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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33편> 복을 받는 길 연합과 동거, 형제가 연합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대제사장.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복, 헐몬의 이슬
1. 말씀배경
시편 133은 다윗이 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의 중요성에 대하여 평생동안 경험하고 산 사람입니다.
① 그가 친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도 소외당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삼상 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사무엘이 초청한 식사자리에도 끼지 못하고 양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가 모가 나서 형제와 하나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형제와 떨어져 외롭게 보내는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형제와 하나되어 사는 모습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② 그는 사울과의 관계속에서도 사울왕의 사위이면 서로 함께 하지 못하고 쫓기며 살아야 했습니다.
③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간에도 하나되지 못하고 나누어 싸움을 해야 하는 것도 경험도 했습니다. 사울을 따르는 지파와 다윗을 따르는 지파가 한동안 전쟁도 해야하는 경험도 했던 것입니다.
④ 그리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자식간에 서로 죽이는 아픔도 경험했습니다.
▶ 그래서 다윗은 형제가 그리고 지파들이 하나되어 연합되고 동거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고 소망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원수인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도 연인이 서로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했습니다.
[사무엘상 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사무엘상 18:3]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사무엘상 19:1]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사무엘상 20: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사무엘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이 된 후에도 끝까지 보살펴 줍니다 (삼하 9:1-10).
그리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있을 때, 그의 신하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에도 가장 슬퍼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다윗은 이렇게 연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을 받는 모습 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133편은 그의 이런 하나됨의 필요성과 그의 복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 원수처럼 잡아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라가면 하늘에서 내리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도 다윗의 마음으로 교회에 가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되기를 기도하셨고 (요 17:21),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간다고 하시면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5:22-25). 하나되고 연합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대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연합이 어렵습니다. 사랑은 형제가 연합되고 하나되는 가장 강력한 띠입니다.
베드로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벧전 4:8), 사도요한도 설교 때마다 “서로 사랑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요일 3:11, 23, 4:7,11,12)
이 모두가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교회가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2. 시편 133편
1절,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할 때 그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형제가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제”는 반드시 육신의 피를 나눈 형제 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진 거룩함을 입은 모든 자가 형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도 연합하고 동거하면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도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모습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 선하다는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이것은 선하다, 좋다, 이익이 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악하다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함입니다. 선은 하나님 편에 있는 개념입니다.
악한 것들에게는 선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한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 아름다운 것은 히브리어 “나임”입니다. 원어적으로 즐거운 것이고 유쾌한 것이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며, 음악처럼 감미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은 감정적, 정서적인 “토브”인 것입니다.
서로 싸우면서 결코 이런 감정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기분이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굳이 선함과 아름다움을 구분해 본다면, 선함이 외적선함의 성격이 강하다면 아름다움은 내적선함이 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외형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경험한 자입니다. 그는 연합하지 못했을 때 외적으로는 서로 싸우고 죽이고, 내적으로는 마음이 상하고 불안하고, 내외적으로 많은 악한 열매가 얼마나 많이 맺는지를 경험했고, 연합하고 동거할 때 외적으로도 선한 열매가 맺히고 내적으로도 기분도 즐겁고 유쾌함의 열매를 경험한 것입니다.
2절,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했습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기름 부어질 때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기름이 뺨에 있는 수염과 콧수염, 턱수염으로 흘러 내려서 옷깃으로 흘러 내리는 모습을 말입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하늘의 축복을 백성들에게 흘러보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머리가 되는 대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아래 백성들에게 기름부으심, 축복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형제가 하나되어 연합될 때 하늘에서 기름부으심이 임하고 하늘의 축복들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형제의 연합과 동거가 없다면 하늘의 신령한 복이 흘러 내려가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면 복을 받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머리이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통하여 지체되는 우리들 곧 교회에게 복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붙어 있지 않으면 절대 복이 흘러갈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5, 상반절)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가지로 우리들이 붙어 있지 아니하면 결코 포도나무 줄기의 양분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와 같아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연합되고 동거되어져야 합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처 삼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형제와 연합되어져야 합니다. 이 땅에 눈에 보이는 형제들과 화목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분들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도 화목하고, 이웃과도 화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마가복음 9:50]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로마서 12: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3]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싸우면 막히게 됩니다. 흘러내려가지 않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체들끼리 서로 싸우지 마세요. 부부끼리도 서로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복을 가로 막는 길입니다.
무슨 이유이든 간에 싸우면 서로 미워하게 됩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했으니 더 큰 죄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보장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1서 3: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복의 근원이신 우리 주님께 대적하지 마세요. 다투지 마세요, 거부하지 마세요. 모른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참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름부으심이, 축복이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원리가 너무 중요합니다.
3절, 이번에는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게 내림같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비유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의 비유를 또 다르게 비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위에서 흘러내림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헐몬산은 레바논에 있는 높은 산입니다.
그 아래로 낮은 많은 산들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시온에 있는 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헐몬산이 맏형이라면 작은 산들은 동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꼭 나이로 형이 아니라 영적인 형을 말합니다.
헐몬산에서 이슬이 시온산까지 오는지는 모르지만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헐몬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갈릴리 바다로 흘러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젖줄입니다.
헐몬산에서 만년설이 녹아 물을 흘러보내지 않는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말라 죽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물도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고인 것입니다.
이것처럼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므로 위로부터 생명수가 흐르고, 이슬이 내리므로 살게되는 것입니다. 이슬로 표현한 것은 잔잔히 조용히 흘러오는 축복을 상징합니다. 구석구석 내리는 축복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요란한 소낙비와 다르게 마치 내리지 않는 것 같지만 어느 새 옷이 흠뻑젖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도 급하게 역사할 수 있지만 대체로 이렇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지 않고 동거하지 않으면 여기 저기 부족함 만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선함이 아니라 악함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아니라 우울함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있을 때 이슬이 내리는 시온의 산들에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헐몬산들과 연결, 연합되어 있는 시온의 산들은 복을 받는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 머리되신 대제사장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복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시온의 산들에서 받는 복은 영생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헐몬에서 내려오는 이슬은 영생을 주는 이슬인 것입니다. 살리는 생수의 이슬인 것입니다.
형제가 하나될 때 이런 영생의 축복이 위에서부터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 영생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3:15절에서 미움 → 살인 → 영생을 얻지 못함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연합되고 하나되는 것은 영생의 문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령하셨나니”는 강조형(피엘)으로 되어 있으므로 강하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머리, 헐몬은 땅이 아니라 위, 하늘에서 부어지는 영적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면 하늘의 복을 신령한 복을 반드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 구원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분쟁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그 복이 끊어집니다.
마지막 종말의 시대에는 여기 저기 분쟁과 전쟁의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나마 은혜의 시대이지만 그 때에는 더 이상 은혜가 부어지지 않는 심판의 시대가 오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오늘날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기가 과거에 비하여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개인주의로 흘러가고 있고 형제가 많지도 않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합니다. 과거 한 지붕 밑에 부모를 모시고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저의 어릴 시절 좁은 곳에 많은 형제가 오물 오물 한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형제간의 다툼도 있었지만 정도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시대에 설고 있습니다. 형제가 한 두명 있어도 각자 학원으로 개인 방으로 흩어져 살아갑니다. 그나마 있는 형제끼리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PC 게임 안에서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나홀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형제와 연합하고 동거하는 훈련을 통해서 성숙해져 가는데 그런 상황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록 몸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 만은 연합되고 동거되어 하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노력도 해야 합니다. 양보도 해야 합니다. 베풀기도 해야 합니다.
최소한 형제와 재산 때문에 서로 싸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조금 못난 형제가 있다면 특별히 더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교회 어려운 지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잘났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으시되면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최근 유투브에 형제들이 큰 땅을 사서 각자 집을 짖고 모여 사는 형제들 두 가정을 보았습니다. 보기가 좋았습니다.
이런 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오늘 말씀과 같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형제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연습하는 연습장이라면 이런 연합과 동거의 훈련에서도 승리를 해야 천국에서 형제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룬 이런 연합, 동거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