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려면 깨끗이 죽여라
증언자 : 김병준(남)
생년월일 : 1959. 11. 6(당시 나이 21세)
직 업 : 공군 방위
조사일시 : 1988. 12
나는 1959년 11월 6일생으로 나주군 노안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서 논 4마지기 정도의 농사를 손수 지으셨으므로 집안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송정리에 있는 공업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부모님께서 논은 모두 처분해야만 하셨다.
결국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난 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광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을 등지다시피 하여 광주로 올라온 우리는 광주시 임동에 사글셋방을 얻어 놓고서 몇 달간을 'KM사'(말의 장구를 만듦-현재 삼익맨션 앞쪽에 있음)에서 중학교를 중퇴한 동생과 함께 일을 했다. 그러나 'KM사'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성남으로 올라갔다. 성남에서는 '에스콰이어 제화공장'에 취직하고 상대원동에 자취방을 얻어서 생활했다. 그렇지만 제화공 생활도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 두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일자리를 찾아다니다가 국제그룹 산하의 계열회사이던 '국제종합기계'(경운기 등 농기계 제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마 공업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6개월 동안 일을 한 뒤 그만두고, 건축업자들을 따라다니며 조경일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에 내가 하는 일은 조경석의 배치라든지 조경수를 손질하는 따위였다. 조경일은 적성에는 맞았지만 2년 동안 일을 해도 실상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좀더 많이 벌 수 있을까 하여 목수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워 목수생활을 2년 가까이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생활 역시 겨우 내 몸 하나 건사할 수 있었을 뿐 집안을 도울만한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성남에서 생활하다가 1980년 2월 26일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신병훈련을 마치고 그해 5월경에는 광주에 있는 공군 제3252부대 중대본부에서 부대시설 수리 등을 하며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방위병이었고, 계급은이등병이었다. 5월 18일을 전후해서는 휴가중이었으므로 집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나의 집은 서림국민학교 정문 바로 옆에 있었다. 5월 19일(?) 집에 있는데,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더니 시위대들이 무등경기장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무슨 일인지 묻자,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내려오다가 무등경기장에 붙잡혀 있어서 구출하러 간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도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틈에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인파에 휩쓸려 무등경기장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무등경기장 앞에서는 붙잡힌 학생 대신 경남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 2대가 불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한동안 지켜보다가 나는 일부 시민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림국민학교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호로(덮개)'를 안 씌운 8톤 트럭이 맥주병을 가득 실은 채 그 맥주 박스 위에 부상당한 사람인지 시체인지 분간할 수 없는 2명을 싣고 지나갔다. 그 차는 임동에 있는 삼일병원 앞에서 멈춘 뒤 "문을 열라"고 셔터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막 신축개업했던 삼일병원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화가 난 시민들은 돌멩이와 맥주병 등으로 유리창을 깨부셨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가까운 집으로 들어와버렸다.
저녁 7시경에 집을 나서 옆방에 살던 황강주 씨(당시 같은 부대 공군 방위병)와 두암동으로 군화를 구하러 갔다. 그런데 통금시간이 지나 차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임동행'이라고 차에 탄 시민들이 외치고 있는 타이탄 트럭 뒤켠에 올라 타게 되었다. 우리가 탄 차가 전남대 후문 쪽에 이르렀을 때, 단독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의 제지를 받고 차가 멈췄다. 그 순간 뒤쪽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나고 차에는 나와 황강주 씨, 그리고 낯모르는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공수대원들에게 맞아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4명이 차에서 뛰어내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수부대원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뒤쫓아와 결국 우리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전남대 후문 주변에는 신축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는데 담을 넘어 도망갈 수도 없는 곳에 갇히게 되고 만 것이었다. 뒤쫓아왔던 공수부대원들이 골목 어귀에서 "너희들은 살려 보내줄 테니 전부 나오라"고 외쳤다. 나는 담벽에 기대어 숨어 있다가 아무 죄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 제일 먼저 골목 어귀로 나갔다. 그리고 숨어 있던 세 사람은 내가 손짓으로 불러내어 결국 4명 모두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붙잡힌 우리들은 무차별로 곤봉세례를 받고 손을 뒤로 묶인 채 4명이 굴비처럼 엮어져 전남대의 어느 강의실로 연행되어 갔다.
잡혀가자마자 4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양쪽에서 군화발로 내지르기 시작하는데 넘어지지도 않고 맞았고, 소총 개머리판, 곤봉으로 무지하게 맞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공수대원들에게 나는 방위병인데 군화를 구하러 나왔다가 잡혔다고 했더니, 집에 보내준다고 '열외'를 시켜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열외되어 있는지 1시간 만에 공수부대원들이 근무교대되었는데, "너는 뭐야 새끼야!" 하면서 무지하게 구타를 했다. 그리고 잡혀들어갈 때 숫돌에 대검을 갈고 있었는데, 그 대검 으로 어떤 사람의 머리를 그대로 찔러버렸다. 이어서 또 다른 한 사람의 머리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는데, 다행스럽게 그 사람이 피해 머리카락이 잘렸다. 소름이 끼쳤다. 대략 3일간을 전대에 붙잡혀 있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곤봉, 소총 등으로 온몸을 구타당하며 죽음의 공포 속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전대에 임시 수용되어 매일같이 얻어터지다가 21일 오후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이송될 때는 팔을 뒤로 묶여 탑차에 실렸다. 그런데 차 속으로 어떻게 최루탄을 까넣었는지 차에 실린 전원이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되어 살갗이 벗겨지도록(지금도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팔목의 끈을 풀어낸 뒤 차의 문 유리창을 깼다. 그때 갑자기 대검이 깨진 유리창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움직일 틈조차 없는 좁은 공간 안에서도 우리들은 대검에 찔리지 않기 위 해 모두 피했다.
그렇게 교도소로 이송된 후 뒷문을 확 열어젖히니 뒤쪽에 '쌓여 있던' 사람들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다행히 안쪽에 있어서 걸어내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공수대원이 곤봉으로 내리쳐 잠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고 있던 청바지와 트레이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완전히 땀으로 목욕을 한 것이다.
그러고는 바로 원산폭격을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죽이려면 깨끗이 죽여라"고 대들자 공수부대원들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난타하여 정말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곤봉이 날아와 나는 또 한 번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두 사람 몫으로 건빵 한 봉지씩을 나누어주고 수통 뚜껑에 물 한 모금씩을 떨어뜨려주었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겨우 그 물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건빵을 입에 넣고 너무 많이 맞아서 움직여지지 않는 턱을 손으로 밀면서 건빵을 몇 개 집어먹었다. 3일 동안 굶었기 때문에 안 죽으려고 겨우겨우 먹었다.
몇 시간 후 날이 어두어졌을 때 어느 창고로 옮겨졌다. 허리를 펴고 눈을 똑바로 앞만을 응시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만약 눈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곤봉 세례를 당했다. 그렇게 꼬박 날을 새운 뒤 다음날부턴가 밥이 나왔다. 교도소 죄수들이 먹는 '가다밥'이라고 했는데 군대에서 버리는 짠밥보다 못했다. 반찬은 쫑각까지 붙어 있는 마늘 한 개가 전부였지만 그것도 밥이라고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마늘 장아찌를 반찬으로 주었을 때는 장아찌 한 조각으로 밥을 먹었다.
24-25일경(?)에는 교도소에서 수사관들(그중 한 사람은 최근 추가접수 기간중에 추가접수 서류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던 중 공군 제3252부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에게 조사를 받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전남대에서는 성명, 소속 등을 확인하는 신원파악만을 하였고, 교도소에서 본격적으로 조사를 받았던 것 같다.
조사장소는 어느 건물의 2층(?)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이동할 때 공수부대원들에게 신나게 두들겨맞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사관들이 묻는 말에 무조건 '예' 하라"는 것이었다. 덜 맞기 위해서 무조건 '예'라고 대답했고 B급으로 무거운 판정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교도소에서 가장 늦게 석방되는 사람들 속에 끼게 되었다. 언젠가 공수부대원이 일반군인으로 대치되었다.
그런데 대치된 일반군인들은 더욱 잔인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허리를 꼿꼿이 편 상태로 무릎을 꿇고 앉게 하여 눈동자를 못 움직이게 하였는데, 내가 눈동자를 좀 움직였다고 내 눈을 담배불로 지졌다. 그래서 눈을 데어 3일 동안 고생을 했다. 어쩌면 당시 내가 방위병이었기 때문에, 처음 연행자 중 특별관리 7명에 포함되어 있었던 까닭으로 그들의 목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교도소 생활 중 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것도 나는 보지 못했는데, 나로서는 '어떻게 하면 덜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최대한 뒤에 숨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내가 맞고 있는 시간이 다른 재소자들에게는 휴식시간이었다.
또한 저녁에 잠잘 때가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데 환하게 불을 켜놓은 상태에서 "눈을 감고 양쪽 엄지발가락을 붙이고 자라"고 했다. 그러나 두들겨맞은 사람들이 양쪽 엄지발가락을 붙이고 잘 수가 없었고, 무의식중에 신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취침중에 일반군인들에게 붙들려나가 곤봉으로 수없이 맞았다. 그런 식으로 두세 명이 붙들려나가 맞으면 날이 새곤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취침시간에 잠을 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발가락을 붙이고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고, 낮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가벼운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일부 5월 말경에 나갔고, 우리들도 6월 중순경에 상무대로 이송되었다. 상무대에서는 교도소로부터 이송되어 온 사람들과 상무대로 붙잡혀온 사람들이 함께 교회에서 생활했다.
상무대 군인들도 '군기'를 잡는다고 벌을 주기는 했지만, 교도소보다는 더 나았다. 상무대에서 언젠가 군의관들이 와서 "아픈 사람들은 의무대로 보내준다"고 해 여러 명이 몰려나갔는데 전부를 구타하면서 "아직도 아프나"며 윽발질러대자 아무도 아프다는 시늉조차 못 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에도 어떻게 연줄이 닿은 사람들은 의무대 생활을 하도록 편의를 봐주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어떤 대학생이었다. 그 대학생은 애인(여대생)과 함께 교도소로 잡혀왔다. 그들은 전남대 뒷산에서 데이트하다가 잡혀왔다고 사람들이 말했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고, 아무튼 학 생의 형이 상무대에 근무하고 있었다(송소위라는 사람). 그래서 그는 교도소에서 형을 면회하기도 했고, 상무대에서도 의무대에 입원해 있었다.
그렇게 교도소와 상무대를 2개월여 전전하다가 7월 3일에 황강주 씨와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당시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셨는데 하루 종일 교육을 받고 각서를 써주셨다고 했다. 석방되기 전에 나도 각서를 썼는데, "사회에선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석방된 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해 다녔고, 그렇게 두들겨맞았지만 8년 동안 병원에도 한 번 가보지 못했다. 대신 지금껏 한약과 단방약(뱀술 따위) 등 을 먹고 침을 맞으면서 자가치료만을 해왔다.
사실 그곳에서 안 당해 본 사람들은 몰라도 마지막까지 당하고 나온 사람들은 다음에 다시 또 끌려가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당시 신분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석방된 다음날 부대에 출근했다. 그렇지만 이미 '군무이탈'로 불구속기소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유로 '군무이탈'을 한 사람은 영창에 보냈지만, 나의 경우에는 영창에 가지 않았다. 오히려 부대의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이 잘 대해 줬다. 그들이 나에게 사주(뱀술) 등을 많이 권했고, 실제로 뱀을 잡아다주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군대생활을 하다가 제대를 하여 계속 광주 임동 집에서 3, 4년간을 거의 일을 못 하고 지냈다.
내가 그렇게 앓아 누워 있는 동안 가정형편이 어려운 우리 집에서 어머니께서 막노동을 하셨고, 동생이 돈을 벌어다 내 약값을 대어야만 했다. 또한 주변 친척들(주로 이모부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1985년부터 몸을 조금 움직일 만하여 현재 하고 있는 수도수리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힘든 일은 내가 하지 못하고 주로 동생이 도맡아 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그 고통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부상자 추가접수 기간에 고민을 몇 달 동안 하다가, 이렇게 시들시들 죽으나 다시 잡혀가 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각오하면서 추가신청을 했다. 그러나 나의 신분이 군인이었기 때문에 보상은커녕 여지껏 부상 정도를 확인하라는 신체검사 통지서조차 받지 못하고 이렇게 집안에 처박혀 있다. (조사.정리 박종신)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