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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3:26-43> 가상칠언(架上七言)-1,십자가 사건, 용서와 사랑의 사건
1. 말씀의 배경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과 다르게 아예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원죄도 없고, 그리고 자범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가셨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원래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예수님 죄가 없으신 것을 다양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을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로마총독도 3번이나 예수님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도다”(눅 23:4)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그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래서 때려 놓겠노라” (눅 23:14-16)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 23:122)
하지만, 유대인들이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3:23-24).
오늘날도 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로 이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내 큰 목소리가 남을 죽이는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해야합니다.
② 빌라도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 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마가복음 15: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고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푸는 예수님을 수많은 군중들이 따라 다니게 됩니다.
그러니 기득권을 가진 그들의 지위가 불안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시기로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시기도 사람을 죽입니다.
요셉도 그들의 형들이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창 37:11).
③ 여기에 더해진 것이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고도 민란이 일어날까봐 두려워서,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그냥 두면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이 될 것을 두려워서 사형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눅 23:25, 요 19 :12-15).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염려한 것입니다.
→ 이와 같이 빌라도는 죄의 유무, 진리에 따라 판결을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판결한 것입니다.
그는 진리를 모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고 하니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요 18:37-38)
그가 내린 사형판결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빌라도의 이름은 영원히 저주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 사도신경을 통하여 지금도 모든 믿는 자들로부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겨 주면서 자기는 무죄하다고 손을 씻었지만, 예수님은 그가 죄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큰 죄인인 것입니다.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 19:11)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가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정당한 재판도 변호도 받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엄청난 고통 가운데 일곱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오전 9시이고 (유대인 시간 제 삼시), 운명한 것이 오후3시니 (유대인 시간 제 구시) 십자가 위에 서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살아 계신 것입니다. 그 고통은 수없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시편 22편에서는 이헣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22: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모든 피와 물이 다 쏟아져 내립니다. 뼈가 어그러지는 아픔입니다. 마음이 다 녹아져 내렸고, 힘이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었습니다. 모든 뼈들을 셀 수 있을 정도로 뼈 마다 마다가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고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일곱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들에게 큰 의미와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곱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수도 있고, 왜, 이 땅에 오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성자라고 하는 석가모니, 무함마드, 공자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에 한 하나님 여호와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지극히 큰 능력으로 덮으셔서 낳으심과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가 보내시는 발출)
그래서 이 가상칠언을 통하여 그의 죽음과 고통, 그의 부르짖음이 오늘 나의 구원을 포함해서 삶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십자가 위에 있는 것처럼 감정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시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가상칠언의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제 자기가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하면서 감정을 넣어서 다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6) "다 이루었다" (요 19:30) - 테텔스타이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2. <첫 번째 말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을 해야할 상황이 아닙니다.
아마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 “살려달라”하면서 “욕”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계실 때,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① 지나가는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막 15:29-30). 여기서 모욕하다가 미완료형이므로 계속 모욕한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흔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시, 비웃을 때 하는 동작입니다 (왕하 19:21, 시 22:7).
②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이렇게 희롱하면서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막 15:31-32)
③ 누가복음에서는 백성들은 서서 구경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경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④ 관리들도 비웃으면서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눅 23”35)
⑤ 군인들도 희롱하고 신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눅 23:35- 37),
⑥ 함께 못 박힌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욕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눅 23:39, 마 27: 44, 막 15:32)
남을 욕할 자격도 없는 강도까지 무죄한 예수님을 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⑦ 더구나 십자가 밑에서는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 27:35, 눅 23:34). 속옷까지 제비뽑은 것으로 보아 예수님을 발가벗은 몸인 것입니다 (요 19:24).
→ 예수님을 죽이면서도 작은 물질에 눈이 멀어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⑧ 시편 22편 에서는 예수님께서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22:6-13]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6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아무튼 십자가 아래의 분위기는 이런 모습인데, 분위기는 용서를 선포할 상황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용서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능하시겠습니까? 대부분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만 있다면, 당장 잡아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어를 보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앞에 원인,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gavr “가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해달라는 이유가 “자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 그러면, 자기들이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가요? 왜,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할까요?
이것도 원어를 보면 조금 이해가 갑니다.
“알지 못한다”고 할 때에 “못하다”는 부정어 ouv “우”와, “알다”라는 동사 ei[dw “에이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정어와 함께 해석하면, 알지도, 경험하지도, 지각하지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감각, 지각으로든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지식, 생각, 판단, 의식이 작동되지 않는 그런 상태는 사탄, 어둠의 영에 잡혀 있을 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해본적이 없습니까? 일을 저지르고 나서 정신이 번쩍들어 후회하거나, 일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가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니 예수님을 팔게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나서야 정신이 들게 되니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게 됩니다(마 27:4). 이때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돌아오면 살수 있는데, 사탄은 자살하도록 부추겨서 죽게 만듭니다 (마 27:5).
→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의 백부장의 반응과 구경하러 모인 무리, 예수를 지킨 자들의 반응을 보면,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눅 23:47-48)
“백부장과 함께 예수를 지킨 자들이~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몰론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며 성도들이 부활하고 하는 징조도 있었습니다. 이 징조도 한몫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자기들이 의인을 죽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입이 잡히고, 생각이 잡혀서 사탄이 시키는 행동을 하고 정신이 번쩍 들면 후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①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은 마치 강시처럼 사탄의 조종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며, 하나님께 그들의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이 영적으로 대속을 위한 구원의 사건 임을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르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는데, 이게 구원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악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용서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가르침인 용서를 친히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 베드로가 큰 마음 먹고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하면서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마 18:21)
우리들은 세 번도 용서하기가 어려운데 일곱 번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것은 사실 끝까지,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들의 의지로, 힘으로, 노력으로는 세 번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합니다.
그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 우리들이 무한정 용서해야 하는 근거와 할 수 있는 힘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 십자가 사건은 믿는 우리들의 구원의 사건인데,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용서의 사건입니다.
원죄도 자범죄도 지난날 모든 죄를 사하는 사건이며, 앞으로 지을 죄도 회개하면 사해지는 것입니다 (도표이용)
→ 우리들이 지은 죄의 값은 스스로는 다 갚을 길은 없습니다.
수백번 죽어도 안됩니다. 내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안됩니다 (마 18:25).
이것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용서함을 받지 못하면 그래서 자신의 죄를 가지고 육신도 죽어야 하지만 그 영혼도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종말에는 둘째 사망, 유황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계 21:8).
→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용서함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용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것과 같습니다 (마 18:24).
잠시 산수를 해보시죠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화폐 단위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약16년간 품삯이며, 일만 달란트는 약 16만년의 품삯인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백년도 못사는 우리들이 살아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돈이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도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49: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 그래서 우리들의 노력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죄의 삯인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못갚으니까. 빚을 탕감받는다는 것은 다른말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요, 사랑인 것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값 없이, 돈 없는 자도 와서 생수를 먹으라는 초청하는 것입니다. 생수는 영생수입니다.
[이사야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리고, 너희들이 예수를 믿으므로 이렇게 큰 것을 용서 받았으니, 너희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마태복음 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믿지 않는 자들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 18:28).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빚진 것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누가복음 12: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한푼은 영어로는 1 cent, 1 penny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위하여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사랑 앞에 눈물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 초림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찾아내어 심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가장 큰 용서의 사건이며 사랑의 사건이고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는다. 이게 복음입니다.
→ 그래서 “믿음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고행으로, 선행으로 뭔가 자기가 이룬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믿음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은혜의 기간인 것입니다. 지금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과 같이 십자가 위에서도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살리기 위하여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선포한 용서는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찌르고 욕하고 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용서를 선포한 것도 있지만, 오늘날 죄인인 우리들 모두에게 선포하신 용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난날, 어쩌면 지금도 예수님을 욕하고 찌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러니 지금도 예수님을 못 박고 찌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용서의 선포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죽어야 하고, 이방인인 우리들은 하나님 없이 살았으므로 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이런 용서를 선포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우리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 십자가 위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막 16:19).
예수님의 중보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고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 이런 용서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다면, 그는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마음 중심에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용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을 통해서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요즘 세상에는 용서가 안되는 세상입니다. 사랑이 식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전부 보복을 위해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 김대중 대통령이 잘하신 것도 많지만 보복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보복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정치를 보면, 서로 보복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전직 대통령이 대부분 감옥에 가고 자살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비극입니다. 지금 나라 간의 전쟁도 보복에 보복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한번은 그 보복의 고리를 끊으면 되는데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 이 보복에서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 용서를 우리들이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까? 예수님이니까 가능하다고요?
→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죽음 가운데서 용서를 선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분인 스데반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은혜를 입으면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직 가족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선포한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스데반을 생각하면서 용서의 삶을 사셔서 구원을 받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