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08, 2002. Written by C. J. Lee
<이 이야기 1편이 9월 13일에 올랐으니, 그 새 무려 거의 두 달이 지났다. 워낙 번잡한 성격이라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해하려면 복습이 필요할 거다>
CP 당번실로 새로 배속된 방우병은 참 똘똘한 선수였다. 그는 그 지방 P 대학교에서 일본어학과를 다니다 입대하였는데, 두뇌회전도 빠르고 또한 성실하였다. (드문 경우인데..)
그 날의 사건은 이 방우와 관계된 것이었다. 아니, 솔직히 다 술 때문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새로 온 방위병 환영회를 해 준다는 것이었고, 내부적 이유는 비서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였지만, 정말 솔직한 이유는 내가 술이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내가 얼마나 군기가 빠졌었는지도 말해준다. 도대체 대학도 아니고 군대에서 새로 방위병 왔다고 환영회를 해주겠다 했으니..그것도 이름을 '신입생환영회'라고 했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낯이 뜨겁다.
운명의 그 날. 장대비가 퍼붓던 날. 그러나 그 거센 빗발도 나의 음주慾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음주욕은 식욕의 일종으로, 거부할 수 없는, 성욕보다도 한 수 높은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므로 당연히 장마비 정도는 장애가 되질 않았다.
우리는 업무를 끝내고 장교우의를 꺼내 입고 보무도 당당히 부대 밖으로 나갔다.
(사병들의 우의는 판쵸 우의라서 입어도 별로 뽀다구가 나지 않는다. 꼭 저승사자 같다. 그래서 우리 CP에서는 군수과에 압력을 넣어서 장교우의를 공판 쳐 왔고, 그걸 즐겨 입고 다녔다. 그 긴 우의를 입으면 마치 독일군 장교 같이 뽀다구가 났었다.)
영감님 관사의 당번병들에게 우리의 환영회 계획을 알려주고 뒷일을 부탁한 후, 몇 번 들렀던 적이 있던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막 삼겹살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때였다. 불과 한두 해 전만 해도 백성들이 고기를 그렇게 보편적으로 먹지 않았다. 바야흐로 배달의 식탁에 고기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같이 다니던 많은 친구들은 현금동원력이 상당했었다. 집에서 용돈을 풍족히 줘서가 아니고, 사교육시장에서 열심히 후학을 가르치다 보니 만만치 않은 부수입이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방학 때만 열심히 뛰어도 (아니지.. 열심히 후학을 지도해도) 등록금 이상의 수입을 올렸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번 돈으로 등록금 내는 놈은 보질 못했다.
(친구들이 그 모양이었으니 나 또한..아~ 부끄럽다. 그 돈으로 학교 앞 하계동 논마지기라도 사뒀으면 지금은 더욱 심오한 인생공부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시절 우리 젊은이들에겐 너무 유혹이 많았었다. 언니들도 너무 예뻤고.. )
대신 우린 그 돈으로 이 나라 산업발전에 기여를 했다. 유흥산업. 교육사업에 종사해서 번 돈으로 대한민국의 유흥산업을 번창시킨 나와 내 친구들. 정말 자랑스럽다.
그렇게 수중에 돈이 넉넉해도 술을 마실 때 안주는 주로 빈대떡이나 조개탕 같은 것들이었다. 고기를 구워먹는 일은 없었다.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음식점도 별로 없었고. 그러던 것이 국민소득이 늘어서인지, 돼지 기르는 신기술이 개발된 건지 갑자기 전국적으로 삼겹살이니, 소금구이니 하는 간판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돼지고기를 생으로 구워먹는다는 것의 충격은 참으로 컸다. 전국에 순식간에 삼겹살 열풍이 불었고 배달겨레의 안주 패턴, 더 나아가 레저 생활까지 완전히 바뀌었다. 야유회니 하면서 놀러 다니는 사람들은 이제 솥단지 대신 불판과 렌지를 들고 다니게 되었고, 아울러 상추와 깻잎의 비약적인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그 때 나 또한 삼겹살의 오묘한 맛에 사정없이 충격을 받고 있었을 때였다. 게다가 난 군바리였고 그것도 졸병이었으니 오죽 했겠나.. 기회 있을 때마다 삼겹살만 찾았다.
나와 조수, 새로 온 방우. 우리 셋은 삼겹살 집에서 참으로 군인답지 않게 굽고, 먹고, 마셨다. 대한민국 군대생활 더도 덜도 말고 요만만 하거라.. 하면서..
밖에는 장대비가 계속 내리 꽂혔지만 우리의 취흥은 도도해져만 갔고, 1203 특공대 지휘부의 단합은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 신선놀음도 어느 덧 파해갈 때쯤, 갑자기 음식점 문을 박차듯이 뛰어드는 선수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영감님 관사 당번병인 성 일병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큰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야. 큰 일 났어. 빨리 올라가. 부대 비상야."
"비상이라뇨? 이 태평성대에.."
"하여간 지금 영감님이 CP에 못 들어가시고 있어. 너 찾느라고 난리 났어."
아뿔싸.. CP의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부대에 비상이 걸려서 영감님이 급히 올라오셨는데 열쇠도, 당번병도 없어서 사무실에 못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Oh..My God.. 나는 폼 나는 장교우의고 뭐고 집어치우고 ㅈ나게 뛰었다. 아.. 이런.. 이럴 수가..
참모부 건물에는 이미 단독군장을 한 중대원들이 주욱 깔려있었다. 나를 째려보는 고참들의 눈초리가 사납다. 나는 얼른 CP의 문을 열어놓고 영감님을 찾아 나섰다. 영감님은 상황실에 계셨는데, 나를 보자 물끄러미 위아래를 훑어보시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사무실로 향하셨다. 영감 뒤를 따르는 다른 참모들 대부분도 나를 그냥 덤덤하게 보고 지나갔는데, 행정과장과 본부중대장은 마루 밑의 멍멍이 같이 눈이 파랗게 되서는 이를 갈고 있었다. OMG..
아니나 다를까.. 영감님이 사무실로 들어가시고 내가 당번실을 수습해서 (수습할 것도 없었지만) 모든 게 정상 업무 상황으로 돌아왔을 무렵, 중대장이 당번실로 들어섰다. 그 때부터 나는 ㅈ나게 맞았다. 발길질, 주먹질.. 하도 중대장이 중국식 무협영화 풍으로 패는 바람에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아프단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맞기 바빠서.
그 날의 비상은 그 장대비 때문이었다. 그 억수 때문에 하동 지방에 물난리가 났다. 그것도 크게. 우리 특공대(특수공병대)는 도(道) 전체가 '나와바리'였고 ('야인시대'를 보다보니 ..), 지금도 그렇듯이 수해복구는 군바리들이 떠맡는 것이 거의 상식이라 비상이 내린 것이었다. 또 우리 부대는 특공대답게 당시의 어지간한 민간 기업보다 더 우수한 중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늘 앞장이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전쟁도 아닌데 무슨 비상이냐고 싱거워할지도 모르겠지만, 특공대는 그랬다. 특히 수해 때는..)
수해 때문에 걸린 비상이라 조치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장비를 재배치하고 작업대대 병력을 이동시키고.. 그런 일에는 이골이 난 특공대 아닌가? 부대는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참모들은 모두 정위치 하였고 영감님은 혼자 사무실에 계셨다. 내일 직접 수해지역으로 점검을 가실 것이고.. 이런 빠른 조치와 정상화 때문에 나는 더욱 두드려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번병이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맞을 일만 남은 것이다.
그 때 당번실의 그림은 이랬다. 처음엔 맞는 나를 측은히 바라보다 아예 뒤돌아 앉아 담배만 빨아대는 주임상사, 칸막이 뒤로 숨어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조수 (같이 술 마셨는데..), 점점 더 현란한 중국무술을 선보이는 중대장, 차렷 자세로 돌아오고자 무진 애를 쓰지만 날아드는 중대장의 손과 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
그런데.. 한참을 맞다보니 점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음향효과에 비해 별로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술김이라 그런가? 그건 아니었다. 틀림없이 중대장은 음향에 비중을 두고 나를 패고 있었다. 중대장은 영감님에게 자기가 지금 잘못한 당번병을 혼내주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이 아첨쟁이 중대장. 참 영악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예의 상당한 고수가 아닌가?! 그가 마음놓고 그런 식으로 팼다면 나는 아마 불과 5합을 견디지 못하고 후송을 갔을 거다. 역시 위관시절에 특전사에 있었다더니..
역시.. 버저가 울렸다. 영감이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맞던 매무새를 추스르고 영감 방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곧 죽어도 당당해야 한다. 나는 대 야리공삼 야공단 (大 1203 野工團) 지휘부의 근무병이 아닌가?! 나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큰소리로 여쭸다. 뻔뻔스러운 놈..
영감님은 또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기만 하셨다. 당황스러웠다.
"술 마셨니?"
한참만에 날아온 이 말은 당당하던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예.. 죄송합니다"
이렇게 뿐이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영감님은 다시
"지금 맞고 있니?"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이런.. 대답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영감님은
"본부중대장 들어오라고 해라" 라고 하셨다.
중대장의 의도가 잘 맞은 셈이었다. 밖에서 당번병 교육시키던 사람이 본부중대장이란 게 영감에게 전달되었으니까. 중대장이 영감 방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에 나왔다. 중대장은,
"너 임마 똑똑히 해" 라고 하고는 더 이상 '교육'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이렇게 그 장대비가 퍼붓던 날의 신입생환영회는 끝이 났다.
다음날. 나는 완전군장을 하고 연병장을 50바퀴 돌았다.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누가 봐도 '근무지 무단이탈'의 중죄를 지은 놈이 무슨 낯이 있어 불만을 갖겠나?! 입에서는 단내가 났지만 나는 힘든지 모르고 연병장을 돌았다. 그리고 그 것이 끝이었다. 나는 후폭풍으로 다가올 수많은 기합과 교육을 감수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중대 고참들의 집합도 없었고, 한 따까리도 없었다. 오히려 불안했다.
한참 후 주임상사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영감님이 특별히 지시하셨다는 것이다. 그 날 영감 방에 불려 들어간 중대장에게 영감님은 '당번병들은 종일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풀려고 술을 한 잔 한 모양이니까 더 이상 문제삼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중대 고참들이 못 건드리게 하고, 내무생활과 근무에서는 열외 시켜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래서 '또복이' 행정과장이 '영창 보내야 한다'고 악악대던 것도 흐지부지 되고, 중대 고참들도 아무 소리가 없었던 것이었구나...
그 날의 그 사건은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버린 셈이었지만, 한편으로 영감님에 대한 나의 송구한 마음은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영감님의 조치는 부대장의 재량일지도 모르지만 틀림없이 도를 넘은 '편애'였다. 그리고 그런 '편애'와 그에 보답하는 '무조건적인 보필'은 영감님과 내가 헤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