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왜 우리는 명상을 하는가?
명상 수행은 선한 일이며, 전쟁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다.
명상은 나라끼리 맞붙어 싸우는 큰 전쟁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전쟁’도 중단시킬 수 있다.
‐ 초감 트룽파 린포체
사람은 스스로를 격려하면서라도 자신에게 불편한 장소에서 머무를 수 있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게 ‘명상’이다. 명상은 깨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명상은 보리심을 기르는 밑바탕이며, 구도하는 수행자가 마땅히 머물러야 할 안식처다.
명상은 보리심의 특징인 자애慈愛와 자비慈悲를 길러준다. 명상을 하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고,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더 섬세하게 감지할 수 있다. 명상은 스스로에게 조건 없는 자애의 싹을 틔우게 하고, 타인의 고통을 열린 마음으로 공감하게 한다. 한마디로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명상하면서 몸과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다보면,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생각 사이에 공백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속으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대는 중에,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잠시 멈춤’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고, 그 공백이나 잠시 멈춤이 점점 확대되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의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힘은 명료함, 열린 공간, 열린 인식이며 세상에 편안하게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인식으로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처럼 외부 세계를 향했던 인식이 ‘지금 이 순간’의 체험으로 돌아오는 것이 명상이자, 보리심 수행이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마음이 누그러지며 존재의 열린 차원으로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명상이 두려움을 없앤다거나 기분을 편하게 한다거나 희망을 준다거나 몸을 낫게 한다는 생각들은 모두 잘못된 믿음이다. 이런 것들은 수행을 왜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들이다. 명상은 심신이 고단한 일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이 가진 혼란스러운 면이든 건강한 면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수용하는 것이 ‘자비慈悲(maitri)’다. 내가 가진 존재 방식 그대로,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자신과 소통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혜와 자비의 원천으로 존중할 때 지속적인 향상이 이루어진다. 8세기 인도 고승인 샨티데바가 말했듯이, 인간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보석을 찾는 장님과 같다. 당장 내버리고 싶은 것들 속에, 역겨움과 두려움을 주는 것들 속에 청정한 보석인 보리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명상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편안해지는 것부터 시작하라. 자신을 마주할때 더이상 훈계하지 않고, 거칠게 굴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야 해로운 습관들을 놓아버릴 수 있다. 명상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비심이 자라나고, 자비의 네 가지 미덕도 함께 자라난다. 그 네 가지 미덕은 항심恒心, 명료한 인식, 괴로운 감정을 포용하는 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집중력이다.
자비심이 가지는 첫 번째 미덕은, 한결 같은 마음, ‘항심’이다. 명상을 하면 누구나 자신을 변함없이 대할 수 있는 힘이 커진다. 무슨 일이 닥치든지 졸리거나 지루하든, 어지러운 생각이나 거친감정으로 머리가 무겁든 상관없이 맞이하는 경험에 성실하게 임하게 된다. 짧은시간이라도 날마다 명상을 해야 항심을 가질수 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기분좋을 때나 우울할 때나, 명상이 잘된다고 느낄 때나 엉망진창이라고 여겨질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그저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며 명상을 해야 한다.
항심 수행의 특징은 의식이 자기 몸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명상할 때 온몸에 긴장을 풀고,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세세히 관찰하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각 부위를 이삼 분씩 집중하며 의식으로 훑어 내려가 보라. 만약 통증이나 긴장감이느껴지면, 서너 번 호흡하며 그곳에 의식을 집중하라. 이렇게 발끝에 이르면 거기서 끝내도 좋고, 다시 머리끝으로 훑어 올라가면서 되풀이할 수도 있다. 이런 연습에 익숙해지면, 명상을 하다 언제라도 재빨리 몸으로 되돌아가 자신의 모든 감각이 몸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의식을 ‘지금 여기’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다.
명상을 통해 발견하는것 중 하나는 인간이 타고난 본질적인 불안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의 날 것에 그대로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이 위기를 넘겨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너그러움과 유머 감각을 발휘해야 한다.
수행에서 핵심 가르침은 이렇다. ‘머무르라, 머무르라, 그저 지금 여기에 머무르라.’ 자신이 방황할 때마다 “머무르라”며 부드럽게 달래고 다독거려주라. 지금 마음이 들뜨고 불안한가? 머무르라! 마음이 산만하고 어수선한가? 머무르라! 두려움과 역겨움으로 주체할 수 없는가? 머무르라! 내가 지금 여기서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는가? 머무르라! 더 이상 못 참겠는가? 머무르라! 이것이 바로 항심을 닦아가는 과정이다.
자비심이 가지는 두 번째 미덕은 ‘명료한 인식’이다. 명상 수행을 하다 보면 마음이 깨어 있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세상을 보다 명료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징조다. 명상을 매일같이 하다 보면 자신에게 정직해지기 시작한다. 명료하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기기만’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다.
명상에는 인내와 자비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자비가 없다면 결국 자신을 공격하게 된다.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스스로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 해도 자비심이 필요하다. 그저 지금 여기에 머물기 위해서도 자비심은 필요하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 ‘생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지닌 깨끗함이든지 혼란함이든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암호와도 같다. 명상을 통해 생각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나의 방어기제를 명료하게 보고, 나에 대한 부정적 신념이나 욕망 또는 기대도 명료하게 알아차리려는 것이다. 명료한 인식이 자라날수록 우리는 자신에게서 용기, 지혜, 관용도 함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규칙적으로 알아차리는 명상 수행을 하다 보면, 더이상 자신으로부터 숨을 수 없게 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걸 막기 위해 스스로 어떤 방어벽을 세워 놓았는지 명료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 벽이 갑갑하게 느껴지고 갇혀 있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하는 게 수행자에겐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갇혀 살던 작고 낯익은 세상 대신, 대안을 찾는 열망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수행자는 환기창을 찾고, 나와 남 사이에 놓인 벽도 허물고 싶어 한다.
자비심이 가지는 세 번째 미덕은 ‘괴로운 감정을 포용하는 힘’이다. 초보 수행자뿐 아니라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들조차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명상을 이용한다. ‘생각’이라는 딱지를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밀쳐내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처음엔 감정적으로 고통스럽더라도 대상을 저주하거나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한 호흡 한 호흡, 한 달 또 한 달, 한 해 또 한 해 수행해나가야 변화가 일어난다.
감정은 ‘내면의 혼잣말’을 통해 부풀어 오른다. 내면의 부추김이 없다면 감정은 증폭되지 않는다. 우리는 명상을 하다가 분노가 일어나면 그것에 ‘생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흘려보내라고 배운다. 그런데 다 흘려보내고 나도, 그 생각의 기저에는 여전히 무언가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고동치는 생명 에너지이며 우리 존재의 근원이다. 그 에너지 자체가 나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니다. 수행이란 그 에너지와 함께하고, 그 에너지를 체험하며, 그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느닷없이 마음이 괴로워지더라도 괴로운 까닭이나 세세한 자초지종은 놓아버리고, 그 괴로운 에너지와 함께 머물러야 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감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몸에 그 에너지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에너지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고, 그 에너지를 억누르지도 않으며, 그저 그것과 온전히 함께 머무를 때 우리는 깨어난다.
감정 에너지를 밀쳐내는 것은 그 속에 내재한 지혜의 샘물을 거부하는 것이다. 화가 나도 그것을 흘려보낼 뿐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명료하게 보는 지혜다.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있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평등심이고, 열정이 있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모든 방향을 두루 보는 지혜다.
보리심 수행에는 감정이라는 살아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보통은 감정이 강렬해지면 두려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우리 삶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다. 그러니 좌선할 때는 마음에서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든 다 놓아버리고, 일어나는 감정과 두려움에 마음을 기울이고 알아차려라. 그런 식으로 두려움을 향해 마음을 열고, 불안한 에너지와 소통하는 연습을 하라. 괴로운 감정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으로, 그 에너지를 밀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비심이 가지는 네 번째 미덕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힘이다. 명상을 할수록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힘이 생긴다. 매순간 지금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겠다고 선택하라. 지금 이 순간 내 몸에, 내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나와 남과 세상에 자비를 베푸는 길이다. 집중하는 힘 속에는 나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알아차리고 흘려보낸다’는 가르침만 기억하라. 어떤생각이 일어나면, 그저 ‘생각’이라고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끓어오르던 내면의 갈등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은 것처럼 의식을 ‘지금 여기’에 머무르게 해주는 평화로운 방법이다.
때로는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이 너무 좋아서 놓기싫을 때도 있다. 공상의 세계가 훨씬 달콤하고 유혹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습관적인 패턴을 멈추려고 할 때는 ‘부드럽게’ 접근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자비심을 베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로워지기 위해, 조건 없이 열린 마음과 통하기 위해 명상을 한다. 아무것도 인위적으로 일어나게 하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생각을 단순히 알아차린 다음에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에너지가 온화하고, 완전하며, 늘 새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행자로서 구도의 길을 가게 되면, 원래 인간이 품고 있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보리심이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