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람이 수양대군의 좌장 역할을 했다면 한명회는 '장량'격이었다. 말하자면 수양대군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였다.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141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을 여윈 탓으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서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된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거사 국면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그는 1453년 계유정난 때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의 무사들로 하여금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 바 '생살부'를 작성해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 후 1457년에 이조판서,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길, 강원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제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 손에 거머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딸들을 2대에 걸쳐 왕후로 삼게 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466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함길도(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때 그는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한다. 이유는 그들이 함길도 절제사 강효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시애의 계략이었다. 이시애는 조정에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 '한명회, 신숙주 등이 강효문과 짜고 반란을 도모하려 하기에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집권기의 가장 큰 변란이었다. 즉위 이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일단 신숙주와 한명회를 옥에 가두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조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신하는 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하였다. 그리고 1469년(예종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공신들과 함께 고관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세조는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으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획득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 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의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 연산군이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이 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됐다. 하여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을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