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이야기
다치바나 미노리 지음/김소운 옮김
뿌리와이파리/2003년 10월/236쪽/12,000원
1. 인류 최초로 토마토를 먹은 사람들
콜럼버스는 정말 토마토를 만난 것일까?
토마토의 원산지는 남미의 페루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페루의 들판에서는 토마토 야생종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중남미 원주민인 인디헤나가 야생 토마토를 언제쯤부터 먹기 시작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16세기의 아스텍 왕국(지금의 멕시코)에서는 토마토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옥수수 가루로 만든 토르티아(멕시코식 옥수수 빈대떡)와 함께 토마토를 일상적으로 먹었다는 것은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정복자, 즉 콩키스타도르(16세기 초의 스페인 모험가들.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에 남아 있다. 구대륙(유럽) 사람들에게 토마토는 감자, 옥수수, 고추 등과 더불어 ‘신대륙 발견’이 가져온 ‘새로운 식료품’이었다. 그렇다면 정복자들의 선구자였던 콜럼버스는 과연 토마토를 만났을까? 일설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2차 항해 때나 제4차 항해 때 토마토를 스페인으로 가져왔을 것이라고도 하지만, 콜럼버스가 우연하게나마 토마토를 보았다는 확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콜럼버스는 토마토에는 관심이 없었다. 콜럼버스가 주로 찾아 헤맨 것은 무엇보다도 황금이었고, 당시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준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인들은 황금의 고향을 찾아 속속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위대한 3대 문명인 멕시코의 마야 문명과 아스텍 문명, 그리고 페루의 잉카 문명을 접하게 된다. 코르테스(Herman Cortes)는 이들 모험가 중 멕시코의 아스텍 왕국을 정복하여 일약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토마토와의 첫 만남 - “첫인상이 좋지 않다.”
아스텍 문명은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정확하게 따져보면 몇 가지 그림 문자는 사용하고 있었다.) 문자로 된 것이라곤 정복자인 스페인인들의 손으로 기록된 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토마토에 관해 기록된 문헌도 이러한 보고서나 편지 형태로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즉 문헌상으로만 보면, 가장 빨리 토마토를 만난 유럽인은 코르테스 일행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이들 문헌에 씌어진 ‘토마토’가 과연 우리들이 지금 먹고 있는 토마토와 같은 것인지 아닌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마토라는 말의 어원이 된 것은 인디헤나 사람들의 언어인 나우아틀어의 ‘토마틀’(tomatl)이며 이것은 ‘불룩한 열매’란 뜻이다. 그런데 이 토마틀이란 말은 붉은 토마토와 식용 꽈리 양쪽에 모두 쓰였다. 따라서 ‘토마틀’이라는 말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토마토라고 부르고 있는 불룩한 빨간 토마토를 그대로 지칭했던 것은 아니다.
껍질이 벗겨진, 배꼽이 있는 열매
스페인인들이 남긴 고문서 가운데서도 수도사인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1547년부터 1569년에 걸쳐 기술한『신스페인 풍물의 역사』는 신뢰도가 매우 높다. 그 책의 제3권에는 “사자(死者)의 혼이 가는 또 하나의 ‘지상 낙원’은 즐겁고 먹을 것이 넘쳐흐른다. 푸른(어린) 옥수수, 호박, 푸른 고추, 피, 시토마테(xitomate, xitomatl이라고도 표기), 푸른 콩, 꽃 등이 끊이질 않는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토마테’란 현대의 ‘히토마테’, 즉 ‘붉은 토마토’를 뜻하는 옛 나우아틀어다. 나우아틀어에서 ‘ji'(히)라는 것은 ’껍질이 벗겨졌다‘는 뜻이나 ’xi'(시)는 ‘껍질이 벗겨졌다’는 뜻 외에 ‘둥글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즉 ‘껍질이 붙어 있지 않은 둥근 토마틀’이라는 뜻이 된다. 애초부터 껍질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 꽈리는 아니다. ‘xi'에는 ’화산의 분화구‘란 의미도 있다. 또한 ’xi'는 ‘xill'(열매의 꼭지가 달린 부분, 배꼽을 의미한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배꼽이 있는 열매‘가 아닐까라는 설도 있다. 과연 토마토의 꼭지를 따면 음푹 들어가 있어 배꼽처럼 보인다. 게다가 ’토마틀‘의 ’toma'는 ‘열매의 집합체’를 의미하여, ‘tl'은 ’물‘(水)을 나타내므로 ’수분이 많은 열매‘를 뜻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토마틀‘을 기본으로 해서 ’시토마테‘라는 말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원래 인디헤나 사람들에게 ’토마테‘란 녹색 토마토, 즉 식용 꽈리를 뜻하며, 이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따라서 식용 꽈리의 ’껍질을 벗긴‘, 반들반들한 붉은 토마토는 식용 꽈리가 있고 난 뒤부터 먹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시토마테’야말로 붉은 토마토인 것이다. 필시 야생종 토마토거나 인위적으로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가장 오래된 토마토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토마토의 선조라 해도 좋다.
인도양을 건너 아시아로
인도양에 진출한 포르투갈은 1511년 말라카를 점령하고, 1513년에는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를 식민지로 삼은 것은 1557년이다. 한편 스페인은 마젤란이 태평양을 횡단하여 1521년에 필리핀에 도착했고, 1571년 마닐라에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이윽고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마닐라 사이에는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고, 스페인은 태평양을 경유하여 아시아와 적극적으로 접촉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카풀코와 마닐라 사이의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다는 것은, 토마토를 늘 먹었던 멕시코에서 태평양 주변을 잇는 직항편이 빈번하게 일본 근해에 출몰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토마토가 1668년 이전에 일본에 전래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17세기 중엽 동남아시아와 일본 사이에 긴밀한 무역 루트가 연결되어 있었으며, 쇄국령이 공포된 이후에도 류큐나 규슈의 다이묘 사이에 밀무역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해볼 때, 토마토가 동남아시아를 경유해 일본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을까? 중국 자료를 바탕으로 토마토의 전파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에 토마토가 전래된 것은 명나라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서적에 토마토에 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명나라의 승정제 때 저술된 『군방보(群芳譜)』로, 여기에는 ‘번시(蕃枾)’라고 씌어 있다.『군방보』의 첫 부분에 “서번(西蕃)에서 온 까닭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되어 있다. 중국에서 서번은 인도차이나를 말한다.
2. 토마토의 고향을 찾아서
스페인인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멕시코 원주민은 그들이 말하는 토마토르 혹은 토마테를 먹었다. 이것이 실은 우리들이 현재 먹고 있는 붉은 토마토와 식용 꽈리 둘 다를 의미하지만, 붉은 토마토보다도 식용 꽈리 쪽이 훨씬 오래 전부터 식용으로 쓰였다. 현대 멕시코 가정에서는 돌 절구와 돌 곤봉이 한 세트로 되어 있는 ‘모헤카테’라고 하는 조리기구로 토마토와 식용 꽈리를 으깬 다음 거기에 고추를 섞어 살사를 만드는데, 그 모헤카테와 똑같이 생긴 것이 기원전 7000년경의 지층에서 출토되었다. 멕시코인들은 아득히 먼 9천 년 전의 그 옛날부터 변함없이 모헤카테로 식용 꽈리 살사를 만들어온 것이다. 이와 같이 식용 꽈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식용으로 했다는 증거가 있지만, 정작 붉은 토마토를 식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똑같이 ‘토마테’라 불렸다 하더라도 식용 꽈리와 붉은 토마토는 식물학적으로 엄연히 다르다. 같은 가지과 식물이긴 하지만 식용 꽈리는 꽈리(Physalis) 속에 속하기 때문에 토마토와는 먼 친척뻘일 뿐이다. 식용 꽈리는 멕시코에서는 단순히 ’토마테‘나 ’토마테 베르데‘(녹색 토마토)라 불린다. 한편 현재 우리들이 먹고 있는 토마토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 재배종 토마토는 작은 열매를 맺는 체리 타입의 토마토며, 학명은 ’리코페르시콘 에스클렌탐 셀라시포르메‘다. 에스클렌탐은 ’먹을 수 있는‘, 셀라시포르메는 ’체리 같은 모양을 한‘ 이라는 뜻이다. 현 시점에서는 멕시코에서 붉은 토마토가 언제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종자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대 벽화나 토기류에서 토마토와 비슷한 것조차도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헌상으로도 스페인인이 침입한 16세기 전반까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아스텍 문명은 독특한 그림 문자를 사용했으나, 문자로 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멕시코와 페루에서 더욱 다방면에 걸쳐 유적 발굴이 진행되면, 언젠가는 붉은 토마토 종자가 출토되어 붉은 토마토가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토마토의 고향은 안데스인가, 멕시코인가?
어쨌든 코르테스가 아스텍 왕국을 침략했을 당시, 원주민들이 이미 붉은 토마토를 먹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대체 그 붉은 토마토는 언제, 어디서 멕시코 고원에 전래된 것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멕시코에서 자생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경로를 추적하려면 우선 토마토 야생종의 분포부터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페루나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에 걸쳐 있는 안데스 고원에는 8~9 종류의 야생종 토마토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자생하고 있다. 한편 멕시코의 야생종은 핌피넬리폴리윰처럼 익으면 빨갛게 되는 종류만 확인되고 있다. 멕시코 만에 인접한 베라쿠르스 주의 산간 지대와 중앙 고원의 페브라 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핌피넬리폴리윰은 식용으로 쓴다. 1978년 릭 박사는 유전자적으로 페루의 야생종보다 멕시코의 야생종 쪽이 재배종인 셀라시포르메에 더 가까운 종임을 증명했다. 세계 농학자들은, 토마토는 당초 안데스 고원 일대를 원산지로 하여 멕시코로 전래되었고 다양한 품종 개량을 거쳐 재배종 토마토가 탄생되었을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일치시키고 있다. 어쨌든 최초의 재배종 토마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셀라시포르메는 식용 가능한 야생종 토마토의 변종으로 태어나 교잡에 의해 조금씩 변화해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토마토는 고향이 두 곳이다. 야생종의 고향은 안데스고, 재배종의 고향은 멕시코다.
죽음의 계곡에서 살아남은 야생 토마토
고원 도시 멕시코시티와는 달리 페루의 리마는 태평양에 인접한 해안 도시다. 리마 주변은 잉카 사람들이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던 건조 지대이며, 원주민들은 정복자인 스페인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이 열악한 지역을 추천하여 그들의 도시를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페루는 태평양에 인접한 해안 지대, 안데스 산맥의 산악 지대, 안데스 산맥 동쪽의 정글 지대 등 세 개의 기후 지대로 나누어져 있는데, 페루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차빈(chavin) 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7세기에 걸친 모체(moche) 문화, 그리고 1세기부터 8세기까지 존재했던 나스카(Nazca) 문화 등 고대 문화가 각지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기원전부터 서기 12세기에 걸쳐 안데스 고지, 티티카카 호 주변에서 번영했던 타아우아나코 문화는, 그후 잉카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산재해 있는 잉카 문명은 13~15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1523년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불과 백 수십 명의 스페인인들에 의해 어이없이 멸망하고 만다. 안데스의 고대사와 토마토와의 연관성에 관해 고고학적인 증거가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여기는 야생 토마토의 고향이다. 야생 토마토는 남북으로 약 8,500킬로미터에 이르는 안데스 고원에 광범하게 분포하고 있다. 비교적 높은 건조 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히르스텀과 ‘페루’란 이름이 붙여진 페루비아넘, 둘 다 핌피넬리폴리윰과 달리 식용으로는 적당치 않지만 유전자원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야생종이다. 라 페루라는 리마에서 찬카이 강을 따라 북쪽으로 150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간 해발 1,500미터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히르스텀과 페루비아넘의 자생지는 라 페루라 마을에서 다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아나스마이요 강의 상류, 안데스 산맥의 앞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2000미터 이상의 산악 지대다. 히르스텀은 잎과 꽃이 페루비아넘보다 크고, 열매에는 하얀 솜털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어 반짝반짝 빛이 난다. 큰 것은 열매가 3센티미터나 되는 것도 있다. 키도 커서 인간의 키를 훌쩍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종횡무진 힘차게 쭉쭉 뻗어 서로 뒤엉켜 있다. 히르스텀의 열매는 완전히 익어도 붉게 변하지 않으며, 식용으로는 쓰지 못한다. 잉카어로 쿨레브라미쿠나(뱀의 먹이)라 부른다고 한다.
3. 과연 독초인가 약초인가?
생명의 기원인 ‘물’의 식품
4 원소설이란 “모든 물질은 4가지 원소로 구성된다.”는 사고에 입각해 자연계의 다양성과 변화를 설명한 것이다. 4 원소란 불, 물, 흙, 공기지만 각각이 구체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은 빛을 상징하며, 뜨겁고 건조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은 유동성과 액체의 상징이며, 차고 습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흙은 고체의 상징이며, 차고 건조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공기는 휘발성과 기체의 상징이며 뜨겁고 습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약초학자들의 이론은 4원소에 인간의 기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질(쾌활, 성급함, 우울, 무기력), 신체를 구성하는 네 가지 체액(혈액, 황담즙, 흑담즙, 점액)을 첨가시켜 인간의 건강에 대해 연구했다. 즉 상기한 네 가지 기질, 네 가지 체액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질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편 동양에서는 어땠는가. 한방의 기본이 되는 음양오행설에서는 질병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오행은 오장, 오부, 오근 등과 대응한다. (오장(五臟)은 심(心), 간(肝), 비(脾), 폐(肺), 신(腎), 오부(五腑)는 소장(小腸), 담(膽), 위(胃), 대장(大腸), 방광(膀胱), 오근(五根)은 감각을 생성하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감각을 뜻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를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로 보며, 거기서 뜨거운 것, 차가운 것, 마른 것, 습한 것은 균형 있게 섭취한다는 생각을 이끌어냈다. 이 생각이 본초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토마토를 ‘물(水)’의 식물이라고 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약제 처방전에서도 토마토는 여름에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신체의 열을 식히고, 진정, 소염 작용이 있는 ‘찬’ 식품으로 분류하고 있다.
토마토에서 약효를 찾아낸 사람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명으로 파견되었던 의사 에르난데스는 1570년부터 1577년까지 멕시코에 머물며 저술한『신스페인 자연사』에서, 신스페인(멕시코)에는 토마틀이라 불리는 차고 신맛 나는 식물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약효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에르난데스는 토마틀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시토마테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이어서 밀토마틀, 코스토마틀, 코요토마틀, 에파토마틀 등 몇 종류의 토마틀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삽화에는 우리들이 식용으로 하고 있는 붉은 토마토(시토마테)는 없고 녹색 토마토, 즉 식용 꽈리만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엔 식용 꽈리만 주목한 듯하다. 어쨌든 에르난데스는 붉은 토마토와 식용 꽈리를 일괄적으로 ‘토마토’라 기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코르테스의 스페인 정복으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멕시코에서 현지 조사를 담당했던 왕실 주치의가 썼던 글이라는 점에서, 이 보고서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신뢰도가 높았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토마토가 다양한 생리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토마토는 체내에서 비타민 A로 전환하는 카로틴과 비타민 B군, C, E 등이 함유되어 있고, 미네랄 또한 균형 있게 함유되어 있다. 비타민 A는 점막을 보호하는 작용이 있고, 비타민 B군은 인체에 필요한 3대 영양소인 당질, 지질, 단백질 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C와 E에는 항산화 작용이 있고, 나아가 토마토의 붉은 색소인 ‘리코핀’도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또한 식이섬유는 변비를 개선하고,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작용도 한다. 어쨌든 토마토에 독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여전히 뿌리 깊게 만연해 있던 시대에 모종의 약효가 있음을 알고 연구했던 식물학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평민을 위한 토마토
1545년부터 1591년까지 약 50년 동안 파도바 식물원에서 재배된 식물을 총망라해 만든 소책자는 아프레포 제롤라모 포로가 자료를 수집해 편찬한 것이다. 총 1,156종의 식물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토마토도 있다. ‘포미 도로 데티 달 볼고’(Pomi d'oro detti dal volgo)라 적혀 있는데, ‘평민을 위한 황금의 사과’라 번역하면 맞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림이 첨부되어 있지 않아 어떤 토마토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591년까지는 포모 도로, 즉 ‘붉은 토마토’나 ‘노란 토마토’가 지배적이었던 게 확실하다.
1544년에 마티올 리가 맨드레이크의 일종으로 소개했을 때만 해도 아직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토마토가 그로부터 반세기 만에 ‘포모 도로’라는 이름으로 인지되어 이탈리아 식물학자의 손에 재배되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갖는다. 스페인 왕립 식물원에서 토마토가 재배되었다. 그보다 먼저 혹은 적어도 같은 무렵에 이탈리아에서도 베네치아 왕국의 식물원에서 토마토가 재배되었음을 이 문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역시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토마토에 관한 한 선구자였던 게 틀림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토마토는 상당히 일찍부터 스페인 직할지 주변에서 재배되어 식용으로 쓰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다른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이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4. 토마토가 채소가 된 날
‘관상용 식물’에서 ‘채소’로
16세기 전반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전래된 토마토는 미심쩍은 소문들이 무성했기 때문에 좀처럼 식용 ‘채소’로 인정받지 못했다. 미식(美食)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예로부터 음식이나 레스토랑에 관한 가이드북 같은 책이 발행되어 왔다. 이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토마토가 프랑스에서 ‘채소’로 인정받은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18세기 초엽부터 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있는 『빌모렝-앙드리외(Vilmorin-Andrieux)』라는 음식 연감에는 원예식물의 종자가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잡지에 토마토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760년 판. ‘채소’ 항목에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한해살이 관상용 식물’로 정의되어 있으므로 식용 채소로서의 지위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토마토는 16세기 말 경에는 ‘별채나 정자를 가려서 분위기를 좋게 하는 역할을 했던’ 존재였다. 때로는 열매의 색을 즐기기 위해 화분에 심어 방을 장식하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썼고, 때로는 냄새에 해충 구제 효과가 있다고 해서 방충 식물로 쓰기도 했다. 토마토가 명백하게 ‘식용 채소’로 정의되는 것은 『빌모렝-앙드리외』지의 1778년 판부터다. 원예 잡지 「르 봉 자르디니에」의 1785년 판에서도 “토마토의 열매로 소스를 만들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토마토 소스 문화권’이라 불릴 정도로 토마토를 조미료로 이용하는 독특한 식습관이 생긴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어쨌든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프로방스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남프랑스에서라는 한정이 붙기는 하지만, 토마토가 ‘관상용 식물’에서 ‘채소’로 변신해 시민권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일부 특권 계급에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파리 시민의 식탁에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채소’는 여전히 아니었다.
스페인, 날것으로 먹다
유럽에서도 비교적 일찍부터 토마토가 받아들여졌던 곳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토마토를 갖고 돌아온 공로자였음에도,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스페인 문헌 가운데 토마토 재배에 관한 언급은 매우 드물다. 18세기 스페인 식물학자 쿠에르는 자신의 저서 『스페인의 식물군』제5권(1784년)에서 토마토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18세기 말 스페인에서 토마토는 무엇보다도 우선 스튜 소스로 쓰였고, 생으로 먹거나 기름에 튀겨서, 혹은 볶아서 다채롭게 조리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토마토는 일부 부자들이나 특권 계층은 물론이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침, 점심, 저녁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채소로 사랑받고 있었다. 스페인인이 발견한 신대륙의 진기한 식물 토마토는 구대륙에 전래된 지 25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일반 가정에서도 즐겨 먹는 지극히 평범한 식료품이 된 것이다.
스페인어로 ‘토마토 크루드’ (tomato crude), 즉 토마토를 가열해 조리하지 않고 먹는 것은 스페인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쿠에르의 문헌에도 “모든 스튜 요리에 이용될 뿐 아니라 샐러드를 만들기도 하고, 소금을 살짝 찍어 날로 먹는다.”고 씌어 있다. 토마토를 생으로 먹는 방법이라면 가스파초가 있다. 이것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요리로 너무나도 유명한 요리지만 처음엔 토마토를 넣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가스파초는 피망과 오이, 양파, 토마토 등을 믹서에 갈아 소금, 후추로 간을 한 다음 각각의 재료를 깍둑썰기 한 것과 크루통을 토핑으로 얹어 마무리하는 다채로운 냉 스프다.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마시면 가슴이 편안해지는 메뉴다.
제3의 조미료로 인정받은 유일한 채소
토마토가 채소로 인정받은 이후, 일대 전기를 맞이한 것은 토마토 소스가 ‘어떤 요리에나 잘 어울리는 조미료’로 보급되었을 때였다. 토마토는 토마토 하나만 가지고도 일품요리를 만들 수 있고 뭐니뭐니 해도 토마토 소스의 선명한 색상은 ‘붉은 조미료’로 식탁을 화려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토마토 소스가 등장하기까지 유럽의 주요한 조미료는 소금, 후추, 올리브 기름(혹은 라드나 버터), 가름(garum : 고대 로마의 향신료. 염장한 고등어 같은 바다 생선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이 생선들을 압착시켜 피클을 만들 때 소금물 역할을 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라고 불리는 어장(魚醬)류, 와인과 그 부산물인 와인 비니거, 거기에 생크림과 치즈 등의 유제품, 감미료인 꿀, 신맛을 내는 레몬과 덜 익은 열매 정도였다. 여기에 토마토로 만든 새빨간 소스가 출현한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토마토 소스의 출현은 ‘식탁의 붉은 혁명’ 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식욕을 돋우는 붉은 색, 비니거와는 다른 상큼한 신맛, 그리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 토마토 소스라는 미각의 대혁명이 이탈리아를 진원지로 해서 지중해 연안 지역, 나아가서는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어느덧 토마토 소스는 서구의 음식문화에서 소금과 가름에 이어 ‘제3의 조미료’라고까지 불려 마땅한 존재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토마토가 제3의 조미료로서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를 현대 과학이 해명했다. 토마토 소스로 보관해두면 생 토마토를 구할 수 없을 때에도 토마토의 영양을 보충할 수 있다. 당시의 기본적인 토마토 소스 조리법은 큼직큼직하게 썬 토마토를 뭉근하게 삶은 다음, 채에 걸러 조리는 방법이다. 좀더 질 좋은 소스를 만들고 싶으면 채소와 허브를 함께 넣고 끓인 다음 마지막 단계에 라드나 버터를 넣는다.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각 가정마다 전통적인 조리법을 갖고 있고, 그 집안의 기본이 되는 맛이며, ‘어머니의 손맛’인 것이다. 토마토 재배가 왕성한 남이탈리아에서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 토마토 가격이 싼 시기에 한 해 동안 먹을 분량을 한꺼번에 만들어 저장해 둔다. 이리하여 토마토는 토마토 소스로서 서구의 음식문화 속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
5. 케첩의 뿌리는 간장과 같다
발효의 조미료
케첩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아무래도 어장(魚醬)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고대 로마 시대에 가름이나 리쿠아멘(liquamen)이라 불리는 생선을 발효시킨 조미료가 쓰였음이 밝혀졌다. 가름은 그리스어, 리쿠아멘은 라틴어다. 가름의 제조법에 관한 기록으로는 10세기경 그리스 농업 지도서에 씌어진 것이 가장 상세하다. 그것에 따르면 소금에 절인 생선 내장과 아가미 등을 항아리에 넣고 잘 저은 다음 집 밖에서 2~3개월 발효시킨다고 했다. 가름은 중세까지는 유럽에서 널리 쓰였고 만능 조미료로 대활약을 했다고 한다.
한편, 동양은 어떤가. 중국 춘추 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5세기)때 씌어진 『시경(詩經)』에 이미 젓갈을 의미하는 해(醢)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리고 젓갈의 발효를 촉진하기 위해 누룩을 혼합한 장(醬)도 있었다고 하므로 상당히 일찍부터 어장 담그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아(爾雅, 기원전 1세기)』에는 해(醢)는 고기 젓갈, 지(鮨)는 생선 젓갈을 뜻한다고 씌어져 있으며, 따라서 중국에서는 생선과 가축의 고기를 원료로 한 발효 조미료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이윽고 콩과 곡류를 재료로 한 장이 탄생했다. 일정한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어 재료로 쓰기에 훨씬 편리했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의 농업서라 일컬어지는 『제민요술(濟民要術)』에는 술 담그는 기술에 관한 책 후반에 장 담그는 기술이 소개되어 있다. 이들이 훗날 간장과 된장의 원형이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듯 조미료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모두가 ‘염장(鹽藏)’이라는 보존법 때문에 생긴 부산물일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유럽에 전래된 동남아시아의 어장 문화, 그리고 갖가지 발효 조미료의 영향을 받아 케첩이 완성되어간 것이다.
케첩은 살사?
동남아시아에서 ‘케첩’이라 불리던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젓갈인 것 같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지금도 다채로운 케첩의 변형을 볼 수 있다. 작은 물고기나 새우를 원료로 한 젓갈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파인애플 케첩, 피너츠 케첩 등. 채소나 과일을 원료로 한 케첩도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케첩’이라고 하면 단순히 소스를 뜻한다. 그러니까 멕시코의 ‘살사’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멕시코에서 ‘살사’는 때로는 소스로, 때로는 요리에 곁들이기도 하고 장아찌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추의 강렬한 매운 맛이 특징인 살사에도 파인애플이나 망고 등을 이용한 달콤하고 짭짤한 살사가 있다. 17세기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케첩’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케첩은 생선을 원료로 한 발효 조미료인 ‘젓갈’이 그 뿌리며, 이윽고 콩이나 곡류, 채소를 원료로 한 ‘젓갈’의 변종이 생겼고, 거기에 새로운 채소인 토마토도 첨가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17세기 중엽에는 말레이 반도에서 토마토 재배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무렵에 토마토를 원료로 한 케첩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풍부하게 입수할 수 있었던 갖가지 향신료가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향신료의 맛을 한껏 살린 ‘케첩’은 유럽 사람들, 특히 영국인들을 매우 흡족하게 했다. 동남아시아로 찾아온 선원들은 값비싼 향신료와 함께 이국적인 아시아의 조미료인 ‘케첩’도 본국으로 가지고 돌아갔던 것이다.
새콤달콤한 토마토 케첩의 탄생
케첩에 토마토가 이용된 것은 언제쯤부터일까? 요리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뉴욕 주 역사협회에 남아 있는 요리 사본(1795년)의 요리법이다. 이건 아무래도 토마토 소스 같다. 처음엔 토마토 소스와 토마토 케첩이라는 말이 별 구분 없이 쓰였다. 토마토 케첩의 특징은 시큼한 맛이다. 식초와 설탕 이 두 가지 소재야말로 토마토 소스와 토마토 케첩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요소일 것이다. 그럼 식초와 설탕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던 것일까? 처음에는 식초가 쓰인 적도 있었고 쓰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설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탕을 가미하면 발효가 촉진되어 결과적으로 시큼한 케첩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점차 더 많은 양의 설탕이 이용되었다. 한편 발효가 지나치게 촉진되어 너무 시큼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니거의 양도 아울러 늘어났다. 설탕 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20세기 중엽에 접어들고 나서의 일이다. 카리브 해 여러 나라에서 값싼 설탕을 구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미국인의 단맛에 대한 기호는 점점 높아져 케첩에도 다량의 설탕을 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과 같은 ‘새콤달콤한’ 토마토 케첩이 탄생된 것이다.
6. 간장의 나라에서 맛보는 토마토 맛
어떤 요리에나 잘 어울린다
서양의 음식문화는 기름을 많이 쓴다. 기름으로 조리한 요리의 느끼함을 완화시키려면 신맛이 나는 조미료가 필요하다. 기름과 잘 어우러지고 적당한 신맛을 가진 식재로 와인이나 사와 크림, 레몬 등이 사용되었다. 신대륙에서 토마토가 전래되어 조미료로 대환영을 받은 것은 토마토가 가진 적당한 신맛이 크게 작용했다. 토마토의 상큼한 신맛은 구연산과 사과산 등이 주요 성분이다. 또한 토마토의 독특한 향은 시트랄, 헥사놀, 헥사날 등이 주성분을 이루고 있으며, 육류나 어패류의 냄새를 제거하고 채소의 담백한 맛을 살려주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토마토 조미료는 기름진 요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일본인에게 서양요리의 문을 여는 역할도 해왔다. 구미의 음식문화에서 토마토를 이용한 요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토마토 소스뿐 아니라 토마토 케첩과 살사까지 포함시키면 토마토 맛의 요리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할 것이다. 어떤 요리에나 잘 어울리는 범용성은 토마토 맛의 조미료와 간장의 공통점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토마토와 간장 모두 아미노산계의 단맛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토마토는 다른 채소에 비해 글루탐산 등의 단맛 성분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독특한 방향 성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이 성분은 짠맛을 순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반대로 크게 다른 것은 신맛이다. 간장에서는 신맛을 거의 느낄 수 없지만 토마토의 신맛은 느끼함을 말끔히 해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간장의 나라’에서 토마토가 퍼져나간 배경에는 아무래도 유지류라는 존재가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다.
토마토 맛의 재발견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 여러 나라는 포식으로 인해 생긴 생활습관병의 증가라는 숙제를 안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래의 음식문화를 재평가하는 기운이 싹트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정통 지향, 품질 엄선, 자연 지향, 건강 지향, 단순화 지향이라는 방향성은 세계 공통의 것이다. 당연히 토마토 조미료, 토마토 요리도 그 변화의 물결에 편승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음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 시대에, 토마토 맛의 재발견이라는 커다란 파도가 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건강한 대지에서 태양을 듬뿍 받고 숙성된 토마토를 원료로 그 풍미와 영양이 손상되지 않도록 가공한 토마토 주스 같은 음료 제품이나 자연의 맛과 식감을 소중하게 간직해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토마토 소스 같은 조미료 제품의 유행이 그 일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