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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장 머리에 가시관 붉은 피 흐르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요일 3:16)
우러러 나의 죄 사하신 그 얼굴(1절), 내 대신 당하신 그 상처(2절), 내 대신 죽으신 예수(3절) 보고서 주님의 참사랑 알았네(후렴)의 서술형의 가슴 뭉클한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가 일품인 고난찬양으로 작사자는 만주 길림성에서 출생하여, 한국신학대학, 건국대학교, 일본동지사대학원, 미국 루터신학교,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현재 캐나나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원로 목사 반병섭(潘秉燮;1924~ )목사가 1986년 수난절 묵상을 위해 만들었다. 곡은 충남 청양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작곡과, 일본 도쿄음악대학, 무사시노 음악대학대학원졸업, 대한신학교, 건국대 사범대 음악교육과 교수를 역임한 황철익(黃哲益;1932~ )교수가 2,000년 곡을 만들었다.
1절 머리에 가시관 붉은 피 흐르는
주님의 얼굴을 우러러 보라
나의 죄 사하신 그 얼굴 보고서
참 사랑을 알았네
1절, 머리에 가시관 붉은 피 흐르는 주님의 얼굴 보고서 참 사랑을 알았네.
찬송가 1절의 핵심은 “머리에 가시관 붉은 피 흐르는 주님의 얼굴”이다.
육신의 형제들(요 7;5), 친척(막 3:4), 제자들(마 16:22) 그 누구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궤변을 늘어놓던 서기관들, 거드름을 피우던 왕족이나 귀족들, 잘난 척하는 산헤드린의 학자들, 위선적이고 비열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 사악하고 포악한 로마 병정들, 이들 모두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쉴 새 없이 괴롭혔습니다.
유다가 배반했고 베드로가 부인했으며 도마가 의심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늘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우주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땅에서도 버림받았고, 온 세상이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를 끌고 간 군인들이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씌우면서 놀려대고, 희롱을 하고 채찍과 주먹으로 때리고 갖은 수모를 주어도 주님은 그 모든 모욕을 말없이 다 받으셨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양옆의 강도들까지 주님을 정죄하고 모욕했어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묵묵히 참고 계셨습니다(사 53:7).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고 모욕을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없이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얼굴을 하늘로 향해 들고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 자기를 죽이는 무리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 기도드린 예수님, 자기를 죽이는 무리를 용서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로마의 백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
39).
그러나 이보다 더한 고통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의 비명과 기도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5~46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전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45절에 보면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캄캄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 이어 46절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비명이 울부짖음이 십자가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비명이 단지 육신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외침이 터져 나 온 것일까요? 물론 육신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컸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구절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제사장의 축복기도’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과 연결시켜서 보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린 사건의 아픔이 어떤 것인가를 금방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축복기도는 주님의 얼굴과 관련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며 지키시기 원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로 여러분 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길 원하며, 주님께서 그 얼굴을 여러분을 향하여 드사 평강, 평화 주시기를 내가 바라노라."라는 제사장의 축복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민수기가 기록되던 BC 1,500년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최고의 축복기도로 통합니다. 오늘날에도 이 기도를 히브리어로 해주면, 유대인들은 울어버립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은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를 자신에게 비추신다고 하는 것은 이건 최고의 축복이자 대박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주위가 어두워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거든요.> 하나님이 나를 바라봐 주시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면, 최고의 저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등지시고 얼굴을 돌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저주입니다. 물론 저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좇아 십자가를 지고 감에도 불구하고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를 향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왜! 이런 고통과 저주의 화살을 예수님께 돌린 것일까요? 예수님이 싫어서요? 아니죠. 예수님이 지고 있었던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4장 8절, 59장 2절, 예레미야 33장 5절, 에스겔 39장 24절, 미가 3장 4절에는, “너희의 죄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리라. 너희의 죄악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서 얼굴을 가려버리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부활의 그 순간까지는 아직 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외면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오는 그 영광의 광채를 처음부터 누렸던 예수님에게 단 1초라도 그 빛이 끊어진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저주와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육신의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터져 나온 고백이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찢으면서 터져 나왔던 이 외침은, 영과 혼과 육을 갈가리 찢는 고백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고통과 아픔을 안다면 우리는 “머리에 가시관 붉은 피 흐르는 주님의 얼굴을 우러러 나의 죄사하신 그 얼굴 보면서 주님의 참 사랑을 알고 감사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찬송가 1절)
2절 채찍에 상하고 쇠못에 박히신
주님의 그 상처 우러러 보라
내 대신 당하신 그 상처 보고서
참 사랑을 알았네
2절, 채찍에 상하고 쇠못에 박히신 주님의 상처보고서 참 사랑을 알았네.
찬송가 2절의 핵심은 “채찍에 상하고 쇠못에 박히신 주님의 상처”이다.
마가복음 15장 16∼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신 광경이 담겨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5절에 보면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기전 전날 밤 예수님은 이미 공회 의원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며 주먹으로 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65절)고 경멸적으로 말했습니다. “네가 진정 선지자라면,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희롱이 끝난 후에, 그들의 하인들도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희롱했습니다(65절). 누가복음 23장 11절에 기록된 말씀에서는 같은 전날 밤에 예수님은 분봉 왕 헤롯과 그의 군인들로부터도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마가복음 15장 16∼20절에 내용대로 예수님은 빌라도의 군인들로부터 또다시 심한 희롱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희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을 지나가던 자들도 또한 그 곳에 있던 공회 의원들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며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더불어 누가복음 23장 36절에서는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며 조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상하고, 쇠못에 박히신 주님의 상처”(찬송가 1,2절)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난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식으로 채찍질을 했으며, 정확하게 어디에 또한 어떻게 못을 박았는지 전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난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도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만 대략 삼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들 모두도 육체적으로는 예수님과 똑같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당하신 육신의 고난은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 특별하게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시면서, 계속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신 것은 독특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신 후, 이리저리 많이도 끌려 다니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새벽에 예수님은 또다시 공회 앞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잠시 후 공회 의원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에, 예수님을 분봉 왕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을 희롱한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도로 보냈습니다. 그 후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리고 잠시 관정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후 최종적으로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요 19:4).
이와 같이 예수님은 쉴 새 없이 끌려 다니셨습니다. “이제 그만해라. 너희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느냐?” 그러면서 예수님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부리셔서,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을 끌고 다니는 자들을 벌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입을 다무신 채, 아무 저항도 하지 아니하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미 예언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이렇게 수치스럽게 끌려 다니셨으며, 또한 계속해서 침묵하고 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제 아내를 이런 고통과 시련의 환경 속에 원치 않게 보내져 있습니다. “하루에 잠을 4시간만 자도 원이 없게다.”고 말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을 감독하며 내좇으려고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괴롭히지만 그때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침묵의 사건을 기억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쉽게 찬양강해가 주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눈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30년을 걸려 만들어진 찬양강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기 바랍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처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흔들림이 없이 맡은 일에 끝까지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절 골고다 언덕에 주께서 달리신
고통의 십자가 우러러 보라
내 대신 죽으신 예수를 보고서
참 사랑을 알았네
3절, 골고다 언덕에 매달리신 십자가 보고서 내 대신 죽으신 예수 알았네.
찬송가 3의 핵심은 “골고다 십자가에 내 대신 죽으신 예수”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분명하게 죄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죽음을 향해 오늘도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양을 많이 쌓은 사람이든, 종교적인 사람이든, 선행을 많이 행한 사람이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다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대신한 새로운 대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미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죽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불의한 자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찬송가 3절) 대속의 피를 흘려주시므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담대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4,25)
중세 유럽사회에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전염병 이었습니다. 전염병 가운데서도 페스트는 전염성이 강하고 병균에 감염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것이며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 불란서의 마르세이유에 페스트가 급속도로 번져 도시는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의사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느 날 의사들이 모임을 갖고 페스트를 어떻게 대처 할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은 환자를 해부해서 치료약을 개발하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으로 떠올랐습니다만 그 일은 해부하는 의사 역시 페스트에 걸리게 되고 죽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모두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한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규온(guyon)이란 의사였습니다. "제가 조국의 안전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인류애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일 아침 시체를 해부하고 관찰한 바를 기록할 것을 서약하는 바입니다." 그는 즉시 회의실을 떠나 경건한 기도의 시간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날 새벽 규온은 그 전날 밤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방에 들어가 환자를 해부하고 정밀 검사를 하면서 치료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환자의 상태를 기록한 종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질병을 감염 시키지 못하도록 그 종이들을 식초병에 넣고는 그 방을 나왔습니다. 그 후 열 두 시간 만에 규온은 죽었습니다. 규온이 죽어 가면서 파악한 페스트 환자에 대한 기록은 후에 페스트를 정복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의사 규온의 살신성인의 정신이 페스트로 죽어가던 조국 프랑스를 구했고 유럽을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와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다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그분을 통해서 영원히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님은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길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심령에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를 통해 새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고 죽음에서 벗어나 자유 함을 얻고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지배했던 나쁜 주인은 쫓겨 가고 새 주인인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금 사단은 우리의 이기심과 정욕을 자극하여 죄의 노예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최선의 길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려 하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됩니다. 죄의 권세를 계속 깨뜨려버리고 흠 없고 점 없는 순전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벧전 1:19).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며 풍성한 생명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으로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살며 인생을 낭비 하지 않고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며 살아 존귀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