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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란영화인가?
전 세계에서 가장 검열이 엄격한 나라, 연간 5O편 내외의 영화를 만들지만 데뷔하자마자 사라지는 감독이 가장 많은 나라, 관객들은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지만 외화를 볼 기회는 거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나라, 이란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들은 이처럼 온통 열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왜 80년대 이후의 이란영화는 전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화려한 수상실적을 쌓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이란에는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어린이영화밖에 만들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들이 제기되는 이유는 일반 관객들의 이란영화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 동안 적은 편수나마 일부 이란영화들이 소개되었지만 관객들은 그러한 이란영화들을 모두 비슷한 영화로만 인식하였고,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이란에서는 극히 제한된 형식과 내용의 영화만 만들어진다는 편견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란영화는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편협하지 않으며, 세계의 주요 영화제들이 끊임없이 주목할 정도로 다양하고 우수한 영화들을 계속 양산해 내고 있다. 이러한 편견은 비단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이란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이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종교 등 각 분야에 대한 숱한 오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반인들은 아랍과 페르시아의 차이점을 잘 모른다. 아랍인 혹은 중동인에 대한 우리의 피상적인 고정관념은 헐리우드영화에서 보여지는 부정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배꼽춤 추는 여자나 암살자, 또는 테러리스트 등). 하지만 시인이 2만 명이나 존재하는 나라의 예술과 전통은 그리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란의 영화문화 역시 우리의 인식 이상으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더군다나 지난 20여 년간 이란의 영화가 이루어낸 성과들은 세계영화가 지난 100년 동안 발전시켜 왔던 모습과도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다.
분명 이란영화는 세계영화사에 있어 신천지를 열어 보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페르시안 시네마 로드: 과거의 회상
이란에서는 표상예술이 이미 오래 전부터 가장 중요한 예술분야로 인식되어 왔다. 미니어처 표현법의 경우 원근법이 없는 대신 자연 속에서의 인간과 동물 간의 관계를 표현해 내는 중요한 미장센 기법이었으며, 순교자나 영웅이야기를 우리의 병풍과 같은 천에 아라베스크식으로 나열하는 회화기법도 17세기 이후 꽃을 피운 바 있다. 또한 사이에 바지라 불리우는 그림자 놀이도 이란인들로부터 폭넓게 사랑을 받았으며, 파누스-에 키얄이라 불리우는 ‘상상의 램프’도 있었다. 11세기에 시인 카이암은 이 ‘상상의 램프’에 대해 아래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가 방황하는 우주의 수레바퀴는 상상의 램프 같은 것 태양은 램프요, 세상이요, 상상의 램프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돌고 도는 그림들이다. |
중국식의 표현에 따르자면 ‘움직이는 전기그림자(電影)’인 영화에 대해 이란인들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이란이 현대판 ‘상상의 램프’인 영화를 처음 접하였던 것은 영국과 러시아의 통치 아래에 있던 1900년이었다.
당시 국왕은 유럽으로 휴양차 여행을 갔다가 영화를 처음 보게 되었고, 왕은 동행한 전속 사진사 미라자 에브라힘 칸으로 하여금 카메라를 사서 영화를 만들게 하였다. 그 후 1905년에 이란에 첫 영화관이 생겨났지만,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아 곧 폐쇄되고 말았다. 하지만, 1907년에 또 다른 극장이 생겨났고, 대중들의 지지에 의해 더 이상 폐쇄되는 불운은 피할 수 있었다. 당시 극장은 기존의 보수 수구적인 가치관을 타파하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개혁적인 정치 세력의 모임 장소로도 활용이 되었고,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일례로 1917년에는 여성의 영화관 출입이 허용되었고, 여성전용관 설립은 물론 영화관 내에서는 챠도르를 벗을 수 있도록 하였다.
초창기의 이란영화는 궁정을 중심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나 선전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또한 모자라는 극장 수, 40%에 달하는 엄청난 세금, 지나치게 엄격한 검열제도, 열악한 제작 환경 등으로 인해 이란영화는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7O년대까지 가장 대중적인 장르영화는 아내와 누이를 강간, 살해한 악당을 찾아서 복수한다는 내용과 같은 ‘복수의 이야기’가 대부분인 소위 필름 파르시였다.
물론 일부나마 소위 ‘작가주의 영화’나 ‘색다른 영화(시나마 예 모타파베트)’라 불리우는 비상업적인 영화들도 간간이 만들어졌다.
다리우스 메흐르쥐의 <암소>나 아미르 나데리의 <하모니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여행자> 등이 70년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1979년의 이슬람 혁명은 이란영화에 있어서도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혁명 직후의 상황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제작 자체가 크게 위축되어 연간 10편 정도로 제작 편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그나마 이슬람의 이상을 그리는 선전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은 이란-이라크전쟁이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나마 1988년부터 시나리오에 대한 검열이 사라지면서 상황은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다리우스 메흐르쥐, 바흐람 베이자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고, 모흐센 마흐말바프, 키아누시 아이야리, 락산 바니 에테마드 등이 서서히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세계영화계에 서서히 이란영화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란의 현실세계를 직시하는 데에서 동력을 얻었으며, 때로 환상과 꿈으로까지 그 지평을 넓혀 나갔다. ‘상상의 램프’에 이란인들이 집착하였던 것처럼.
가베 : 이란영화의 다양성
영화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듯이 이란영화 또한 당연히 사회적 변동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왔고, 그들의 전통 카페트인 가베만큼이나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국내에는 어린이를 소재로 한 이란영화들만 주로 소개되는 바람에 일반 관객들은 이란영화의 다양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1979년 이후 이란영화의 경향은 정부(샤 정권)에 대항하는 정치적 투쟁, 마약 밀매, 군주국가를 지지하는 봉건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혁명 등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어 이란-이라크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영화도 붐을 이루었다.
1984년부터는 멜로드라마 영화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고, 우리 일반 관객들이 잘 알고 있는 이란의 어린이영화는 1985년경부터 비로소 붐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주로 국영기관인 파라비 영화재단과 어린이 청소년 지능계발연구소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어린이영화는 초기의 경우 영화 속에서 어린이를 다루고 있다는 점 외에도 다소 철학적이고도 우화적인 내용이나 새로운 스타일을 도입하여 ‘신비의 영화’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이란영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다.
코미디영화는 이란에서 가장 제작이 어려운 장르영화 중의 하나이다.
웃음 자체를 불경시하는 종교적 분위기와 검열 문제 때문이었다. 특히 혁명 이전에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코미디영화에서 쓰여졌던 일종의 웃음의 법칙들이 혁명 이후에는 전혀 사용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코미디영화의 맥은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엄격한 검열은 이란영화의 성격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연인들의 포옹이나 키스 장면은 물론이거니와 리드미컬한 노래나 춤 또한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란의 감독들은 서스펜스, 모험, 복수 등과 같은 요소들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검열은 또한 영화의 결말 부분에도 제한을 가하였다. 정부는 결말을 항상 행복한 것으로 마무리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 결과 결말 부분이 수정된 작품도 상당히 많이 생겨났다. 1985년에 만들어진 라흐만 레자히의 <동그라미는 출구가 없다>의 경우 애초에는 두 젊은 부부가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는 현실을 담아냈지만 검열 결과 구체적인 결말은 보여주지 않더라도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마무리짓는 선에서 겨우 상영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8O년대는 이란영화가 가장 다양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란의 리얼리즘영화의 부활을 알렸던 다리우스 메흐르쥐가 여성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일련의 여성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페르시아의 아름다운 정서를 환상적으로 담아내는 일련의 감독과 작품들(사이에드 브라히미파르의 <석류와 피리>, 파르비즈 키미아비의 <이란, 나의 조국> 등)과 산악지방 사람들의 삶을 고집스럽게 담아내는 파르하드 메흐란파르와 같은 감독도 등장하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80년대 이후의 이란영화를 대표하는 양식은 다큐멘터리와 허구를 뒤섞는 방식일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필두로 아볼파즐 잘릴리, 마지드 마지디, 자파르 파나히 등은 이란의 현실세계에 눈을 돌리면서 이야기 서술 방식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큐멘터리와 허구를 뒤섞는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은 이란영화뿐만 아니라 세계영화를 새롭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이들이 이러한 독특한 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의 오랜 전통과 드라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제작여건의 한계, 엄격한 검열, 그리고 화려한 문학적 전통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과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순수의 순간>, 그리고 파르하드 메흐란파르의 <생명의 나무>가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허구와 다큐멘터리를 뒤섞는 방법은 또 각기 다르다. 단순히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경계를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허무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시, 공간의 경계를 함께 허물어 버리는 형식도 있다. 이처럼 다큐멘터리와 허구를 뒤섞는 방식의 영화 하나만 가지고도 이란영화는 무한히 다양하고 풍성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와 관객의 거리 :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영화
이란영화가 세계영화사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소위 ‘영화인’이라 불리는 전문가 집단이나 영화 만들기를 배운 일반인 정도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예를 들면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작가가, 연기는 전문배우가 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란영화는 이런 통념을 타파하고, 말 그대로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는 영화산업 바깥에서 영화를 만드는 ‘사적 영화’의 개념과도 다르다. 물론 그 시작과 주체는 영화인이지만 주체의 자리를 항상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영화인과 일반인이 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은 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재고하게 한다. 이를테면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순수의 순간>에서 경찰 역으로 등장하는 알리 악바쉬-조잠은 전문배우도 아니며, 시나리오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마흐말바프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전직 경찰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젊은 연기자에게 전수하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속에 반영시킨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명감독을 사칭하고 다니다가 교도소까지 갔다 온 알리 사브지안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알리 사브지안이 자신의 역을 맡아 출연하며, 영화 속의 모든 이야기가 바로 그 사브지안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알리 악바쉬-조잠이나 알리 사브지안은 영화인도 아니며, 영화를 공부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여느 이란인들처럼 영화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영화광일 뿐이다. 하긴 이란인들의 영화사랑은 좀 유별난 데가 있긴 하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영화 탄생 100주년 기념작품으로 만든 <살람 시네마>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마흐말바프가 신작에 출연할 배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낸 뒤, 몰려 든 배우지망생들의 카메라 테스트 장면을 모은 이 다큐멘터리의 도입부 장면을 보면 수천 명의 배우지망생이 한꺼번에 몰려와 아수라장이 되는 현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 배우지망생들은 카메라 테스트 외에도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가를 열심히 설명한다. 이러한 이란인들의 유별난 영화사랑을 이란의 영화인들은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함께 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
지난 1999년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의 PPP에는 자파르 파나히의 새 프로젝트 <순환>(2000)이 초청되었었다. 당시만 해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이슈를 제대로 인식하는 이는 드물었었다. 그러나, 지난 해 이 작품이 완성되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고발의 주제는 세계인을 놀라게 하였다. 그토록 철저한 이슬람 사회에서 매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감히 털어놓은 것이다.
물론, 매춘은 <순환>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파나히는 이슬람 사회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억압받고 있는가를 적나나하게 표현하고 있다.
<순환>은 베니스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후 아직 국내개봉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란의 보수적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더군다나 파나히는 살해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파나히 자신은 <순환>을 페미니즘영화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였지만, <순환>이 이란영화사에 있어 성역이나 마찬가지였던 여성의 억압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마르지예 메쉬키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2000)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순환>에 비해 우화적인 서술기법을 채택하기는 하였지만, 이슬람 사회의 여성억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최근 도전 받고 있는 이란영화의 성역은 여성문제뿐이 아니다. 소수민족의 문제도 과감하게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칠판>(2000)은 이란 내의 쿠르드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로 이란의 북부 산악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민감한 정치적 문제로 인해 그 동안 이란영화에서 금기시 되어 왔던 이슈였다. 하지만, <칠판>을 통해 사미라는 인본주의의 시각으로 쿠르드족을 바라다보고 있다. 확실히 이란의 대통령 하타미의 개방정책은 종교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이란영화에 가해졌던 굴레를 하나하나 벗기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은 여전히 이들 도전적인 젊은 영화인들을 의혹과 온갖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갖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다 주는 이유는 바로 그처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이상이 열악한 환경 하에서도 높은 예술적 성취를 함께 일구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가 대중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출처] 이란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몇 가지 _
이란에 영화가 시작된 것은 1900년. 영국과 러시아의 통치하에 있을 때, 이란의 국왕이 유럽여행에서 본 영화에 감동을 받고 영화제작을 장려하게 된다. 초기 작품들은 궁전을 중심으로 제작되었고 70년대 복수 이야기가 주요 장르였다. 이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며 영화계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혁명 직후 영화제작이 줄어들어 연간 10편 정도가 제작되나 대부분 이슬람 이상을 그린 선전영화였다. 이라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그러나 1980년부터 이란영화가 프랑스에 본격적으로 배급되기 시작하고 1988년에는 시나리오 검열이 사라짐으로 인해 상황이 나아진다. 세계영화제에서 각종상을 수상하면서 이란의 영화는 알려지기 시작한다. 단순히 다큐와 허구의 경계를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허무는 방식과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이 이란영화의 특징이다. 다큐와 허구를 뒤석는 방식만으로도 이란의 영화는 다양하고 풍성하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전통과 드라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제작여건, 엄격한 검열, 화려한 이란의 전통이 어우러져 이란의 독특한 영호제작 방식이 대두된다.
70년대 이란 영화의 뉴 웨이브를 이끌었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이란의 세계적인 감독 키라로스타미는 1940년 테헤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테헤란 예술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즐겨보았으며, 13년 동안 교통 경찰청에서 근무하면서 주경야독 끝에 대학을 졸업한 다음, 1960년부터 광고 분야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10여년간 150편의 광고 필름을 만들었다. 1969년 이란의 청소년 지능개발센터(카눈)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영화인들과 함께 카눈에 영화부문을 신설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카눈 영화부의 중심을 활동하면서 그 영화제작소를 이란영화의 산실로 키웠다.
초창기의 단편영화 <빵과 오솔길(1970)>, <쉬는 시간(1972)>, <리포트(1977)>와 중편영화 <체험(1973)>, <결혼 예복(1976)>, 그리고 장편영화 <여행객(1974)> 등은 모두 카눈에서 어린이들을 소재로 만든 것이었다.
1989년 낭트 영화제를 통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1992년에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주목할 만한 시선’부분을 차지하고, 1997년에 「체리향기」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비교적 덜 알려진 <클로즈업(1990)>을 꼽는다. 영화 속에서 영화 너머의 현실을 읽기를 바라는 작가의식이 형식과 내용에서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실업자 영화광인 사브지안이라는 청년이 이란의 인기 영화감독 모센 막말바크를 사칭하다가 고소당한 실제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영화 속에 실제의 사건과 허구가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영화 필름 안은 현실이기도, 영화가 되기도 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정식으로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더군다나 반미적인 이란에서 서방세계의 영화를 볼 기회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자기의 방식으로 영화를 배웠으며, 서방세계와도 전혀다른 수사학으로 작업했다. 키아로스타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것은 1988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은표범상을 받으면서부터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초등학교 짝인 두 친구가 주인공이다. 공책에 숙제를 해오지 않은 짝은 선생님에게 몹시 야단을 맞고 내일도 공책에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퇴학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소년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서 숙제를 하닥 우연히 자기 가방에 짝의 공책까지 갖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근심에 쌓인 소년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멀리 떨어진 짝의 집을 찾아 지그재그 길너머 마을을 찾아간다.
그리고 3년 후에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가 이어진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찍은 포케마을에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부상을 당하고 집을 잃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키아로스타미는 그 영화의 두 주인공 소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근심스럽다. 그래서 촬영팀을 이끌고 두 소년을 찾아간다. 영화의 주인공은 키아로스타미의 역을 대신한 가짜 키아로스타미이다. 소년들을 찾지만 결국은 만나지 못하고 거기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마지막 삼부작 <올리브 나무 사이로>에서는 영화 속에서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가 촬영 중이다. 그 속에 가짜 키아로스타미를 찍고 있는 영화 속의 조연 둘이서 사랑에 빠져 있다. 말 그대로 영화 속의 영화인 셈이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만일 해피 엔딩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영화 속에 감독이 개입하더라도 잘못된 게 하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실과 영화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해 온 서구 영화의 사유방식을 단숨에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간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며 자신의 차에 동승할 사람을 찾는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수면제를 먹고 누운 자신의 위로 흙을 덮어 줄 사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젓는다. 애띤 얼굴의 군인도, 온화한 미소의 신학도도 '죽음'이란 단어 앞에선 단호하게 외면할 뿐. 드디어 한 노인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박물관에서 새의 박제를 만드는 노인은 주인공 '바디'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며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들을 하나씩 펼쳐 놓는다. '누구의 삶이나 문제가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생각해봐요. 삶의 즐거움을. 갓 떠오른 태양의 아름다움, 맑은 샘물의 청량함, 그리고 달콤한 체리의 향기를...'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 듯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는 바디. 운동장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도시의 하늘 너머 펼쳐지는 저녁노을의 눈부신 빛깔...
현실과 허구의 경계선을 실험하고 신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이라는 독특한 사조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한 키아로스타미는 현재까지 장편영화 9편과 단편영화 16편을 감독해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광고와 영화 자막을 만들다가, 1969년에 아동 및 청소년 지능개발연구소에 고용되어 이 연구소에 영화 제작부를 신설했다. 이 연구소가 제작한 서정적 단편영화 〈빵과 골목길(1970)>로 그는 처음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예술가의 눈으로 이 모든 요소들을 짜맞추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테헤란에 가서 축구 경기를 보기로 결심한 반항적인 시골 소년을 다룬 〈여행객 (1974)>는 그가 감독한 첫 장편영화로서, 문제 청소년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다큐멘터리 〈1학년 학생들 (1985)>과 〈숙제 (1989)>는 이란 학생들이 마주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흥미진진한 통찰을 보여준다.
키아로스타미가 아끼는 작품은 〈클로즈업 (1990)>으로, 어느 좌절한 영화광이 이란의 영화 감독인 모센 마흐말바프를 사칭하여 테헤란의 한 가족에게 사기행각을 벌인 사건과 그 정황을 복잡하게 재창조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은 영화화된 진실의 주관성 및 영화와 현실의 중첩을 탐구하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987)>와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1992)> 및 〈올리브 나무 사이로 (1994)>라는 3부작에서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경계를 더욱 확대했다. 1996년에 그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중년 지식인을 다룬 새로운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필모그래피
빵과 골목길(1970), 방과 후(1972), 경험(1973), 여행객(1974), 색깔(1976), 결혼식 의복(1976), 보고서(1977), 스승에 대한 감사(1977), 여가 시간을 어떻게 할까요(1977), 첫번째 경우 두번째 경우(1979), 치과 위생학(1980), 펠로우 시티즌(1983), 퍼스트 그레이더스(1984), 숙제(1989), 클로즈 업(1990),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1),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체리향기(1997),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1999), ABC 아프리카(2001), 텐(2002), 파이브 데디케이티드 투 오즈(2003), 쉬린(2008), 사랑을 카피하다(2010), 사랑에 빠진 것처럼(2012)
모흐센 마흐말바프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은 이란 영화 '고요'였다. 국내 관객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낯선 나라의 낯선 영화였다. 게다가 연출을 맡은 모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15세 때 팔라위 왕정에 반대하는 이슬람 지하조직을 결성한 무장 게릴라 출신이었다. 수감 생활을 거치며 그는 '총' 대신 '카메라'를 택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혁명 대신 예술의 깃발을 내걸었다. 망설임 끝에 극장에 들어선 영화제 관객들은 찡한 가슴을 움켜쥐고 극장을 나서야 했다. 그리고 2003년 마흐말바프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선정한 '제1회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젠 국내 관객들에게도 이름이 꽤 알려진 스타 감독이 됐다.
9.11 테러 이후 연일 톱뉴스를 장식하는 아프가니스탄. 그러나 미국인들에게도 이 나라는 내전과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 정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미지의 나라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소개되기 시작한 ‘칸다하르(Kandahar)'라는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임을 웅변하며 이 나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것을 세계에 조용히 외치고 있다. ‘가베(Gabbeh)'등으로 널리 알려진 이란 모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탈레반 정권의 수반인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Mullah Muhamad Omar)의 고향 이름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한 여인이 고향에 남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조용히 소개됐었다. 영화는 주인공의 여정에 이란에 사는 여성 난민들을 동행시켜 이들의 힘든 삶을 그린다. 다리를 잃은 난민들이 적십자가 공중투하하는 인공 다리를 잡기 위해 목발을 짚고 뛰는 장면이 처절하다. 프랑스 리베라시옹지등은 “불모의 땅에 나부끼는 부르카 (여성들 몸을 가리는 천)를 형형색색 꽃처럼 묘사하는 등 지나치게 시적이다”는 비판도 했다. 그러나 감독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목적이 “고향을 떠나서도 굶주림과 무지의 상황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의 현실을 알리고 이란 정부로 하여금 난민들을 내쫓지 못하도록 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감독은 홈페이지(www. makhmalbaf.com)에서도 “탈레반 정권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정부인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그곳에 필요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경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액션이다”고 밝혔다.
필모그래피
사랑의 시간(1990), 순수의 시간(1996), 가베(1996), 고요(1998), 키쉬 이야기(1999), 섬 이야기(2000), 아프칸 알파벳(2001),
칸다하르(2001), 섹스와 철학(2005), 개미의 통곡(2006), 정원사(2012)
바흐만 고바디
이란의 쿠르드족 출신인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정식으로 영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장편 영화를 찍기 전에 서른 네 편의 단편을 찍었다. 테헤란 대학에서 공부했으나 거기서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그는 인생과 영화를 배운 것은 서른 네 편의 영화를 찍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는 가족들과 친지들의 돈을 꾸어 열심히 영화를 찍었고 일가 친지들을 모두 스탭들로 동원했으며 영화를 만들고 보는 문화가 없던 자신의 쿠르드족 공동체에서 드물게 영화 감독의 길을 이어나갔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가 연출한 단편 영화는 세계 곳곳의 영화제에서 꽤 유명세를 탔다. 그 즈음 감독 인생의 전기를 모색하던 고바디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를 연출하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찾아가 자신의 단편 영화를 보여주며 조감독을 자청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촬영이 끝났을 때 자기 방식대로 장편 데뷔작을 만들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 접경지대에서 살아가는 쿠르드족 아이들의 치명적으로 불우한 삶을 화면에 옮긴 이 영화는 2000년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을 받았다. 그 이후로 바흐만 고바디는 서구권 영화제의 저명인사가 됐다.
여기까지는 바흐만 고바디가 서구 영화제를 통해 발견된 이란 영화계의 선배들처럼 흔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흐만 고바디의 출신 성분은 선배들과 다르다. 정확히 그는 이란의 영화감독이라기 보다는 이란에 사는 쿠르드족 출신의 영화감독이다. 이는 얼핏 이란 지역의 사람들의 삶을, 그것도 아이들을 등장시켜 현실의 불행을 찍는 고바디의 영화세계에 막연히 가해질 수 있는 통념을 가로막는다. 고바디는 쿠르드족 사람들의 삶을 영화로 찍는다.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생활을 보여줄 문화적 도구가 전혀 없는 고향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그는 영화를 찍는다. 불행히도, 현재의 쿠르드족 사람들이 처한 현실은 그렇게 밝지 않다. 전쟁과 빈곤의 양 축에서 고난받는 동족들의 곁에서 바흐만 고바디는 가족같은 공동체를 이루며 동족들의 삶을 카메라에 옮긴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만들어진 후 영화 속에서 비전문배우인 아이들은 어떻게 그토록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언론으로부터 숱하게 받았을 때 고바디는 그들과 함께 가족처럼 사는 것이 비결이라고 답했다. 고바디의 영화 현장에선 액션이나 슛과 같은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강 윤곽만 정해놓은 각본을 들고 고바디는 아이들과 얘기하면서 적당한 순간이 오면 그는 스탭들에게 눈짓으로 카메라를 돌리라고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바디가 어린이들의 불우를 카메라로 착취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란에서 어린이가 등장하는 영화는 일찍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할 만큼 대중화됐다. 이 장르를 토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의 현대 이란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은 다큐멘터리 형식과 접합한 일련의 영화들로 세계 영화계에 등장했다. 이것이 이란 영화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하나의 표식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는 그들 선배의 영화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르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의 감독이 예술가의 인류애적 사명으로 찍는 페르시아 반도 지역의 전쟁 참화를 그는 실제 자기가 사는 공동체의 복판에서 찍는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족같은 친밀감으로 뭉친 소공동체를 이루면서 동시에 고바디는 그들의 문제를 내부에서 찍는다. 그 자신 스스로 이 가족같은 친밀감이 예술적 창조의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말하는 이 방식, 결국 그들과 함께 살면서 영화를 만들어가는 이 방식이 고바디 영화의 화면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든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전쟁의 피해를 아이들의 눈으로 고발하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거북이도 난다>에서 관객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그 점이다. 이것은 반성을 촉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너무 끔찍해서 외면하고 싶은 그런 상황에 대한 증언이며 동시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비평이 아니라 그냥 그들과 함께 살면서 찍어내는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이다.
지뢰가 널린 이란과 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며 어른들 틈에서 밀수를 하며 살아가는 쿠르드족 소년가장의 모습을 담았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 비해서도 바흐만 고바디의 근작 <거북이도 난다>는 훨씬 강도가 세진 비극을 담고 있다. 고바디는 그의 두 번째 영화 <고향의 노래>의 개봉 건으로 바그다드를 찾았다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으로 지옥이 된 그곳 현장을 목격했다. 바그다드와 여러 도시에서 목격한 것들을 DV 카메라에 담은 고바디는 이란으로 돌아온 지 며칠 후 다시 이라크로 떠났다. 소수의 스탭들을 데리고 그가 현장의 상황에 기초해 구성한 이야기는 지뢰밭을 놀이터 삼아 노는 아이들과 곧 일어날 전쟁의 위험 때문에 하루하루를 불안에 떠는 쿠르드족 난민들과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아이를 낳고 사는 어린 소녀의 자살 강박과 같은 예외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곧 전쟁은 벌어지지만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질서를 꾸리며 살고 있고 너무 일찍 어른흉내를 내며 세상을 버티어낸다.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불가사의한 느낌을 주지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이들의 생명력을 용인하지 않는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마찬가지로 <거북이도 난다>는 쏟아지는 눈물과 무력감에 몸에 힘이 쑥 빠지는 관람체험을 안겨주며, 기진하게 만들고 텔레비전 미디어가 전해주지 않는 세상의 참혹한 진실을 알리는 법정에 참관인으로 관객을 불러낸다.
이제까지 숱한 영화와 사진이 전쟁의 참화를 기록했지만 강력한 증명 효과를 갖고 있는 이미지의 효용은 점점 무디어졌다. 사람들은 전쟁을 또 하나의 스펙타클로 여기며 비극은 활자와 이미지로 구성된 또 하나의 스토리일 뿐이다.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는 가해자의 시각에서 전쟁을 반성하거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성찰적 입장도 아니며, 바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동족들의 현재형 비극을 그들의 삶 복판에서 극적으로 지어낸 상황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바흐만 고바디는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우리의 속 편한 믿음에 대해 아픈 각성을 안기고 숱한 찬란한 과학 문명의 발전과 예술적 진보 속에 결국은 퇴보하고야 만 우리의 인류애에 대해 바치는 쓰디쓴 독백 같은 형식을 창안해내어 별다른 수식 없는 영화의 형태로 단도직입해서 특정 공간의 불행을 응시한다. 21세기의 영화예술은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앙상한 현실 앞에서 카메라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더 심화되는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의 현장 앞에서 카메라를 원시적인 기록의 도구 삼아 대드는 한이 있어도 영화예술은 결국 이 시대의 불행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그의 영화는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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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2000), 고향의 노래 (2002), <거북이도 난다(2004), 빈얀(2008)
1959년 테헤란 출생인 마지드 마지디는 <천국의 아이들>을 통해 이란인 감독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최고 외국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모흐센과 압바스의 뒤를 이은 혁명 이후 이란 영화계를 이끈 2세대 감독에 속한다. 그 역시 어린 아이들을 등장시켜 그들 사회에 상존하는 문제를 풍자한다
배우로 영화일을 시작한 마지드 마지디는 1991년 그의 첫 장편영화인 <바둑>을 만들기 전 몇 편의 단편 영화들을 연출하였다. 마지드 마지디는 <천국의 아이들>과 <천국의 색깔> 그리고〈Baran〉으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세 차례나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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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들의 합창(2008), 윌로우 트리(2005), 맨발로 헤라트까지(2002), 천국의 미소(1999), 천국의 아이들(1997), 아버지(1996), 바둑(1992)
위의 감독군을 이은 3세대 감독으로 주목받는다.
1960년 이란에서 태어났다. 이란 영화TV 대학 졸업 후 방송국에서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던 자파르 파나히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하얀 풍선>(1995)으로 칸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란영화로서는 드물게 미국에서도 개봉됐다. <하얀 풍선>은 7살 먹은 여자애가 설날 치장 할 금붕어를 사러 가는 아주 작고 사소한 얘기다. 그러나 이 소녀가 금붕어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서자 소녀가 평생 잊지 못할 설날 전야가 펼쳐진다. 어렵게 어머니에게 돈을 타낸 소녀는 골목길 어귀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뱀 장수들을 구경하다가 그만 돈을 잃어버릴 뻔하고 나중에는 거리 상점의 환기구에 돈을 빠뜨리고 만다. 그때부터 돈을 되찾기 위한 소녀의 천진한 행위를 카메라가 따라가기 시작한다. 이처럼 ‘키아로스타미 스타일’로 데뷔했던 그는 형식 변화를 꾀한 <거울>(1997)부터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키아로스타미의 미학 안에서 정치적인 탐색을 벌이며 이란영화의 리얼리즘을 동화로부터 사회 비판의 테마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회비판적 의지는 <써클(2000)>에서 심화된다. <써클>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이란 여성 4명의 이야기로 ‘남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란 여성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써클>은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그의 화두는 언제나 이란의 현실이었으며, <붉은 황금>(2003)을 통해서는 이란 사회내의 계급 갈등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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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풍선(1995), 거울(1977), 써클(2000), 붉은 황금(2003), 오프사이드(2006),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0), 클로즈드 커튼(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