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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12.가을호 특집
송수권 시인의 시 세계
①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1900~2000년까지) 송수권(宋秀權) 편에서
(2007. 11 문학과 지성사)
송수권은 한국시의 전통적 서정을 향토성 짙은 남도방언과 가락으로 조형화 한 시인이다. 그는 김소월 이후의 한의 정서를 담은 전통적 서정시를 계승했으나 진솔한 삶의 숨결과 토속어의 가락을 서정적이며 생동감 있는 언어로 변화시켜낸다. 또한 민중적 역사의식을 현재 시점에서 재현해냄으로써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담아내었다.
그의 시는 전통적 한의 정서를 기저로 하면서도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 생동감을 보여준다. 첫 시집 『山門에 기대어』에서 드러나듯 한의 정서는 역동적인 이미지들과 결합하여 정서적 변화를 꾀하면서 새로운 감성의 동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송수권 시의 독창적인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독특한 울림의 이미지에 힘입어 송수권 시에 깔려 있는 한은 감상적 분출을 벗어나 새로운 창조력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인다. 전통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다양한 심상과 조응하는 시적 가락은 송수권 시의 독특한 울림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송수권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향토적인 서정성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주변부에서 잊혀져간 삶의 한 자락을 복원하는 일과 맥락이 닿는다. 고향에 대한에 추억과 그리움은 그의 초기 시부터 이어진 것으로 고향에 대한 복원을 통해 향토적 정감을 불러일으키고 현재적 자아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 고향은 전통 사회의 풍물을 지니고 있는 공간인 동시에 민중적 생명력의 강인함을 표출하는 공간이다. 고향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옛 것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져 설화나 전설을 통해 잊혀진 삶의 질감을 재구성하고 현재의 부재와 상실에 관하여 성찰하도록 한다.
송수권 시를 특징짓는 요소 중의 하나인 토속어를 활용한 시어는 향토성을 짙게 드러내는 동시에 삶의 원초성을 환기한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질감을 살린 언어구사와 삶의 원형질을 살려낸 방언을 통해 토속적인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형상화 한다는 점에서 송수권의 시정신이 생명의 원초성과 민중적인 생명력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승」은 여성으로 상징되는 삶의 그늘과 대면한 추억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방 안의 소년과 ‘먼 절간’의 여승과의 조우는 소년이 간직한 먼 곳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며 연민이 서려있는 그 생경한 세계와 마주친 기억은 시 쓰기의 바탕으로 자리 잡는다.
「山門에 기대어」가 담고 있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언어적 조형미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시의 핵심적 심상인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낱’은 과거 기억과 어우러진 현재적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재생과 부활이라는 다채로운 이미지로 변주되면서 역동적이고 성찰적인 상상력을 드러낸다.
「지리산 뻐꾹새」는 ‘울음’이 애달픈 소리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서적 연쇄를 일으키고 서정적 힘의 원천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울음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삶의 밑바닥에 깔린 공감대로 확산되어 역동성을 획득하면서 슬픔의 승화를 보여준다.
「대숲 바람소리」는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 서서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기억을 담고 있다. 대숲의 바람소리는 ‘한 사발’의 냉수와도 같은 청정함 뿐 아니라 삶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과 설움 그리고 민중적인 역동성과 역사의 비극적 경험(동학혁명의 발상지인 현장)을 담고 있음을 다양한 감각적 심상의 변주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② 피리와 죽창으로 둔갑하는 개땅쇠 대나무
《시인 박물관》(현암사 발행, 2005) 글
대숲을 휘둘러 밥 짓는 연기, 땅을 기며 마을로 간다. 자진모리, 중중모리, 휘모리, 굿거리장단, 해질 무렵 땅 울음소리, 하늘을 메다치는 징소리, 낙지발 몸에 감기듯 살내 물씬 풍기는 전라도 뻘밭의 개땅쇠 시인, 시나위 가락으로 춤을 춘다. 시와 노래가 몸으로 어우러져 삶과 죽음의 경계를 푼다.
배달민족의 원형정서, 땅에서 태어나서 땅으로 돌아가리니. 겨레말을 좇아 전라도 구석구석, 수리성 그늘을 찾아 떠도는 시인. 살아서 풀지 못한 한, 죽어서라도 풀어야 하는 슬픈 제의식, 언어의 씻김굿, 그늘 깊은 시인의 소리는 귀신의 한도 풀어주려나 보다.
땅에 말뚝을 박고 흙의 정신을 들여다본다. 국토의 삼대정신 ⓵ 황토의 정신 ⓶대나무의 정신 ⓷ 뻘의 정신, 시인은 이것들을 국토의 삼대정신이라 말하면서 겨레말의 정서로 풀어간다. 뻘을 일구어 땅을 만든 곡절 많은 설움으로 질박한 전라도 개땅쇠의 언어, 말, 정신.
대숲에 바람 불면 시인도 하염없다. 태평성대에는 풍류를 즐기는 가락으로 떴다가 난세에는 피를 부르는 죽창으로 둔갑하는 대나무의 힘.
대학에서 후학에게 겨레말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시인의 모습은 대쪽처럼 단단하고 여린 죽순처럼 순결하다.
③ 산문山門의 소릿길
山門에 기대서면 왠지 뒤를 돌아보게 된다. 앞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왔던 지난 모습들이 안쓰러워진다. 자칫 센티멘탈해질 무렵 고즈넉한 풍경소리에 문득 정신이 든다. 저만치에서 그때 그 당신이 시나브로 다가온다.
남도 시인 송수권은 ‘山門에 기대어’ 눈물로 얼룩진 한의 강물을 응시한다. “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 즈믄 밤에 강이 일어서던 것을 /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山門에 기대어」) 본다. 또 “마지막 맨 마지막에 모이는 / 푸른 물결 속 / 섬 한 개 동두렷이 떠올라 / 이 못물 속 연꽃으로 비쳐오는 것을” (「續 山門에 기대어」) 보기도 한다. 주목할 만한 역사기행집인 「山門에 기대어」『남도기행』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남도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언뜻 그의 시의 표제만 둘러보더라도 ‘한국의 강’이며, ‘꿈꾸는 섬’이며, ‘정든 땅 정든 언덕 위에’ 혹은 ‘줄포 마을 사람들’이며, ‘우리나라 풀이름’들이며, ‘우리나라 숲과 새들’이며, ‘대숲 바람소리’이며 ‘춘향이 생각’이나 ‘세한도’를 비롯한 전통적 제재와 심상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짧게 말해 그는 전통적인 세계와 민족적인 감수성을 새로운 정서로 일깨워 지금 여기의 삶이 새로운 생명과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노래 부르는 시인이다. 국적과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고답적이지 않은 소릿길을 열어 보인다.
그의 시적 장기 중 하나를 「지리산 뻐꾹새」나 「남도 꾀꼴새」 소리를 들으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뻐꾹새는 실제로 한 마리가 울더라도 여러 봉우리로 연접되고 여러 마리의 소리로 확산되어 마침내 “저 連連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지리산 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 이 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지리산 뻐꾹새」) 보게 한다. 송수권의 뻐꾹새 노래는 단지 새소리가 아니다. 천지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어떤 소리이다. 산봉우리들을 울리고 그것을 연결하며 마침내 강의 물줄기를 연결하고, 바다의 섬들까지 이어진다. 꾀꼴새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꾀꼴새의 ‘한 소리판’, ‘한 놀이판’에서 자지러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새처럼 가볍게 비상할 준비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토록 날고 싶어했던 당신, 남도 소리에 취한 듯 가벼워진 당신, 이제 비상하려나 보다. 산문에 문득 새로운 기운이 감돈다.
④ 백석의 여승과 나의 여승
《한계전의 명시 읽기》(문학동네, 2003)에서는 백석의 여승과 함께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고 있다.
이 작품은 마치 소설의 한 토막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시가 시간적 질서에 따라 씌여진 ‘이야기 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에서 사용된 언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이 시를 감상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단순한 산문의 한 토막을 넘어선 듯한 긴장감을 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의 독특한 시어구사에 있다고 할 것이다.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열에 흐들히 젖은” 같은 시구를 보자. 이들 구절에는 남도 방언이 하나씩 들어있다. “뿌여니” “포름한” “애지고” “흐들히” 같은 단어들은 그 지방 독자가 아니면 그 어감을 충분히 느낄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처럼 시에서는 관습화되고 규격화된 표준어보다는 자연스러운 생동감을 가지고 있는 방언이 더 효과적이다. 시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배제된 것들이 보존되어 있고, 일상의 논리성 뒤에 감춰진 삶의 고통과 경이가 살아있다. 그것이 시의 존재 이유이자 구성논리이다.
송수권의 시들은 이처럼 남도 특유의 단아하고 어감이 풍부한 시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방언은 장애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살아있는 질감 그 자체와 마주칠 수 있기도 하다. 방언에는 표준화 되어가는 삶으로부터 소외된 것들이 자리 잡고 있어,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간 것에 대한 그리움과 한의 정서와 연결되기 쉬운 법이다. 송수권의 시들은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한 서린 언어로 포착하는데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뒤쫓아온 화자에게 여승이 하는 말은 신분차이를 넘어서지 못하는 남녀에 관한 전통적 연애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야기시란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진술하는 시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때 시속에서 진술되는 사건이 펼쳐지는 시공간은 대체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여승」은 감기를 앓는 화자의 어느 봄날 한 순간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담담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시인은 시의 초두에서 화자의 정황을 간략히 묘사한 후, 곧바로 시적 화자의 체험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그 체험은 여승을 훔쳐본 어느 하루의 짧은 시간과 집에서 동네 어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화자가 체험한 시간적 질서는 다음과 같다. 장지문 틈으로 훔쳐본 여승의 인상이 뇌리에 깊이 박힌 시적 화자는 그 여승을 따라 문을 박차고 나서게 되고, 계속 쫓아오는 화자를 향해서 여승은 묘한 인상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화자는 여승에게서 받은 인상처럼 시를 쓰겠노라 다짐한다. 이 정도가 사건의 뼈대이다. 이처럼 한 편의 시를 요약해놓고 나면 너무나 진부한 내용이 된다. 이것이 이야기시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고, 한계가 될 수도 있다. 훌륭한 이야기시는 산문적 진술의 진부함을 뛰어넘는 시적 긴장을 유지하는 시이다. 뒤쫓던 여승이 돌연히 돌아설 때의 화자의 심정을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이라고 진술할 때 이 시의 긴장감은 절정에 다다른다. 「여승」은 일상에서 체험할 법한 간단한 사건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그것을 훌륭히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여승을 신비에 감싸인 존재로 그려낸 점이 그렇다. “어느 해 봄날이던가”라는 시간 지점은 마치 시 속의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등장하게 되는 신비한 여승의 존재에 더욱 현실감을 부여해준다. 그러나 이것이 시인의 실제적 경험의 반영인가 아닌가는 문학의 관점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살구꽃 그림자”와 “흙바람”, 화자의 “고뿔”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여승과의 만남이 훔쳐보기라는 관음증의 시선 하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은밀한 매력이 배가된다. 훔쳐보기란 일대 일의 정면대결이 아니라 보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의 훔쳐보기를 지켜보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쉽사리 화자의 동일한 위치에 감정이입하게 마련이다.
화자가 훔쳐 본 여승의 모습은 처연하다. 목소리에는 삶의 간난신고를 겪은 깊이가 느껴지고, 눈동자에는 “설움”이 깔려 있고, 얼굴은 창백하다. 그 모습에서 화자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것은 미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닌 듯하다. 여승에게서 받은 미묘한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화자는 그 여승을 좇게 되지만, 여승의 뒤돌아봄으로 인해 화자의 발걸음은 멈칫 한다. 시의 화자에게 여승은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한 여인이 남자에게 하듯이 얘기한다. 이 여승은 말 못할 사연을 가슴에 품고 있는 여인의 표상이다.
이와 같은 여승의 모습은 이미 일제시대 백석이나 조지훈의 시에서 묘사된 바 있는데, 특히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여승의 표상이 송수권의 「여승」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백석의 시에도 ‘여승’이라는 똑같은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시적화자가 포착하는 여승은 송수권의 여승처럼 말 못할 사연을 품은 존재로 묘사된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이것은 백석 시「여승」의 1연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여승은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여승은 우리 민족의 정서라고 익히 지적되어온 한을 품은 여인의 형상이다. 백석이 이 시 속의 여승을 일제시대 생존권을 빼앗긴 민중의 한으로 형상화 한 반면, 송수권은 시 외부 현실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백석이 뿌리 뽑힌 존재의 시선으로 여승을 바라본 반면, 송수권은 좀 더 탐미적인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외에도 송수권은 여러 시들에서 백석 시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처럼 송수권의 초기 시들은 우리 전래의 설화를 차용하거나 이야기시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시에는 그 나름의 새로움이 필수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통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다면 시의 발전은 순탄하지 못할 것이다. 시인 송수권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 뿌리가 매우 튼튼한 경우라 하겠다. 그는 뿌리 없는 새로움의 지향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 우리 시의 전통에 끊임없이 착목하여 거기서 현대적 변용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의 시는 근대화 되어가는 우리 사회가 쉽게 폐기처분한 것들을 보존하고 있는 창고이다.
⑤ 언어의 대활령(大活靈)과 민족정서
한계전이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근대화 되어가는 우리 사회가 쉽게 폐기처분한 것들을 보존하고 있는 창고’란 말은 나에게는 의미심장한 말로 다가온다. 모바일 시대, IT강국이 되면서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발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이 변화 속도 속에 은폐되거나 소멸 또는 소멸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전통문화 속의 고유한 탯말들을 나는 ‘봉인封印된 말’이라 부른다.
독자들을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들에 대해 나는 머뭇거리고 주저할 때가 많다. 가령 「왱병」이라든가 「소반다듬이」 등 봉인封印된 말들에 관해서이다. 지금도 소용되고 있는 용품들인데 기억해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학부생은 물론 내가 강의하고 있는 평생교육원 50~60대 어머니들마저 이런 기억상실증에 있다는 증후군에 대해서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왱병」과 「소반다듬이」를 아는 어머니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그 밥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그렇고 촛병을 사용하면서도 그렇다. 2011. 11. 27(일)에는 마침 아침방송으로 KBS-TV 특집 「名人」시리즈에서는 ‘나주 소반장’ 김춘식 씨의 ‘나주반’을 만드는 공정을 다큐로 재현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서막에 나의 시 「소반다듬이」 전문이 걸쳐져 떠오른다. 아직 시집에도 나가지 않은 작품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연이어 몇 통의 전화도 걸려온다. 물론 신세대는 아니다. KBS-TV 「퀴즈 대한민국」 구성 작가의 전화도 있었는데 나의 시 『남도의 밤 식탁』 중에 나오는 <지린 홍어의 맛>이 퀴즈로 나가는 모양이어서 『지린』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왔다.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보라 했더니 『아, 맵고도 지린 홍어의 맛 / 너와 함께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 그처럼 밤도 깊은 남도의 식탁』이란다. 원래는 ‘지릿한’으로 표기했는데 이 출판사 저 출판사에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된 모양이라고 얼버무렸다. 원형은 ‘지리다’ ‘지릿하다’ 등이 맞을 것 같다. ‘오줌냄새’를 표현할 때도 그렇게 쓰기 때문이다. 암모니아(질소)의 그 구릿한 냄새, 즉 홍어가 잘 삭으면 코를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음식이 곰삭으면 이 독특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발효음식에서만 나는 이 독특한 냄새와 맛은 서양인의 혓바닥에는 없는 맛의 영역이다. 이 맛을 두고 우리는 ‘개미가 쏠쏠하다’라고 표현하거나 ‘그늘 있는 맛’이라고 표현한다. 이 ‘그늘’이란 말이 판소리로 가면 ‘그늘 있는 소리’ 즉 째진 목이 아니라 ‘옹근목(수리성)’이라고 한다. 요즘 소리꾼들의 목은 거개가 ‘째진목(건넘은 소리)’인데 비해 임방울의 소리가 상한가를 치는 것도 이 ‘그늘’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도 폼새가 넉넉하면 ‘그늘이 있는 사람’ 시도 깊은 서정이 우러나면 ‘그늘 있는 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개미’와 ‘그늘’은 1차 문화인 음식에서 온 것들이다.
‘그늘’ 있는 맛과 시는 우리들의 영혼을 흔든다. 아니 이 ‘그늘’에서 한국인의 기질과 성품, 인성 그리고 영혼이 유전자 소인으로 각인된다 함이 옳다. 봉인된 이 언어에 시의 혼 즉 대활령(大活靈)이 숨 쉬고 있다. 향토색이 없는 표준말은 시의 폭력적 언어에 불과하다. 이는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고향 탯말인 ‘웜매, 이 잡것 봐라!’고 했다면 욕설이기 보다는 어깨를 툭 치고 싶은 정겨움의 시적 아우라를 갖는다. 더구나 세계 공통어인 영어만 쓰는 워싱턴이었다면 이 정서는 배가될 것이다. 특히 신세대의 모바일 언어에는 이 대활령이 죽어있는 것 같아 나는 시도 믿지 못한다. 이는 봉인(封印)된 말을 써야하는데 ‘건넘은 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소월의 언어에는 3합에서 볼 때 가락이 승하고 백석의 시에서는 이 전통정신을 갈무리하는 대활령이 진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한계전의 감상문처럼 그 대활령을 빌어왔다고 말할 수 있는 백석의 『여승』 한 편만을 놓고 보더라도 이에 대한 심증은 굳어진다. 단언하건데, 이 시대나 전 시대를 아울러 대활령이 빠져있는 시를 나는 ‘민족전통 시’라고 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전통적인 민족언어의 색체는 전통성을 아우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지향해온 내 시쓰기 작업이며 표준어는 향토색깔 언어에 대한 폭력이라고 막말을 함도 여기에 연유한다. ‘왱병’을 ‘촛병’ 또는 ‘소반상’을 ‘식탁’이라고 불렀을 때는 음식 맛이 쏙 빠져버린 껍데기 같은 이름만 남기 때문이다. 이 모듬살이 속에 바로 우리 정서와 정신인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승’에서 보면 조지훈은 ‘파르라니’ 백석은 ‘파리한’으로 색감을 드러냈는데 나는 그 수그런 낮달에서 ‘포름한 향내’를 회감의 정서로 걸어본 것이다. 가녀린 색체와 후각을 결합함으로 ‘대활령’에 기어코자 함이다.
백석의 시는 내 시의 전범으로서 ‘모닥불’은 ‘대숲 바람소리’에서 ‘나타샤와 나와 흰당나귀’는 ‘바람 타는 나무’ 등에서 ‘여우난 곬족’이나 고야에서 내벌약눈 받는 모습을 보고 ‘내빌눈’(2012. 서정시학 여름호)을 발표했는데 이런 흔적들이 내 시에 많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남도 정서와 서북정서를 구별함에 있어서 나의 시와 소월 시의 비교 학위논문이 나와 있기도 하는데 백석과의 비교연구 석사논문이 나온다면 서북정서와 남도정서의 향토성과 토속성에 대한 ‘그늘의 미학’이 될 것 같다. 최근에 읽은 책으로 곽효환이 쓴 ‘북방의식 연구’ 논문에서 김동환, 이용악, 백석 비교연구가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깊이가 있었음을 실감했다.
대활령이 빠진, 이를테면 사무적인 공용어나 표준어는 대활령을 흔들어내는 언어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표준어로 남도 판소리 가락을 흔들어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므로 향토언어야말로 표준말의 상위에 있는 원초적인 민족의 체질적 언어라고 할 것이다. 할아버지들은 원래 카렌다를 책력(정지용의 시어)이라 불렀고, 그 후 달력이라 부르더니 요즘은 유식하게 카렌다로 부르고 있다.
나의 시에서도 이런 시어는 3백 단어 이상이 나오는데 나는 이 시어들을 토박이말 쓰임새 사전(동광출판사)에 올렸고 고려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국 현대시어사전(김제홍 편)에도 상당량 올라있다. 『소반다듬이』에서 하니, 두니, 서니, 너니 하는 유아어(탯말)만 해도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따라서 『여승』에서도 한계전이 지적한 대로 ‘포름한’ ‘애지고’ ‘흐들히’ ‘고뿔(감기)’ 등이 곧 민족의 색채를 드러내는 시어라는 점이다. ‘소반상’이란 말에 개다리를 덧붙이면 ‘개다리소반상(막치소반상)’이 되고 호랑이다리를 덧붙이면 양반이란 신분을 드러내는 ‘호족상(虎足床)’이 된다. 이 호족상을 놓고 둘이 마주하면 곁뚜리요, 셋이 마주하면 셋뚜리가 된다. 이는 『남도의 밤 식탁』에 나오는 시어이기도 하다.
끝으로 민족정서가 숨 쉬는 공간과 시간의 이음새는 대활령에 깃드는 시어 그 자체가 곧 생명이란 점을 강조해 둔다. 그렇다고 시적 아우라를 향토정서로 먹칠하는 시는 자칫 품격이 떨어져 오히려 소활령(小活靈)의 표준공통어보다 시를 죽이는 행위라는 것도 함께 유념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