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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와우울산4050 원문보기 글쓴이: 와우사랑
★11월6일(수)
07:00 버스로 약 1시간 이동하여 영석 도착하여
1. 왕가대원 관람 - 왕씨 형제의 고택
2. 다시 1시간 이동하여 평요에 있는 평요고성(청나라 거리탐방)
3. 오후엔 4시간 버스를 타고 임주에 도착
4. 호텔투숙 - 임주중주국제호텔(별4)
영석에 있는 왕가대원 ↓ - 거리 이동 편의상 왕가대원을 11월5일 면산(하늘도시) 가기 전에 관람하였다.
중국 현지 식사↓ - 아주 맛있었다
평요의 평요고성(청나라거리 탐방)↓ - 길이 좁아 전동차를 타고 들어 간다.
1. 왕가대원
왕가대원(王家大院) : 민간의 황궁
왕가대원 정문
면산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20분 정도 이동하면 왕가대원을 만날 수 있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고 일행이 내리자 바로 보이는 3층목탑 비슷한 것이 보인다.
이곳을 지키는 문묘라고 한다.
왕가대원 앞의 문묘
우리가 흔히 들어온 문묘는 공자를 기리는 사당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그대로 지나처 대원의 정문을 향해 올라갔다.
얼마전 가인님이 이곳을 지나가셨을 때는 이곳 구경을 하시며 상세하게 설명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그대로 가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왕가대원 선전그림
정문 앞에는 노동절을 맞아 연휴에 일요일인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대기한다.
왕가대원은 '민간의 자금성(쯔진청)'이라 불리며
중국 대원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총면적 4만5000㎡ 터에 113개 정원과 1118칸의 방이 잘 보존돼 있다.
담벼락과 정원, 대문, 건축물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정교하고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탐험하는 것도 흥미롭다.
집안을 한 번 돌아보는 데만도 족히 4~5 시간은 걸릴 정도라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산서성 일대에는 옛날 진상 부호들의 대저택이 5채나 있다.
이를 산서오가대원(山西五家大院)이라고 부른다.
왕가대원 정문
흔히 대원(大院)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큰 집이란 말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 곳에 여러 채의 집이 집단으로 몰려있고
그 사이사이로 정원도 여러 개 있는 것을 말한다.
왕가대원 지붕들
중국산시성 태원에서 3대 대원이라하면 상가대원, 교가대원, 그리고 왕가대원이 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규모와 역사로는 상가, 교가는 그 규모가 제일 작으나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고있어 유명하고,
그중 제일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는 곳이 왕가대원이다.
상가대원 정문
우선 상가대원은 산시 어차현 동양진 차망촌에
상(常)씨가 살던 집과 후원으로 중국 청나라 때의 외국 무역을 통해
돈을 벌어 이곳에 11만 평방미터에 이루는
대원을 지었지만 지금은 그 5분의 1정도만 남아있다.
상가대원 누각
교가대원은 산시성 치현 교가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콩국을 팔아 거부가 된
청나라 때 유명한 중국의 상업금융자본가 교치용의 저택이다.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성채와 다름없는 주택 구조다.
교가대원
모두 높은 담벼락, 깊은 정원이 있고 건축물의 좌향(坐向)은 모두 안쪽을 향하고 있다.
‘홍등(紅燈)’은 중국의 유명 감독 장예모가 연출하고
여배우 궁리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영화다.
부잣집으로 팔려온 여성 궁리가 첩살이를 하다가 결국은 닫히고 닫힌 폐쇄적 구조의
건축물 안에서 자살하는 내용이다.
그 영화의 배경이 ‘교가대원’이다.
홍등을 이곳 교가대원에서 촬영했다.
역시 찻잎 판매와 금융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교씨 집안 사람들이 지은 대저택이다.
이 집의 담도 높이가 10m에 이른다.
그러나 규모는 왕가대원보다 작다.
약 4분의 1 규모다.
상가대원 내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외부,
그리고 더욱 조밀하게 높은 담으로 가려진 내부 구조가 돋보이는 저택이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성채와 보루(堡壘)의 건축이다.
규모는 작아도 건축물 좌향이 모두 내부로 향하는 노골적인 구조,
바깥을 향해서는 닫혀진 형태의 폐쇄적 속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왕가대원의 담 높이는 평균 10m로 자금성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을 민간 자금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멀리서 본 왕가대원 담장은 용을 상징
그 또한 모두 사람이 거의 들여다 볼 수 없는 담으로 가려져 있다.
큰 담이 외부를 형성하고, 그 내부 구조 또한 각종의 담으로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이런 집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축 심리는 우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다.
담 밖을 배회하는 낯선 사람이 집 내부로 넘어 들어오는 경우를 최대한 막는 구조다.
그래서 집 외부는 10m가 넘는 견고한 벽돌로 높게 둘러쳐져 있다.
낯선 사람의 움직임은 군사시설을 방불케 하는 높은 곳의 망루(望樓)에서 모두 감시할 수 있다.
완벽한 폐쇄형 구조다. 집이 곧 성이요, 성이 곧 집인 셈이다.
군사적 시설인 성을 주택으로 삼는 사람들의 마음….
낯선 사람의 침입을 막고, 나아가 그들과 때로는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한다는 각오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중국인의 집은 모두 그런 건축 심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배타(排他)와 경계(警戒), 나아가 ‘나’ 아닌 ‘남’과의 다툼 의식은
중국인의 일반적인 건축구조에서 고루 나타나는 심리다.
용천 뒤로 보이는 왕가대원
담 밖에 있는 남을 나와 혼동하지 않고 타자(他者)로 인식하는 데서
중국인의 다툼과 거래, 경쟁과 타협 의식은 틀을 잡는다.
낯선 외부의 존재가 나를 위협할 때는 다툼,
그렇지 않은 상황일 때는 거래와 교섭으로 나타날 수 있다.
북명청시대의 대표적인 가옥인 왕가대원은 크게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동은 고가애(高家崖). 서는 홍문보(紅門堡)라고 하는데 1700칸이 넘는다고 한다.
지금도 계속 증축이 되고 있어서 그 규모는 마치 성과 같아 사람들은 이를두고
궁궐을 짖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왕가대원 응접실
왕가대원은 청나라 때 4대 명문가의 하나인 정승 왕씨(靜升王氏) 형제가 지은 대 저택이다.
왕씨 가문은 원래 농부였으나 두부장수를 시작하여 상업의 길로 나서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두부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약 600년 전의 왕실(王實)이라는 인물이 선조로,
명대 말과 청대 초에 들어서면서 왕씨 가문의 17대 손이었던 왕여총(王汝聰), 왕여성(王汝珹) 형제가
비즈니스와 과거 급제를 통한 중앙 정계로의 진출로
막대한 재부를 쌓은 후 1796년 부터 집안 대대로 지었던 건물이다.
왕가대원 하마석 앞
이 건물은 중국 북방 민간 주택의 대표로 꼽히며무려 300년에 걸쳐 지어졌고 그중 54년 동안 집중적으로
지어져 지금과 같은 형태가 이루어젔다.
"자! 인원점검 하겠습니다. 모여 주세요"
오랫만에 우리의 가이드 선생께서 안테나에 메단 깃발을 흔들며 소리친다.
"이곳이 왕가대원인데 들어가면 화살표 방향으로 쭉 따라가시면 됩니다."
젠장 누가 왕가대원이란 사실을 모르나? 그러고 화살표 방향만 있으면 뭐해 설명을 해 줘야지
왕가대원 조벽 앞
"그러고 30분 후에 모이는 곳은 이 조벽 앞입니다. 늦지 않게 모여 주세요"
그렇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우리의 가이드 선생이 왕가대원에서 한, 두 마디의 말은
"이게 무었인지 아시겠어요?"다.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는 상.하마석과 사합원 마당에 있는 커다란 물동이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 네, 선생님, 우리같은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요~~~"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대며 문 안으로 들어선다.
왕가대원 내부 물동이
보통의 건물들이사합원(四合院, 쓰허위안) 형태이고 정원 가운데에는 물독이 하나 놓여 있다.
물독의 형태는 동그랗거나 직사각형 등인데 그것은 옛사람들의 소망을 담는 특별한 것이기도 하며,
화재시 그 물을 사용할 수도 있고 마음의 안정을 주기 위한 장치라고도 한다.
사합원은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드시 전쟁이 많은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란을 피해서 많은 민족들이 유랑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도적들과 그들의 지배하에 놓인 적도 여러번 있었다.
우리가 삼국지 소설을 읽으면서 알게된 황건적이라던지 또는 홍건적과
심지어 흰 두건으로 얼굴을 감춘 도적들도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왕가대원 거실 한 쪽에 온돌이 있다.
나라의 흥망성쇠에 따른 변란은 많은 시기에 돈이 많은 부호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많은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높은 성곽과 같은 담장이 필요하고 주위에 자신을 보호해 줄 많은 인척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남보다는 혈연으로 연결된 씨족이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성벽으로 가는 길
이처럼 여러 주위환경과 중국 화북지역의 매서운 추위와 황사바람 등이 높은 담장을 요구 해서
폐쇄적인 사합원이 발달 했을 수도 있다.
저택 전체 모습은 왕(王)자 형태로 되어 있으며
곳곳에 많은 뜻이 숨겨진 디테일한 장식과 조각이 흥미롭다.
그 조각들의 구조가 짜임새 있고 디자인이 정교하며 대략 보면
'희희(喜喜)'자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원숭이 조각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곳곳에 상징적인 조각품들이 보인다.
자주 등장하는 돌조각중에는 원숭이가 복숭아를 들고 있는 조각이 있다.
매우 귀엽게 생겨 관람객들이 많이 만진 탓에 반질반질 윤기가 흐른다.
학이나 박쥐 등도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모든 조각품들이 어느 하나 소홀하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워 내 눈을 즐겁게 했다.
왕가대원 굴뚝
나무로 조각된 목조, 돌로 조각된 석조, 또한 굴뚝 등을 보니 벽돌로 만든 예술품도 많이 있어
다양한 내용을 담은 가치있는 예술품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유능한 가이드 선생의 발걸음이 무척 빠르다.
많은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안을 들여다보는 방 앞에 발걸음을 멈춘다.
무슨 특별한 방인가 하고 들여다 보니 다른 방과 별다른 차이는 없다.
서태후가 하룻밤 잔 방
다만 베이징 이화원에서 시안으로 도망가던 서태후가 이곳 정승왕씨 대원에서 하룻밤을 잤던 방이란다.
정말 천하를 호령하던 여걸 서태후 자희가 이처럼 초라한 방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잠을 자다니....
여기가 이층올라가는 곳입니다.
"여기가 2층입니다"
"푸하하하하하 아니 여기가 2층인 것은 어린아이도 안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런 멘트뿐이니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딸의 방으로 추정
이런 곳에서 재미난 설명을 들으며 가면 덜 피곤할듯 싶다.
"엉터리 이야기라도 지어서 우리에게 전해주면 좀 좋아?"
많은 사람이 살고 지나갔을 이곳에 왜 많은 이야기가 없겠는가?
며느리가 하인하고 눈이 맞았다던지....
작은 마님은 어떻고 저쩌고....
이집에 살았던 사람이 3000여명이 넘었는데 밤이야기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장예모감독과 궁리의 작품으로 알려진 교가대원의 '홍등'처럼...
꼭 생각하는 것이 왜 요로코롬 야한 생각만 들까?
아무래도 내가 좀 천박해서 일까? ㅋㅋㅋㅋㅋㅋ
사합원의 정원
왕가대원 우물 용천
왕가대원은 크게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동쪽은 고가애(高家崖), 서쪽은 홍문보(紅門堡)라 불린다.
여행객들은 먼저 고가애를 먼저 둘러보고 난 후 고가애와 홍문보를 잇는 운교를 건너가서
홍문보를 한바퀴 둘러보고 난 후에 문을 빠져나오는 동선으로 움짐이게 된다.
왕가대원 조벽
고가애(高家崖) 쪽 대원을 들어가는 입구 앞쪽에 조벽(照壁)이 하나 세워져 있다.
구룡벽이나 칠룡벽은 왕가의 상징이었고
민간에서는 사자가 들어간 조벽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
이 조벽의 문양을 보면 원형 안에 두 마리의 사자가 여의주를 두고 희롱하는 모습이다.
산서성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문양에서 원형이 상징하는 것은
모든 일이 원(圓)처럼 순리대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한다.
골목에도 조벽을 세웠다.
대원을 걷다보면 좁은 골목 끝이나 문을 들어올 때
창문도 아닌 고쇼에 문장식을 하고 벽에다 지붕을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조벽이라 보면 무난할 것이다.
문앞 등 놓는 곳으로 추정
또한 대원에는 규모는 작더라도 명색이 학교도 만들고
병원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도
자체적인 생활방식으로 살았을 것이다.
용을 상징한 담장
이 왕가대원을 구경하며 딴 가이드들에게 들은 재미난 이야기는
나이 많은 형보다 동생이 더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원의 형과 동생의 집을 살펴보면
나이 많은 형의 집의 문턱이 동생의 집보다 더 높으나,
동생이 관직이 높았던 관계로 동생 집이 내부는 더 잘 꾸며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2층으로 올라가는 난간이나 문턱 옆 양쪽 바닥 등에도
아름다운 조각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드나드는 사람마다 꼭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는지 반들반들 윤이 났다.
등용문을 상징
형태도 여러가지여서 동물모양과 과일모양 들 가지각색이다.
흔히 등용문을 상징하는 조각품도 있고,다산을 상징하는 조각품도 있다.
물고기, 박쥐, 복숭아, 원숭이, 참외 등 별로 생각지 못한 사물들이 많다.
운교
고가애와 홍문보를 잇는 것은 운교(雲橋)다.
고가애에서 홍문보를 가려면 운교를 건너야 하고
이곳을 지나면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진 홍문보를 만나게 된다.
왕가대원 누각
이곳은 집안의 연로한 어르신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정교하고 우아한 담장과 대문, 처마 밑의 수많은 조각물들이
세월을 이겨내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그란 벽돌문을 지나 성벽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경사로를 타고 걸어 올라가면
홍문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왕가대원 성벽 위
성벽을 따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성벽을 반 바퀴 돌은 후에
내려오면 왕가대원 일정은 마무리된다.
왕가대원의 길체계를 보면, 남북방향의 도로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동서방향으로 세 개의 길이 있어서 ‘王’자 형태를 띠고 있다.
왕가대원을 빠져나오는 거리에는 길거리 음식을 팔고 있는 행상인들이 많았다.
두부를 팔아서 거부가 되었다는 왕씨들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서인지 아니면
그 왕씨의 후손들이 선대들의 맥을 이어 내려가기 위해서 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왕가대원 골목 앞에는 누군가 두부를 팔고 있었다.
1.평요고성
중식후에는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평요고성(平遙古城)으로 이동을 합니다. 중국 5대고성중에 한 곳으로 '중원문화의 보물창고'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명~청시대의 건축과 문화, 경제와 사회의 모습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고성입니다. 1997년에 세게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어느 고성에 비해 상업화에 물들지 않은 것이 매력적입니다. 지금도 골목길을 거닐면 명, 청 시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시루(市樓)에 올라 고성의 전체풍경을 조망해 보며 평요고성의 명, 청대의 거리를 탐방해 보며~ 고성내의 상점이나 카페, 식당 및 민가등을 자유롭게 돌아보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립니다.
이 날의 석식은 평요고성의 최고 공연인 '평요인상 디너쇼'를 감상하시며 드실 수 있는 멋진 시간을 만들어 드립니다.
식사와 공연을 마치고 밤에는 이 아름다운 평요고성의 고즉녁한 아경을 감상하시는 기회를 드립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고성의 민속객잔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합니다.
높이 12m, 둘레 6km에 달하는 성벽 안에 약 4천여 세대의 고택이 있고,
성벽에는 4개의 탑이 있으며 망루 72개가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며 서있는 곳,
지금까지 역사의 잔 때가 흠뻑 밴 고성 안에서 대대손손 이어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평요고성의 북문
무슨 영화 시나리오에서나 나올 듯 한 글이지만 내 글재주가 요만큼인걸 어쩌랴!
지금 우리는 왕가대원을 떠나 중도에 점심을 먹고 평요고성으로 향하고 있다.
거의 모두 점심 후의 나른한 몸을 꼭 병든 닭이 졸 듯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있다.
장벽고보를 소개한 브르슈어
오는 도중에 장벽고보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이지만 우리가 탄 차는 그대로 직진.
아마도 특별히 팸투어를 진행하는 일행들은 장벽고보를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잘 먹고 잘 보고 오래 오래 살아라."
은근히 질투 섞인 부아가 치민다.
장벽고보의 지하2층이라 한다.
아직도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러나 장벽고보는 가인님이 우리보다 먼저 답사하고 우리 중여동에 글을 올려주셔서
그 읽은 내용으로 대신하련다.
베트남의 구찌터널 입구
"뭐 베트남의 구찌터널과 비슷하겠지"
베트남의 구찌터널 역시 3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하에 학교까지 세워져 있었다.
구찌터널 계단
배가 아파서(?) 베트남의 구찌터널까지 들먹이는 내 꼴을 보면
저런 심술쟁이 영감탱이를 다시는 이런 여행팀에 끼워주나 보자고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순수한 로맨스를 추구하는 신사(?)다.
하긴 세상에 있는 신사가 다 죽으면 신사 소리 들으려나. 원……. 주제파악도 못하고…….
산시 성(山西省)의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중국의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성이 평요고성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예부터 대대손손 내려오는 2500년 역사가 깃든
핑야오 시민들이 살고 있다.
평요고성의 성곽
평요고성은 서주(西周) 시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성벽과 건축물은 대부분 명나라 때 지어져
명ㆍ청 시대의 건축과 문화, 경제, 사회모습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평요고성을 ‘중원문화의 보물창고’라 칭하며
중국의 4대 고성 중 하나로 뽑고 있다.
여의도의 약 5배에 달하는 면적 속의 핑야오시, 시민 50만 명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
고성의 실제크기는 성벽 둘레 6,163m, 면적은 여의도의 4/5 크기다.
고성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약 1만여 명으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장사라면 남들한테 뒤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진상(晉商)들이 살고 있다.
지금도 그들은 선조들의 후광을 이어받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평요고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관리를 받고 있다.
성(城)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춘 도시인만큼 성문을 걸어 잠그면
사방의 모든 것과 단절되는 도시이다.
우리가 탄 차는 여러 번 길을 잘못 들어 전 후진을 계속한 뒤 평요고성 북문에 도착했다.
평요고성은 일반적인 자동차 운행을 금지하고 있고 전동차만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북문 밖에서 전동차로 갈아탄 후 숙소인 객잔으로 이동하게 된다.
평요고성의 북문 주차장
내가 중국 여행에서 제일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어느 관광지를 가도
일반 차는 절대 출입금지라는 것이다.
환경보호를 위해 전기 차나 개스차만이 출입을 할 수 있어 공기가 깨끗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이 차를 운행시키는 기사와 회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모든 짐을 들고 전동차를 기다릴 때 우리의 안테나(?)께서는
매우 바삐 움직이신다.
전동차를 흥정하기 위해서다.
전동차 운전기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호객 행위를 하기 때문에 난리법석이다.
가격 흥정으로 몇 번을 망설이던 가이드가 마침내 결정을 한다.
우리 중여동회원 8명이 전동차 한 대에 타고 출발한다.
평요고성의 북문 주차장의 전동차
차가 성 안으로 들어오자 도로에서 먼지가 몹시 날린다.
기사는 정신없이 속력을 내며 차를 모는데 이건 완전히 곡예수준이다.
좁다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빵빵거리며 달린다.
평요고성의 성곽 안 토성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띈다.
성 밖에서 볼 땐 성곽이 전돌로 쌓여졌는데 안에서 보니 토성이다.
중간 중간에 빗물 내리는 통로에만 전돌로 쌓아 놓았다.
전 속력으로 달리는 전동차
차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전 속력으로 달린다.
중간의 교차로에서도 교통질서는 엉망이다.
먼저 몸통을 딜여미는 쪽이 우선권인 모양이다.
움찔움찔 몸과 마음이 떨린다.
교차로에서도 들이밀면 우선권?
누런 황토의 성곽, 군데군데 흙이 무너져 내리고
죽은 듯이 있는 을씨년스런 회색의 높은 담장,
흙먼지와 함께 들리는 빵빵거리는 경적소리
땀에 배인 기사의 회색등짝에서 시큼하게 나는 냄새.
여기에 대륙에서 몰아오는 듯 한 역사의 쾨쾨한 냄새가 어우러져
평요고성 특유의 냄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평요고성은 주민이 연탄을 연료로 쓰고 있다.
아니! 연탄가스 냄새도 같이 난다.
차가 지나가는 골목길의 민가에선 연탄불을 이용하여
바깥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있었다.
연탄가스의 특이한 냄새와 그 위에서 조리되고 있는 음식 냄새가
마치 외국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방인의 시선을 붙들고 있었다.
평평요객잔의 정문
차가 객잔 안으로 들어와 정차 한다.
‘평요객잔(平遙客棧)’이다
그러나 우리의 안테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잠시 마당을 둘러보니 객잔의 규모가 호텔수준이다.
평요객잔의 내부
‘객잔’이란 중국의 여관으로 주로 상품을 거래하거나 상담을 하는 지방 상인의 숙소였다고 한다.
물론 입구에도 분명히 평요호텔이라고 영문으로 적혀있기 때문에 호텔인 것은 분명하다.
청나라 시절 주막과 같은 이곳에 짐을 풀고 이곳저곳을 돌아봐야 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한 신비감을 느끼며 관광을 시작해야 한다.
이곳의 객잔은 명·청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형태가 많다.
평요객잔의 숙소로 가고 있다.
대부분의 객잔이 사면을 방으로 두르고
가운데에 정원을 꾸민 사합원(四合院, 쓰허위안)이다.
숙소의 내부 침대가 아니고 온돌침상이다.
자물통을 따고 방에 들어서니 한쪽으로 온돌형식의 침상이 있고 그 위에
얇은 매트리스를 2장 깔아 놓았다.
중간에 소반과 녹차를 마실 수 있는 찻잔이 있어 매우 소박하면서도 깔끔했다.
전형적인 중국식이고 겨울에는 바람이 들어 올 것 같은 내부였지만,
작은 화장실에 양변기와 온수 보이러등 설치되어 있어 불편함을 덜어줄 것 같았다.
서둘러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 또다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평요고성을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어 나가야 한다.
도삭면가게의 간판
우선 객잔 정문으로 나와 옆을 보자 바로 도삭면을 만들어 파는 음식점이 있다.
뭣 눈에는 뭣만 보인다고 다른 동료들이 나오기 전에 얼른 손짓 발짓으로 주문을 한다.
그런데 역시 음식 만드는 연료가 연탄이다.
하긴 연탄으로 물을 끓여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 도삭면이 유명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어
어깨에 판을 대고 얇은 칼로 국수를 잘라 물에 넣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삭면을 만드는 장면
역시 우리나라에 와서 저렇게 하면 '달인' 소리를 들을 만 했다.
하긴 세계의 국수가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중국의 국수 역사는 바로 산시 성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산시 성(山西省)의 연평균 강수량은 600mm 이하로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쌀농사보다는 밀, 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고
이런 밀과 수수를 이용한 국수 문화가 빨리 발달했다.
길거리서 도삭면을 먹고있다.
또한, 산시 성은 중국의 최대 석탄 매장지역으로 풍부한 석탄을 이용한 뜨거운 불로
재빠르게 끓여낸 국수가 이 지방 사람들의 입맛에 맞았다고 한다.
국수의 종류는, 면발을 잘라내는 도구의 종류와 소스와 소스 만드는 법에 따라
국수의 종류가 400여 가지에 달한다고 한다.
어깨나 손에 반죽을 올리고 재빠르게 면발을 잘라내는 도삭면(刀削面, 따오샤오미엔)이나
면발을 길게 한 가닥으로 뽑아내는 일근면(一根面, 이꺼미엔) 등
산서성을 대표하는 면 요리는 면을 뽑아내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도삭면은 손이나 어깨에 밀가루 통반죽을 올리고
구부린 철판 같은 날카로운 물체로 재빠르게 면을 깎아 끓여낸 국수를 말한다.
도삭면을 만들 때 중요한 것이 바로 면발을 깎아내는 도구인데
산시 성에서는 절대 일반적인 부엌칼은 이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길거리의 음시점
부엌칼 대용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것은 얇은 철판이다.
그런데 왜 도삭면은 얇은 철판으로 면발을 깎아내는가?
그 이야기는 칭기즈칸이 중원을 통일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칭기즈칸이 중국을 지배할 때 자기에게 저항했던 한인(漢人)들의 정변이 무서워
모든 백성의 금속도구를 몰수하도록 했단다.
요리에 사용하는 부엌칼은 10세대 정도의 가구에 하나씩만 사용할 수 있도록 통제했다.
사람들은 부엌칼을 사용하려면 종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칼을 사용하려고 순번을 기다리면서 지쳤던 한 사람이
우연히 길에 버려진 얇고 작은 철판을 발견했다.
철판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 수 없을까 생각을 굴리다가
좋은 수가 생각나 음식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는 비교적 쉽게 썰어지는 밀가루를 반죽해 얇게 쳐내 끓는 물에 데쳐냈다.
이렇게 만든 밀가루 음식은 맛도 좋고 시간을 들이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어 삽시간에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생겨난 면이 바로 지금의 도삭면이란다.
물론 아니면 말고, 믿거나 말거나 이다.
길거리의 꼬치구이 장수
간식으로 도삭면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린 나는
일행과 만나 다시 본격적인 평요고성의 탐험(?)에 들어간다.
우선 눈치로 평요고성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다.
관광객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버린다는 평요고성.
더구나 노동절 연휴를 이용해 이곳을 찾은 중국의 관광객들이 많아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때문에 밀려다닐 지경이다.
오이를 물에 담궈 팔고 있다. 아이가 만지는 것.
그러나 북적대던 평요고성은 의외로 호객꾼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골목길이 좁지 않고 다니기가 편리한 것은 물론이고
다른 도시에 비해 조금은 깨끗한 편이다.
왁자지껄한 소리는 물론이고 시장처럼 호객하는 소란스런 분위기도 아니다.
이것은 아마 중국에서 가장 장사를 잘 한다고 소문이 난 진상(晉商)이
평요고성에 그 명성을 이어가기위한 자구책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의 선조는 이곳에서 전국을 상대로 한 포목이나 소금 등을 팔며,
더구나 신용이 있는 은행업무로 살았기에 그 영향이 컷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평요고성의 카페
양쪽 길로는 각종 먹거리를 파는 영세노점, 작은 카페와 중국고유의 식당,
그리고 그 식당과 함께 있는 객잔들이 즐비하게 있다.
작은 카페에 앉아 이곳의 명물이라는 쇠고기 육포에
얼음에 차게 얼린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것은 꿈같은 일이다.
아! 옛날이여! 언제 술 좀 마시려나…….
우리나라 서울에 있는 인사동거리를 가면 고서점과 화랑, 골동품상 등이 많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노점에는 옛날 물건뿐만 아니라
중고품 등 마치 벼룩시장과 같은 여러 가지 잡동산 물건들이 많다.
평요고성의 시루
얼마동안 걸었을까? 길 앞에 커다란 문이 보인다.
여기가 바로 평요고성의 중심이 되는 시루(市樓)다.
시루에 오르면 평요고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평요고성의 시루 위에서 본 모습
새벽에 올라 떠오르는 태양을 본다면 매우 장관일 것 같은데
관광객들에게는 새벽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단다.
시루에 올라가 고성 전체를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루로 올라가려고 줄을 서 있다.
입장료가 5위안이다.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가격치고는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5위안을 지불하려고 손에 들고 누각 앞으로 입장을 했다.
그런데 입장료를 받고 있던 직원이 뭐라 뭐라 하더니
나에게 5위안짜리 한 장을 주며 빨리 올라가라 재촉이다.
관광객이 많다.
무슨소리인줄 모르고 나는 뒷사람에게 밀려 누각의 계단위로 오른다.
세상에! 모두들 돈을 지불하고 입장하는데,
누가 평요고성 시루에 와서 돈 받고 입장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난 돈 받고 올라갔다 내려 온 사람이라고…….ㅋㅋㅋㅋㅋㅋ
내가 이렇게 유명하다우…….ㅋㅋㅋㅋㅋㅋ
평요고성의 시루 위의 관우상
시루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척 가파르다.
어둡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 다시 문으로 기다시피 꺾어 올라가니
관우상을 모신 공간이 나온다.
평요고성의 시루에서 아나운서가 안내를 한다.
그 앞으로 좁은 난간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으며 아나운서인지 한 관리인이
열심히 긴 연설을 한다.
나를 보고 인사를 하는 시루 아나운서
무슨 소리인줄은 모르지만 아마 평요고성을 소개하는 것 같다.
다음에는 예쁜 아가씨가 마이크를 잡더니 무슨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시루 아래 남대가 길에 있던 관광객들의 함성이 들린다.
총각을 구합니다.(?)
옆에 있던 하바별시님이 "이 아가씨가 신랑을 구한다."는 이야기라고 귀띔한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몇 장의 인증 샷을 찍고 급히 내려온다.
벌써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총각도 아닌데 거기서서 뭐하슈?~~~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우리는 급히 객잔으로 돌아왔다.
가까스로 늦지 않게 도착한 것이다.
우리 중여동 회원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야 없지 않는가?
저녁식사는 객잔 옆에 있는 평요대극장에서 인상디너쇼를 즐기며
여유롭게 하기로 되어있다.
중국어를 모르는 우리 같은 관광객이 무슨 흥미를 느낄 수 있겠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밝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내용에 몰입되기 시작한다.
다른 관광지의 거대하고 화려한 환상적인 공연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것이 평요고성의 특징을 많이 살렸다.
중국어를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 디너쇼가 이곳의 이미지를 좋게 했다.
아리랑 동동 ~ 쓰리랑 동동 ~
우리나라 가락이 흐른다.
아마도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오니 한곡 정도는 필요한 모양이다.
쓰촨 성에서 흔히 보는 변검도 어설프지만 이곳에서는 인기 있는 프로다.
사회자가 관객석에서 참여하고픈 사람을 골라 부른다.
결혼식. 출연자와 관객이 어우러진 결혼식 장면은 더없는 재미거리다.
저녁 9시쯤 공연이 끝난 뒤 모두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평요고성의 야경을 보자는 것이다.
평요고성의 야경
숙소 앞에서 전동차를 한 대 부르더니 우리보고 타란다.
차는 골목을 돌아 전 속력으로 달린다.
깊은 밤 캄캄한 골목길을 달리는 전동차를 탄 기분이 즐겁기보다는 무섭다.
차량은 성문 밖으로 나가 시내로 향한다.
평요고성 남대가의 야경
이건 무슨 시추에션인지 모르겠다.
평요고성의 야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내 드라이브를 하는 것이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성곽 주위로 조금 다니다가 돌아와 호텔 밖에 차를 세운다.
운남리강에 있는 카페 벚꽃마을 분점이란다.
우리 일행은 숙소로 들어가기가 아쉬워 고성의 야경을 걸어서 보기로 하고,
다시 시루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홍등이 거리를 밝히고 연인들은 '벚꽃마을' 같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앉아,
고성의 밤 분위기에 흠뻑 취해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밤의 시루
이곳저곳 밤 고성을 돌다 어느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맥주와 분주를 시키고
안주로 꼬지를 가져오라 한다.
평요고성의 야경
얼마 후 가져온 꼬지를 먹던 일행들이 화들짝 놀랜다.
무척 짜다.
완전히 소금을 범벅한 것 같다.
주인을 다시 불러 꼬지가 짜다고 알려야 하는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른다.
손짓 발짓에 주인이 꼬지를 다시 가져간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가져간 꼬지에 또다시 소금을 뿌리는 것이 아닌가?
이거 환장할 노릇이다.
다시 가져온 꼬지를 앞에 놓고 물을 달랜다.
물을 가져온 컵에 꼬지를 휘휘 저어서 주인을 주니 그제야 알아듣고 끄덕인다.
이런 젠장! 술 한 잔 마시려고 별 쇼를 다했다.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것 같다.
꼬치구이가 무척 짜다.
평요고성의 밤은 화려한 홍등들로 길거리를 밝히지만
대부분의 숙소는 밤 11시가 넘으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우리도 주석을 끝냈다.
그런데 계산이 문제였다.
들어올 때 분명히 분주가격을 흥정하고 들어 왔는데 계산이 틀리다.
숙소에 켜진 홍등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잘 하지도 못하는 짧은 중국어로 가까스로 타협을 본 후
우리는 숙소인 평요객잔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