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나날이 흘러갔다. 위안부들에게는 새로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하루하루가 불안한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 어디로 끌려가 굶주린 병사들의 밥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최대치가 속해 있는 제35군 산하 1개 연대병력이 버마 전선을 향해 떠나간 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밤이 되자 포장된 트럭 한 대가 위안부 막사 앞에 정거하더니 헌병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급히 막사 안으로들어가 위안부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빨리 빨리. 떠날 준비하고 나와. 쓸데 없는 것은 모두 버리고......" 여자들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미 예견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떠난다는 사실이 눈앞에 닥치고 보니 그녀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왜 우물쭈물하는 거야? 빨리빨리 나오지 못해?" 헌병들이 소리치자 여자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급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여옥이도 조그맣게 보따리를 하나 꾸렸다. 고향에서 떠나올 때 가지고 온 보따리 그대로였다. 그것을 가슴에 품고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트럭 안에는 다른 데서 끌려온 위안부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침묵으로 여옥이 일행을 맞았다. 헌병 하나가 플래쉬를 비춰들고 마치 물건을 점검하듯 위안부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것이 끝나자 차는 곧 출발했다. 헌병들은 포장을 내리고 출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앗다. 트럭은 헌병 오토바이의 안내를 받으며 어둠 속으로 치달려갔다. 차 안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어둠 속에 묻혀 기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었다. 여옥은 무릎 위에 얼굴을 폭 파묻고 눈을 감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성난 파도에 내던져진 자신이 의식되곤 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감정도 굳어버려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어때?" 헌병 하나가 물었다. 여자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헌병은 플래쉬를 비추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이것들이 귀가 먹었나? 기분이 어떠냔 말이야?" 그러자 나이든 일본인 위안부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매우 좋습니다." "각오는 돼 있나?" "각오하고 내지(內地)를 떠났으니까요. 황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갈 자신이 있습니다." 일본 여인은 조그만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음, 좋은 일이야. 역시 내지인은 달라. 자, 이거 먹어." 헌병은 그 여인에게 과자봉지를 하나 던져주었다. 여인은 그것을 받으면서 황송하다는 듯 거듭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조선 여자 하나가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선인들이 비밀리에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랑하다.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목소리에 다른 조선인
위안부들도 힘을 얻어 따라 불렀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여옥은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감동하고 있었다. 헌병들은 이 돌발적인 사태에 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잠시 어둠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제서야 놀란 헌병들이 다시 플래쉬를 비춰들고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후려갈겼다. "이 개 같은 년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노래를 불러! 닥치지 못해?" 호되게 얻어맞은 여자들은 입에서 피까지 흘렀다. 조선 여자들은 입을 다물고 아까처럼 침묵했다. 그때 일본인 위안부 하나가 중얼거렸다. "죠센징이......그 주제에 무슨 노래를 부른다고......" 그 말을 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뭐라고? 이 게다짝 같은 년이!" 할퀴고 물어뜯긴 일본인 위안부는 비명을 질렀다. 일본인 위안부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싸움은 집단 싸움으로 번져 헌병의 호령에도 아랑곳없이 여자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맞잡고 뒹굴었다. 트럭은 더욱 속력을 내어 달려갔다. |