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강 한국사회 윤리의 재건
1. 윤리학을 하게 된 이유
[도올]
윤리학에 대해서 그렇게 전체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평생 그 분야에서 공부해오신 대가가 아니면 정말 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제 하신 강의를 보고 윤리학이 무엇인지 터득하면 좋겠다.
선생님께서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평생 윤리학이라는 고고한 학문을 하시면서도 끊임없이 철학문화운동을 하고 계시다.
철학을 우리 삶과 동떨어진 서양철학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화로서, 특히 젊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철학을 알아야만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2,30년전부터 계속 철학문화운동을 주도하고 계시다. 그런 일에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계시다. 그래서 항상 젊은 마음으로 사시는 거 같다.
오늘은 선생님이 어떻게 젊은 시절에 윤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는지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윤리학이라는 주제를 여러분들 마음속에 좀더 깊게 새겨보는 시간을 만들기로 하겠다.
[김태길]
또 만나서 반갑다. 사실 난 처음부터 윤리학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1943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청주에서 5년제 중학교를 나오고 일본 쿄오토(京都)에 있는 3년제 제3고등학교(第三高等學校)를 입학했다. 제3고등학교는 당시 최고의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명문이었다.
그러니깐 종전(終戰) 1년반정도 전이다. 그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의 무슨 과를 갈지 생각했다. 처음에 하려던 학문은 종교학이었다. 내가 제3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들은 강의 중에 가장 감명 깊은 강의는 야마야 교수의 법학강의였다.
야마야(山谷)교수의 법학강의에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고등하교는 우리나라 현재 대학교 교양학부과정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 분의 법학에 대한 강의가 좋은 게 아니라, 법학강의를 하시다가 딴길로 갔을 때가 정말 좋았다. 예를 들면, 그때가 전시인데 일본의 군국주의를 마구 질타하셨다. 태평양 전쟁은 잘못된 거라고 질타하셨다. 얼마나 용감한 분인가?
야마야(山谷) 교수는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를 질타하였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있었으며 군국주의적 윤리의 강요가 심했다. 야마야의 행동은 용감했다.
그 밖에 일본 사람은 너무 옹졸하다고 하셨다. 옹졸한 것을 증명하는 예로서 화장실에 갈 때 앞단추부터 먼저 풀고 가는 것을 들었다. 앞에 가서 천천히 하면 되는데 뭐하러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일본 사람의 국민성부터 고쳐야 된다고 하셨다. 이런 말이 굉장히 감명 깊었다.
그런데 그 양반이 그렇게 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그 분의 과거와 관계가 있다. 그 분은 내가 다닌 학교의 선배인데, 졸업을 하고 일본 동대 법학부를 갔다. 법학부는 일본 동대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학과였다.
동경대학(東京大學) 법학부(法學部)
일본의 최고수재들이 다닌 곳. 일본의 관료세계, 법조계는 동대 법학부 출신들이 지배한다. 엘리키즘의 본산. 1877년 설립.
거길 들어가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또 수석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대단한 천재다. 당시 수석을 한 사람은 정계(政界) 쪽에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었다.
그래서 졸업 후 관계(官界)로 들어갔다. 그런데 과장까지 하다가 그만 두었다. 관리 생활의 지저분한 이면(裏面)을 보고, 사람으로서 갈 길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어렵게 한 공부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종교학과에 갔다. 그래서 나는 그 분이 종교학과에 갔기 때문에 그렇게 당당한 말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법학만 해서는 저렇게 되지 못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야마야 교수를 닮고 싶어서 종교학을 할까 했는데, 그래도 주저한 바가 있어서 경도제국대학의 조선인 선배들과 상의를 했다.
10대의 소년, 소녀들에게는 닮고 싶은 정의로운 인간의 모델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더니 ‘무슨 말이냐? 네가 지금 종교학을 할 때가 아니다. 인간적인 수양을 하려면 종교학을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조선이 얼마 안 있으면 독립하게 되어 있다.’는 거였다.
나는 당시 몰랐는데 그때 선배들은 단파 라디오를 듣고,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말했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러니깐 불원간에 독립할 나라의 국민으로서, 우리가 누구냐? 엘리트다! 엘리트가 정치에 마음을 두어야지, 종교학 같은 것을 배우는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안된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나도 동경대 법학부를 들어갔다.
김태길 선생은 1943년 동경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당대의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드문 영예였다.
들어갔다가 나와서 졸업을 하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나는 충주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계속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당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것이 전국에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1945년 8월 15일 기존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여운형이 결성한 좌우연합의 통일전선체
그래서 건국준비위원회 충주지부에 가봤더니,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도 누구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회의할 때, 동의요, 재청이요 하는데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걸 보면서 그 사람들이 너무 우수해서, 나는 도저히 정치는 따라갈 수 없다고 느꼈다.
그 다음에 간 것이 윤리학이다. 왜 윤리학이었냐 하면, 해방직후 우리나라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 사람들이 많은 재산들을 놓고 갔다. 보따리 싸고 못 가져간 것도 있고, 집도 놔두고 갔다. 그렇게 일본사람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적산(敵産)이라고 했다.
적산(敵産)
자국내에 있는 적국인 소유의 재산, 해방 후 일본인이 남긴 재산
적산은 재빨리 차지하는 사람의 것이 되었다. 그러니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힘세고 재빠른 사람이 차지했다.
[도올]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라는 말인가요?
[김태길]
그렇다.
그리고 또 한 가지로 일본사람들이 가고 나니깐, 탐나는 취직자리가 많이 났다. 그 전에 일본사람이 있을 때는 기껏해야 군수였는데, 이제는 장관도 할 수 있고, 대학총장, 교수도 할 수 있었다. 탐나는 자리가 마구 나왔다.
그런 곳에 이력서를 위조해서 마구 취직을 했다. 히로시마는 폭격을 맞아서 조회를 할 수 없으니깐, 히로시마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서 취직을 했다. 조회를 할 수 없는 북경대학을 나왔다고 위조를 해서 마구 취직을 했다.
히로시마 대학(廣島大學)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시에 있었던 국립대학. 1929년 설립
그 뿐만 아니라, 당시 유명한 학자들도 책을 낼 때, 일본 사람의 책을 마구 베꼈다. 자기의 번역이라고 하지 않고, 자기의 저서로 내었다.
우리나라 학계는 표절(plagiary)이 성행했다. 그 유습이 아직도 잔존해있다.
그럴 정도로 도덕이 마구 무너졌다. ‘이건 안되겠다. 나라가 이렇게 도덕이 문란해져서는 나라꼴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도덕운동을 해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원래 윤리학자가 되어서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윤리운동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방 후 윤리적 무정부상태를 목격하고 윤리적 사회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윤리운동을 하려면 내 신념체계가 먼저 서야 한다고 보고, 그 신념체계를 세우려면 윤리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법과 를 포기하고, 철학과로 갔다. 그랬더니 주변에서는 그런 바보짓을 왜 하느냐고 말렸다. 출세를 하려면 법과을 가야하는데, 윤리학해서 뭐하겠냐고 다들 말렸지만, 나는 그것을 했다.
윤리적 신념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 윤리학을 공부했다. 그 후 미국 발티모아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Johns Hopkins)에서 철학박사를 획득(1960), 서울대학 교수가 되었다.
윤리운동을 하겠다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은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감동을 했기 때문이다. 상록수의 주인공이 농촌의 정신운동을 한 것처럼 윤리운동을 크게 해서, 전국적인 규모의 청년운동을 해보려는 생각이었다.
심훈(沈熏, 1901~1936)
소설가. 시인. 영화인. 경성제일고보, 항저우 조지앙대학(之江大學) 다님.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특별공보에 당선. 연재되어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세상을 몰랐다. 그 당시의 사정으로 청년 단체를 조직하려면, 그건 우익단체거나 좌익단체여야만 했다. 좌도 우도 아닌 중립적인 단체는 성립이 불가능했다.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해방 후 모든 조직활동은 좌, 우 이데올로기에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윤리운동은 정치적 중도로 가야지, 어느 한 쪽에 쏠리면 윤리운동이 안된다. 내가 세상을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윤리운동은 좌, 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운동이어야만 했기에 나는 윤리학이라는 학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또 한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단체를 만들려면, 많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돈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깐 돈도 필요하고, 좌우의 싸움도 없는 그런 사회라야 가능한 윤리운동을 무지한 내가 하려고 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윤리운동을 못하게 되니깐,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깐, 그걸로는 교수를 하는 길밖에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수는 절대로 안 하려고 결심했었다. 내가 지금도 말을 더듬는데, 젊어서는 말을 더 많이 더듬었다. 말을 더듬는 사람으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은 갖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 교수다. 그래서 교수는 절대로 안하겠다고 생각했는데, 팔자에 있는 건 할 수 없는 거 같다. 하다보니 다른 것은 못하니깐, 배운 도둑질은 그것밖에 없으니깐, 어떻게 하다보니깐 교수가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정년퇴직까지 윤리학을 가르쳤다. 정년퇴임을 하고 젊어서 하고 싶었던 윤리운동을 좀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철학문화연구소라는 재단법인이다. 잡지도 내고, 강의도 했는데, 제일 첫 번째 강의를 도올 선생이 했다. 나하고 둘이 하자고 해서, 12번 가운데 2번은 내가 하고, 도올 선생은 10번 하겠다고 했다. 나하고 둘이 하게 되면, 도올 선생 말솜씨에 내가 납작하게 되는 거였다. 그런 작전으로 김태길을 누르는 많은 사람이 왔다.
김태길 선생님의 철학문화연구소의 첫 사랑방강좌를 도올 김용옥이 맡았다. 광화문 페스티발 앙상블 미도파 사옥에서 열렸는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1989년 봄이었다.
도올 선생은 철학문화연구소 강의에 협조해주신 분이고, 그때 인연을 맺게 되었다.
2. 가치 서열의 인식
윤리라는 것을 좁게 해석하면, 행동이 되겠지만, 기본적인 것은 가치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덜 소중하냐는 가치 체계를 세우는 게 윤리의 가장 기본이다.
[도올]
가치에도 서열이 있는거죠?
[김태길]
그렇다. 가장 높은 가치에서 가장 낮은 가치까지 그 서열을 잘 알고, 그 서열에 따라 자신의 가치 체계를 갖는 게 제일 중요한 윤리의 과제이다.
윤리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의 서열을 인식케 만드는 것이다.
- 김태길·학술원 회장
한국사람들이 가치 서열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우선 사고방식이 너무 감정에 휩쓸리면 안된다.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감정에 휩쓰리지 않고, 냉철하게 생각하고, 깊게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고, 또 논리에 맞게 바르게 생각하는 좋은 사고방식을 갖도록 하는 운동을 해보고 싶다. 이것이 윤리를 마음에 둔 철학운동의 한 가지 내용이다.
한국인은 너무 감정에 치우치는 습성이 있다. 냉철한 이성으로 넓고 깊게 생각해야 한다. 감정은 예술을 발전시키고 인정을 넘치게 만들지만 사회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성이다.
3. 종교와 철학
[도올]
철학하는 사람들은 어떤 종교나 종파에 자기 신념이 얽매어버리면 철학하기 곤란하다.
철학은 무전제적 사고이다. 어느 특정 종교신념에 헌신하거나 구애받는 사람은 진정한 철학인이 될 수 없다.
선생님의 사모님과 자손들은 모두 열심히 교회를 나간다. 선생님은 종교가 아닌, 이성적 지성으로 냉철하게 윤리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어떠한 모범이 되어야겠다는 삶의 자세을 갖고 계신 거 같다.
그런 선생님의 태도를 보면서, 특히 저는 철학사에서 스피노자 같은 사람의 전체를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도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스피노자의 ‘영원의 상 아래서’ 모든 것을 보자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해 주시는 좋을 거 같다. 스피노자의 윤리관을 하나 소개해 주시죠.
Amor fati
운명애라는 철학자 니체의 개념. 운명이라는 필연의 긍정
영원의 상 아래서(sub specie aeternitatis)
스피노자 철학의 개념
우주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성적 구조로 파악한다.
[김태길]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2, 3년 전 하와이 가서 1년 있었는데, 거기에 외국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사람이 나 보고 너의 신앙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신앙이 없다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내가 보기엔 너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미국에서 종교가 없다고 하면, 불한당처럼 여긴다고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앙이 없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 사람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뭐든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 체계를 말한다. 옳은 길과 그른 길에 대한 생각을 넓은 의미의 신앙으로 말한다.
그 다음부터 신앙이 없다는 말을 되도록 안 한다.
[도올]
어떤 특정한 종교적 제도에 속하지 않더라도 자기에게 윤리적인 신념이 있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이것이 옳다고 하는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그는 이미 신앙인이다. 신앙인이란 종교적 제도에 복속해야만 얻어지는 타이틀이 아니다.
[김태길]
도올 선생이 말한 것처럼, 우리 집의 아들, 딸, 며느리, 노처까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다. 그래서 나보고 자꾸 믿으라고 그랬다. 그래서 너희들이 믿는 것을 내가 말리지 않는 것처럼, 너희들이 나한테 믿으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종교라는 것은 강요할 게 아니다. 자유로 맡겨두자고 그랬더니 이제 종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윤리학, 철학을 하는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상체계를 전부 다 뜯어고쳐야 하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철학(윤리학)하는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상체계 전체를 뜯어고쳐야만 가능하다. 나는 그런 철학적 이성이나 논리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 없었다.
아들, 딸들은 나한테 종교를 믿으라고 감히 못하고, 우리 집사람은 기도를 한다. ‘이 사람이 믿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한다. 그런데 그 기도발이 먹힐 거 같지 않다.
철학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발이 먹히지 않는다.
4.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큰 인물이다. 그 사람의 중요한 철학적인 명제는 ‘실체는 하나다.’ ‘전 우주가 하나로 연관된 것이다. 그 실체는 바로 신이다.’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성주의적 범신론(Pantheism)
실체(Substance) =신(God,Deus)=우주(Nature)
그런데 그가 말한 신은 인격신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이법(理法)을 말하는 거 같다.
신(God,Deus)=우주의 이성적 이법(理法)
그는 모든 우주 혹은 세계의 변화는 어떤 인과법칙을 따라서 생긴다고 했다. 그 일이 꼭 생길만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생긴다고 했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인과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니깐 가령 애인이 나를 배신했다고 하더라도 배신할만한 원인이 있어서 한 것이다. 나한테든, 그 사람한테든, 또는 제3자한테 있든 필연불가피하게 배신이 생겼으니깐, 그 사람을 내가 미워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우주 속에서는 필연과 자유가 일치한다.
[도올]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델란드에서 살았던 유태인이었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 ~ 1677) :
네덜란드의 다이애스포라에서 살았던 유대인으로서 매우 포괄적인 이성주의(rationalism) 철학을 구축함. 『윤리학』(Ethica)이 대표적 저술이다.
유태인들은 상당히 박해를 받았는데, 비교적 네델란드에서 박해를 안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우주 밖에 있는 신이라는 것은 없고, 신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신이라고 했다. 그러니깐 모든 자연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자연의 이법과 같은 것이니깐, 우리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과적 법칙 속에 있다고 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해서, 이 사람이 유태인으로부터 파문 당한 사람이다.
그래서 네델란드에서 아주 어렵게 렌즈를 갈면서 살았다. 이 사람이 광학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있어서, 그 일을 하면서 다락방에서 살았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김태길]
스피노자는 19살 때 논문을 냈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우주 전체였기 때문에 인격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도올 선생 말한 것처럼 스피노자는 유태인이었고, 유태교의 신이나 기독교의 신이나 인격신이긴 마찬가지다.
유대인 사회에서 인격신을 거부하는 것은 무신론적 주장이며 파문(excommunication)의 대상이다.
그런데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아 19살 때 논문을 썼다. 그러니깐 유태교 세계에서는 큰일이 났다. 이건 민족 반역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태교에서 파문을 시키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많은 돈을 유태교회에 헌금해서 처음에는 파문을 안 시켰다.
파문은 안 당했지만 제대로 취직은 못하고, 네델란드에서 렌즈를 갈고 있을 때,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정교수로 초빙을 했다.
스피노자는 16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철학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스피노자의 이름이 벌써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교수로 초빙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 스피노자는 그걸 거부했다.
어떤 한계 내에서 철학하는 자유를 삼가해야 종교에 간섭하지 않게 될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속세의 지위를 바라기보다는 평정을 사랑합니다. 교수 취임을 사양합니다.
- 스피노자
철학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는 제한을 받는다면 교수를 안 하겠다고 했다. 렌즈를 갈면서 가난하게 살지언정 안 하겠다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스피노자의 일화를 한 가지만 더 하겠다. 네델란드를 두고서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을 하면서, 프랑스군이 네델란드에 진주했다. 그럴 때 프랑스군의 총 사령관이 스피노자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그 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철학적인 담론을 하자면서 자기의 군막으로 초청을 했다.
1672년 프랑스 침략군 사령관 콩데공(the prince de Conde)은 스피노자를 철학적 담론을 위해 사령부로 초대했다. 홀란드전쟁(1672 ~ 1678)때의 사건.
그래서 별 생각없이 초대에 응해 군사령관하고 철학 이야기를 오래 하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오해가 생겼다. 그때 네델란드는 프랑스 편이 아니었다. 프랑스 총사령관의 막사에 가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으니깐, 스피노자가 스파이 노릇을 안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파이라면서 군중들이 몽둥이, 괭이, 이런 것을 들고, 집을 에워쌓다. 군중들이 어서 나오라고, 죽인다고 했을 때, 스피노자는 태연히 나타났다. 피해서 달아나려고 했으면, 거기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사실 나는 여러분이 생각하듯 스파이노릇을 안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하고 끝냈다. 내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 태도가 너무나도 태연하니깐, 사람들도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스피노자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기 때문에 그의 진실이 군중의 오해를 가라앉혔다. 스피노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간이었다.
5. 스피노자의 정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아들이니깐, 재산의 대부분이 아들에게 상속이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 덕분에 파면을 면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깐, 끈 떨어진 뒤주박처럼 되어서 파문을 당했다. 파문 당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아주 무력한 사람이다.
파문은 유대인사회에서 죽음이나 같은 무서운 형벌이었다. ‘낮에도 밤에도 그를 저주하라. 누울 때도 일어설 때도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그를 저주하라! 신은 영원히 그를 용서치 않으리라! ...’
파문당한 사람은 누가 건드려도 어디에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런 무력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래서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무력해지니깐, 재산을 탐내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남이 아닌, 누이와 매부가 재산을 억지로 뺏을려고 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재산을 빼앗기는 게 아까운 게 아니라, 이것을 빼앗기면, 정의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탐욕에 의하여 정의가 무너질 수는 없다."
-스피노자의 제소이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끝까지 싸워야겠다고 해서, 그 문제를 네델란드 법정에 고소했다. 그 법정은 정당하게 판결을 내려서 그 재산이 스피노자에게 돌아가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받은 것을 그냥 누이와 매부에게 주었다.
재판에 이긴 후에 전재산을 누이와 매부에 주어버렸다.
그건 내가 재산 때문에 한 게 아니다.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고소를 했다는 증거였다. 그런 일화도 있었다.
[도올]
그러니깐 재산을 뺏으려는 사람한테 재판을 해서, 사회 정의가 그런 탐욕에 의해서 무너질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재판에 이기고 난 다음에는 자기 누이하고 매부한테 재산 전부를 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자기는 가난하게 살았다.
6. 우주는 하나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슬퍼하거나 기뻐할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거시적인 법칙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모두 우주라는 하나의 실체 속에 있다.
필연과 자유는 일치한다. 모두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가 하나이니깐 인간이란 존재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독립된 개체일 수가 없다. 나무에서 나뭇잎들이 자기는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뿌리부터 꼭대기까지 다 연결되어 있듯이 이 우주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법칙적 세계이다. 그것을 전부 알게 되면, 상당히 많은 윤리적인 악이 해소될 수 있다. 스피오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주전체의 포괄적 인식에 도달하는 이성적 행위를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Intellectual Love of God)이라고 불렀다. 이 사랑에 도달하면 부분적인 악은 해소된다.
[김태길]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다. 사람들은 결국 싸운다. 싸운다는 게 뭘 의미하냐 하면, 왼팔과 오른팔이 서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뭇잎들이 서로 많은 태양광선을 받으려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 하나다. 하나인 실체가 부분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평화론자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국가의 목적이 개인의 자유의 촉진에 있다고 보았으며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법률을 부정했다.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6. 한국이 지향할 윤리적 가치
[도올]
우리 사회가 이념을 넘어서 지향해야할 윤리적 목표로 뭐가 있을까요? 이런 것을 말씀해 주시죠.
[김태길]
한국 사람들의 가치관은 서로 협력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한국 사람들에게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말로는 인격. 우정,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돈, 권력, 향락이다.
한국사람이 실제 행동으로 표현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돈, 권력, 향락이다.
그런데 인생에서 돈, 권력, 향락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믿는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협력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은 그 전체 총량이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6년도 한국이 가지고 있는 땅덩이는 일정하고, 한국이 가지고 있는 탐나는 권력의 자리도 일정하다. 대통령 자리도 하나, 장관도 몇 자리밖에 없다. 숫자가 국한되어 있다. 돈도 국한되어 있고, 향락의 기회도 돈으로 사야하니깐 국한되어 있다. 이렇게 국한된 걸 가지고 서로 다투면 협력이 안된다. 협력이 안되면 사회는 결국 쓰러지게 되어 있다.
서로 협력이 잘 될 수 있는 가치관은 돈도, 권력도, 향락도 아닌, 얼마든지 전체 총량을 늘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뭐냐하면, 나는 그걸 ‘내면적 가치’라고 부른다.
돈·권력·향락은 제한되어 있다. 인간에게 제한 되어있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의 협력이 가능한 가치는 내면적 가치(internal values,)이다.
내면적 가치는 외면적 가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말이다. 외면적 가치의 대표적인 것으로 돈, 권력, 향락이 있다. 내면적 가치는 인격, 평화, 자유, 건강, 생명, 우정 등과 같은 것이다. 내면적 가치는 굉장히 수가 많다. 내면적 가치를 서로 최고의 가치로 알고, 우리가 추구한다면, 얼마든지 총량을 늘릴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건강한 사람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남자들이 건강하다고 해서, 여자들 건강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장수(長壽)라는 게 TO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울 사람이 오래 살아도, 부산 사람이 오래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우리가 서로 내면적 가치를 많이 키우려고 한다면, 총량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인생 설계만 잘 하면, 누구나 자신이 갖고 싶은 인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굉장히 풍부한 내면적 가치 세계를 제쳐놓고, 쓸데없이 좁은 외면적 가치 세계를 향해 서로 달려가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잘못되고 어리석은 가치관이다. 이 말을 여기서 강조하고 싶다.
인생 설계만 잘하면
내면적 가치는 그 총량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도올]
선생님 말씀에서 답이 나온 거 같다. 우리가 이념을 이야기한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가지 이념이 있지만, 그런 이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운동을 하게 된 것이고, 그 운동이 조직을 갖게 되고, 또 어떠한 교리체계를 갖게 되면서,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념의 본래적 의미는 어떠한 정치적 입장이나 제도적 입장이 아니다. 지금 말씀하셨듯이 인격, 평화, 자유, 건강, 생명, 우정과 같은 조금 더 추상적인 가치를 놓고, 우리가 공동으로 이러한 가치를 어떻게 살려가야 할지 노력해야 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결국 인간답게 살자는 인간세의 윤리적 가치에 종속된다. 따라서 그 소이연이 되는 내면적 가치, 인격, 평화, 자유, 건강, 생명, 우정 등을 통하여 모든 이념을 통합하여야 한다.
북한 사람들도 건강하면 좋지 않겠나? 북한 사람들도 모두 평화로우면 좋지않겠는가? 그러니깐 이념의 문제를 떠나서,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서, 나가는 것이 훨씬 더 윤리적인 과제 상황이다. 그것이 윤리적인 운동이다.
그러니깐 외면적이고, 제한되어 있는 돈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향락이라든가 하는 한정된 것을 우리 삶의 목표로 삼는 것보다는 무제한적으로 우리가 불려 나갈 수 있는 추상적 가치를 오히려 생각해야 한다.
사실 여러분들 세대는 돈이나 권력에 대해 우리 시대보다 신경을 덜 써도 되는 사람들이다. 지금 여러분은 우리 때보다 돈이 많고, 권력도 많다.
우리 때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두들겨 맞아도 어디에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경찰이 와서 곤봉으로 마구 때려도 항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정확하게 항의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이미 스스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과거로 치면 여러분 한 명이 자유당시절, 장관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다. 자유당 때 장관이 누리던 권력을 여러분이 누리고 있다. 장관이라고 해도 시발 택시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더 좋은 차를 갖고 있다. 옛날 자유당 시절, 장관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깐 21세기를 살아가야할 여러분들이야말로 돈과 권력이라는 문제보다 추상적이고 윤리적 가치를 살려나가야 할 세대이다.
여러분들을 감언이설로 꼬신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게 실제로 사실이다. 우리 때와 비교하면, 여러분들은 이미 돈과 권력에 있어서는 신경을 덜 써도 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면 돈과 권력이 생긴다. 정말이다. 그래야 사회가 더 건강해지고, 더 가치의 증대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경제적 문제도 해결된다. 윤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결코 이원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윤리적 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항상 이원적으로 생각한다. 돈 버는 것과 윤리적인 선을 달성하는 것은 위배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윤리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가 있는 길이 많다. 그러니깐 윤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결코 이원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20세기의 ‘윤리적 회의’를 물리치고, 다시 규범 윤리를 재건하는 게 선생님이 하시는 철학문화운동의 중요한 캐치프레이즈이다.
그리고 오늘 하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학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규범 윤리라는 것이다. 규범 윤리가 여러분들에게 타율적인 규범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거기에 희생당해 비극적인 상황이 역사적으로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을 점검하자는 것이 메타윤리고 분석윤리고, 이모티미즘이다. 이런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윤리의 기본은 규범윤리라는 것이다.
7. 가치 서열의 척도
[김태길]
우리가 너무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다. 여기서 학생들의 질문이나 의견을 듣고 싶다.
[학생]
가치 서열에 따른 체계를 쌓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가치 서열은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니깐, 사람들의 가치 서열은 각각 다른가요?
가치에는 서열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서열은 어떻게 정하는 것입니까?
-김민우 중앙고 2년
[김태길]
그렇게 보면 안된다. 사람마다 가치 서열이 제각각이면, 가치서열이 들쑥날쑥하게 된다. 가치서열을 이야기할 때, ‘가치 비교의 척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높다, 크다, 낮다, 적다’라고 비교하는 ‘가치 비교의 척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가치비교의 척도 :
가치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척도가 있다.
가치 비교의 척도에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가치의 수명이 오래 가면 가치가 있고, 짧으면 가치가 적다. 다른 점이 모두 같다면 오래 가는 것이 가치 있다.
예를 들어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있다. 여러 해 전 이야기지만, 한국미술 5,000년전이라는 전시회가 있었다. 한국 미술품 중 옛날 토기는 오 천년전 것이 있다. 외국에도 비슷한 전시회가 있다. 이집트는 문화의 역사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만 년전의 예술품도 있다.
예술은 이렇게 오래 가는 데, 부의 가치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부의 가치는 100년 가기 어렵다.
1) 수명이 길수록 가치의 서열이 높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1세대를 30년으로 하면, 부자가 100년까지 가기 어렵다.
부자는 3대를 지속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속담
또 하나, ‘가치 비교의 척도’로 되도록 여러 사람들에게 혜택을 나눠줄 수 있는 가치가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가치보다 크다고 봐야 한다.
2) 여러 사람에 많은 혜택을 주는 가치일수록 서열이 높다.
아까 내가 이야기한 내면적 가치는 여러 사람에게 큰 혜택을 나누어줄 수 있다. 나누어 가져도 각자의 몫이 결코 줄지 않는 것이 내면적 가치다. 하지만 외면적 가치는 여럿이 나눌 수록 줄어든다.
가령 1억원의 돈을 100명이 나누면, 100만원씩 돌아간다. 그런데 1,000명이 나누면, 10만원씩이다. 10만원은 별게 아니다.
모차르트의 명곡을 세계적인 관현악단이 예술의 전당처럼 큰 오페라 하우스에서 같이 듣는 경우하고, 오나시스 같은 부자가 그 악단을 전세 내서 어떤 섬에서 혼자 듣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혼자 독점해서 들으면 훨씬 더 기쁨을 많이 느낄까? 그렇지 않다. 그것보다는 음악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같이 듣는 것이 더 기쁠 것이다. 예술은 나누어 가져도 가치가 줄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든다면, 가령 인격 같은 게 있다. 인격자가 있으면, 그 인격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가령, 율곡이라든지 퇴계라든지 하는 인격자를 본받아서 많은 인격자가 생긴다. 그러니깐 내면적 가치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가질 수 있다.
하나만 더 보탠다.
3) 목적적 가치가 수단적 가치보다는 서열이 높다.
가치 가운데는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적 가치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적 가치가 있다. 목적적 가치가 수단적 가치보다 높은 가치이다. 틀림없다.
예를 들어, 의술, 약, 의학은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의학보다 건강이나 생명이 더 높은 가치이다. 말이 되죠? 그러니깐 그 자체가 수단도 되지만, 목적도 되는 가치가 단순히 수단에 지나지 않는 가치보다 높은 가치이다.
[도올]
수단에 그치는 가치보다는 목적적인 측면이 많은 가치가 더 우위를 갖는다는 말씀이시다.
[김태길]
칸트가 연상된다. 칸트는 사람을 목적으로 대접하고 수단으로 대접하지 말라고 했다. 인간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라.
- 칸트의 실천이성 근본법칙
[도올]
그러니깐 ‘목적의 왕국’이라는 말을 썼지 않습니까?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항상 보편적 목적의 왕국(the Kingdom of Ends)의 입법적 성원인 것 같이 행위하라. - 칸트
우리 정치도 정적(政敵)을 수단으로만 보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서, 목적적 가치가 성행하는 목적의 왕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오히려 민주주의의 가치를 살리는 길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제도로서 발전해야 하지만, 모든 제도의 이면에는 윤리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 윤리적 가치가 제대로 굴러가는 사회라야 모든 민주적 제도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선생님이 오늘 말씀하신 것은 민주적 가치의 배경에는 윤리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7. 또 다른 윤리설?
[학생]
어제 시간에 배운 것 중에서 인간은 절대적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사람은 마땅한 지켜야할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법칙론적 윤리설을 말씀해 주셨다. 그 외에 다른 윤리설이 있나요?
고전윤리학에서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이외의 설은 없습니까? -황성연(중앙고 2년)
[김태길]
그러니깐 어떤 행위를 평가할 때, 그 행위가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하는지 본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위가 사람이면 누구나 따라야 할 법칙에 부합하는지 본다. 이런 기준이외에 또 생각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생각나는 게 없다. 기준이 있는데 그걸 빼놓았다면, 내 잘못이다. 기준을 생각할 수 없다면 나로서는 할말을 다 한 것이다.
[도올]
여러분들이 너무 집중력 있게 선생님 말씀을 경청해주신 자세에 내가 오늘 아주 감동을 받았다.
다음 시간에는 재즈의 구조와 역사에 대해 공부한다.
오늘 선생님 너무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