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기념일
...이향숙...
창문을 활짝 열었는데도 더운 바람이 끈적인다.
이렇게 후덥지근한 18년 전 8월 23일 결혼식이 있었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남편의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 부랴부랴 치러진 폭염 속의 결혼식은
지금 생각해도 축하객들에게 송구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기 마련이다. 나 또한 결코 불행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지만.
가정을 꾸리지 않고 홀로 삶을 개척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아름다운 신부와 백마 탄 멋진 왕자를 꿈꾸었지만 막상 결혼 적령기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교재 중이던 지금의 남편에게 일방적이 이별을 통보했었다.
그것이 상대방을 불안하게 해서인지 끝없는 구애와 시어머니의 보고 싶다는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어머니 댁에 들렸다. 어머니는 작은 반지 하나를 내놓으시며
"이것은 막내며느리를 위해 마련해 놓았던 게다" 하시면서 내어 주셨다. 망설였지만
어머니의 따뜻함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소꿉장난 같은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들처럼 평탄하고 넉넉하게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살았다.
친구들은 신혼에 기선제압을 하느니 마느니 하며 귀여운 다툼도 많았는데 우리 부부는 한번쯤
싸워 볼래야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부모님 같이 챙겨 주시던 둘째 형님의 저녘 초대를 받았다.
별생각 없이 찾아뵈니 우리 부부의 결혼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란다.
1주년은 본인이 꼭 챙겨주고 싶으셨다면서 앞으로 2주년부터 두 사람이 챙기고
행복하게 살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그날의 형님을 잊지 못한다. 살면서 형님이 서운한 적도 더러 있었지만
그날을 생각하면서 따뜻했던 미소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형님의 당부처럼 아무리 바빠도 소박하지만 행복한 하루를 보내었다.
어느새 18주년이 되었고 그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폭염에 연로하신 시어머니가 여름 동안
우리 집에 피서를 오신지 거의 한 달쯤 되어간다. 좋다는 병원을 찾아서 진료도 받으시고 보약도 지으셨다.
그 동안 가까이 지내며 결혼기념일에 자주 여행도 함께 가고 식사도 하던 친정어머니 대신 잘 되었다 싶어
시어머니를 모시고 정갈한 음식점에 들러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조그만 마트를 꾸려 나가다 보니 여름엔 휴가철이다, 직원들 휴가도
한 차례씩 다녀오고 나면 곧 추석을 맞이하는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한 번씩은 내가 주저앉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에서 서 있기도 힘들고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예민해져서 별스럽지 않은 대화도
서운함으로 가슴에 남곤 한다. 그래도 어먼니께 말씀 드릴수가 없었다.
행여 당신 때문에 내가 불편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실까봐 이다. 말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꾸만 채근하여 어쩔 수 없이 몸의 불편함을 이야기 했다. 남편에게 부디 어머니께 걱정 끼치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예전에 몇 번 진료를 받았던 한의원에 들렀다. 진사가 진료 중에 너무 착하게
살지 말고 한 번씩 내지르기도 하라 했다. 그래야 정신 건강에 좋단다. 진료를 마치고 다시금 매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순간 울컥하는 것이 가슴부터 뜨겁게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지친 몸을 이끌고 삶터로 돌아가야 하는 부담 때문 이었을까! 누구를 위한 삶인가.
이것이 진정 내가 꿈꾸던 삶인가. 하면서 눈물이 앞섰다. 라디오의 볼륨을 높혔다. 때마침 어린 시절
자주 듣던 가수의 노래가 애달프게 흘러 나왔다. 남들은 모두 행복한데 나만이 불행한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음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겨우 18주년이다. 나에겐 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다. 아이들은 너무 어리고 내 꿈은 아무것도 이루어
낸 것이 없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달리자. 하지만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리지는 않을 게다.
주위도 돌아보고 천천히 걷기도 해야지. 가끔은 열심히 사는 내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 본다.
글을 읽고...(58회 이춘자)
해마다 나의 결혼 기념일은 여행을 간다.
북쪽에서 동서쪽이며 북동쪽으로 사막으로...아주 오랜 옛날에 내 애인인 지금의 남편은 애원을 했다.
제발 자기와 결혼 해 달라고...자기와 결혼 하면은 미국으로 되려와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 것이며 미국을 함게 여행하고 늙어서는 유럽 여행을 함게 하자고...
나와 그렇게 약속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근~4년 데이트를 한 뒤 우리는 결혼을 했다.
대학생 이면서도 6개월에 한번씩 아무런 연락 없이 나를 보러 한국으로 미숙한 나를 만나러 와 주곤 했었다.
(약속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나의 남편.)
그런 어느날 나는 나의 애인에게 결혼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유는 영어 회화도 못하고 개인주의 사회와 문화가 전현 다른 생활을 할 용기가 전혀 없었기에...
통역관을 통해서 결혼 할 수 없는 이유를 들은 남편은 제발 부탁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며
나에게 애원을 했다. 영어회화를 못해도 괜찮다고...하지만 오직 두 가지 단어만 자기에게 표현 할 수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거라며 그 두 단어의 첫째는 당신을 사랑합니다.(I love U...그리고 I am hungry)
남편은 늘 나의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필요 하며 내가 배 고프지 않기를 늘 원했기에 두가지 말 만 표현 할 주
알면은 영어회는 필요없고 나를 잘 보살며 주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허리를 굽시거리며 눈치를봐야 하는
시집살이는 없지만 아들과 며느리 중간에 있는 시어머니의 질투는 정말 고통 스러웠다.
투쟁을 하듯이 말 없이 조용한 신혼11년을 보내고
그리고 또 11년을 보내고 세번째 11년을 접어든 나의 결혼 생활은
주위사람 모두가 부러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