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삶의 어깨를 두드리다
-박시교論
손진은 (시인 / 평론가)
연습이 필요한 인생
박시교의 신작들을 읽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쓴 듯한 세 편의 작품이 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질 것이라”(「사는 게 다 그렇다」)는 세간의 인식에 역류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제 안에 가득한 것을 찬찬히 풀어내는 시인의 나직한 음성을 듣게 하고 골똘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 단초를 우리는 「나의 아나키스트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 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모두 다 놓아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
- 「나의 아나키스트여」 전문
첫행(초장)만 보면 “누가 죽어가나 보다.”로 시작하는 김춘수의 「가을 저녁의 시」와 비슷한 빛깔을 가진 첫째 수는, 주변에 시의 대상이 된 사람을 따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별성을 확보한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에 이르면 죽음 쪽으로 의미 영역과 공간이 현저하게 확장된다.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모두 다 놓아버리고”는 시인의 삶과 죽음관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인에 의하면 우리 삶은 어떠한 순간에도 완성에 이르는 연습 중이라는 것, 그 연습을 더 해야 하는데 다 못하고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운명을 가졌다는 것을 넌지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 불만은 자신의 죽음을 당겨서 상정해 보는 둘째 수에 이르면 시인으로 하여금 주머니 없는 옷을 거부하는, 자신의 운명에 살짝 맞짱을 뜨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중심문장은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살펴보라. 잠옷, 죄수복,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주머니 없는 옷! 오죽했으면 이세룡 시인은 「주머니」라는 시에서 “죄수들의 슬픔은 / 주머니 없는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거나 “파자마에는 주머니가 없다 / 잠이란 일종의 짧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하고, 심지어 “주머니 없는 옷을 만드는 / 젊은 디자이너들을 때려주고 싶다”는 조크를 던졌겠는가? 살아 있는 사람이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다. 주머니는 남의 눈에 보이고 싶지 않거나 들키기 싫은 손이나 사물이 그 속에 들어가는 공간이다. 추울 때나 어색할 때, 허전할 때 손을 집어넣는 거소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래서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고, 죽음 앞에서 거드름마저 드러내면서 당당한 인간으로서의 호방까지 부리고 있는 것이다.
순리마저도 얽매이지 않고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는 누구일까? “내 사랑 아나키스트”는 첫째 수의 대상일까? 아니면 시적 주체인 ‘나’일까? 둘 다로 읽을 수 있겠지만 매이지 않는 주체는 둘째 수에서 '나'임이 확실히 드러나고, 그 얽매이지 않음이 죽음 앞에 선 자신이라면 읽는 묘미가 훨씬 더 크고 깊기에 ‘나’로 읽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 호기에도 불구하고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에 드러나듯, 인생은 한 번밖에 없다는 사실을 변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천지간 만물의 생성과 사멸(“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이요 허무일 뿐인 것을!
필자는 어느 글에서 박시교 시조의 근저에 놓인 정신을 ‘삶의 근원 동력으로서의 허무’(박시교 『낙화』, 우리시대 현대시조시인선 36, 태학사, 2000)라고 한 바 있지만, 도저한 그 허무가 체념의 미학이라는 전통 서정시의 정서를 한 단계 성숙시킨 것은 「나의 아나키스트여」를 비롯한 이번의 시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죽음에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아래 시는 더 편안하게 나아간 진경을 보여준다.
삶의 미세한 결을 무화시키는 죽음의 눈
도봉산 아랫길 광산(壙山)* 선생과 걷고 있는데
도서관** 앞 잔디 마당에 김근태 앉아 있다
잔잔한 미소 띤 얼굴 어디 가냐 묻는 듯
아까운 사람은 왜들 일찍 떠나느냐며
“당신 같은 사람 몇 명만 있어도 나라 꼴이 이처럼 엉망이지는 않을 텐데”라는 내 말에 “아니지, 혼자서는 힘들었지만 좀 더 살아 있었어도”라고 손사래 치는 선생
우리 둘 대화가 객쩍다는 듯 마냥 웃고 있는 그.
*문학평론가 구중서의 호.
**도봉산 입구에 ‘김근태 기념도서관’이 세워져 있고, 작은 잔디 앞마당에 생전 모습의 앉은 흉상이 있다.
- 「그리운 사람 2」 전문
산 자 둘과 죽은 자 하나가 삶과 죽음의 거리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물 흐르듯이 대화하는 구조가 이채롭다. 광산(壙山)과 나는 산책을 하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이듯 “도서관 앞 잔디 마당에 앉아 있”는 김근태를 만난다. “잔잔한 미소 띤 얼굴”의 그는 “어디 가냐 묻는” 표정이다. 놀랍지 않은가? 삶과 죽음과의 거리가 이렇게 곁에 있다는 것이. 광산 선생과의 대화가 다시 이어진다. “당신 같은 사람 몇 명만 있어도 나라 꼴이 이처럼 엉망이지는 않을 텐데” 나는 말하고, 광산은 손사래 치며 “아니지, 혼자서는 힘들었지만 좀 더 살아 있었어도” 대꾸한다. 깨어 있는 사람 ‘몇 명만 있어도’와 죽음을 원망하는 ‘좀 더 살아 있었어도’의 차이는 제법 있다. 산 자들의 현실 인식이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둘 대화가 객쩍다는 듯 마냥 웃고 있는 그.” 정작 죽은 자는 너희들 견해가 ‘거기서 거기다’, 객쩍게 웃고 있는 것이다. 삶의 결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 그것을 가로질러 무화시키는 죽음이라는 제3의 눈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움! 박시교의 시조는 여기서도 죽음에 딴지를 걸었던 「나의 아나키스트여」에서 더 나아간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여전히 그립기만 하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자는 김근태처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올지도 모를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 마치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고 했던 어떤 시인(윤동주, 「참회록」)처럼. 그 첫 번째가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지난 생에 대한 후회요 이것은 그대로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왜 그런 일들을 했을까
언제부턴가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걸어온 길
머문 자리
나눈 대화
맞잡았던 손
그 모두 마음에 밟히면서
발목 잡는 날 있다.
- 「되새김하다」
단수로 되어 있는 이 시조는 별다른 비유나 수식도 없이 살이 거의 발라져 뼈만 남은 구절로 아프게 스스로를 침잠하며 돌아본다. 내가 살아온 지난 역사의 디테일이 다 들어 있는 중장 “걸어온 길 / 머문 자리”와 “나눈 대화 / 맞잡았던 손”은 뼈아픈 후회와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왜 안 가야 할 자리인 그곳에 머물러 그런 일들을 도모했으며, 어떤 이들과 그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이합집산 했던가. “그 모두”가 “마음에 밟히면서” 발목을 잡고 있는 연치에 와 있는 것이다. 타자를 향한 남다른 염결성에서 발원한 이 자책과 후회가 생의 순리가 보이는 지금에 이르러 일어난다는 것은 화자가 생의 후반의 저물어가는 시간(이는 “만나야 할 시람 있다면 저물기 전 만나야 한다”는 「만남에 대하여」에 드러나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가 않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질 것이라고
아픔의 칼끝도 무디어질 것이라고
살면서 부대낀 상처 치유될 걸 믿었지
한때의 사랑마저도 까마득 지워지고
세월이 흘러가며 어루만질 애욕의 흔적
아직도 기다려 사는 마음은 풀밭인데.
- 「사는 게 다 그렇다」
「되새김하다」가 타자를 향한 그의 시선에 있었다면, 이 시조는 타자에게 당했던 자아의 상처에 집중한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마주하고 있는 거울이다. 시인의 예민한 마음은 시간의 경과에도 “아픔의 칼끝”, “살면서 부대낀 상처”, “한때의 사랑”을 아직도 풀어놓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고독 속 시인의 깨어 있는 의식이 아직도 뾰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고 싶지만 되지 않는 상태. 그러나 둘째수 종장에 이르면 그 단초가 보인다. 시인은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함께’ “세월이 흘러가며 어루만질 애욕의 흔적”을 풀밭의 마음으로 “아직도 기다려”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 이르면 시인의 고독도 풀밭의 촉기와 편안함을 거느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위대한 일은 한결같이 시장터와 명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설파하지 않았던가? 타자를 배려하지 못한 뼈아픈 성찰과 함께 타자에게 입은 상처를 털고 자신의 마음의 균형을 갖춘 시인은 이제 서서히 꽃과 절벽, 그 아뜩한 거리를 합쳐 읽을 지점에 이르게 된다.
꽃과 절벽, 생과 사의 거리를 통합
누구나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 「꽃 또는 절벽」
그 삶의 환하고 절정인 순간을 꽃이라 한다면, 티끌도 흠집도 죄다 지워낸 순간의 빛남을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나가 바라는 삶의 목표이지만 달리 말하면 인간의 욕망이 다다른 지점이 아닌가? 그러나 인간은 고독 속에서 홀로 익었을 때 “아, 하고 /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 생사를 초월해 훨씬 더 깊이를 가지며, 그것은 때로 “순간이 절벽”이라는 팽팽한 양가성으로 삶과 죽음을 모두 포괄하는 자리도 아울러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이 더 큰 본질이 아닐 수 없다. 예민한 시인의 영혼은 그 지점을 이번의 시조들을 통해 통과하고 있다.
박시교의 신작 세 편은 「나의 아나키스트여」, 「꽃 또는 절벽」과 결부하여 읽게 하면서 세계관의 깊이를 드러낸다. 우리 시조단에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는 미세하게 짜인 구성, 복잡한 비유나 화려한 수사적 장치를 모두 걷어낸 그의 시는 생과 사에 대한 인식, 그 맨몸의 존재론만으로도 시조단에 돌올한 깊이와 개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죽음에 딴지를 걸던 시인이 풀밭같이 부드러운 죽음의 손을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손진은 l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1995년 《매일신문》 문학평론 당선. 시집 『저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등, 저서 『시창작교육론』등이 있음. 〈금복문화상〉〈시와경계문학상〉〈대구시인협회상〉 등 수상. 경주대 문창과 교수를 거쳐 현 대구교대 출강.
출처 ; 공정한 시인의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