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업보를 어찌 감당하려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몸이다.
42km 이상 걸어온 77늙은이가 단지 샤워를 했을 뿐인데 피로감은 커녕 포만감 같은
느낌으로 뿌듯하니 어찌 이해되겠는가.
식당을 겸한 알베르게지만 마을을 돌아보러 나갔다가 돼지고기를 인심 후하게 넣어
주는 3e(euro)짜리 보카디오(sandwich)로 저녁식사를 했다.
아침은 고에스가 만들어준 토스트였고 점심은 카스트로헤리스 초입의 교회 맞은편
만사노(Bar)에서 카스텔라 한 조각으로 때웠으므로 모처럼 세끼 다 먹은 셈이다.
그랬어도 방값 6e를 포함해 12.75e가 하루의 총 지출액이다.
생 장 피드포르에서 여기까지 350km이상 오는 14일 동안의 경비가 200e도 채 들지
않았으니 1km에 1e가 최소 경비라는 통설도 이미 깨졌다.
마을에 어떤 콘시에르토 소리다리오(Concierto Solidario/Joint Concert)가 있는가.
회관(?)스테이지에서 밴드가 튜닝(tuning)하느라 쏟아내는 괴성을 쫓아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었으니까.(전체 주민이 200명도 못되는데 얼마나 모이겠는가)
마을 주민들의 축제가 아니고 유료 행사다.
이미 사라졌지만 시골의 마을들을 찾아다니는 변사 딸린 무성영화, 서커스(circus),
신파 등을 얼마쯤의 곡식 또는 푼돈 내고 보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여기에서 내가 놀란 것은 이 어설픈 콘서트의 티켓값이 10e(16.000원)나 된다는 것.
1일 평균 15e미만이 지출되고 있는 지금 내게 10e는 거금인데.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나 10e짜리 티켓에 놀란 가슴이 잠을 몰아내버렸는가.
2010년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9.890인데 비해 스페인은 $31.650으로 우리
보다 훨씬 높으며 광대한 땅에 자원이 풍부한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유럽연합 국가중 실업률이 최악이며 연합국가들의 국가 부채 폭등으로 인한
그리스와 이태리 사태가 도미노 현상으로 파급된다면 스페인이 어찌 안전하겠는가.
카미노에서도 가장 흔히 보게 되는 것은 건물과 토지에 붙은 'SE VENDE'(매물)다.
이처럼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매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5e,10e를 하찮게 취급하며 시에스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르에 모여들어
심야까지 흥청댄 업보를 어찌 감당하려고.
하긴, 피안의 일, 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두고 남의 눈의 티를 걱정하는가.
극심한 양극화에 고가품일 수록 잘 팔리며 사치가 극에 달해 있는 우리나라 아닌가.
참담한 IMF사태를 겪었음에도 어느새 까마득히 망각하고 있는 대한민국인데.
카미노에서도 '투 매니 피플', '코레아 무초 모니' 로 회자될 만큼 많이 몰려 와서 잘
먹고 잘 쓰는 특등 소비자 한국인이 받을 업보는 어찌 하고.
적대적 대립상태지만 한 민족인데도 아사직전인 상대편을 두고 쌀이 남아돈다 해서
쌀을 사료로 쓸 것을 고려중이라고 약올리는 정부가 받을 업보는 또 어찌 하고.
상대편 길들이기와 구제, 어느 것이 우선인가.
운하, 스페인의 지혜
늙은이가 망령이 드는 중인가.
걷는 일도 벅차며 피로를 풀어야 하는 급선무를 두고 뜬금 없는 상념으로 마음 아파
하며 잠을 몰아내고 있다니.
그러나, 놀랍게도 잠은 쫓겨날 때 피로를 대동했다가 돌아올 때는 홀로였는가.
늦잠이지만 한잠 자고난 아침은 다시 말짱했다.
그럼에도 카미노에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여유롭게 늑장을 부렸다.
남보다 가장 늦은 아침 8시 반에 나섰으니까.
대간과 정맥, 옛 10대로 등 장거리 장기 여정에서 늘 초반부를 지나면 가속이 붙고
한결 여유로워지듯이 카미노에서도 예외 없이 그러는 중이다.
마을을 빠져나온 카미노는 포장도로에서 널따란 비포장 직선로로 변한다.
곧, 피수에르가 운하(Canal del Pisuerga)를 건넌다.
18c 후반에 팠다는 집약 영농용 운하다.
주변에 운하가 없는 우리에게 운하의 개념은 수에즈와 파나마 운하처럼 거대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나는 한남정맥 종주중 공사가 중단된 경인운하의 현장을 목도하고 수정했지만.
경인운하는 진주 진양호의 인공강이 낙남정맥을 두동강 낸 것처럼 한남정맥을 잘라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수로다.
MB정부가 추진하려다 저항에 부딪힌 소위 경부운하로 인해 운하에 대한 상식이 업
그레이드 되었지만 소규모 수로도 지형에 따라서는 운하가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산을 개간해 조성한 드넓은 들판의 영농에는 운하가 절대적 요건이다.
인력이 절대부족인 스페인의 농촌이 부유한 곡창지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현명하게도 영농의 기계화 보다 더 중요한 다량의 운하를 개설한 덕이라 하겠다.
이미 언급했듯이 농로가 광폭이며 굴곡이 완만한 것은 기계화의 필수 요건이다.
카미노가 넓어진 이유이며 이게 싫다면 카미노는 어디론가 이사가야 한다.
이같은 이유로 해발 700m대의 넓은 고원 농로 5km이상을 걸으면 130여명의 주민이
사는 농촌마을의 전형 보아디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다.
한 때 인구 2천여명의 번성한 마을이었다지만 영화는 간 데 없고 산만한 인상뿐이다.
다만, 교회 앞(광장)에 선 '로요 후리스딕시오날'(Rollo Jurisdiccional/재판의 기둥)
이 눈을 끌어간다.
중세 사법권을 상징하는, 큰 가리비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돌기둥이다.
카미노와 백두대간
밀밭 한 가운데로 난 직선 농로를 걷다가 한 중년과 교행하게 되었다.
가리비, 표주박 등 카미노 심벌과 포르투갈 국기를 달고 야영용 장비를 실은 리어 카
(rea car)를 끌고 오는 그는 포르투갈인 조셉.
이 사람은 묻는 방식이 좀 달랐다.
비록 재파니스를 앞세웠지만 코레아를 동시에 말했으니까.
코레아노라니까 코레아라 더 반갑단다.(아첨인가?)
코레아를 아느냐 물었더니 잘 안다고.
축구가 파보리토(favorito/favorite)라는 그는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알게 되었단다.
그는, 그 때 포르투갈이 한국에 패해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월드컵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백두대간 종주중이었으므로 경기를 본 적이 없다.
그에게서 듣기 전에는 한국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있었는지 조차 몰랐다.
포르투갈 뿐 아니라 월드컵 자체에 관심을 기질 수 없었다.
대간에 들어서면 일체의 세상사를 잊고 산 길에 심취해버리는데 월드컵이라고 해서
관심이 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카미노가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내겐 대간과 9정맥에는 비할 수 없다.
계곡과 강을 신묘하게 비켜가며(단 한 번도 건너가지 않으며) 한도끝도 없이 산에서
산으로 이어가는 황홀한 능선길을 카미노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기독교 사도 야고보의 길이라는 카미노와 우리 국토의 척추이며 민족의 대서사시가
점철된 백두대간의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 의식이 대립 또는 충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 한국인의 카미노 집중현상을 종교적 맹목 또는 부화뇌동적 경도현상이라고
보는 나이 든 서양인들을 대할 때마다 매우 당혹스러웠다.
이같은 시각을 불식시킬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카미노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에게 성인103인을 배출한 한국의 무수한 성지 순례길과
우리 조상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10대 옛길, 백두대간 등은 무엇일까.
내 수염이 멋있다기에 몇살쯤 되어 보이냐 했더니 60쯤?
77이라니까 기겁하는 이 사람, 꽤 나이들어 보이지만 자기는 겨우 47세라는 조셉을
돌려 세우고 얼마쯤 갔을까.
또 운하다.(Canal de Castilla)
자료에 의하면 1753~1859년에 건설된 카스티야 운하는 단절되는 곳이 있지만 장장
207km의 수로로 되어 있다.
티에라 데 캄포스(Tierra de Campos)에서 북부와 멀리 대서양안까지 곡물을 수송
하다가 1959년 이후에는 관개와 카누 루트 전용으로 사용되고 있단다.
심약한 늙은이
키 크고 다양한 나무가 빽빽한 수로(일부 구간 제외)를 따라가는 한가로운 카미노는
프로미스타 들머리의 어지러운 수문(Conjunto de Esclusas)에서 갈라선다.
수로를 카미노 따라 만든 것인가 방랑하던 카미노가 이 둑길에 정착한 것인가.
철길 밑을 지나면 팔렌시아주의 191개 마을 중 하나인 해발 783m, 인구 1000여명의
프로미스타(Fromista) 중심가다.
프로미스타는 곡물(穀物)을 뜻하는 라틴어 프루멘툼(frumentum)에서 유래했단다.
당시, 로마제국에 다량의 밀을 제공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라니 친로마 부역의 땅?
습관대로 번잡한 광장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들렀다.
카미노와 무관한 관광객이 몰리는 관광마을 답게 방문한 중년 여인들을 상대하느라
바쁘던 두 여직원중 하나가 영어로 나를 맞았다.
어르신(Sir)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잘 훈련된 직원은 묻는 것 부터 예의스럽다.
늙은이라 힘들 거라 생각되었는가.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까지 가려 한다는 말에 놀라며 며칠째냐고 물어왔다.
생 장에서 14일째라니까 기겁한 그녀는 옆 직원도 함께 놀라주기를 바라는가.
'세텐타 이 시에테 아뇨스'(77세)와'카토르세 디아스'(14일)를 강조하며 국립기념물
성 마르틴 교회(Iglesia de San Martin)를 꼭 보고 가라 권했지만 그냥 떠났다.
이미 언급한 대로 교회를 비롯해 건물에는 별무 관심인 늙은이니까.
프로미스타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20km쯤은 차로(지방도로)와 나란히 간다.
다행히 지극히 짧은 마을 통과지역 외에는 차량의 진입이 절대 불가능한 인도다.
카미노는 프로미스타에서 N-620우회도로와 철판 순례자상이 서있는 A-67고속도로
육교를 건넌 후 널따란 세석(細石) 길이다.
인구150여명의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on de Campos) 마을로 가려면 도로
를 떠나 우측의 가로수 길을 택해야 한다.
마을을 지나 우시에사 강(rio Ucieza)다리 앞에서는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에 이르는
2개의 카미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다리를 건너 도로와 나란히 가는 레벵가 데 캄포스 길과 약간 돌지만 우시에사 강과
짝하여 농로를 걸어 비요비에코를 거쳐가는 비교 우위의 길 중 하나를.
나는 레벵가 데 캄포스(Revenga de Campos) 마을 길을 택했다.
(두번째 때는 후자를 택했다)
다음 마을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를 가볍게 지났으나
소나무 그늘이 있는 마을 끝의 널따란 쉼터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승용차 여행중인 것으로 보이는 한 중년 부부가 어린 딸과 함께 식사중인 테이블의
오붓한 정경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 그림은 돌연 옛 일을 불러와 한 참 상념에 잠기게 할 만큼 행복해 보였다.
식사를 마친 그들이 떠날 때까지 응시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괴이쩍은 늙은이다.
괴이쩍다기 보다 매우 심약한 늙은이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은 단지 로밍 불능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길보(good news)는 훗날 들어도 무방하지만 불길한 소식이라면 어찌하겠는가.
당장 달려가거나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은가.
집을 떠나 장기간 산을 누비고 다니는 국내에서도 휴대폰은 S.O.S. 대비용이었을 뿐
집에 전화하는 일이 없는 늙은이다.
차라리 모르느니만 못하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신약 히브리서 11:1)고 믿음으로서 억제하는 것 뿐이다.
홍매화, 접시꽃 몇 송이에도 마당에 피어 있을 집 생각이 나는데 하물며 어느 정겨운
가족 모습에 2만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일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흔히 말하는 철인이 아니고 지극히 심약한 늙은이일 뿐이다.
옛 일이 된 그 때는 산업사회로 진입중인 우리나라의 도농이 모두 바빴다.
역마살을 타고난 나는 승용차를 몰고 가족나들이를 자주 했다.
그늘 있는 쉼터가 이동 부엌과 식탁이 될 때마다 논밭에서 땀을 쏟고 있는 분들에게
늘 송구스러워 결국 자제했던 옛 일이다.
지방 산을 누비고 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조신했지만 도농간의 등산열기가 역전
되듯 한 이제는 그같은 부담을 가질 필요 없게 되었지만.
쉼터를 떠날 때 베가의 딴 알베르게에서 묵었다는 독일 중년남이 동행자가 되었으나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lcazar de Sirga)에서 접는 그와 작별했다.
실은, 나도 이 곳에 머물려고 아침에 늑장을 부렸던 것인데 다른 구간에 비해 평탄한
길이긴 해도 의외로 빠르게 진행됨으로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까지 가기로 한 것.
또 30km를 훨씬 넘기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인력(引力)이 대단했다.
백두대간을 탈 때도 어떤 인력을 느끼면 가던 길을 멈추고 (끌려)가서 살펴보았듯이
마을에 들려 대강이나마 둘러보았다.
원래의 마을 이름은 예선(曳船)길(운하,강따라 배를 끌고가는)을 뜻하는 비야시르가
(Villasirga/towpath) 였다는 인구 200여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13c에 템플기사단이
세웠다는 웅장한 교회(Iglesia de Santa Maria la Blanca)가 있다.
국립기념물로 지정되었을 만큼 유명하다 하여 내부를 보려했으나 돈을 내고(순례자
여권 소지자1e, 일반은1.5e) 볼 정도로 내게 매력적이지 못하여 돌아섰다.
중세의 순례자들은 꼭 이 교회에 들러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했다는데.
엘 사비오(el Sabio/the Wise)로 불린 카스티야 이 레온 왕 알폰소(Alfonso)10세의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칸티가스(cantigas/songs)도 널리 회자되고 있는데.
(두번째 길에는 이곳 알베르게에서 묵으며 아쉬움을 풀게 되어 다행)
지리한 사이비 카미노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일단 끝난다.
중세 초까지 산타 마리아 데 카리온(Santa Maria de Carrion)이었던 이름이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로 바뀌었다는 마을이다.
작위가 백작(Condes)이었던 이 마을 제후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개명했다는 것.
한 때, 인구가 1만명을 상회했으며 14개의 순례자병원이 있을 만큼 옛 순례자들에게
중요했던 마을이 지금은 4분의 1도 못되게 줄어들었으나 명성만은 여전하단다.
독립전쟁 때인 1809년에 파괴되었으나 근래 거의 복원된 산티아고 교회(Iglesia de
Santiago)를 비롯해 산타 마리아 델 카미노 교회, 산타 클라라 수도원 등. <계 속>
자그마하나 천년의 역사를 가진 이테로 데 라 베가의 성 페테르 교구교회(위1)와
관객의 입장을 기다리는 조인트 콘서트(Concierto Solidario/Joint Concert/위2)
베가를 떠난 카미노는 광대한 농로가 되어(아래1) 피수에르가 운하를 건넌 후(아래2.3)
보아디야 델 카미노 마을(아래4~8)로 들어간다.
2002월드컵 축구를 통해서 한국을 알게 되었다는 포르투갈인 조셉(위)은 카미노 프랑세스의 역주행자다.
앙증스런 리어 카에는 자기네 국기와 카미노의 심벌인 가리비, 표주박이 걸려있고 야영장비 일습이 실려있다.
카미노는 프로미스타 입구까지 카스티야 운하 둑길이다(아래)
카스티야 운하와 갈라선 카미노는 철도 굴다리를 통과해(위1) 중심가의 관광안내소(위2)를 거친다.
N-620 도로와 A-67 고속도로를 건넌 후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한하고 20여km를 P-980 지방도로와
나란히 간다.(아래)
카미노는 지방도로를 잠시 떠나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마을을 거친 후 우시에사 강 앞에서(위1.2)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마을까지 둘로 나뉜다.
다시 지방도로와 동행하는 카미노는 레벵가 데 캄포스 마을과 공동묘지(아래1~4)를 거쳐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 마을(5~7)을 통과한다.
비야르멘테로 데 캄포스 쉼터(위)와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마을(아래)
(위 1~3은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교회와 입장료판과 교회 내부)
P-980지방도로가 끝나고(위1~3)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의 산타 클라라 수도원(아래1.2), 산타 마리아 교회(3),
산티아고 교회(아래4)와 산 소일로 수도원(아래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