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힘이 된다
신새벽 소도시 대학 도서관에서 제자를 만났다. 글을 쓰다가 '텅 빈 공간의 형광등 불빛이 을씨년스런 분위기로구나' 라며
감상에 젖는 중이었다. 출입구의 안경 쓴 아가씨와 슬쩍 마주쳤을 뿐인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금세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팔 년
전쯤 서산에서 근무할 때의 그 소녀다. 문득 하나의 그림이 떠오른다. 담장 앞에서 우르르 치마를 내리며 쪼그려뛰기하던 풍경이다.
등굣길 국어선생과 눈이 마주치자 기합 받는 와중에도 싱글싱글 손바닥 V자를 흔들었던가. 유리창으로 성에꽃 하얗게 번지던 그
초겨울도 여덟 바퀴가 돌았다. 임용고시 재수생, 올해는 1차를 통과한 상태에서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대학 졸업 후 꼬박 1년 동안 책상머리에서 글자 수 맞췄다는 사연을 들으며 짧게 여명을 맞이했다. 교사를 꿈꾸는 그니와
헤어지며 문득 주마등처럼 스치는 한 해를 돌이켜본다.
먼저 촛불이다. 시작은 여고생부대의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라는 이색 슬로건부터였다. 토론장 저쪽에선 기타 소리,
유모차 행진, 스포츠 댄스와 촛불 행진이 범벅되어 집회와 놀이의 합종으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70-80’의 굳은 비장함과는
달리 밝고 명랑한 마당잔치로 만감을 교차시켰다. 일회용 종이컵들이 일제히 대오를 맞추어 촛불들의 바람을 막아주면서 ‘껍데기와
알맹이의 행복한 만남’을 만들기도 했다.
다음으로 올림픽이다. 보수와 진보가 모처럼 하나 되어 박수쳤다. 박태환의 수영과 장미란의 역도 금메달 그리고 쇠붙이의
종류는 다르지만 핸드볼 ‘우생순’의 동메달이 브라운관을 열광시켰던 것 같다. 수영 7관왕 마이클펠프스나 자메이카의 인간탄환
우사인볼트를 보면서 ‘강한 몸의 가치’도 새롭게 실감했다. 또 있다. 시련을 헤치며 동참하는 ‘의지의 몸’들이다. 소말리아의
요마르 선수는 이슬람민병대를 피해 탈출하듯 200미터에 참가하여 ‘행복한 꼴찌의 환호성’을 질렀다. 바레인 단거리 여자 선수는
히잡과 추리닝으로 온몸을 두른 채 야생마처럼 치달렸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리 디 투아는 절단된 외다리로 10킬로 수영을
주파하여 19위를 기록했다. 그 올림픽 팡파레 속으로 아픈 사연들이 장막으로 가려지기도 했던가.
비정규직의 눈물겨운 절규가 그것이다. 평범한 민초들이 밥그릇을 빼앗기면서 질긴 머리띠 행렬의 스크럼을 만들었다. 3년
투쟁의 장도에 선 KTX 여승무원들의 메아리가 쩌릉쩌릉 옆구리를 찌르더니 마침내 절반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을 듯하다. 기륭전자
1000일 투쟁과 60여일의 목숨 건 단식은 처절함 그 자체다. 그렇듯 ‘박봉의 일터’로 돌아가려는 아픈 외침이 국민소득 2만불
시대의 명암이다. 장막에 가려진 무수한 사연들. 그 장벽의 간극을 메꾸는 점액질을 떠올리며 신발끈을 조인다. 어느 새 교단생활
스물다섯 해. 그렇듯 올해도 무수한 사태들이 노랗고 파랗게 피어올랐다.
실용정부의 교육정책은 ‘아륀쥐’ 때부터 지지받지 못했다. 공청회 구성원들은 ‘두 손 두 발을 들어 박수친다’고 브라운관을
흔들었지만 정작 현장에선 전혀 아니었다. 관료들 중에서도 박수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국제중 설립도 그렇고 0교시 수업이나
줄 세우기 일제고사도 그랬다. 정보공개에 대한 불안감도 일파만파로 예고되는데 웬 보고서가 그리도 쏟아지는지 컴퓨터 앞에서 떠날
틈이 없었다.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망합니다.’
그 어리둥절한 현수막 제작팀이 박빙의 차로 서울시 교육계 수장으로 입성하면서 깜짝 사태가 더욱 급물살을 탔다. 급기야
뉴라이트 등의 보수단체에서 전교조를 파렴치 집단으로 만든 후 전교조 교사명단을 공개하겠다며 황당 카드를 내밀었다. 전교조 교사가
많은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의 아이들 성적을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오히려 누가 이기나 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단순할수록 자기 확신을 공격성으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토씨나 글자 몇 자로 새싹들의 사고를 바꾸겠다는 것일까. 4.19는
‘데모’가 되었고 멀쩡한 역사교과서가 저자의 동의 없이 내용이 바뀌는 시대가 되었다. 좌우지간 막무가내다. 이 말은 선동이고 저
말은 배후 조종이며 이렇게 하면 좌편향이란다.
‘설마’하던 소심증들이 현실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12월 10일 초등학교 6학년 일제고사를 계기로 쌍팔년도식 무작위 징계가
소나기처럼 쏟아진 것이다. 정상용 선생님, 최혜원 선생님, 박수영 선생님, 송용운 선생님, 설은주 선생님, 김윤주 선생님,
윤여강 선생님이 그 이름자다. 2급수 3급수 온갖 물고기가 혼재된 벌판에서 살아가던 교단의 일급수 열목어들이 저수지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스물여섯 최혜원 선생님부터 지천명의 윤여강 선생님까지 세대를 불문하고 파면ㆍ해임 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송용운 선생님은
89년 이후 두 번째 해직의 길을 걸어야 한다. 오마이뉴스에선 곧바로 해직과 석별 그리고 출근 투쟁의 화면을 톱밥처럼 쏟아내었다.
먼저 아이들과 쫓겨난 선생님이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장면이다. 기자들이 교실에 카메라를 디밀자 “안 돼요? 아이들에게도 초상권이
있습니다.”라며 막아서는 쓸쓸한 스냅도 등장한다. “민간인 신분인데 수업을 하려네요.” 하는 소리로 가슴에 못이 박힌 김은주
선생님의 스크린이 나타나자 잠시 세상의 물상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보수언론은 정상용 선생님을 '남의 자식을 팽개치고 자기 자식만 시험을 치르게 했다’며 재빨리 마녀사냥의 채비에 나선다.
절묘한 순발력이다. 선생님의 딸은,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일제고사 선택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고 혼자만 빠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시험을 보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정과 학교에서 모두 선택권을 주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나쁜 펜’
집단에선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 출근길,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가진 설은주 선생님이 동료교사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옆 자리 두 명의 여교사는
쫓겨난 선생님을 부축하느라 정작 즈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다. 베를루트 브레이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글귀가
겹치면서 모두의 눈동자에서 이슬의 폭포가 흐른다. “얘들아, 나라에서 선생님과 너희들을 분리하라 하거든.” 안절부절하는 관료의
목소리에 달그락달그락 밥고리 잡는 소리가 들린다. 동직원 끼리의 민망사태를 넘기며 다시 마우스를 누른다.
이번에는 닫힌 교문 앞에서 또 다른 관료와 대치해있는 정상용 선생님의 사진이다. 파란 하늘을 가르치려는 그니의 굳은 표정
앞에 마스크를 쓴 채 교문을 지키는 관료의 모습 앞에서는 찬바람도 안타까워 옷깃을 여민다. 이제 교실 밖으로 펼쳐진 비탈길에 어떤
숨결을 모아주어야 할까.
문득 5공화국 청년 시절의 스크린이 겹쳐진다. 낭만주의자 이십대 청년이었던 나는 그야말로 소박한 마음으로 교단에 섰었다.
칠판은 밥과 술을 주었고 우렁각시처럼 날마다 뒤를 보살펴주었던가.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나는 단지 소박한 글쟁이 교사로
정년퇴임까지 칠판 앞에 서겠다는 그런 꿈을 꾸었었다. 그랬다. 사내아이 계집아이 마주선 그 자리에서 오그르르 옛날 얘기에 빠진
늙은 교사의 파안대소 풍경으로 마침표를 찍겠다고 결심했었다. 아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따라주었고 나는 쨍그랑쨍그랑 유리알 깨지는
소리에 취해 날마다 행복했다. 시국은 흉흉했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여파가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활자판에 터지는 시국
사건들을 수시로 접하면서 ‘어쭈구리 또 한 번 엮네’ 하는 정도였다. 그런 남의 일들이 느닷없이 내 발목을 잡을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내 이름을 TV에서 먼저 보았다. 그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유상덕 김진경 윤재철 선생님이 구속되었고 몇몇은
피신해 다닌다는 속보였는데, 내 이름자가 후자에 섞여 있었다. 기실 해직 사유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당시에 흔히 있었던
‘사립학교 교사 채용과 기부금’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80매였다. 신새벽 소도시 경찰서에 끌려가면서 그 내용이 허위사실 유포로
규정되었고 그래서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는 흐름도에 쏠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쫓겨났던 그 소도시에 나타나는
것조차 경계했다. 발자국마다 선동이고 의식화란다. 떠밀리듯 거리로 나섰고 심약한 나는 날마다 상처받았다. 나를 찾아온 학생들이
이튿날 또 야단을 맞았다는 소식을 들으며 ‘가슴이 아프다’라는 문구가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육체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야 했다. 2008년 겨울의 일제고사 해직 선생님처럼 “얘들아, 선생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올게.”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 때
나는 “얘들아, 나는 너희들 옆으로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구나.” 라고 그대로 말해서 아이들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러나 절대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기에 현관문 나설 때마다 다시 의자를 되찾겠다며 허리띠를
조여매었다.
그리고 강산이 두어 번 바뀌었다. 그 학교 담벼락에서 새로 오신 선생님의 인사 말씀을 들으면서 담쟁이 넝쿨을 쥐어뜯던
사연도 까마득한 기억이 되었다. 세상이 아파서 내가 아프던 ‘70-80’의 시국이 쏜살같이 지났고 핸드폰이나 디지털과 승용차가
번뜩거리는 본격적인 자본주의 온난화 시대가 도래했다. ‘루카치의 별을 보던 마음’ 쓰다듬던 청년교사는 어느 덧 서리가 하얗게 내린
장년의 평교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재단사나 노동자가 되고 요리사나 공무원 그리고 주부와 경찰과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슬리퍼 굽을 치며 교실을 연다.
이제 칠판 앞에서 예전처럼 설레지 않는다. 그냥 쳐다만 봐도 예쁜 꾸러기들이 큰아버지 같은 국어 선생 머리 꼭대기에 널따란 놀이터를 만든다. 국어책 뒤에 숨어 온갖 부스러기 깨물다가 스트레스 풀듯 한 마디 던진다.
“선생님은 왜 교장 선생님이 못 되셨죠?”
“시간이 가면 그냥 되는 줄 알았겠지. 아싸 -.”
눈텡이에 반창고를 붙인 이놈은 ‘누님 같은 꽃’이 된 옛 제자의 아들이다.
“얘들아, 공부해서 남 주자.”
장년의 평교사는 사춘기를 머리를 일부러 벅벅 긁어주며 시치미 뗀다. 유리창 너머 배추 뿌리 뽑아낸 자리로 억새꽃만 허옇게 휘날린다. 하굣길 터미널 부근에선 더 적나라하다.
“엄마 아빠가 매일 싸워요. 요샌 아예 말도 안 해요.”
“얌마, 우리 아빤 엄마가 늦게 일어난다고 베개로 때렸어.”
그러더니 아이스크림 한 입씩 깨물더니 전봇대 뒤로 까르르 사라진다. ‘요즘 애들은 참’ 그런 혀를 내두르는 푸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피라미드에도 요즘 애들은 예전과 다르더라‘는 문구가 적혀있지 않던가. 차창 밖은 어둡다. 십이월 퇴근길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아이들의 그림자까지 덮어버렸다.
그 위로 임용고시 준비생 제자와 집나간 아이들이 알록달록 펼쳐진다. 이번에는 일제고사 해직교사 선생님들 사진 위로 십구 년
전 전교조 해직교사의 사진들이 겹쳐진다. 괜찮다. 일하면서 멍든 발등은 아프지 않다. 슬픔도 서로 기대면 더 큰 힘이 된다.
그릇된 가르침은 사람을 부려먹는 데만 몰두하지만 바른 가르침끼리 힘을 모아가며 세상을 섬기며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내
글들은 골목길 찾아 씨 뿌리는 촛불들을 지켜주는 종이컵으로 남고 싶다. 세파에 쏠릴 때마다 맨살을 태우며 알맹이를 지켜주는
껍데기로 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 자꾸 눈시울이 젖는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난롯가에서 해직교사의 못 다한 이야기꽃 벌겋게 피우고 싶은데 공문서에 쫓기는 학교는 ‘먼 바다 작은 섬’처럼 묵묵부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