명문학자들의 행선지는 모스크바에서 브라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 걸치고 망명의 계기도 다양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그 생활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는 S. 츠바이크의 자살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나치스의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독일에 머물렀던 국내망명 문학자도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은 동서로 분열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어느 쪽도 저마다의 입장에서 20년대를 축으로 한 문학의 발전을 계승하였다. T. 만과 브레히트와 같이 동서(東西) 양 독일에서 후계자를 배출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F. 카프카나 벤야민과 같이 서독에서만 평가가 높은 사람, J.R. 베허나 H. 만과 같이 동독에서 특히 존중받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과거의 문학유산의 발굴이라든지 재평가 작업은 진행 중이엇다. 60년대 후반의 문화 혁명적 국면을 거쳐 서독에서는 문학의 이상적인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제기되었다. 동독에서는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조직적으로 문학사의 재검토가 추진되어 왔다. 그 사이에 서서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업도 민족이 저지른 과거의 죄과를 직시하게 된다. 현재의 자세를 생각하는 고뇌에 찬 것이 많아 독일문학의 정신구조는 크게 변화했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는 시(詩)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G. 아이히나, P. 후슬 등의 자연서정시의 성숙에 대해 I. 바흐만 H.M. 엔첸스베르거 P. 첼란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60년대의 공백기를 거친 후인 70년대에는 새로운 형식의 발라드나 신변잡기적인 시가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계속 저조하여 첼란의 희유(稀有)한 시업(詩業)만이 빛을 발하고 있다. 또《카바레》의 계보가 W. 비어만에 의해 새로운 개화를 이룬 점도 특기할 만하다.
50년 말부터는 산문이 주류가 된다. H. 뵐 G. 그라스 U. 욘존 등에 의해 현대사를 올바른 의미에서의 시민의 관점에서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소설이 잇따라 저작된다. 전후의 대표적인 경향을 형성해 갔다. 이에 이어서 현대사회의 억압상황을 그리는 작품이 쓰여졌다. 70년대 이후는 그 테마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르포르타주적인 수법이 두드러져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문학도 활발해졌다.
이야기 그 자체로 독자의 흥미를 끄는 전통적인 소설장르는 C. 볼프 등 주로 동독의 작가들이 이끈 느낌이다. 전후의 독일연극의 방향을 결정한 것은 60년대에 P. 바이스가 확립한 기록연극(記錄演劇)이다. 그 이후는 현대를 묘사하기 위하여 역사극을 다루는 경향도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브레히트극(劇)의 발전적 계승이다. 70년 이후의 서독에서는 자연주의적 풍속극이 우위를 차지하고 브레히트극의 전통은 오히려 동독의 P. 하크스 H. 릴러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대체로 독일의 현대문학에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이 많아 그것으로 문학 그 자체의 자율성이 유지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문화와 매스컴의 보급에 따라 원래의 역할이 크게 변화하여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의식층에 파고드는 사회비평이 문학에 부여된 사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별첨
* 탈식민지문학의 정전화
-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를 중심으로
■문학생산과 문학적 가치의 생산
문학의 세계와 문학 밖의 현실간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분명히 문학은 현실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또한 그러한 변화의 과정에 참여한다. 문학작품의 집필은 현실의 조건들에 묶인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한 개인들이 써낸 원고들은 책시장이라는 현실에 관여하는 출판업자들을 통해서 책의 형태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문학'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작가 자신의 뼈아픈 노고가 담긴 책이라고 해도 남들이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으면 책은 말없이 서점에 꽂힌 채 반품을 기다리는 신세에 머물 뿐이다. 문학의 생산은 책의 생산이라는 물리적인 과정과 동시에 책의 가치를 생산하는 상징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문학의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의 가장 유명한, 특히 한국인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예는 노벨문학상 수여이다. 그러한 관심은 한국인으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없는 데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기도 하려니와 실제로 이 노벨문학상만큼 상금 액수나 수상으로 인한 파급효과가 큰 문학상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대변되는 문학적 가치의 인정은 책시장에서 획기적인 판촉효과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발생하는 책 판매를 통한 물질적 이득의 창출 외에도, 바로 본 논문이 입증하듯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은 학술적 문학연구의 대상으로서도 본격적으로 자리잡는 상징적 이득이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이름에 첨가된다.
문학의 생산과 문학적 가치의 생산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입장에서 볼 때 노벨문학상과 같은 문학적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가 어떠한 조건과 어떠한 과정의 결과인가는 중심적인 탐구의 과제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를 결정하는 위원회의 속사정을 캔다든지, 노벨위원회가 매년 짧게 발표하는 공허한 수사로 가득한 수상이유의 변 따위를 분석해서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설사 노벨문학상을 결정하는 위원들의 개인적인 편견 등이 큰 변수가 된다고 해도 이들이 무명의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상당한 문학적 가치가 인정되는 저명 작가들 중에서 한 사람을 고르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의 창출은 이미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에 다른 데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연구자는 노벨문학상이 상징하는 문학적 가치의 창출이 어떻게 최초에 만들어지고 수상에까지 이어졌는가를, 말하자면 스웨덴 한림원 밖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반면에 노벨문학상 수상이 일체의 우연한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해당 작가의 고유한 '문학성'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결론 내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론의 전제로, '노벨문학상은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에게 필히 주어진다'는 명제와, 그 역인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는 필히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명제가 둘 다 예외 없는 진실임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뛰어난 작가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이 전제들은 무너질 것이며, 결론 또한 근거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뛰어난 작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뛰어난 작가'라는 판단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의 판단만이 옳다고 볼 객관적 근거를 대기는 쉽지 않다. 문학적 가치의 판단이 미적 가치판단이라면 칸트(Immanuel Kant)가 {판단력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지적한대로, 모든 미적 가치판단은 객관적 보편성에 근거한 논리적 판단이 아닌 주관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 사람, 또는 한 위원회의 미적 가치판단이 '문학성'에 대한 판단으로서 객관적인 보편성을 갖는다는 논리적인 오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벨문학상이 대표하는 문학적 가치의 창출과정을 연구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방법론적 해답은 이하에서 간략하게 제시하겠으나 해결의 열쇠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이미 담겨 있다. 미적 가치판단은 주관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이 주관성은 특정 이해관계나 목적의식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지향하며, 하나의 "공감대"(sensus communis)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다만 이 '공감대'는, 예컨대 '노벨문학상 상금의 액수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논리적 판단이 주장할 수 있는 수학적, 객관적 보편성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그 '공감대'는 논리적으로는 하나의 상대적인, 즉 주관적인 보편성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럼에도 이것이 수사적으로는 객관성을 주장하는데 성공하는 것은, 어떤 미적 판단이 특정 조건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사회 내에서 만들어진 '공감대'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감대'는 사회적으로 상대적인, 또는 말을 달리 해서 한 사회, 한 시점에서는 절대적인 '공감대'로서, '사회적 공감대'라고 부를 수 있다.
본 연구는 문학적 가치의 창출, 또는 '문학적 가치판단'이 지향하고 주장하는 '공감대'의 창출 과정의 한 예로서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유럽의 언어를 사용하는 비유럽 지역 작가들 중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유력한 경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유럽 식민지 출신 지역에서 유럽의 언어로 문학을 하는 이들 작가들에 대한 연구가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문학적 가치창출 과정을 살펴보기에 적합하다.
그 이유는 문학적 가치부여의 주체인 중심국가의 문단과 판단의 대상인 주변부 국가의 작가가 선명히 구분되면서도 동시에 양측이 공유하는 언어로 인한 '공감대'의 형성이 용이하다는 이점 때문에, 문학적 가치 및 거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의 창출과정이, 중심국가 내부의 작가를 발굴하거나 번역자들에 의존해서 이질적인 문학을 중심국가들이 수용하는 경우보다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탈식민지 문학
본 연구의 제목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식민지 지역에서 제국의 언어로 쓰여진 문학을 '탈식민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은 최근 문학연구의 뚜렷한 조류로 부상한 '탈식민지'(postcolonial) 문학연구에 대한 인정 및 경의의 표현이다. '탈식민지' 문학론은 크게 보면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나 에메 세제르(Aim C saire) 등 서구의 문화적, 철학적, 심리적 담론으로서 '식민주의'(colonialism)에 대한 비판을 개시한 이들과, 작게 보면 문학비평 내지는 비교문학의 영역 속에서 이들의 사상과 방법을 적용하여 식민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을 심화시키고 전문화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작업에 이어지는 연구들이다.
이러한 탈식민지 문학론에 대한 일반적인 개설서로 널리 읽히는 {제국이 되받아 쓰다}(The Empire Writes Back)에서 저자들은, '탈식민지 문학'은 언어와 지역간의 차이와 "그들의 특별하고 뚜렷한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경험에서 현재의 (문학적) 형태가 나왔으며, 제국의 힘들과의 긴장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고 제국의 중심국가들로부터의 차이점을 강조하므로 자기주장을 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Ashcroft et al. 2). 그런데 모든 자기주장은 그 주장을 들어줄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런 주장을 인정해 줄 때 의미를 갖는다.
탈식민지 문학이 주장하는 중심국가들과의 대립성은 단순한 자기주장의 차원에 머문다면 그것은 국지적인 현상에 머물 것이다. 탈식민지문학을 중심국가들이 탈식민지 문학론의 자기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바로 중심국가 영국에서 출간된 {제국이 되받아 쓰다} 같은 책을 통해서 받아들일 때, 탈식민지 문학은 "제국의 힘"에 맞서는 힘을 비로소 얻게 될 것이다. 결국 탈식민지 문학론이 제국의 힘들과 갖는 "긴장 관계"의 핵심에는 문학적 가치, 문학적 특성을 인정해 주는 타자로서 제국의 문학적 담론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탈식민지 문학이 국지적,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려면 중심국가들의 '공감대'의 영역에 포용돼야 하며,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야 단순한 인쇄물 이상의 하나의 문학적 현상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제국중심 국가들이 탈식민지 문학의 '문학성'을 제대로 본 것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또는 이들이 그 어떤 '오리엔탈리즘'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주변부 문학의 실상을 잘못 파악할 가능성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탈식민지 문학의 자기주장과 '제국'이라는 타자에 의한 가치인정 사이에는 불가분의 거래관계가 발견되는 것이다.
가장 과격하게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탈식민지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작품 내용이 제국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있다고 해도, 그 작품의 궁극적인 지향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세계'는 실제로는 탈식민지 문학이 빌려쓰는 언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국가의 문학세계를 지칭한다. 그런데 중심국가 문학세계에는 이미 숱한 문학작품들이 서로 보다 낳은, 보다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 속에서 시대를 거치면서 비교적 확고한 인정을 받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하나의 '정전'(canon)을 이룬다. 중심국가의 '정전' 또는 '고전'들과는 근본적으로 간접적이다.
말하자면 '서자'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전 식민지 지역의 문학작품이 '정전'의 목록에 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탈식민지 문학의 성공적인 '정전화' 과정은 주관적 입장에서 볼 때 중심국가의 전통적인 '정전'이 갖는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한 대항으로 나타나고, 중심국가의 '정전'의 배타성을 깨는 형태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 이후로 서양에서 '정전'의 개념은 언어의 '올바른 용례'의 모범들이 담긴 작품들이라는, 사뭇 '문법적인' 개념이었다). 오늘날 탈식민지 문학과 중심국가의 정전과의 관계도 유사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영어로 된 문학의 예를 들면, 영어 문학의 정전에는 영국 고전 문학이 중심을 이루는데, 이들이 구성하는 정전은 영어권 전역에 걸쳐 가장 정확하고, 가장 멋진 영어의 용례로 인정되며 교육된다. 이러한 영국문학 '정전'이 갖는 '언어적' 권위는 영국 식민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음을 오늘날까지 영국의 식민지 출신 지역, 예컨대 인도의 실질적인 공용어가 영어라는 점이 반증한다. 그러나 영국문학 정전에 대해, 탈식민지 문학, 또는 기타 주변부 문학은 그것이 "서남 잉글랜드 지방 영어"를 보편적 규범으로 삼는 데 불과하다든 문제제기를 한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함께 양산되는 주변부 지역의 문학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중심으로 하여금 이것들을 포용하지 안되게 된다.
그리고 중심은 '정전'의 범위를 넓혀서 이들도 '영국적'인 문학의 한 분파로서 인정하고, 가치부여 하고자 한다. 중심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과정에서 '순수한' 잉글랜드적 전통의 권외가 약화되며 '영어'의 순수성이 오염되기는 하지만, '영어'와 '영문학'을 보다 넓게 재정립하므로 자산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중심에 대한 도전으로 출발한 탈식민지 문학이 중심부에 의해 포용되면서 그러한 포용이 함축하는 물질적, 상징적 보상을 얻지만, 최초의 대항적 입장은 약화될 것이다. 이것이 양측이 서로 주고받는 '거래'의 일반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심국가가 주변부 문학을 인정하는 내용이나 시각은 중심에 대한 대항적, '탈식민지적' 시각에서 보면 왜곡과 자의성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중심이 자의적으로 주변부 문학을 인정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려면 먼저 '잘못된 인정'의 형태로라도 이루어지는 주변부 문학의 인정, '왜곡된 가치'의 형태로라도 이루어지는 가치의 인정은 필수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주변부 문인들의 첨예한 반제국주의적 정서와는 무관하게, 이들이 중심부 문학론과 비평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은 전혀 마다할 일이 아닌 것이다.
정전화의 주체가 누구이건, 정전화의 방식이 어떠하건, 정전화 또는 쉽게 말해서 '명성'을 거부한 작가는 탈식민지 작가이건 중심부 작가이건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정전화 과정에는 해당 작가의 주관적 의향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들이 인정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러한 인정에 개인 작가가 반발을 한다고 해도, 예컨대 노벨문학상을 거부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그 작가의 '작가적 양심' 따위가 더 '유명'해지면서 더욱 더 '정전화'의 과정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개인의 주관적 창조성을 기념하는 상이기도 하지만, 매년 보기에따라 '뜻밖의 결정'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수상작가 선정이 드러내 주듯이, 수상작가 선정의 근본적인 자의성(미적 가치 판단은 엄밀한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으므로)은 개인의 창조성 자체가 얼마나 남들의 평가와 남들의 제도에 의존해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전화와 문학장의 논리
문학 창작은 개인의 주관적 체험과 성향을 텃밭으로 한다. 하지만 문학적 가치의 창출, '문학성'의 인정에 있어서는 타자의 권리와 목소리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정전'의 형성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정전'이 만들어져 온 역사를 거슬러 로마 시대로 가면, 이 당시 '정전' 또는 '고전'에 해당하는 작가들을 지칭하는 말은 "antiqui"(옛 사람)(Curtius 253)이다. 정전은 한마디로 '죽은 옛날' 작가들의 세계였던 것이며 이것은 그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죽은 작가는 말이 없다. 물론 죽은 작가는 남기고 간 책으로 말을 하지만 그의 옛 말을 여전히 들어줄지 여부는 산 자들의 결정사항이다.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산 자들의 권한이다. 정전을 만드는 일은 어떤 작가를 과거로부터 다시 부활시킬 것이며, 어떤 작가들을 계속 문제 삼을 것이며, 출판할 것이며 읽히고 가르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이 결정적으로 끝나는 경우는 없다. 선별적으로 망각의 늪에서 건져진 작가들로 만들어진 정전 속에 새로 발굴된 작가가 들어가기도 하고 거기서 추출되기도 하는 변화의 과정으로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가변성을 막고자 하는 시도는 '정전'을 두고 늘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예컨대 "서구 전통의 최종 상속자"를 자처하는 미국 예일대학 석좌 교수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모든 문학 정전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서양 정전"을 "{일리아드}, 성서, 플라톤, 셰익스피어에 기초를 둔 교육"(Bloom 33) 속에 보존하고자 한다. 이미 뼈도 남지 않은 이들 죽은 이름들은 블룸 같은 이를 통해서 '정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계속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블룸처럼 정전을 고정화시켜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성공적이라면 '서양 정전'은 이러한 대작가들의 이름 몇 개를 굳게 세우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정전의 형성은 이처럼 개인 작가의 이름이 문자 그대로 '유명'해지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정전은 이러한 개인의 문제, 작가의 문제인 듯한 환상을 만든다. 그러한 환상을 강화하는 것은 정전에 들어가 있는 작가들에 대해 끝없이 나오는 작가론이나 전기들로, 작가는 이러한 담론들을 통해서 하나의 특별한 개인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정전화는 작가 개인을 만드는 과정이기는 해도 작가 개인이 스스로의 명성을 만드는 과정은 아니다. 정전에 들어간 작가는 이미 죽은 작가인 경우가 많다. 산 작가라고 해도 자신의 명성과 자신의 '문학성'이 만들어지는 결정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작가에게는 없다. 정전 그 자체는 개인 작가들의 이름으로 빛나지만 정전을 빛내는 이름들은 개인 작가를 '띠우는' 숱한 사람들의 의식적 노력, 조작들을 그 이면에 가린다. 우리의 연구는 '노벨상 수상작가'로 대변되는 '위대한' 작가, '정전'에 들어가는 작가를 만드는 구조와 조건, 그들의 이름 뒤에 숨은 알려지지 않은 정전형성의 기여자들, 눈에 보이는 개인 작가의 명성을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개인들에 대한 연구이다.
하지만 이들이 또 다른 '위대한' 개인으로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지적하듯이, 중요한 것은 탁월한 개인으로서 작가를 숭배하는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해서, "사회적 행위자들이 점거하고 조작하는 사회적 위치"간의 "구조적 관계"로서의 "문학장"(literary field)으로 눈을 돌리는 발상의 전환이다(Bourdieu 1993, 29). 문학장을 형성하는 행위자들은 개인일수도 있으나 집단이나 노벨문학상 같은 제도일 수도 있다. 이처럼 종합적인 관계망으로서 문학장을 인식할 때, 개인 작가는 "눈에 띠는 생산자"이기는 하나 그는 생산관계의 한 요소일 뿐이고, 이러한 "저자(author)를 인허(authorize)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 그리고 저자를 인정할 권위(authority)를 만드는 구조, 결국 "창작가를 창조하는"(76-77)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를 사회적으로 '창출'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은 예술의 '생산'이 갖는 상징적 차원 때문이다. 하나의 예술품, 예컨대 기존의 관습을 파괴하는 전위예술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 그 작품은 아직 '작품'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예술 생산물이 '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것이 '예술'이라는 상징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정, 또는 "집단적 오해"(Bourdieu 1993, 81)가 필요하다. 부르디외가 주장하듯이, "예술 작품은 알려지고 인정될 때, 즉 사회적으로 예술작품으로 제도화되고 그것을 인식할 능력이 있는 관람객들에게 의해 받아들여질 때만이 상징적 대상으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예술작품에 대한 의식적 인식의 차원으로, 예술을 '보는'(voir)는 행위는 단순한 동물적 감각 차원 이상의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savoir)의 기능"이라는 것이며, 이러한 '앎'은 개념과 말을 통해서 대상을 명명하고 알아보는 "지각 프로그램"(Bourdieu 1984, 2)이다. 쉽게 말해서, '말해주는 이', 즉 비평가나 예술론자가 없이 예술은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창출할 수 없다. 물론 개인 작가의 '천재성'은 필히 후세에라도 '인정'받는다는 것을 굳게 믿는 낭만주의적인 예술관, 또는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는 비평에 우선하는, 비평이 필요 없는 창작의 절대적 지평을 상정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예술론을 포함한 다양한 입장의 예술비평들을 통해서 예술이 인식되고 인정받는, 보이지 않는 상징적 권위의 '장'(field)에 창작은 절대로 의존해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담론이 형성하는 제한된 '장'은 보다 큰 사회적 실천의 장 속에 위치한다. 현실 사회에서 제한된 보상과 재화를 두고 다양한 (개인, 집단, 제도 등의) 행위자들이 치열한 경쟁과 투쟁을 벌이듯이, 문학예술의 장 내부에서도 치열한 경쟁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현실 사회의 실천이 이전의 기득권자들을 폐기하는 새로운 기득권 세력의 상승의 끝없는 반복이듯이, 예술의 장, 예컨대 문학장에서는 "이미 이름을 날리는 작가"들과 "자리를 잡은 작가들을 과거로 폐기하지 않는 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없는" 새로운 작가들 사이에 끝없는 투쟁이 전개된다.
생산자 측에서의 이러한 "인정을 위한 투쟁"(Bourdieu 1993, 106)은 실제로는 작가 개인들 간의 고독한 결투가 아니라 이들 생산자들을 '생산'하는 보이지 않는 생산자들, 출판업자, 비평가, 문학교수 간의 투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회 일반의 투쟁이 어떤 형태로건 영향을 주고 있는데, 20세기 한국의 문학장이 전통적으로 소위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간의 대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사회 일반에서 거대한 사회적 집단간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은 문학이나 예술 장내에서는 어떤 것이 좋은 예술이며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가를 두고 전개하는 "분류투쟁"(classification struggle)의 형태를 띤다(Bourdieu 1984, 479). 이러한 '분류투쟁'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는 노벨문학상같은 '정전화' 또는 '신성화'로 표현된다.
문학장 내부에 문학장이 위치한 현실에서의 거대 집단간의 역사적 투쟁을 이면에 업고 전개되는 '분류투쟁'의 가장 대표적인 예들로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거대 집단간의 투쟁을 재현하는 '여성문학론'이나 서구 제국주의의 유산에 대한 도전과 비판이라는 역사적 투쟁을 불러내는 '탈식민지 문학론'을 들 수 있다. '탈식민지 문학의 정전화 과정'을 연구하는 우리의 질문은 사뭇 소박하다. '어떻게 식민지 지역 출신의 주변부 작가가 노벨문학상이라는 대표적인 '정전화'의 대상이 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손쉬운 대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개인 작가의 '천재성'을 전제로 하는, 또는 문학의 자율적 질서를 가정하는 입장에서의 대답은 '그 작가가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이다'라는 것과, 둘째, 문학의 자율적 질서를 불신하고 거기에 개입한 '정치성'에 민감한 입장에서는 "서구 중심국가가 주변부를 관리, 통제하기 위하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자신감에 찬 결론을 유보한 채 그 과정을 좀더 차분히 살펴보고자 한다. 문학적 가치부여의 사회적, 객관적 "분류투쟁"의 측면을 배제한 후, 단순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위대성을 전제한 후 그것을 해명하는 문학애호가의 차원이나, 아니면 문학장 내의 '분류투쟁'을 기계적으로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므로 노벨문학상의 '이데올로기'를 과감히 파헤치는 우상파괴주의자의 차원이 아니라, 문학의 실상을 객관적이며 냉철하게 살펴보는 문헌학자의 노동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다.
■영연방 작가들의 문학적 가치 창출과정에서의 영국 서평의 역할
1) 서평에 의한 '명성'의 창출
독일의 낭만주의 비평가 프리드리히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의 단장 가운데 비평에 의한 명성의 창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다. "한 작가의 명성은 흔히 돈이나 여성의 호의를 얻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얻는다. 밑천만 잘 대면 나머지는 그대로 따라오는 것이다. 요행이 많은 이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요행, 오직 요행일 뿐이다'는 말은 대부분의 정치적 현상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문학적 현상에도 적용된다".
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새로 출판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하고 거기에 평을 달은 서평이다. 이러한 서평은 해당 출판물의 존재와 상징적,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는 최초의 단계로서 그 중요성은 적지 않다. 최초의 서평들이 든든한 "밑천"이 된다면 대개 "나머지는 그대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데 부나 사랑이 그렇듯이 서평의 세계는 온갖 우연과 요행으로 가득하다. 어떤 저자가 아무리 좋은 책을 썼다고 해도 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서평이 없다면 그의 명성은 쉽게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좋은 책들이 언제나 제대로 서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천재성'은 늘 인정받는다는 소박한 논리는 실제 '천재성'이 만들어지고 홍보되는 세계에서는 입증되지 않는다. 서평은 자신의 자율적인 논리에 의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관심이 있지, 이름 없는 창작자의 노고를 치하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평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예술) 생산자와 생산물을 신성화하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투쟁(Bourdieu 1993, 42) 그 자체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정치적 현상의 우연성과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평의 힘, 서평을 통한 권력 투쟁은 슐레겔의 단상을 낳은 독일보다도 영국 사회에서 일찍이 개화했다. 영국은 17세기에 근대적 시민혁명을 이룩한 후 18세기부터는 본격적인 민간주도의 시장경제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보편화된 시장경제가 주도하는 사회의 전범을 보인 영국은 문학에 있어서도 자유경쟁과 개방의 원칙 하에 누구나 글을 써서 출판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열린 문학장을 구현했는데, 이것은 예컨대 언론과 출판이 국가권력의 후원과 통제에 그대로 노출돼 있던 대륙의 문학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책 시장이 지속적으로 팽창하면서 양산되는 책에 대한 적절한 분류를 하는 "분류투쟁"의 필요성이 새로운 질서를 통해 이권을 독점하려는 사회적 세력간의 투쟁은 요구하게 되고, 이것이 어떤 한 집단이 국가 권력을 장악해서 일방적인 검열이나 물리적 봉쇄의 형태를 띨 수 없는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서평에 의한 "분류투쟁"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세기를 걸쳐 꾸준히 발전한 영국의 서평문화는 19세기초가 되면 '계간지'(quarterly) 들의 등장으로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
18세기의 월간지들의 비교적 단순한 서평에 비교해서 보다 깊이 있고 보다 상세한 서평, 또한 18세기 서평들과는 달리 출판업자의 이해관계에 그대로 부응하지 않는 공정성을 지향한 이들 계간지들의 효시는 1802년에 창간된 {에딘버러 리뷰}(Edinburgh Review)이다(Shattock 4). 이 잡지의 창간호 첫 장에 나오는 '광고문'(Advertisement)은 문학장을 주도하고자 하는 서평의 야심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이 잡지는 결코 출판되는 모든 생산물들에 알아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잡지는 실린 글의 숫자가 아니라 그 선별성으로 구별되기를 편집자들이 바란다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매일 제시되는 책 중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은, 다룬 주제가 중요하지 않거나 그것을 구현한 방식의 결점으로 인해,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이다. .... 따라서 가장 낮은 급의 출판물들은 독자대중이 이미 보고 있는 문학잡지들 대부분이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에딘버러 리뷰의 편집자들은 이 선별의 원칙을 훨씬 더 강화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당대 문학을 완전히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를 사양한 채, 일정한 양의 명성을 얻었거나 얻을 만한 작품들로 우리의 관심의 대부분을 제한할 것이다.
"선별의 원칙"에 의거해 '명성'이 창출되는 문학장의 논리를 극명히 표현한 고전적 예에 속하는 이 [광고문]의 약속 그대로 이후 {에딘버러 리뷰}는 매우 성공적으로 '선별자'이자 문학적 가치의 부여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만들어 내고 유지했다. 그런데 이 잡지의 문학적 권위 및 권력은 보다 큰 권력과 암묵적인 연계를 하고 있다는 점이 당대의 여러 사람들에게 줄 곳 지적되었는데, 이것은 18세기의 영국의 양당정치를 구축한 파벌들인 '휘그'(Whig)와 '토리'(Tory) 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서평이 꾸준히 복무한 역사를 이어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딘버러 리뷰}가 암암리에 지지하는 '휘그당파'의 입장에 대항하기 위해, 문학장 내부에서의 경쟁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먼저 토리 계열의 {쿼털리 리뷰}(Quarterly Review), 그리고 급진파(Radical)의 입장을 표명하는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 등이 나와서, 이들 서평 계간지들은 상호 경쟁과 투쟁을 통해 서평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면서, 동시에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의 변동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계급 투쟁과 권력 투쟁을 '분류투쟁'의 형태에 담아서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학시장의 자율적인 경쟁구도와 그것을 주도하는 서평들에 의해 문학적 가치가 구분되는 상황은 그 이후 영국 문학장 및 나아가 영어권 문학장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영국 또는 영어권 문학장에서 서평이 갖는 중요성에 비교할 때 프랑스에서 유래한 '문학상'은 훨씬 덜 중요하다. 오늘날 영국의 가장 유명한 문학상으로 자리잡안 '부커 상'(Booker Prize)은 프랑스의 공쿠르상(Prix Goncourt)를 모방한 상으로 뒤늦게 도입된 것이며, 문학상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긴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하나의 책 마케팅 전략으로서의 부커상은 서평을 통한 책의 가치에 대한 소개를 생략하고 곧장 수상작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으로 현대 자본주의적 문학 마케팅의 전략으로 등장한 것이다. 반면에 서평은 언론 출판의 자유가 확립된 18세기 이후로 영국 땅에서 꾸준히 이어진 전통적인, 따라서 보다 권위 있는 문학가치 인정 방식이다. 오늘날에도 영국의 서평문화는 런던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서평잡지들 속에 그대로 살아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권위있고 영국뿐만 아니라 영어권 및 세계 전체의 지식인 및 여론 형성층에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다.
이 잡지는 19세기 서평계간지의 전통이 약화되는 시점이며 {에딘버러 리뷰} 창간 10년 후인 1902년에 등장한 {타임문학부록}(The Times Literary Supplement, 이하에서는 TLS로 약함)이다. 처음에는 {더 타임즈}지의 주간 문학부록으로 출발한 이 잡지는 이후에 독립적인 별책으로 출간되는 서평 주간지로, 매호 40여권의 신간들을 소개하고 비평하는 놀라운 역량을 창간이후 오늘에까지 줄기차게 과시하고 있다.
이 잡지에 촌평의 대상만 되더라도 큰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영어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TLS는 문학 외에 정치, 경제, 예술, 철학, 과학 등 여러 분야의 책들을 기획 서평의 형태로 게재한다. 문학연구자 외에 많은 인문사회학자들, 그리고 서적상, 도서관 사서 등, 책의 가치를 인정하는 상징적 차원뿐 아니라 실제로 책이 유통되고 구매되는 물질적 차원에도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영국의 식민지 지역의 '주변부' 작가들로 분류가 되면서도 비교적 최근에 '노벨문학상'이라는 세계적 영예를 안은 호주의 패트릭 화이트(Patrick White), 남아프리카의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 (카리브 해의 작은 섬인) 세인트 루시아의 데렉 월컷(Derek Walcott)의 '명성' 창출과정에 영국 서평전통을 직접 이어받는다. 영국의 서평문화를 대변하는 TLS가 행사한 '선별의 원칙'과 '분류투쟁'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들 작가들의 '신성화' 또는 '정전화' 과정을 TLS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노벨문학상 위원회가 TLS를 고정적으로 구독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차원과는 다르다. 또한 이들 작가들의 성공이 꼭 TLS라는 특정 잡지의 영향만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노벨문학상이라는 '상징적 가치'의 창출과정의 한가지 단서로서, 한가지 연결고리로서 TLS의 서평들을 추적하는 것이 보다 거시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미시적 자료로서의 의의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미시적 연구는 거시적 일반론을 즐기는 한국적인 학문풍토에서는 때로는 매우 긴요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2) 패트릭 화이트의 경우
패트릭 화이트는 나딘 고디머나 데렉 월컷과는 달리 이미 죽은 작가이다. 그만큼 그는 '정전'에 들어갈 가장 중요한 '자격'을 얻은 셈이다. 그는 또한 고디머나 월컷보다 더 일찍 태어났음은 물론 노벨문학상도 1990년대에 들어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두 작가보다 약 20여년 전인 1973년에 받았다는 점에서도 먼저 다루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 연구자의 말대로, 화이트가 노벨문학상 수상은 영국과 미국의 문학 전통 밖의 영어문학이 최초로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현대 영어문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으로(Walsh 1977, 126), 이후 고디머나 월컷 같은 영연방 지역 출신 작가들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길을 활짝 열어준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이트는 TLS와의 관계가 다른 작가들보다 더 밀접한 경우로, 서평을 통한 '명성'의 창출과정을 예시하기에도 매우 적합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호주 작가로서는 최초로 (그리고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패트릭 화이트가 197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 그는 이미 중심국가 영국에서의 '고전적 작가'로 분류되고 있었다. 서평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화이트에 대해 영국에서 이 무렵에 나온 대학 교수들의 저서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20세기 문학장의 큰 특징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는 '투쟁'의 일부가 대학 안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업적 책 시장과 거기에 개입하는 서평 계간지를 중심으로 문학장의 권력이 분배되던 19세기와 비교할 때는 매우 특이한 점이다. 오늘날 대학의 문학연구자들, 문학교수들은 고급문학에 대한 독서대중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생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문학장에서 한 몫을 차지한다.
다만 대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고, 대학에서 관리하는 '정전'의 분량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새로운 작가, 특히 살아있는 당대의 작가가 대학의 문학담론에 성공적으로 포함되는 경우는, 대학 내에서 장기적으로 '명성'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해당 작가의 정전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패트릭 화이트의 정전화의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1965년, '영연방 문학 연구'라는 분야를 앞서서 개척한 영국 리즈(Leeds) 대학의 학술대회와 이 때 발표된 논문들을 모아서 출판한 {영연방 문학: 공동 문화에서의 통일성과 다양성}(Commonwealth Literature: Unity and Diversity in a Common Culture)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 화이트는 호주를 대표해서 등장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67년에는 배리 아가일(Barry Argyle)의 {패트릭 화이트}(Patrick White)라는 단행본이 에딘버러에서 출간된다. 이 책은 저명한 문학교수들인 데이빗 데이치스(David Daiches), C. P. 스노우(Snow) 등이 편집자문을 한 "작가와 비평가 총서"(Writer and Critics Series)의 한 권으로 나오게 된다. 1970년에 윌리엄 월시(William Walsh)가 내놓은 영연방 문학 주요작가들에 대한 연구서 {다양한 목소리: 영연방 문학 연구}(A Manifold Voice: Studies in Commonwealth Literature)에서 화이트는 시인인 A. D. 호으프(Hope)와 함께 호주를 대표하는 작가로 등장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에는 보다 많은 화이트에 대한 학술적 연구들이 등장하게 되며, 아울러 학생들에게 읽히는 교재로서도 화이트가 정착됐음을, 주로 학부생이나 영국 고등학생들의 자습서에 해당되는 개별 작품에 대한 짧은 해설서들인, 데이치스 편, '영문학 연구'(Studies in English Literature, Edward Arnold 출판사) 총서 속에 화이트의 {보스}(Voss)가, 역시 월시의 집필로, 1976년에 포함된다. 이쯤 되면 화이트와 그의 대표작으로서 {보스}의 정전화는 완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모든 성공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화이트를 영국 본토에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호주 사람들이 호주의 '대표작가' 또는 '민족작가'로 화이트를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영국적인 시각에서, 영국인들의 문학적 '공감대'에 맞춰 그를 수용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맥밀런 호주문학 앤솔로지}(Macmillan Anthology of Australian Literature)를 공동으로 편집한 호주 퀸스랜드(Queensland) 대학 교수 켄 구드윈(Ken Goodwin)가 1986년에 쓴 {호주문학사}(A History of Australian Literature)에서 화이트는 호주적인 전통과의 연관성 속에서, 특히 호주문학의 향토색 전통에 대해 반발할 "상징주의적, 사회적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이해된다.
반면에 영국 리즈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연방 문학' 담론은 "좋은 글은 지역적 국가적, 생각과 정신의 경계선을 초월하는 것"(Press xviii)이라는 전제하에, 화이트의 호주적 독특성보다는 '영국적' 또는 '세계적' 보편성이 강조된다. 화이트 문학은 아가일에 의하면 "우주의 불가분성"에 대한 "희랍적 또는 동양적"(Argyle 22)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와 지리적 구획을 부인"(4)한다. 이처럼 화이트를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호주문학 전통 자체에 대한 폄하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호주 문학은 비록 150년의 나이를 먹었긴 해도, 패트릭 화이트가 등장하기 전에는, 보다 오래 된 문학들의 최상의 것들과 견줄만큼 지속적으로 좋은 문학은 없었다"는 식의 주장이다.
그런데 화이트가 호주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은, 영국에서 화이트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되며, 또한 화이트에 대한 연구 덕분에 영연방문학의 중심지 노릇을 한 리즈 대학의 '영연방문학 주임교수'가 된 윌리엄 월시의 말대로, 화이트가 호주사회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입장보다도 현대사회에서의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들로부터 "정신적으로 유리된" 예술가로서의 그의 "개인적 비전"(Walsh 1970, 125) 때문이다. 유럽 대륙이 주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화이트는 월시가 보기에 호주적인 전통보다도 톨스토이, 도스토에프스키, 투루게네프의 전통과 보다 더 가깝다(Walsh 1977, 127). 결국 화이트가 '세계적 작가'의 대열에 들어가는 대가는 그의 '호주성'을 배제하거나 약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이트가 '호주적이냐' 아니면 '세계적이냐'하는 것은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일단 이민자들이 만든 다인종 사회 호주의 '호주적'인 본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화이트의 문학이 '세계성'이 있다는 것도 '세계성'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가 있다. 우리의 관심은 영국인들의 화이트 문학 이해가 얼마나 '오해'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오해'라고 하더라도 그런 형태의 '이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 '오해' 또는 '이해'는 화이트가 작품을 쓴 호주 사회가 아니라 영국이라는 중심국가 문학장 내부의 문제로, 자신들의 '오해'는 그 내부에서 '공감대'를 획득한다면 하나의 '이해'로 통용될 것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주어진 상황과 문학장 내에서 '오해'를 할 권리가 있다. 사실 명확한 수상이유를 과학적이며 객관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노벨문학상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아닐까?
화이트라는 작가의 인정 또는 오해/이해의 과정의 최종 국면이 대학이라는 지식 재생산 기관의 저작물들로 확인된다면 이러한 과정의 최초 국면은 신간이 나오자마자 즉각적인 인정과 평가를 해주는 서평의 세계이다. 패트릭 화이트의 작품이 TLS라는 가장 대표적인 영국 서평지의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두 번째 소설인 {산 자와 죽은 자}(The Living and the Dead)가 나온 1941년이다. 약 반 페이지 정도의 "금주의 소설"란 전반부에서 익명의 비평가는 화이트의 문체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적 동정이라는 대개 부르는 것은 단 한 마디도 없다"든지, 작가의 "이기주의가 너무 강하게, 그리고 너무 지속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꼬집는다.
말하자면 '신인' 소설가에 한 수 가르치려는 듯한 어조가 짙게 깔린 이 서평이 아무튼 본 연구자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TLS와 화이트가 맺은 첫 번째 인연이다. 그리고 이렇게 개시된 화이트의 '정전화' 과정은 다소 소박하게 시작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TLS와 같은 지면에 그의 작품이 거론된다는 사실인데, 위에 인용한 {에딘버러 리뷰}의 '선별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 이 잡지에서 일단 서평이 될만한 작품으로서 '분류'되는 투쟁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이 서평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초기 화이트 서평에 깔린 다소 부정적이며 유보적인 어조는, 1946, 그의 세 번째 소설인 {아주머니 이야기}(The Aunt's Story)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역시 {하인}(The Servant)라는 다른 소설과 함께 이 작품을 한 단짜리 기사속에 다루면서 화이트의 "개성적인 문체"를 언급한 후, "{하인}은 읽기가 쉬운 반면, {아주머니 이야기}를 끝내는 데는 집중력의 수고가 필요하다"(TLS 1948, 10월 2일, 553)는 불평을 개진한다. 화이트의 문체를 주로 거론하는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인 1956년에 나온 네 번째 소설 {인간의 나무}(The Tree of Man)에 대한 평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귀에 익은 "특이한 문체로 그는 작품을 압도한다"는 지적이 등장하는 이 서평은 그 밖에 화이트라는 주변부 작가를 중심부 문학전통에 연결하고자 하는 첫 번째의 본격적인 시도로도 기념될 것이다. 서평가는 말하기를, "그의 뒤 어딘가에는 D. H. 로렌스와 초기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모습을 나란히 볼 수 있다"(TLS 1956, 6월 8일, 341)는 것이다. 각기 영국과 미국 소설 전통을 대표하는 두 작가들과 화이트를 비교하므로, 한편으로는 그의 문학적 가치를 인식가능하게 해주며 다른 한편 그를 중심부 문학장의 비평 담론 속에 표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화이트의 대표작 하나를 꼽으라면 많은 평자들이 강력한 후보로 택할 작품은 1957년에 나온 그의 다섯 번째 소설 {보스}(Voss)이다.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나 서사적인 구도에 있어서나 20세기의 뛰어난 소설 중 하나임이 분명한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이미 '선별의 원칙'을 통과한 작가로 TLS가 구별하는 화이트인만큼 TLS는 {보스}를 역시 어김없이 거론하며 평가했다. 이 서평은 화이트를 다른 작가들과 같이 거론하고는 있지만 화이트의 작품을 맨 앞에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후대에 이 작품이 누린 영광, 예컨대 호주는 물론 영국 학생들에게 읽히는 교재로의 정전화와 비교할 때 TLS의 평가는 다소 인색하다. 서평자는 이 작품이 "지극히 야심적인 시도"임을 지적하면서 이런 말로 작품의 가치를 재고 있다.
너무도 많은 것을 시도하다보니 그가 완전히 성공할 것이라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소설의 주된 미덕과 정당화는 보스와 로라를 묶는 관계를 작가가 심오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점과, 한 세기 전의 호주를 시적이고 예리하게 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문명이 이 대륙의 가장자리에 매우 가볍게 얹혀져 있었기에 이들 인간성의 작은 오아시스들 안의 피상적인 안정과 사회적 경직성이 주변의 공간의 사나움과 거대함과 대조되는 것은 특히 인상적이다.
로라를 다룰 때를 제외하면 보스는 그렇게 만족스런 인물이 되지는 않는데, 그는 대부분은 불쾌한 인간적 속성을 많이 갖고 있기는 해도 하나의 개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관념의 비인간적 표현 이상이 되지 못했다. 바로 그 이유로 이 인물이나 그의 탐험에 깊이 빠져들 리가 어려운 것이고, 이 책의 논점과 힘의 상당 부분은 상실된다. 남다르고 지극히 개성적인 문체는 적절한 묘사나 생각의 표현을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거드름의 요소도 갖고 있으며, 탐험 준비를 하는 앞부분은 가치를 쳐도 전혀 손실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먼저 '문체'에 대한 불만 섞인 지적이, 패트릭 화이트라는 문학적 대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고정된 방식, 화이트를 거론하는 하나의 '언어'로 정착됐다는 점이다. 문학적 가치의 창출은 문학작품 그 자체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나, 해당 작품을 보는 '시각', 그 작품을 '아는' 방식에 영향을 받게 된다. 서평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던 작품이 새로 나왔을 때 그 작품을 알아보고 인식하는 최초의 문학적 가치부여 행위이다.
특히 화이트처럼 개성이 강한 작가의 특이한 작품이 등장했을 때 서평자는 작품의 독창성에 압도당하기 않기 위해서라도 이미 등장한 인식의 방식들, 인정의 방식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패트릭 화이트 = 특이한 무체'라는 TLS가 '만든' 인정 방식, '오해'/'이해' 방식이 동원된다. 또한 서평자에게 주어진 복합적 과제는 다른 한편, 이 작품을 서평잡지 독자들에게 소개할만한 가치를 정당화해야 하는데 (특히 서평이 나오기 1주일 전 호인 12월 6일자에 이 작품에 대한 광고가 나간 터이므로), 이 "정당화"의 요소로 두 중심 인물간의 관계의 심오함과 19세기 호주사회를 다룬 역사소설로서의 가치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창작물을 압도하고 창작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또 다른 '창작자'로서 비평가의 권위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작품의 평가는 즉시 주인공을 형상화하는 데 작가가 실패했음을 방향으로 바뀐다. 뿐만 아니라 서평자는 '문명'의 중심에 선 사람으로서 중심부의 문명이 이식된 호주의 사회가, 적어도 100년전에는 얼마나 가볍고 피상적이었는가를 작품의 미덕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지적하므로, 중심부의 우월성과 주변부의 열등함을 확인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다. 이와 같이 서평에 의한 가치창출은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가치의 재생산이기도 한 것이다.
{보스}에 대한 서평은 화이트가 '신성화'되는 전환점을 보여준다. 문학장 내에서, 아직 평론가의 훈수를 받아야하는 '신인'의 지위와 안정된 독자층을 확보하고 무시할 수 없는 '주요작가'의 지위 사이에 걸쳐 있던 화이트의 상태를, 또는 '주가'를, 결정적으로 변하게 한 것은 {보스}의 상업적인 성공이다. 서평은 문학장을 주도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상징적인 세계로서 문학장, 또는 '문단'은 물질적 세계로서 책 시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유구한 문학전통이 있는 영국의 문학장을 대변하는 TLS는, 무조건 잘 팔리는 책이면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보는, 예컨대 '베스트 셀러'에 큰 관심을 갖는 미국의 {뉴욕타임스서평}(New York Times Book Review)와는 다르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돈을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내내 점잖을 빼는 영국인들의 후손들이 아닌가. 그래서 보스가 나온 후 잘 팔린 1959년, 1월 2일, {아주머니 이야기}의 재판에 대한 기사가 TLS에 나오는데, "{보스}의 성공은 화이트 씨의 출판업자들이 {아주머니 이야기}를 다시 찍어내도록 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번에는 초판의 서평보다 더 너그러운 표현들, 예를 들면 "화이트씨는 매우 설득력있는 작가이며 장면의 전환이 깔끔히 처리됐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TLS가 처음으로 서평을 해준 {산자와 죽은 자}가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62년에 다시 출간되는 것을 거론하며, 이전에는 '유별난 문체' 정도로 치부했던 것을 "{보스}를 쓸 사람의 문체로 우리가 이제 이 작품을 읽으면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는 화이트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기준과 '언어'를 화이트의 문학세계 내에서 찾으면서 초기 서평의 성급함을 시정한 셈이다.
1959년과 1962년에 각기 다른 화이트의 초기작들 재판에 대한 서평이 TLS에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화이트가 이제는 그의 다른 작품들이 상호간에 하나의 '작품세계'를 만들만큼 중요한 작가로 확실히 분류됐다는 점을 선언하는 지표이다. 이러한 '신성화'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은 화이트 본인으로 그는 1961년에 {전차를 탄 자들}(Riders in the Chariot)이라는 빼어난 작품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가치는 TLS에 의해 즉시 인정받았다.
TLS는 1961년 잡지 맨 앞의 서평기사로 [무한성을 시도하기]("Attempting the Infinite")라는 멋진 제목을 단 후 {전차를 타는 자들}에까지 이어지는 화이트의 작품 세계만을 단독으로 다루는 글을 게재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화이트에 대한 TLS 서평들이 그를 다른 작가들과 함께 다루는 글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고 3쪽에 걸친 글의 분량으로 봐도 매우 대단한 영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평의 논점은 지금까지 화이트의 소설들의 여러 주제와 요소들이 {전차를 탄 자들}에서 총체적으로 결합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TLS의 비평적인 권위에 손상이 안 갈 만큼 서평자는 화이트의 장단점을 상세히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길다. 왜냐하면 화이트씨는 그의 인물들을 체현할 공간이 충분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단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종종 신비로운데 그 이유는 그가 원하는 말들을 포착하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의미로 함께 비약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할 때 버릴 수 있는 말들을 생략하는 일에는 일체 양보를 안 한다는 점이다. ... 그가 고른 주제들은 유머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 그의 목적에는 위트가 더 적합하고 모든 소설들은 그의 특이하게 뒤섞은 비꼬는 위트로 가득하다.
이와 같이 본격적인 문학비평의 대상으로 정착된 화이트는 일체의 이론 없이 호주의 작가로 인정된다. 서평자는 화이트가 "호주와 갖는 애증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화이트가 "이 나라가 아끼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거칠게 다루고 있다"는 점과 아울러 "위대한 호주, 공간, 경치, 인간보다 더 영속한 무언가에 대한 느낌을 전해주는 그 자연"이 느껴진다는 점을 동시에 지적한다. 이렇게 되면 화이트는 호주를 대변하는 작가, '호주'라는 대상의 의미를 창출하는 주체로 인정되는 셈이다.
주변부 작가의 문학세계가 중심부 문학장에서 가치인정을 받게 되는 과정은 주변부 문화가 갖는 독창성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진 좋은 예이다. 이 점은 '세계 문학'의 대열에 끼고 싶어하는 한국문인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먼저 '조국'의 사회를 호되게 비판하고, 애정과 함께 깊은 증오가 있어야만 "위대한" 또 다른 '한국'이 그런 작품의 책장 사이에서 느껴질 것이라는 점을 한국의 '문학장'은 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유별날 정도로 독특한 문체가 없다면 중심부 문학장에서 애초에 인정되고 거론될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것도 화이트의 예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문학의 세계화' 전략이 본 연구의 과제는 아닌 만큼 계속 화이트의 명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하자. 영국 문학장에서 화이트가 '정전화'가 된 결정적인 시기는 1957년 {보스}의 출간에서 1961년 {전차를 탄 자들} 사이의 기간이다. 이후로 TLS는 그의 책들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일일이 서평을 해줄 뿐 아니라 학생들의 교재나 대중 독자층에 광범위하게 싼 값에 책을 보급하는 출판사 펭귄이 1964년에 {전자를 탄 자들}을 포함한 그의 소설들의 페이퍼백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대학에서도 화이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이처럼 저명한 작가에 대한 서평은, 처음 등장한 '신인'에 대해 '한 수 가르치는' 어조와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한 물 갔다'는 어조를 즐겨 담게 된다. 어떤 작가가 '신성화'가 됨과 동시에 그를 폐기될 대상으로 보는 도전자들의 목소리를 서평은 대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를 실은 서평을 통해 한 작가의 문학장 내에서의 위치의 높이와 비중을 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64년에 나온 그의 단편선집 {타버린 자들}(The Burnt Ones)에 대한 단독 서평에서, "실망"을 표명하는 서평자는 작가의 삶에 대한 "혐오감"이 도를 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화이트씨를 선망하는 이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지적, 즉, 화이트의 독자들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해주고 있다. 1966년에 나온 장편 {단단한 만다라}(The Solid Mandala)에 대한 단독 서평에서도, 작가에 대한 인정은 분명히 해주면서도 그의 단점을 지적하고자 시도하는데, 흥미롭게도 다시금 예의 '화이트 = 유별난, 어려운 문체'의 공식이 다시 부활된다. "화이트씨의 문체는 실제로 아마도 감각이 무딘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다. 그의 의미는 힘들여 찾아내야 한다"(TLS 1966, 6월 9일). 첫 인상은 대인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문학장에서도 상당히 결정적인 듯하다.
여러 모로 보나 화이트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인 {전차를 탄 자들}이 나온 지 12년 후인 1973년에 패트릭 화이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은 한편으로는 노벨문학상이 얼마나 새로운 작가들을 신속히 인정하는 데 주저하는지를 보여준다. 1999년에 비로소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G nter Grass)의 예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노벨문학상은 언제나 '너무 늦다'. 그러나 화이트의 경우, 그가 1970년, 1973년에도 계속 비중있는 장편들을 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노벨문학상은 그의 꾸준한 노력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증거로서 TLS는 1970년에 나온 {생체 해부자}(The Vivisector)와 1973년에 나온 {폭풍의 눈}(The Eye of the Storm)을 둘 다 많은 지면을 할해한 단독 서평으로 맞이했다.
물론 평가의 내용은 이전의 서평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화이트 서평'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굳어진 듯한 느낌마저 주는 이러한 글들은 대개 작품의 매력은 인정하면서도 "중심 인물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TLS 1970, 10월 23일)거나, "잘 봐줘야 인간혐오"로 보이는 작가의 태도로 인해 "인간성을 낱낱이 들춰내서 그 밑에 숨어 있는 어떤 악하고 역겨운 벌레를 드러낸다"(TLS 1973, 9월 21일) 불평이 나온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미 위치가 확고한 작가에 대해 흔히 나오는 수사인, '가장 전성기 때 작품보다 못하다'는 표현이 후기로 갈수록 많이 등장한다는 점인데, {폭풍의 눈}을 {보스}와 비교하며, 전자가 후자에서 보여준 "엄청난 동정심과 진정으로 19세기 적인 소설적 장대함 속에 남자와 여자를 창출한" 경지에 못미치는 점을 아쉬워한다.
다소 예외가 되는 글이 노벨문학상 수상 1년 후에 나온 단편집 {커카투}(Cockatoos) 서평이다. 이 글에서 평자는 화이트에 "인간혐오"를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풍자문학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화이트에게는 "그의 인물들의 혐오스런 신체적 기능들, 그 나약함과 속물근성들이 하나의 도전"외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것이 허상 이면에 깔린 실상 그 자체를 끌어아는 보다 깊은 애정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스위프트가 환원적인 반면 화이트는 창조적이다"(TLS 1974, 6월 28일)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이트라는 작가의 문학적 가치, 그 성취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문학장 내에서 하나의 논쟁의 형태를 띠며 전개된다는 측면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적 형태는 해당 작가에 대한 학문적 담론이 가능한 텃밭을 만들어주기 때문인데, 순전히 새로운 논문을 써야 할 필요성에서라도 문학연구자들은 기존의 해석에 대한 반론과 재반론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장' 일반을 매개하는 서평의 세계에서 시작된 '명성'의 창출은 이쯤 되면 이제 이미 나온 작품들에 대해 해석가 재해석 경쟁을 벌이는 '문학장'(literary field) 내부의 특수한 영역으로서 '문학연구의 장'(academic literary field)로 넘어온 셈이며, 대학에 뿌리를 둔 '문학연구의 장'은 독특한 논쟁적 구도 속에서 한 작가를 '정전', 또는 연구대상 목록에 두므로 '신성화'한다.
서평이 매개하는 '문학장'과 학문적 연구논문이나 연구서들이 매개하는 '문학연구의 장'이 겹쳐있는 예를 화이트와 TLS의 관계를 살피면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1976년에 화이트가 낸 {잎사귀의 가장자리}(A Fringe of Leaves)에 대한 신간 서평과 화이트에 대한 연구서인 {만다라의 눈}(The Eye in the Mandala)를 같이 다룬 글이다. 새로운 창작물과 비평저서가 동시에 서평의 대상이 되면서 한 작가의 '문학성'에 대한 의미부여와 그러한 의미부여를 시도한 책에 대한 의미부여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 글에서 서평자는 의미부여에 있어서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만다라의 눈}에 대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썼지만 ... 문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완벽한 답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늘 새로운 책이 등장해서 이전의 문학작품을 폐기해야 하는 것이 '문학장'의 운영 원리라면, 문학적 '문제'가 바로 완벽한 정답으로 끝나지 않는 '문제'로 남아 한 작품이 계속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문학연구의 장'이 운영되는 핵심적 원리이다. 이처럼 화이트가 '문학장'에서 '문학연구의 장'으로 넘어가는 또 다른 예는 위에서 화이트 연구자이자 리즈 대학 영연방 문학 주임교수로 소개한 윌리엄 월시(William Walsh)가 화이트의 1979년 신작 {트위본 사건}(The Twyborn Affair)에 대해 신간 서평을 한 글이다. 이처럼 대학 교수가 서평자로 나서게 된 배경 중 하나는 1974년 이후 TLS가 18세기부터 내려온 익명서평의 전통을 버리고 실명 서평체제로 전환한 영향이 포함된다.
이렇게 되면 잡지 편집자로서는 손쉽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평자를 통해 서평의 질을 선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실명으로 서평을 하는 교수는 교수다운 말투로 배려에 응답한다. 예를 들면, "화이트는 ... 콜르리지(S. T. Coleridge)가 자아에서 자아의 이미지로 나아가려는 충동과 밖에 있는 그 어떤 것에게도 자아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두 가지 충동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는 식의 '학문적인' 접근이 눈에 띤다. 또한 화이트가 처음 서평의 대상이 될 때 하나의 가치평가의 잣대로 등장한 로렌스나 스타인벡 같은 저명한 이름들이 이제는 시대를 뛰어넘어, 특히 영국문학 정전 내부의 작가들, 스위프트나 콜르리지가 거론되면서 화이트에 대한 의미부여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화이트는 아직 죽지 않은 나이에 이미 '정전'에 포함된 것이며 정전화 과정은 확고히 마무리 된 셈이다.
바로 이러한 '문학연구의 장' 내부에서 '탈식민지 문학론'과 같은 논쟁적 담론들이 만들어진다. 마치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파트로클로스(Patroclus)의 시체를 두고 그리스와 트로이 군대가 서로 싸우듯이, 아카데미 안에서 문학논쟁은 정전화된 작가들, 특히 죽은 작가들을 두고 의미부여 싸움을 벌인다. 그러한 논쟁의 힘이 약화될 때 문학연구의 장 자체가 약화되고 그러한 논쟁의 열기가 뜨거울 때 문학연구의 장은 활성화된다. 연구와 탐구는 항상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는 것인데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 연구의 장은 죽은 연구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 담론이 TLS같은 잡지나 리즈 대학의 '영연방 문학 연구' 같은 중심부의 '영국화'에 대항해서 화이트를 반중심적, 반제국적 진영으로 끌고가는 모습은 화이트가 죽은 후인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출신 연구자인 마크 윌리엄스(Mark Williams)가 1993년에 쓴 화이트 연구서에서 화이트는 이제 "탈식민지적 상황의 총체적 복잡성을 나이폴(V. S. Naipaul)의 유럽중심주의나 응구기(Ngugi Wa Thiongo)의 인종적 민족주의 양자를 피하면서 보여준" 작가이다.
그의 작가적 관심의 핵심에는 호주같은 식민지 사회의 "문화유산의 복잡성"(Williams 166-67) 문제가 놓여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화이트는 '탈식민지 문학론'의 정전 속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생산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개입한 중심부 서평지 TLS의 '공로'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서평의 전통이야말로 화이트가 물려받은 중심부 "문화유산의 복잡성"의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식민지 문학론에서 중심적으로 부각되는 작품은 다시금 {보스}로, 이 역사소설이 재현하는 호주의 모습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것이 탈식민지 문학론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예컨대 카르비해 지역의 탈식민지 문학론자의 하나인 윌슨 해리스(Wilson Harris)는 {보스}를 "인물과 사건의 표층 구조를 지배하는 제국주의를 와해시키는" 요소를 작품 안에 갖고 있는 소설에 포함시킨다. 또한 윌리엄스도 "{보스}는 호주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호주, 세계, 또는 문학 텍스트를 결정적인 해석에 이를 가능성에 대한 부인"(Williams 71)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탈식민지 문학론(postcolonialism)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구조주의(poststru cturalism) 등 여타의 '포스트' 문학론들과 마찬가지로 결정적 해석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며 그러한 불가능성이 열어주는 영원한 해석과 의미부여 행위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하지만 해석의 영원성은 이미 칸트가 미적판단의 불가피한 주관성을 강조했을 때부터 보장된 것이었다. 정전화란 이러한 의미부여 행위의 영원한 상대성, 미완결성 속에 던져졌을 때 완결되는 것이라면, 그 완결은 물론 미완결의 상태이다. 정전의 문제는 늘 '정전화'라는 과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이트의 '명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간략히 살펴본 후 남는 것은 성공적으로 '정전화'된 작가로서 화이트에 대한 보다 긴, 보다 광범위한 정전화 '과정'의 얼마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인식이다. "세계, 또는 문학 텍스트"에 대해 그 어떤 결정적인 해석도 불가능하듯이 정전화의 과정에 대한 그 어떤 결정적인 해석도 불가능한 것이다.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 매번 목요 카페를 위해 이 많은 자료 준비 하시느라고 너무너무 수고가 많으세요 열심히 배워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